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역협의회 5구역장님! 토요일 오후 완두콩 1박스 준비하셨네요^^
성전증축을 위한 완두콩33봉지..구역원 함께 모여 7시간동안 완두콩 껍데기 제거하시고 봉지넣어신다고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함께하는 마음에 박수를 보냅니다.




선교위원장님! 본당에 봉헌한다고 화분싣고 달려오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성전에 봉헌한 꽃들이 함께 모이니 예술이 되었네요^^






사목총무님! 제1.2독서 또랑 또랑한 목소리 봉독하셨습니다. 수고했습니다.





<강론말씀>
찬미예수님!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성령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께 온전히 삶의 희망을 두고, 구원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고자 신약의 백성들이 새롭게 삶을 꾸려나가는 순간이 바로 성령강림 시기입니다. 성령께서는 바로 계시를 통해서 성부,성자와 함께 한 하느님이신 존재이시지요. 성부를 중심으로 성자께서 성부의 구원의 뜻을 이루시고자 사람이 되시고, 우리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시고, 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시기 전, 우리의 구원의 협조자,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모습과 그 성령을 받아 신앙 안에서 일치와 성숙을 이루는 초대 교회의 모습이 오늘 복음에서 또 독서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신앙의 모든 행위가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또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우리 신앙 생활 안에서 조화를 이루어야하고 또 그 이해가 시간이 갈 수록 깊어지고 넓어져야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사십니까? 사람이 살기 위한 조건들이 참 많지요.. 먹어야 살고, 입어야 살고, 또 잠을 자고,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사람이 삽니다. 그리고 희망도 있어야 살지요. 하지만 살아가는데도 여러 차원이 있지요, 육적으로는 그렇게 하면 살 수 있지만, 사람이 빵 만으로만 살 수 없다고 예수님께서 얘기 하셨듯이, 인간은 육적인 삶뿐만 아니라, 영적인 삶 또한 풍요로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이미 우리 안에 영적으로 살게 우리에게 영을 불어 넣었기 때문입니다. 육적으로만 너무 탐하고, 육적인 욕망만 쫓아 살다보면, 우리는 영적인 빈곤함을 느낄 수 있고, 그 영적 빈곤함이 가져다주는 메마름과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우리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안에 내면적인 공간을 함께 창조하셨습니다. 여러분, 내 안에 그 공간이 보입니까? 그것을 볼 줄 알고 그것을 어떻게 가꾸어야 될지 고민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 쫓아 사는 사람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세례는 받았지만, 신앙을 할 줄 모르는 바보입니다.

자신 안의 내면을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그 공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하느님께서 숨을 불어 넣어셨다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더 나아가서, 이 공간을 직접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내면적인 보이지 않는 공간, 그것을 '궁전'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성령께서 기거하시는 성령의 궁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이 내면적인 공간은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영적인 공간입니다. 그리고 앞서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영적인 우리의 내면의 단면입니다. 그래서 이 공간을 좋은 것으로 채워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이 공간이 있는지도 모르고 또 내면적인 공간을 영적이 아닌 다른 것으로 늘 채우다 보니, 결국은 인생을 더 오래 살수록 고통스럽게 살게 되고 또 막힘 속에 살게 되고 늘 근심과 걱정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나이가 들면 힘들고 아프기 때문에 여러 가지 걱정거리가 더 쌓이게 되기에 고통스러운 것이 있습니다만, 내면에는 다른 것으로 채우기에 여러 형태의 고통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면적으로 풍요롭고 영적으로 가득 차 있으면 육적인 어려움을 쉽게 이겨나가는 존재가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프고 아프다 걱정거리다.. 내 인생은 왜 이럴까.. 늘 고민하는 이유는 내 안에 하느님께서 주신 영적인 공간을 성령을 가득 채우지 못하고 살기에 그렇습니다.

강론 시작하면서 드린 질문의 내용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사십니까? 우리는 모두 이 질문 앞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산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우리는 살아간다. 그렇게 이야기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구원의 협조자이시고 또한 내 인생길의 등불이시고 또한 우리의 모든 삶의 주관자 이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공간을 밀어내고, 성령을 밀어내고 우리는 그 내면의 공간을 욕망으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또 우리의 헛된 생각으로 가득 채우고 고집으로 가득 채우고 살아가기 때문에 힘이 드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신앙을 제대로 못하는 이유가 그런 것입니다. 기도하라! 기도하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그 시간에 정해진 아침기도, 저녁기도만 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지요. 그 기도의 뜻을 생각하고 그 정신을 내 안에 바로 세우고 또한 그 기도 정신 안에서 삶의 실천으로 옮길 때, 비로소 그 모든 신비로운 신앙의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언제나 내 생각대로, 판단대로 살지 않습니까? 나도 생각이 있는 존재인데! 나도 판단할 수 있고, 나도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렇지만 살아보면 살아볼수록,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면, 자유로워지고 내가 해방되고 내가 행복해질 것 같지만, 실상 살아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서 어릴 때부터 좋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해방이라 생각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지 하고 생각하지만, 그게 어디 그렇습니까? 해보았자, 또 하면 할수록 내 입 안에 쓰디 쓴 재밖에 남는 게 없습니다. 그러니 성령을 따라 살 줄 알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가르치는 것은, 성부를 통해서 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구원의 진리입니다. 하느님의 진리입니다. 창조의 진리이고 구원의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나약한 인간이 온전히 실천할 수 없고 깨달을 수도 없기에 성령께 나의 모든 의지를 포기하고 비우고, 성령께 내 삶의 주도권을 맡겨드리고, 또 이 순간에는 내가 이렇게 말하고 싶고 이렇게 고집하고 싶지만, 성령께서 이끌어주십시오..하고 다시 성령께 주도권을 그렇게 비워나가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참된 기도가 되는 것이고, 그것이 나를 살려주시는 유일한 신앙의 복된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참으로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고 우리를 영광된 구원의 길로 이끌어주실 것이고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의미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살기 때문에 실패하게 됩니다. 하고 싶은 대로 기도하고, 하고 싶은 때 내 고집대로 봉사를 하고, 교회나 사목자가 무슨 이야기를하든 상관없고, 내가 하고 싶은 때, 봉사하는 것만 해도 고맙지 않느냐?하고 어리석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신앙 안에서의 봉사를 라이언스 클럽 같은 곳에서 하는 봉사나, 사회단체의 봉사와 구분을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곳에 성령이 어디 있습니까? 그곳에 하느님이 어디 있습니까? 인간이 고귀하다 고귀하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고귀한 것입니까? 우리가 고귀하다고 말해서 고귀한 것입니까? 짐승들보다 IQ가 조금 높아서 고귀한 것 입니까? IQ 높아서 하는 짓 보십시오. 자연을 파괴하고, (코로나 사태도 그렇지만,) 모든 일들 속에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이 앞서서 다른 모든 생명과 조화롭게 살아가지도 못하고 또 인간끼리도 조화롭게 살고 있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늘 근심걱정이고 피해자는 많아지고 갑이니 을이니 하면서 살아가지 않습니까? 남을 쉽게 욕하지만, 아파트 경비원을 욕하고 폭행하는 그런 것을 보면 갑이 될 자격이 되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차라리 짐승들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본성대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냥 본성대로 자연스럽게 살아 가쟎아요? 하지만 인간은 자연을 거슬러서 자기의 욕망을 채우면서 그렇게 어리석게 살아가지 않습니까?

무엇 때문에 고귀한 것입니까? 고귀한 이유는 단 하나, 하느님께서 우리를 고귀하다고 하셨기 때문에 고귀한 것이지, 우리 스스로가 고귀하게 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지요. 그분께서 나를 귀하다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또 나를 위해서 희생하셨으니 우리가 고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벌을 내리신다면 그분께서 우리의 잘못을 책하신다면, 우리가 내 밀게 무엇이 있습니까? 내 보여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정의롭고 구원 받기에 합당한 존재입니까? 아닙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정리하면, 내면적인 공간을 다시 들여다 봅시다. 나 자신의 내면적인 공간이 늘 이런 어리석음과 잘못으로 충만 되어 있으니 하느님께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채우지 못하고 또 하느님의 진리로 가득 채우지 못하니 사실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 주님 용서해주십시오. 주님 언제나 잊지 않고살게 내 안에 삶의 주도권을 당신께 맡겨드리고 또 성령으로 가득 찬 또 성령께서 우리를 모두 지배하셔서 우리 삶이 언제나 당신의 사랑에 맞갖은 삶으로 변화 되고 또한 이러한 우리 신앙의 변화를 통하여 이 세상에도 참된 구원의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겠습니다. 언제나 주님께서 부르시면 구원의 도구로 쓰여질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의 삶이 의미롭고 아름답고 또한 참으로 영광스러운 인생이 될 수 있도록, 또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에우리 모두에게 성령께서 임하셔서 우리 모두의 삶을 올바로 주님의 빛으로 비추어지도록 그 은혜를 구하면서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하도록 합시다.

미사전 신자들과 신부님...침묵속에 기도중입니다.



사목평의회 모임을 가졌습니다. ^^



함께한 사진! 오랫만에 마스크제거 후 사진에 담아 보았습니다.
우리모두는 생활속 거리두기 일환으로 마스크착용 생활화합니다.

사목평의회 후 성전마당에서 담소를 나눕니다.

바오로 회원께서는 오늘 예수성심상 삿포질을 하였습니다.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적인 공간을 함께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게 창조하신 나 자신의 내면적인 공간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것만 쫓아다니는
어리석음과 잘못으로 가득차 있음을 반성합니다.
내면적인 공간을 성령으로 가득 채워서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시고 내 삶의 주도권을 성령께 맡겨드리고
성령의 이끄심으로 바르게 생각하고 사랑의 삶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미사봉헌을 하기 위하여 발열체크, 명단작성, 손소독,
자리안내, 방역하시는 봉사자분들과 주차관리하는
바오로회 형제님, 성모동산 벽주변에 흙 채우는 베드로회 형제님, 예수성심상 도색을 위한 사포질을 하시는
바오로회 형제님, 성전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하여
화분을 기증하시는 형제자매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성전을 내집처럼 아끼고 가꾸는 마음을 변치않고
간직하면서 공동체를 가꾸어 나가도록 노력합시다.
쫒기듯 살아가는 삶 안에서도
조금씩 양보하고 노력하는 공동체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항상 주님 은총속에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