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리대밭길
2017. 3. 19.
오산(鰲山) 만회정(晩悔亭)
만회정(晩悔亭)은 조선중기 여러 지역의 부사(府使)를 역임한 만회(晩悔) 박취문(朴就文, 1617~1690)이 말년에 휴식 및 교우(交友)를 위하여 말응정(秣應亭)마을 앞 오산(鰲山) 기슭에 세운 정자(亭子)로 1800년대에 소실된 것을 2011년 울산광역시가 시민들의 정자로 새롭게 중건하였다. 박취문은 그의 아버지인 박계숙(朴繼叔)과 함께 부북일기(赴北日記)를 남겼는데, 이 책은 2006년 1월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다. 만회정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 원래는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그 양옆에 온돌방을 두고 앞면 전체에 툇마루를 둔 언양읍 대곡리의 집청정(集淸亭)과 유사한 형식이었다. 그러나 새롭게 중건한 만회정은 여러 시민들이 올라 두루 삼상하기 편리하도록 하나의 마루로 구성하였다. 한편 만회정 주변의 바위에는 “관어대(觀魚臺)” 글자, 자라그림, 시(時) 등이 새겨져 있어 울산의 선조들이 오산(鰲山)과 십리대숲을 정성껏 가꾸어 후손들에게 물려주려 하였던 태화강 사랑의 뜻을 확인 할 수 있다.
태화강 십리대밭
태화강 십리대밭은 구 삼호교에서 용금소까지 강변을 따라 약 10리(4.3㎞)에 걸쳐 군락을 이루고 있다고 하여 십리대밭이라 불린다. 현재 중구 둔치의 태화강대공원 대숲과 남구 삼호대숲을 합하여 142,060㎡의 대숲이 남아 있다. 십리대밭은 울산 최초의 읍지인 1749년 학성지에 “오산 만회정 주위에 일정면적의 대밭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태화강변에는 대나무가 자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화루(太和樓)
태화루는 고려 성종(成宗)이 울산에 행차했을 때 이곳에서 잔치를 열었을 정도로 유명한 누각이었다. 태화루의 기원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慈藏)이 창건한 태화사(太和寺)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태화루는 조선시대에 두 번 고쳐지었는데, 그 때마다 당대 최고 학자였던 권근(權近)과 서거정(徐居正)이 기문(記文)을 썼을 정도로 명성이 있었다. 서거정은 “경치가 내가 전에 보았던 누대(樓臺)들과 엇비슷한데, 앞이 멀리까지 넓게 트인 것은 이곳 태화루가 오히려 더 좋다.”라고했다. 주변 풍광이 아름다워 고려시대부터 “울주팔경”중 하나였으며 정포. 양희지. 김종직. 김시습. 김안국 등 유명한 관리와 학자들이 태화루에 대한 시(時)를 남겼다. 울산을 대표하던 태화루는 주로 공무(公務)를 처리하거나 경치를 감상하는 장소 등으로 활용되었으나, 임진왜란 전.후에 없어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400여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태화루는 울산 시민의 염원으로 새로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