[雲門에서 華岳까지-036] 용각산 용산면
한때 주막 성업한 말마리재, 하루에 소 1천마리 지나다녀
▲ 맑은 날 청도 서쪽 끝 풍각서 국도를 타고 동쪽(청도읍)으로 달리노라면
전면 멀리로 군계일학(群鷄一鶴) 같은 산덩이가 하나 솟아 보인다.
유독 우뚝할 뿐 아니라 팔을 길게 벌려 모두를 온통 감싸안는 듯하기도 한 그 산이 용각산이다.
청도가 용각산을 저다지 중시하는 이유를 문득 깨닫게 하는 장면이다.
청도 산서(山西)지역의 북쪽과 동쪽을 병풍처럼 둘러막은
비슬기맥-유천지맥 연결능선의 중심에 높다랗게 솟아 그렇게 보일 터이다.
마암산(선의산) 혹은 그 제2봉 고동봉(잠칭·714m)과 용각산은 470m대 낮은 구간을 중간에 두고 남·북 간에 나뉘어져 있다.
고동봉서 100m 급락한 후 470m대 구간까지 추가 하강하고,
마지막 저점인 478m재에서 150여m 솟아 용각산에 이르는 게 이 구간 산줄기 흐름인 것이다.
이렇게 이어진 756m봉(마암산)~478m재~693m봉(용각산)을 이어 걷는 환종주 구심점은 매전면 두곡리다.
시종점은 자주 등산버스 주차장이 된다는 마을회관 앞마당.
등산객들은 거기서 오른쪽(동편)으로 난 암자골 계곡을 들머리로 삼는다고 했다.
숲실마을, 저수지 둘, 몇 집이 사는 암자골 마을 등을 차례로 거쳐 선의산에 올랐다가 용각산을 거쳐 절골로 하산한다는 것이다.
선의산과 용각산의 가름선이라고 봐야 할 478m재를 두곡리 이외 지역 사람들은 ‘말마리재’라 불렀다.
두곡리 쪽 그 조금 아래에 ‘말마리’라 불리던 마을이 있었기 때문이다.
절골마을 상부 ‘마지’라 불리는 저수지 안이 그 자리라 했다. 지금은 염소농장 하나밖에 없지만 집터들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반면 두곡리 사람들은 그 재를 ‘하도재’라 불렀다. 그걸 넘으면 남천면 하도리(河圖里)이기 때문이다.
하도리는 무려 12㎞에 달하는 비슬기맥 구간을 마을 앞 능선으로 삼아, 비슬기맥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마을을 구심점으로 해서 선의산~용각산~성현~고리골산(경산묘원) 사이 비슬기맥이 둥그스름하게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선의산 권역의 4분의 1 또한 하도리 땅이다.
어르신들에 따르면 하도재 혹은 말마리재는
한때 “하루에 소 1천 마리가 지나다닌다”고 할 정도로 통행량이 많아 재 위에 주막이 성업할 정도였다.
용각산 남서편 덕암·내리 등의 사람들이 그 마을 뒤 ‘큰고개’를 통해 비슬기맥에 오른 뒤
용각산 북사면을 타고 말마리재까지 오가며 땔나무를 챙기고 ‘모풀’을 베러 다녔기 때문이다.
‘모풀’은 다음해 못자리용 퇴비를 만들기 위해 모내기가 끝난 7, 8월쯤 베어 모으던 풀이었다.
모두가 땔감과 비료가 귀하던 1960년대 이전 이야기들이다.
말마리재 이후 제법 용을 쓰고 20여 분을 투자하면 널찍하고 평탄한 고원 같은 지점에 닿는다.
용각산 북편기슭 해발 650m 높이의 ‘용각산 분기점’이다.
용각산이 비슬기맥에 솟지 않고 그 남쪽으로 갈라져 나간 산줄기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분기점과 용각산 사이 거리는 200여m, 오르는 시간은 5분 정도다.
▼ 참고 지형도
분기점에서 갈라져 나가 용각산을 거친 후 남동쪽으로 굽어 돌기 시작하는 저 능선은 앞서 소개한 바 있는 ‘유천지맥’이다.
청도를 산서(山西)와 산동(山東)이라는 두 개의 권역으로 좍 가르면서 유천까지 무려 22㎞에 걸쳐 기세 높이
줄기차게 내달리는 산줄기다. 이 시리즈가 저 산줄기에 특별히 ‘지맥’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이유도 이것이다.
저 중요한 산줄기 출발점이니 청도로서는 용각산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옛 기록이 용각산을 ‘소조산’(小祖山)이라고까지 판단한 이유도 그것임에 틀림없다.
풍수지리학에서 소조산은 조산 다음으로 위상 높은 산이다.
대한민국의 원초적 조산은 백두산이고, 거기서 뻗어나온 산줄기가 산하에 넓은 터전을 만들 때 그 모산이 되는 산이 소조산이다.
용각산이 청도에 얼마나 영향력 있는 산인가는
유천지맥 끄트머리에 있는 ‘대운암’(大雲庵)이란 절이 ‘용각산 대운암’이라 표방하는 것에서도 실감된다.
용각산서 무려 20여㎞나 떨어진 유천지맥 마지막 501m봉 아래 잡았는데도 저러는 것이다.
그 아래 청도읍 유호2리서는 아예 501m봉마저 용각산이라 부르기도 했다.
산을 등산하고 놀 공간으로 생각하는 외지인이 보기에 청도 산 중에선 가지산·운문산이 좋고 억산이 뛰어나며 비슬산이 명산이다.
그 다음에는 선의산이 있고 사룡산·구룡산이 특출할 것이다.
하지만 산과 산줄기를 삶의 터전으로 생각한다면 보는 눈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청도 지리지의 결정본인 ‘오산지’ 서술이 대표적이다.
거기 나타난 용각산과 유천지맥 서술을 현대 감각에 맞춰 조금 분식하면 아래처럼 된다.
“단석산 대간룡(大幹龍)에서 한 산줄기가 서쪽으로 100여리 갈라져 나와
군청 소재지(鰲邑·오읍)의 북동 지점(甲方·갑방)에 도달했을 때
한 봉우리가 우뚝 솟으니 ‘갑령’(甲嶺)이라 불리며 특별하게 ‘소조산’(小祖山)이 된다···
그 갑봉(甲峰)서 한 산줄기가 남동쪽으로 흘러 곰티(熊峙)를 지난 후 중산(中山)을 이뤘다가
건령(楗嶺)을 넘어 오례산성으로 솟아 유천 주산(主山)이 된다.”
물론 오산지 서술이 틀림없이 과학적이라 보기 힘들 수는 있다. 단석산을 비슬기맥의 출발점으로 잡은 것부터 그렇다.
이 부분을 요즘 시각으로 보면
“사룡산서 서편으로 분기해 100여리 나와서 한 봉우리가 우뚝 서니 청도의 소조산 용각산이다”고 써야 맞다.
그에 앞서서는
“백두대간의 강원도 태백 매봉산 지점에서 갈라져 남쪽으로 내려오는 낙동정맥의 사룡산 지점에서 비슬기맥이 분기한다”고
써 두는 것도 필요할 수 있다.
오산지가 용각산을 그냥 ‘갑령’이라 한 것 또한 주목할 대상이다. ‘갑’은 24방위 중 갑방(甲方)을 가리키는 방향 표시로 풀이된다.
요즘 말로 하면 ‘청도 읍치(군청)의 북동쪽에 있는 산’ 정도가 될 것이다.
1673년에 완성된 이 책뿐 아니라 그 100여 년 뒤에 그려진 ‘해동지도’(海東地圖)에도 비슷하게 ‘갑산’(甲山)이라 표기돼 있다.
‘용각산’ 혹은 ‘용산’이라는 지금의 이름이 속명(俗名)으로 있다가 나중에 부상했을 가능성을 말하는 자료들일 것이다.
용각산 좌우 능선의 북편에 있는 것은, 아까도 봤듯 경산 남천면 하도리 한개 마을이다.
그러나 그 남쪽엔 한때 ‘용산면’이란 별도 행정구역으로 분류됐던 적이 있을 만큼 많은 마을들이 깃들였다.
그 골 입구에 세워진 ‘용산회관’ 격 건물에는 그 마을들이 8개나 된다고 적어뒀다.
그걸 면·리제 도입 때 처음 ‘내종도면’으로 묶었다가 1832년 ‘용산면’으로 변경했던 것이다.
청도읍에 통폐합된 지금도 그 마을들이 ‘용산’이란 이름 아래 뭉치는 연유도 그것일 터이다.
용각산을 정점으로 해서 옛 용산면 공간의 동쪽을 둥그스름하게 에워싸는 산줄기는 유천지맥이다.
반면 서쪽을 그렇게 둘러싸는 건 용각산 분기점서 서쪽으로 이어가는 비슬기맥과 거기서 남쪽으로 갈라져 내리는 지릉이다.
그 중 비슬기맥은 650m 높이의 분기점에서 370m재로 추락했다가 484m봉으로 올라서는 구성을 보인다.
저 370m재를 그 아래 덕암리 마을서는 ‘큰고개’라 불렀다.
앞서 매전면 두곡리의 말마리마을 말마리재와 산길로 이어져 있다고 했던 그 고개다.
큰고개서 서쪽으로 올라서는 484m봉은 용산면 땅의 서편 외곽능선 출발점이다.
그 지릉 이쪽이 옛 용산면 땅(청도읍)이고, 넘으면 옛 성현역 구역(화양읍 송금리)인 것이다.
저 484m봉을 이쪽 덕암리서는 ‘솔방등’이라 했다.
옛 용산면 공간에는 산줄기에 붙어서 서쪽부터
신암마을(덕암1리) 중리마을(덕암2리) 내리 안인리 운산1리 운산2리 등 여섯 마을이 분포한다.
그 중 운산리는 용각산서 정남쪽으로 내려서는 최장 6.5㎞ 길이의 산줄기에 의해 별도로 구분돼 있다.
이 산줄기는 도중에 175m 높이까지 낮아져 양쪽을 잇는 팔치(八雉)고개를 내주기도 하나,
그 이후 다시 매봉(368m)으로 높아진다. 매봉 기슭에는 통안(원정리) 바깥솔골(송읍리) 무등리 등의 마을이 자리 잡았다.
무등리는 옛 용산면 공간 진입점 마을이다.
이런 땅덩이의 핵심 용각산을 오르는 주 등산로 들머리는 그러나 이 마을들 쪽이 아니라 유천지맥 위 ‘곰티재’에 있다.
거기서 출발해 30여 분간 임도로 걷다가 다시 30분 산길로 오르면 정상에 닿는다.
꼭대기엔 ‘龍角山 697.4m’라 새긴 정상석이 있다.
하나 그것은 밖에서 갖다 올린 돌이 아니라 본래 그 자리에 지금 그대로 있던 암괴다.
거기다 글자만 새긴 극히 보기 드문 정상석인 것이다. 청도산악회서 20년 전에 벌써 그런 생각을 했다니 놀랍다.
하나 거기 적힌 높이 표시는 현재 쓰는 지형도 것과 다르다.
국가기본도엔 693m로 나타나 있고, 현장에도 그렇게 적어 둔 비목이 따로 서 있기도 하다.
청도산악회가 세운 정상석 중에는 높이 표시가 저렇게 어긋난 게 많다.
돌에 새길 때 의지했던 당시의 국가기본도가 지금 것과 달랐던 게 원인이 아닐까 싶다.
측량기술 발달에 따라 지형도에 나타나는 높이도 변하는 모양이다.
글 :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 정우용 특임기자
- 2010년 09월 04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