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궐리사 魯城闕里祠
충청남도 시도기념물 제20호
조선 후기 공자의 유상을 봉안한 영당(影堂)
공자를 제사지내는 사당으로 춘추사(春秋祠)라고도 부르며
1716년(숙종 42년)에 건립하여 공자의 영정과 송조 5현의 연정을 모시고
춘추로 제사를 지낸다.
궐리사는 공자가 생장한 ‘궐리촌’이라는 명칭에서 유래된 것으로,
국내에는 수원(華城)과 노성(尼城)의 두 곳뿐이다.
건물은 사우·강당(絃誦堂), 내·외삼문, 모성재(慕聖齋)·관리사·문간채 등 7동이 있으며,
유림에서는 음력 3월과 9월의 초정일(初丁日)에 석전(釋典)을 봉행하고 있다.
노성면 교촌리 292번지에 노성궐리사가 있다. 노성 궐리사는 숙
종42년(1716년)에 권상하, 김만준, 이건명, 이이명, 김창집 등
이 노성산 아래 궐리촌(현 위치 서쪽)에 궐리사를 건립하고 1717
년에 공자 영정을 봉안하였다. 그 후 정조 15년(1791년)에 송조 5
년 (宋朝五賢)인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 주희의 영정을 봉안
하였다.
궐리사는 강릉, 제천, 화성에도 있었으나 현재에는 노성과 화성
에만 남아 있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1
공자상
명재고택(明齋古宅)
국가민속문화재 제 190호
1709년에 지어진 건물로 조선 중기 호서지방의 대표적인 양반 가옥이며 전형적인 상류층의 양반 가옥
명재고택의 형국은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
조선시대 숙종 때 소론의 지도자였던 윤증(尹拯)의 고택
지정 당시 명칭은 윤증 선생 고택(尹拯先生故宅)이었으나 백의정승(白衣政丞) 명재 윤증(1629~1711)이 지은 가옥인 점을 반영, 그의 호를 따라 명재고택(明齋古宅)을 지정명칭을 변경
윤증 선생 고택은 조선 숙종 때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는 조선시
대 상류 양반가정의 표본이 되는 주택으로 안채는 ㄷ자형, 사랑
채까지 포함된 구조는 ㅁ자형의 목조와즙단층건물이다.
○ 안 채
북쪽 중앙의 대청은 정면 5칸 측면 2칸이고 대청과 연결되어 뒷
편 좌우에 고방이 있고, 대청의 서쪽에는 안방(2칸X1칸)과 윗방
(1칸X1칸) 그리고 남쪽에는 넓은 부엌이 있고 부엌 위에는 다락
이 있다. 대청 동쪽으로 건넌방과 웃방 남쪽으로 부엌이 있다.
○ 사랑채
정면 4칸 측면2칸 규모에 2칸통의 대청과 누마루가 꾸며져 있고
중앙의 2간×2간 규모에는 온돌방을 만들고, 온돌방 뒤에 고방
과 또 다른 방이 연결된다.
○ 특징으로서는 안채의 ㄷ자와 행랑채 사랑채가 연결되어 ㅁ자
형을 이루며, 대청, 누마루, 고방 등의 배치가 검소하고 품위가
있으며, 지붕틀의 특수한 형태는 창경궁의 연경당과 같고, 평면
배치, 구조적인 연결, 창호의 처리는 기능성과 다양성이 있다.
샘
방지원도(方池圓島) 연못
네모 모양이며 가운데에 둥근 섬이 있는 연못
네모는 땅을, 원은 하늘을 상징한다.
노성향교 魯城鄕校
충청남도 기념물 제118호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있는 향교
송당리 월명곡에 있었는데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창건 연대와 이전 연대는 알 수 없고 현재 5성
(聖) 20현(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춘추로 제향하고 있다.
노성향교는 본래 노성면 송당리 월명곡 근처(현 노성초등학교 자리)에 창건하였다 하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며 은진향교와 같은 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700여 년 경에 현재의 자리로 향교를 다시 이전하였다 하나 정확한 연대나 이전 사유는 알 수 있다. 다만, 명륜당의 현판에 의하면 숭정 4년(1631)에 현감이 문묘를 중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오래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증자(增子), 맹자(孟子), 안자(顔子), 자사(子思)의 성위를 모시고, 동무에는 송조(宋祖) 1현과 동국(東國: 우리나라) 9현을 서무에는 송조 1현과 동국(우리나라)의 9현등 모두 5聖20賢등 25위를 모셨다.
유림에서는 선현의 위덕을 받들어 나가기 위하여 매년 음력 2월과 상정일(그 달의 첫 번째 ''丁''자가 들어 있는 날)에 선현들을위한 제사를 올리고 있는데 이를 석존제(釋尊祭) 또는 대제(大祭) 석제(釋祭)라고도 한다
홍살문(紅―門)
능·원·묘·궁전·관아 등의 정면 입로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
둥근기둥 2개를 세우고 지붕이 없이 붉은 살을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 박았다
붉은 화살 문이라는 뜻으로 홍전문(紅箭門),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열녀 공주 이 씨 정려각 烈女公州李氏旌閭
윤증 고택 앞에 있는 정려(旌閭)로 조선 중기 성리학자로 소론파 거두 윤증의 모친 공주 이 씨(1607~1637)의 열행을 기리위 위해 세운 겹처마 팔작지붕 정려각
노성면 교촌리에 열녀 공주 이씨 정려가 있다. 공주 이 씨는 문경 공미촌 윤선거(尹宣擧)의 처이며, 명재 윤증(尹拯) 선생의 어머니이다.
병자호란때, 윤선거는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강화도가 함락되자 이씨부인은 호랑캐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으리라하고 강화도에서 순절하였다.
그 후 공주 이 씨에게 정경부인(貞敬夫人)을 증직 하였고, 1681년 숙종 때에 정려를 내려 세웠다.
장독대
국산 해콩과 서해안의 천일염, 고택 내 우물에서 샘솟는 맑은 물을 사용해 전통 방식으로 담그는 장이 맛있게 익는 곳
애향공원
옥리봉 玉尼峯
노성중학교 뒤에 있는 산으로 옥녀봉(玉女峰)과 무동산(舞童山)의 전설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 이름은(玉女峰)이다.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의 명당자리라고 한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산 11-1
옥재봉 玉齋峯
충남 논산시 상월면 산성리 산 12
노성산성 魯城山城
노성산에 있는 백제시대의 석축 산성
우물터와 봉수대가 있다.
백제가 수도 부여 사비성(泗沘城)의 최후 방어선으로 주요 교통로인 노성산 정상부에 쌓은 삼태기 모양의 퇴뫼식 석축 성벽
백제 때 산 정상 부분을 돌로 둘러쌓아 만든 테뫼식 산성이다.
산 지형을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거의 완벽하게 쌓았고 동쪽면, 북쪽면, 서쪽면은 돌을 네모 모양으로 다듬어 쌓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성 둘레는 590m, 높이 2.4m이다.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는 장수의 지휘대로 보이는 터(장대지)가 있으며 동쪽벽으로 조금 내려오면 봉화를 올리던 봉수대로 보이는 곳이 있다. 성 안에는 4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도 사용하고 있고 토기, 기와 같은 여러 유물 조각들이 발견되고 있다.
연산에 있는 황산성과 함께 백제와 신라가 서로 마주했던 마지막 방어지에 해당하는 산성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사용한 주요 방어지역이었던 곳이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 송당리 산 1-1
니성산정(尼城山亭) 육각정자
노성산 魯城山
노산(魯山)과 성산(城山)을 합쳐 노성산(魯城山)이라고 부른다.
이칭 별칭, 니산(尼山) 진산(鎭山) 성산(城山) 노성봉수 노성산성
스님이 장삼을 입고 곱게 앉아 있는 모습이라 하여 니구산(尼丘山)이라 불렀고
지금은 노성산이라 부른다.
충남 논산시 상월면 신충리 산 26
송신탑
계룡산 전경
향적산(국사봉) 전
금강대도 노성 본원
金剛大道 魯城 本院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18세 손 이승여(李承如)가 1847년에 창시한 종교
봉우재산
충남 논산시 노성면 송당리 14-7
지압
노성 애향탑 魯城 愛鄕塔
노성산애향공원종합안내도
애향공원 출렁다리
종학(宗學)
가시랏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절이 있었다 하여 절골 또는 사동이라 하였는데 윤 씨 문중에서 강당을 세우고 종학이라 하였다.
파평 윤 씨 문중의 자녀와 내외척, 처가의 자녀들이 모여 합숙교육을 받던 교육 도장이다. 인조 21년(1643) 윤순거가 문중의 자녀교육을 위해 세운 후 종약(宗約)을 제정하였다. 화재로 인해 없어졌다가 1970년 윤정규가 지금의 종학당을 다시 지었다.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가운데 1칸은 대청을 겸한 트인 마루를 두었고 양쪽 칸은 방을 설치하였다.
1910년까지 운영된 종학당은 일반 서원이나 서당과는 다르게 교육목표와 교육과정을 두고 학칙도 정하여 시행하였다.
논산역(論山驛)
호남선의 기차역으로 1914년에 건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