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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법은 공(空)하다
불교의 법(다르마)
법(法)은 범어 다르마(dharma)를 의역한 것으로, 교법ㆍ최고의 진리ㆍ법칙ㆍ도리ㆍ실체ㆍ모든 존재(일체) 등,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의 불법승(佛法僧) 3보(三寶) 가운데 법보(法寶)라고 할 때 법은 교법(敎法)ㆍ이법(理法)ㆍ행법(行法)ㆍ과법(果法)의 4법을 뜻합니다. 이 가운데 교법(敎法)은 좁은 의미에서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뜻하고, 넓은 의미에서 3세제불(三世諸佛)의 가르침 즉 모든 부처 즉 깨달은 자의 가르침 또는 불교 경전들에 나타난 가르침 전체를 뜻합니다. 이법(理法)은 교법이 가리키고 해설하고 있는 진리를 뜻하며, 행법(行法)은 이법 즉 진리를 성취하게 하는 계(戒)ㆍ정(定)ㆍ혜(慧) 등의 방편 또는 수행을 뜻하며, 과법(果法)은 행법이 원만해졌을 때 증득되는 이법 즉 진리 즉 열반을 뜻합니다. 따라서 법보(法寶)의 법은 불교의 교의(가르침)ㆍ수행(도리, 방편)ㆍ진리를 모두 뜻합니다.
부파불교의 아비달마와 대승불교의 유식학과 불교 일반에서 일체법(一切法), 법상(法相) 또는 제법분별(諸法分別)이라고 할 때의 법은 존재 또는 실체를 뜻하며, 주로 현상 세계의 존재 즉 유의법(有爲法)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 또는 실체 즉 법의 본질적 성질을 자성(自性) 또는 자상(自相)이라 합니다. 이에 비해 법성(法性)이라고 할 때의 법은 진리 즉 무위법의 진여(眞如)를 뜻하며 법성을 다른 말로는 진성(眞性)이라고도 합니다.
일체법(모든 존재)
초기불교 이래 불교에서는 일체법(諸法 또는 一切)를 분석함에 있어 일반적으로 5온(五蘊)ㆍ12처(十二處) 또는 18계(十八界)의 세 분류법으로 분석하였습니다.
(1) 5온설(五蘊說)
온(蘊)이란 ‘싸 모아 가지고 있다'는 정도의 의미인데, 같은 종류의 법이 서로 화합되어 모여 있기 때문에 이르는 말입니다. 5온(五蘊)이란 5음(五陰) 또는 5취(五聚)라고 하는 것으로, 색ㆍ수ㆍ상ㆍ행ㆍ식온을 말합니다. 5온의 분류법은 다음의 12처설ㆍ18계설 등과 더불어 인생을 주로 하여 일체의 만법을 이에 모두 섭입(攝入)하여 분류한 것인데, 특히 심(心)ㆍ심소(心所)에 중점을 둔 것입니다.
① 색온(色蘊); 물질ㆍ사물ㆍ육체)
색온이란 우리의 육체까지도 포함한 모든 물질적인 것을 총칭하는 말로서, 우리 눈에 보이는 대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6경(색ㆍ성ㆍ향ㆍ미ㆍ촉 법)을 총괄해서 가리키는 객관세계 그 자체를 뜻합니다.
② 수온(受蘊); 감수작용ㆍ감각인식)
수라는 것은 6근[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을 통하여 느끼고 받아들이는 고수(苦受; 불쾌감)ㆍ락수(樂受; 쾌감)ㆍ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 쾌감도 불쾌감도 아닌 감정) 등의 감수작용을 말하는 것이니, 수온이라 할 때에는 이러한 모든 감수작용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여기 향기로운 꽃 한송이가 당신 앞에 있습니다. 그 꽃을 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만져보기도 한다면 당신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일정한 느낌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렇게 5관을 통한 감수작용, 느낌을 수라 합니다.
③ 상온(想蘊): 표상작용ㆍ지각)
상이란 위의 감각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상념의 작용을 말함이니, 상온이란 이러한 것의 총칭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인식할 때는 그것을 바로 인식하기 전에 그것을 마음속에서 먼저 인식하가 마련인데, 이를 상(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외부에 있는 사물이나 사람에 대해 느낌을 받고, 대게는 그 느낌의 좋고 나쁨에 따라 좌우됩니다. 그런데 이 수라는 것은 한번 받아들이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뇌에 저축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대개 스스로 잊어버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머리 깊숙이 저장되고 있습니다. 마치 강의나 대화를 녹음하면 필요할 때마다 그때 그 소리를 생생하게 다시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저장된 기억이 불쑥불쑥 솟아나오는 것은 모두 상(想: 표상작용ㆍ지각)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④ 행온(行蘊; 의지작용ㆍ인식의 능동작용)
의지작용(인식의 능동작용)이 일어나면 이때부터 나라는 인간, 나라는 고집이 스며들고 이해관계와 연관되면서 일정한 가치판단이 내려지게 됩니다. 멋진 시계를 보면 가지고 싶다는 마음, 맛있는 음식을 보면 먹고 싶은 마음 등은 자신의 이해와 결부되어 있는 마음입니다. 이처럼 싫고 좋음, 소유하고자 하거나 배척하려는 어떤 의지가 일어나는 것을 행이라 합니다. 인식의 능동작용이 행입니다.
행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그 일어난 생각 때문에 입으로 말을 하거나 몸으로 행동하게 합니다. 그래서 5온 가운데 업(業)의 근원이 되는 것은 바로 행입니다. 행은 업을 짓기도 하지만 동시에 업보를 소멸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행의 근원인 이해관계를 떠나면 과보를 짓지 않습니다. 어떠한 행동이리라도 이해에 걸림이 없으면 업이 되지 않는다는 이치는 그 때문입니다.
인생살이에서 겪는 대부분의 고통은 업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업에는 업보(業報)ㆍ업력(業力)ㆍ업장(業藏)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업보란 어떤 행위로 인해 받게 되는 과보이며, 뿌린 만큼 거두는 것이 업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업보는 업력에 의해 나타납니다. 업의 힘이 강하게 끌어당기는 이유는 숱하게 쌓아온 업의 모임, 업장에서 나타나고, 업장은 다시 그 근본인 행의 쌓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애연가들이 담배를 끊지 못한 채 습관에 끄달리는 것 또한 업 때문입니다. 담배를 한 대 두 대 피우던 행위가 쌓여 업장이 됩니다. 이로 인해 담배를 피우고 싶은 충동, 업력이 일어나고 그에 끄달려 다시 담배를 피우는 것이 업보입니다. 이것이 계속되면 폐암 등, 각종 질병을 불러 일으켜 수명을 단축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업은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데, 이를 신구의(身口意) 3업이라 합니다.
첫째, 몸으로 짓는 업에는 살생ㆍ투도ㆍ사음의 3가지가 있습니다. 인간이 다른 생명을 죽이는 행위는 오랜 진화의 과정에서 축적된 업입니다. 인간은 먹고 살기위해서 다른 생명을 죽이는 업연을 지어왔습니다. 살생도 습관입니다. 폭력을 일삼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주먹질이 앞서고, 총칼을 많이 다루다 보면 그 또한 습관이 되어 버립니다. 자신이 자각하지도 못하는 새, 다른 생명을 보면 저도 모르게 죽이려고 하는 것은 다 살생업에서 오는 것입니다. 도둑질이나 남의 물건을 탐하는 일도 몸으로 지어온 습이고, 사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말로 짓는 업에는 거짓말ㆍ꾸밈말ㆍ두 가지 말ㆍ거칠고 상스런 말 등, 4가지가 있습니다. 욕이 습관화 되면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입에서 욕이 뛰어 나옵니다.
셋째, 생각으로 짓는 업에는 탐심과 성내는 마음인 진심, 어리석음의 치심이 있습니다. 간단히 이야기 하면 탐심이란 세상 일이 내 뜻대로 되어서 일어나는 만족한 마음, 욕심을 채우려는 마음이고, 진심이란 그와 반대로 내 뜻대로 되지 않아 일어나는 노여움, 괴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탐하는 마음, 성내는 마음의 이치란 알고 보면 이런 것입니다. 이처럼 탐심과 치심으로 눈멀게 하는 근본원인은 어리석음, 치심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⑤ 식온(識薀; 분별ㆍ인식작용)
앞의 것처럼 감각기관을 의지하지 않고 다만 그들이 인식한 것에 대해 비교ㆍ추리ㆍ추억 등의 작용을 식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우리가 어떤 소리를 들었다면 듣는 것만은 이식(耳識)이지만 그 소리가 어떤 소리인가? 남자의 소리인가? 여자의 소리인가? 등을 경험에 의해 분별ㆍ인식하는 것을 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5온의 하나하나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5온의 분류법은 우주 인생의 일체만법을 ① 물질적인 것(色蘊), ② 심적인 것(行蘊의 일부와 수상행식(受想行識蘊), ③ 그 외의 모든 존재(行蘊)의 3가지로 나누되, 특히 우리의 심적 문제에 그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심적 작용 중에서도 유별히 수(受)와 상(想)만을 따로 든 것은 이 두 가지는 모든 심적 작용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 주체는 어디까지나 식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미 앞에서 내용상으론 밝혀진 것이지만 이에는 유위법만이 포함되어 있을 뿐 무위법은 속해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우리의 심적 작용을 주로 한, 우주 인생의 현상계 만유에 대한 분류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12처설(十二處說)
위의 5온설이 우리의 심법에 중점을 둔 만법의 분류법임에 대하여, 12처설은 색법에 중점을 둔 분류법입니다. 이것도 또한 우리 인생을 주로 한 면에서는 5온설과 같습니다. 이 12처(處)를 12입(入), 또는 12입처(入處)이라고도 하는데, 12처라 하는 것은 6근과 6근에 대경(對境)이 되는 6경을 합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적 활동을 일으키는 우주 인생의 만법은 실로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크게 나누어 분류한다면, 주관적인 요소는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의 6근을 벗어날 수가 없고, 객관적인 요소는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의 6경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모든 심적 활동은 눈이 모양을 대하고, 귀가 소리를 대하고, 내 마음이 대상을 대하며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① 6근(六根): 근(根)이라 함은 외계(外界)의 현상을 능히 취하여 내계(內界)의 마음을 발동시키고 증장시킬 작용과 능력이 있다는 뜻에서 일컫는 말로써, 이에는 안근(眼根; 눈)ㆍ이근(耳根; 귀)ㆍ비근(鼻根; 코)ㆍ설근(舌根; 혀)ㆍ신근(身根; 몸)ㆍ의근(意根; 뜻)의 6근이 있습니다.
② 6경(六境): 경(境)이라 함은 외계(外界)의 현상을 능히 취하여 내계(內界)의 마음을 발동시키고 증장시킬 작용과 능력이 있다는 뜻에서 일컫는 말입니다.
㈀ 색(色):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인 객관계의 모든 현상.
㈁ 성(聲):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
(ㄷ) 향(香): 코로 맡을 수 있는 모든 냄새.
㈃ 미(味): 혀로 맛볼 수 있는 모든 맛.
㈄ 촉(觸): 몸으로 접촉하는 대상 즉 굳은 것, 더운 것, 축축한 것 등.
㈅ 법(法): 의식(第六識, 5관을 통하여 인식한 것을 종합하고 분별하는 능력)의 대상. 즉 성격ㆍ개성ㆍ법칙 등 인식의 대상.
이 12처설은 5온설과는 달리 일체 만유를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 물질적인 색법을 위주로 한 분류법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5온설과 다른 사실은 12처에는 무위법까지도 포함합니다. 그 이유는 6근 중에서 안ㆍ이ㆍ비ㆍ설ㆍ신의 전5근은 오직 현재의 대상 경계만을 취할 뿐이나 제6근, 즉 의근은 시간적으로 볼 때에는 과거ㆍ현재ㆍ미래의 3세에 걸친 모든 것과 공간적으로는 인연 화합이 아닌 무위법까지도 그 대상 경계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12처의 분류법은 비록 무위법까지도 포함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색법을 위주로 한 우주 인생의 현상계 만유에 대한 분류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18계설(十八界說)
18계설이란 위의 12처설이 주로 물질적인 색법(色法)의 분류법인데 비하여, 여기에 심법을 추가하여 색ㆍ심 양면을 다 포함하여 일체만유를 구분한 분류법입니다. 계(界)하는 말은 종족(種族)의 뜻도 있다고 하고 본생(本生)의 뜻도 있다고 하는데, 먼저 종족의 뜻은 18계의 제법이 그 자성에 있어서 각각 다르다고 하는 것이요, 다음 본생의 뜻은 이들은 곧 모든 심적 활동을 일으키는 요소가 된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18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위에 말한 12처에 인식작용의 주체인 6식을 포함한 것으로 곧, ① 안근(眼根)ㆍ이근(耳根)ㆍ비근(鼻根)ㆍ설근(舌根)ㆍ신근(身根)ㆍ의근(意根)의 6근(六根), ② 색경(色境)ㆍ성경(聲境)ㆍ향경(香境)ㆍ미경(味境)ㆍ촉경(觸境)ㆍ법경(法境)의 6경(六境), ③ 안식(眼識)ㆍ이식(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ㆍ의식(意識)의 6식(六識)을 합한 18가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심적 활동은 감각기관인 6근이 그 대상 경계인 6경을 대함으로써 일어나게 되는데, 그렇다면 6근이 6경을 대할 때 ‘이것은 이렇다, 저것은 저렇다하는 등의 인식 작용을 일으키는 주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곧 6식이라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의 모든 심적 활동은 감각기관인 6근과 그의 대상인 6경과 인식주체인 6식과의 3가지가 합쳐졌을 때에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일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진다면 결코 우리의 심적 활동은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6근과 6경은 다른 것이 자명하지만 6식은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6식이란 별개의 체(體)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일심이 6근을 통하여 그 대상 경계인 6경을 대하여 심적작용을 일으킬 때, 각기 식의 이름을 얻어 6식이 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일심(一心)이 안근을 통하여 색경을 대함으로써 심적작용을 일으키면 안식이 되고, 이근을 통하여 성경을 대함으로써 심적 작용을 일으키면 이식이 되고, 이렇게 하여 6식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관과 객관과의 문제를 놓고 보면 앞의 12처설에서는 6근이 주관이요 6경이 객관이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6근도 또한 물질적인 것이어서 주관이 될 수 없는 점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 18계에서는 6식이 더해지므로 6식이 참다운 주관이 되고, 6근과 6경은 함께 객관이 됩니다.
이상과 같이 볼 때 앞에 나온 5온설이 심(心)에 치우치고 12처설이 색에 치우친데 비해, 이 18계설은 색ㆍ심 양면을 고르게 받아들여 분류한 것으로 가장 보편적인 분류법입니다. 그리고 5온설ㆍ12처설ㆍ18계설의 셋은 다 같이 우리 인생을 중심으로 한 일체 만유의 분류법으로 흔히 3과설(三果說)이라 하여 한데 묶어져 설하고 있습니다.
제법의 분류법은 이외에도 명(名)과 색(色)ㆍ색(色)과 심(心)의 분류법도 있고, 6계설(六界說)이라 하여 모든 법은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ㆍ공(空)ㆍ식(識)의 6계로 나눈 설도 있으나, 비교적 대표적인 분류법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은 위에서 고찰한 분류법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류법은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 세분화 되었습니다. 소승불교를 대표하는 구사론에서의 5위 75법(五位七十五法)의 분류법과 대승유식론의 5위 100법(五位白法)의 분류법 등이 있는데, 그 해석은 너무도 전문적인 것이어서 생략합니다.
5온개공(五蘊皆空)
부처님은 “5온[일체법]은 공하다(五蘊皆空).”(반야심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부처님은 5온이 공하다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5온(12처ㆍ18계 포함)은 그 어느 것도 항상 하는 것이 없고, 끊임없이 변해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色)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으며, 정신작용인 느낌(受)도 항상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 좋던 것이 다른 때에는 싫어집니다. 상(想; 표상작용)이나 행(行; 의지적 행동)도, 식(識; 분별작용)도 죽 끓듯이 변하므로 믿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5온개공(五蘊皆空)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공(空)이란 범어 슈냐(Sunya)의 음역으로, 결코 어떤 물건이 있다가 없어진 상태나, 텅 빈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일체법[모든 존재]은 인연생기(因緣生起)하는 것이므로, 시간적으로 무상하고 공간적으로 무아(無我)여서 결코 변치 않는 영원의 고정된 실체나 자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기는 곧 공(空)인 동시에 현상계의 유(有)이며 이것이 또한 중도(中道)이기도 한 것입니다.
인간은 변화 속에 살면서도 변하지 않는 그 어떤 것을 인정하려 하고, 그것을 찾아 수많은 노력을 해 왔습니다. 유한한 인생을 한탄하고 영원한 행복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았고, 도교에서는 신선이 되고자 했고, 기독교인은 영생하는 천국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꿈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그 속도가 아무리 느려도 0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존재가 변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시간의 개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개념 속에서 불변하고자 하니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부처님은 우리의 번뇌는 존재가 변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변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데서 일어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간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예외도 있을 수 없다. 모든 존재는 생주이멸(生住異滅) 합니다. 만들어진 모든 것은 잠시 머물렀다가 변화하여 결국 소멸되고 맙니다. 우주도 성주괴공(成住壞空) 합니다. 별이 생기면 일정 기간 동안 머물렀다가 무너져 공으로 돌아가고, 우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존재 또한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생노병사(生老病死)를 막을 수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를 놓고 보더라도 어느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외모도 변하고, 성격도 변하며, 능력도 변하고, 체질도 변하고, 생각도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특정한 모습을 정해 놓고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가난한 운명을 탓하고, 공부 못 하는 자는 공부 못하게 태어난 자신의 능력을 탓하고, 외모가 못난 사람은 자신의 외모를 한탄하고, 성격이 나쁜 사람은 나쁜 제 성격을 탓할지언정 획기적인 변화를 꿈꾸지 않습니다. 음치는 언제까지나 음치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운동신경이 나쁜 사람이 언제까지고 운동을 못하도록 정해진 것도 아닙니다. 어떤 자는 가난한 운명을, 또 어떤 자는 부자의 운명을 타고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변해갑니다. 부자일지라도 낭비와 인색과 무절제함이 계속되면 가난해질 수 있고, 가난한 자일지라도 절약하고 보시하며 이웃을 향해 따뜻한 나눔의 마음을 꾸준히 일으킨다면 언제라도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끊임없이 변해갈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삶의 본질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삶에 도저히 내 능력으로는 해 낼 수 없기 때문에 포기하고 좌절하는 일 따위는 본질적으로 없어야 합니다. 다른 그 누군가가 그것을 했다면 나도 그것을 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있습니다. 내 능력은 태어날 때부터 이정도 밖에 안 되기 때문에 내 능력으로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내 능력을 변치 않는 것으로써 스스로 어떤 한계에 가두어 놓는 것일 뿐입니다. 내 스스로의 능력을 내 스스로 이 정도라고 생각하여 가두어 놓는 순간 우리는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 능력이 본래부터 그것 밖에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그 틀을 만들어 놓고 그 틀 안에 갇혀 있기로 작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가두고 있는 일체 모든 울타리를 걷어치워야 합니다. 이 세상에 정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생각은 제행무상의 이치를 모르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정해져 있지 않으며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무궁무진합니다. 심지어 그 변화의 끝에 우리는 이 우주의 모든 이치를 깨닫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할진대 나라는 존재를 울타리에 가둘 것입니까?. 내 스스로 울타리에 가두지만 않으면 나는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대자유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어디에도 갇히지 말고 끊임없이 변화해야 합니다. 어디에도 머물러 있거나, 정체되지 말고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새롭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5온이 공한 것을 확연히 깨달으면
불교의 근본가르침으로 4성제(四聖諦;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가 있습니다. 연기설이 부처님의 정각의 내용이라면 4성제는 실제문제, 즉 인간 고(苦)의 문제해결에 응용한 이론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첫 번째가 고성제(苦聖諦;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진리란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세상의 모든 것이 괴로움이라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에는 즐거움도 있기 때문입니다. 젊음과 희망, 사랑도 괴로움인가? 물론 그것이 기쁨일 수 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보면 인생의 젊음이나 희망, 사랑은 이윽고 사라지고 오히려 괴로움의 한 양상이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리하여 인생은 괴로움이라고 단정하며, 이것 없이는 불교의 기초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괴로움에 대해서 경전에서는 4고(四苦)와 8고(八苦)를 들고 있습니다. 육신에 따르는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고가 4고이고, 여기에 정신적인 고통 4가지를 더해 8고가 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애별이고(愛別離苦)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지 못하는 것, 연인과 헤어지는 것, 부부간에, 부모· 자식 간에, 친구 간에 이별이 있고,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같이 일하지 못하는 고통도 여기에 속합니다.
둘째가 원증회고(怨憎會苦)입니다. 미운 사람과 같이 일해야 하는 것, 보기싫은 사람과 같이 사는 것을 말합니다. 애별리고보다 원증회고가 사람의 피를 바짝바짝 마르게 하고 더 고통스럽습니다. 고부간에 갈등을 안고도 같이 사는 경우, 원수처럼 서로 으르렁대는 부부간에도 헤어지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바로 이런 고통 속에 가슴을 태우는 것들입니다. 서로 미워하는 사람과 얼굴을 맞대며 같이 살아야 하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겪어보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구불득고(求不得苦)입니다. 얻고자 하는 것이 잘 안 얻어질 때의 고통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얻고자 하는 것아 있습니다. 요즘 무주택 서민들의 꿈은 한결같이 내집 마련입니다. 철마다 오르는 전세값 대느라 돈 얻으러 다니는 일도 뜻대로 안되기 일쑤고, 돈을 못 구해 싼 방을 구하려 해도 터무니없이 치솟은 방값 앞에 억장이 무너지는 이들에겐 집이라도 한 채 있었으면 하는 소망이 더욱 큰 괴로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입자들 중에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서 자살까지 하는 사태가 속출하는 형편입니다. 반면에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지나치면 괴롭기 마련이고, 혹은 병으로까지 발전하기도 합니다. 하물며 나쁜 일이야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땅투기를 전문적으로 하던 사람이, 역시 투기로 먹고 살던 한 친척이 사놓은 땅이 자신이 투기한 땅보다 몇 갑절 더 오르자 배가 아파 끙끙대다 몸져눕기까지 했다는 애기는 충분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보면 많이 가졌건 적게 가졌건 구불득고로 인한 괴로움은 누구에게나 있는 일입니다.
네 번째가 5음성고(五陰盛苦)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자신이나 주변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상대의 사랑이 변하지 않기를, 혹은 지위나 재물이 계속되기를, 지금 누리는 행복이 영원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자신이 처한 상황이 고통스러우면 그 상황이 바뀌기를 바라지만, 자신이 만족하고 있는 처지는 변화되기를 바라지 않는 게 인간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한 사회의 변화를 놓고서도 안정과 개혁을 바라는 사람들은 저마다 그 처지가 다르다는 점에서 각각의 주장이 다 일리가 있는 법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며, 그래서 고통이 오는 것, 이것이 5음성고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온갖 번뇌가 마치 죽 끊듯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은 6근(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과, 6경(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이 서로 만날 때 6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순간이 지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계속 기억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6근과 6경이 만나는 36가지의 경우를 과거ㆍ현재ㆍ미래로 각기 계산해서 종합하면 108개의 번뇌를 이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번뇌가 어찌 108 가지만 되겠습니까? 108 번뇌란 말 속에는 번뇌가 한없이 만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으며, 그래서 ‘8만4천 번뇌’라고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인생살이가 이렇게 고통스럽다면,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불교가 만약 인생은 고(苦)라고만 이야기한다면 불교는 하나의 철학이나 사상에 지나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인간이 고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과 안락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불교는 위대한 철학이자 고등종교인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해답은 다름 아닌 바로 ‘조견 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입니다. 5온이 공한 것을 확연히 깨달으면 일체의 모든 고통과 액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속과 불교의 차이가 있습니다. 세속의 종교나 사상ㆍ철학에서는 어떤 실체가 있어서 그게 구원받은 것을 피안으로 건너갔다고 하는데, 불교는 그 반대로 5온에, 즉 나라는 게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아는 것이 바로 피안으로 건너감입니다.
'나’라는 것은 사실 모든 고통의 원인입니다. ’나‘가 있다고 여기므로 소유하려 하고, 욕심을 부리며,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냅니다. 그러나 ‘조견 오온개공’해서 ‘나’라는 것이 없이 그저 텅 빈 ‘공(空)’임을 알게 되면, 그 땐 일체고액이 다 사라집니다. ‘나’라는 게 고통을 당하고 행복을 겪은 것인데, 그 ‘나’라는 게 사실 알고 보니 본래 없는 것이니, 그래서 이런 것을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고 합니다.
전도몽상이란 ‘잘못 알고 있었다’라는 것을 뜻합니다. 마치 어두워서 새끼줄을 뱀으로 알고 두려워했는데, 낮에 해가 밝아서 자세히 보니 새끼줄임을 알면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교사불자회 법회/ 고불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