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업계가 연말 위기설에 휘말리고 있다. 내수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위축, 물량 감소에 따른 극심한 출혈경쟁, 원자재 가격의 급락 등 악재가 잇따르면서 연말 ‘대란설’을 증폭시키고 있다. 여기에 공정거래위원회의 담합 관련 징계도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업계의 위기감은 그 어느 때 보다 고조되고 있다.
◆ 자금 운영 ‘목이 찼다’= 최근 중소 전선 업체들 사이에선 자금 운영이 한계에 직면했다는 목소리가 심심찮게 들린다. 내수 전선시장의 불황은 최근 경영난에 봉착한 중견 건설사만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4월 건설기업 경기실사지수(CBSI)는 70.5를 기록했다. 지난해 2월 50.0 이후 14개월만에 가장 낮은 수치다. 전선업종의 전방산업이라고 볼 수 있는 건설시장이 위태로워지면서 전선 수요는 당연히 바닥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다. 건설업계는 특히 민간주택과 공공건설에서 ‘허리’ 역할을 하는 중견 건설사들이 잇따라 기업회생절차 개시(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이미 경남기업, 월드건설, 동문건설, 우림건설 등 중견 건설사들이 워크아웃에 들어간 데 이어 상떼빌로 유명한 성원건설과 전남의 유력 건설사인 남양건설과 금광기업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특히 지난 2007년 전선 호황기에 발맞춰 중견기업 수준으로 생산설비를 증강한 상당수 기업들은 내수 수요가 급감하자 직격탄을 맞고 있다. 업계는 2007년 이후 국내 전선 생산 능력이 많게는 10% 가량 늘어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반면 건설경기 침체 등 여파로 전체적인 시장 규모는 오히려 감소되는 추세여서 체감으로 느끼는 수요 위축은 훨씬 클 수밖에 없다. 업계 한 관계자는 “당시 기업들은 시장의 미래를 보고 설비증설을 추진한 게 아니라 일단 설비증설부터 해놓고 시장에 뛰어들자는 인식이 강했다”면서 “연말에는 구조조정 내지는 영업적자로 인해 상당수 기업들이 어려움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해외시장에서 탄탄한 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LS전선이나 대한전선, 일진전기 등 대기업과 대원전선 등 일부 중견기업을 제외하면 중소기업들은 수출시장에서도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중소 전선업체들은 그동안 해외시장 진출에 대해 이렇다할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서 “최근 2~3년 동안 내수 경기가 하락 국면에 접어들면서 이제야 해외시장을 곁눈질하고 있으나 자체적으로 판로를 확보하기는 버거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 ‘불량전선’에 공정위 과징금까지 악재 수두룩= 지난해 업계는 시중에 일부 유통되고 있는 불량전선으로 인해 몸살을 앓았다. 지난해 연말 기술표준원은 안전기준에 미달하는 불량 전선을 제조·유통시킨 13개 업체를 적발했다. 절연전력케이블과 절연전선 관련 96개 업체 107개 제품에 대해 대대적인 수거작업을 벌여 절연전력케이블 12개, 절연전선 3개 등 총 15개 제품의 도체저항이 안전기준에 미달한 것을 밝혀낸 것. 기표원은 앞으로도 추가 실태조사를 거쳐 불량전선 제조 기업을 철퇴시킬 방침이다. 품질 경쟁을 흩트리는 불량전선도 문제지만 내수 수요 급감에도 불구하고 전선 단가는 오히려 하락하는 양상도 업계의 발목을 잡고 있다. 업계는 현재 전선 판매 단가가 최소 10% 이상 올라야 정상가격 수준이라는 데 이견을 달지 않고 있다. 그만큼 현 시장의 가격 질서가 완전히 붕괴됐다는 의미다. 오죽하면 “직접 만드는 것보다 사다 파는 게 더 낫다”는 자조섞인 얘기마저 들릴 정도다. 업계 관계자는 “현재 시판 시장의 단가는 재료비 이하가 대부분”이라며 “마진은 없고 오로지 공장 가동을 위해 출혈수주를 감행하는 행태가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3년 가까이 지루하게 진행된 공정거래위원회의 한전 및 KT 전선 입찰 담합 조사도 막바지에 이르면서 업계는 ‘과징금 공포감’이 팽배하다. 업계는 공정위의 과징금이 한전 입찰 담합건으로만 수 백억원 규모에 이를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 전기동 가격도 하락= 불과 한달 전만 해도 톤당 8000달러를 위협하던 전기동 가격은 5일 현재 7000달러 밑으로 주저앉았다. 지난 2월 16일 이후 LME 현물가격 기준으로 톤당 7000달러가 처음으로 붕괴된 것이다. 가뜩이나 물량확보가 힘든 상황에서 전기동 가격마다 급격하게 출렁임에 따라 제조업체는 물론이고 유통업체들도 정상적인 영업이 힘든 실정이다. 업계 입장에선 전기동 가격이 일정 수준에서 안정화되면 가장 이상적이고, 차선으로는 가격 하락보다는 상승이 유리한 측면이 많다. 전기동 가격 급락은 급등과 마찬가지로 ‘양날의 칼’이지만 선물거래에서 이익이 발생할 수 있는 여지마저 없어진다는 점에서 한 달 동안 20% 가까이 전기동 가격이 급락하면서 제조업계는 원자재 시장에서도 최악의 국면을 맞고 있는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