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반적으로 미군은 한국군을 어떻게 평가했던가?
스탠리 로버트, 제임스 라우톤 콜린스 공저의 "베트남 참전 동맹국(Allied Participation in Vietnam)"에서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여러 동맹국의 참전배경 및 주요 전투성과를 설명하고 있다.
참전 초반에는 한국군 지휘부가 지나치게 신중하게 준비하는 모습에 미군 수뇌부는 "한국군이 적극성이 결여되어 있고 사상자를 내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오해를 하였으나 1966년 1월 '플라잉 타이거'작전에서 11명의 한국군이 192명의 베트콩을 사살한 전과를 보자 단숨에 뒤집어졌다.
그러나 초반의 이런 긍정적인 평가와 달리 파병의 기간이 길어지면서 미군의 평가가 점차적으로 나빠졌다. 70년부터 71년까지 제1야전군 사령관이었던 콜린 중장은 "한국군은 헬기를 비롯한 각종 지원을 과도하게 요구하고 있으며 한 번의 작전 종결 후 다음 작전까지 너무 소극적이다.", "한국군 2개 사단의 성과는 미군 1개 여단 정도에 불과하다."라고 혹평을 했다. 또한 콜린은 "이 전과 달리 한국군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자 오히려 소극적이 되었으며 덜 주는 쪽이 오히려 더 낫다." 고 말했다.
콜린의 후임인 브라운 중장 역시 "한국군은 융통성과 창의성이 없으며 자기 책임구역에 대해서만 치중하고 있다."고 헸다. 또한, 한국군은 자기 책임구역에 대해서는 베트콩에 대해서 매우 훌륭한 성과를 냈고 안전을 확보했으나 남베트남군과의 협력이나 지역 주민과의 관계에서는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다고 평가한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정부는 한국군을 필요로 할 때에는 매우 효율적인 군대라고 높이 추어올리다 한국군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여야 할 필요가 생길 때에는 한국군이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평가했다.
모든 전쟁에서와 같이 월남전에서도 처음에는 무공훈장은 적 사살자의 수를 기준으로 삼았었다. 그랬더니 베트콩으로 확인되지 않은 양민의 희생이 늘어났다. 이러한 부작용이 심해지자 훈장 수여 기준에 무기의 노획 수를 적용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군수품을 팔아 그 돈으로 월남군이나 민병대로부터 소총 등 각종무기를 구입해서 노획무기라고 전투상황을 꾸며 보고하는 또 다른 병폐가 생겨났다. 전쟁터에서 지휘관들의 공명심에 사로잡힌 지나친 경쟁이 가져온 허위전과보고는 사령부를 골치 아프게 하였다.
그러나 이 보다 더욱 골치가 아픈 문제가 있었으니 한국군이 전사했을 경우이다. 전공에 따른 훈장이야 한국 정부가 주는 것이지만 한국군이 전사하면 보상은 미국에서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 돈으로 싸우는 기묘한 전쟁에서는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졸전으로 유명한 1972년 안캐패스 전투에서 월맹군의 포격을 당하여 아군의 피해가 심했다. 이전의 전투처럼 총알이나 적이 설치한 지뢰 때문에 전사를 해도 비교적 신체가 온전히 보존된 상태로 전사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이 조각이 나서 전사하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한국군이 전사자 숫자를 부풀릴 우려가 있다가 보고 훼손되지 않은 시신을 요구했다. 그 결과 지옥 같은 전투에서 겨우 살아남은 전우들이 전사자들의 시신을 조립하기 위해서 미미 날라 가버린 팔 다리, 목을 찾을 수가 없어서 주변에 흩어져 있던 월남군의 시신을 야전삽으로 찍어서 숫자를 맞추는 곱빼기 지옥의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었다. 생사가 갈리는 것 이상 의미가 있을 수 없는 것이 전쟁터이지만 한국군의 월남전은 훈장과 전상보상금이 걸린 비정상적인 전쟁이었다.
1970년 주 월남미군사령부가 돌연 군표개혁, 즉 군대 내에서 쓰이는 화폐개혁을 단행한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실제로 한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군표가 미군이 한국군에게 할당한 군표의 액수보다 엄청나게 많은 액수를 보유하고 있던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기업과 기술자들이 보유한 군표액수도 엄청났고 또한 미 군표를 이용하여 미국 본토 달러와 교환하는 돈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꽤나 되었으니 그 액수도 무시할 수 없는 액수였다.
당연히 우리정부의 지시는 어떻게 해서든지 미군과 협상하여 군은 물론 민간인이 가지고 있는 군표까지도 전액을 교환하라는 지시였다. 주월사령부 부사령관이 협상대표로 나서서 앞으로 한국군은 미 군표를 사용할 때 주 월남한국군이 발행하는 쿠폰을 같이 사용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여 우여곡절을 겪고 한국인이 보유한 막대한 미 군표를 전액 교환하여 휴지조각이 될 뻔한 한국인의 돈을 살려내는데 성공하였다.
주 월남미군사령부로부터 퀴논지역에서 담배가 가득히 적재되어있는 미군 PX 대형 컨테이너 1대가 실종되었는데 컨테이너가 한국군 부대의 영내로 들어갔으니 조사하여 주기를 바란다는 요청이 정식으로 들어왔다. 우리 사령부에서 현지부대에 조사를 나갔을 때는 이미 컨테이너 자체를 통째로 땅에 파묻어버린 후였다. 이 사건은 고급지휘관까지 인지된 사건이었기에 사령부의 입장에서는 문책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러나 미군 측에는 사실무근이라고 통보한 것은 물론이다.
1972년 여름의 어느 날 미군항만사령부는 귀국 Box를 실고 퀴논 항을 출항하여 항해 중인 수송선을 돌연 귀항시켰다. 그 이유는 수송화물의 적재 착오로 재점검을 실시하기 위해서라는 핑계였다. 그리고 한국군의 귀국 Box를 다시 하역하면서 기중기로 Box를 들어 옮기다가 실수인 것처럼 3개를 떨어트려 Box에 담긴 물건들을 쏟아지자 탄피들이 흩어져 쏟아졌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미군측은 한국군이 주 월남한국군에게 지급한 미군의 최신무기와 장비를 귀국Box속에 담아서 한국으로 운반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공작이었다고 한다.
2010년부터 재미 참전전우들은 월남참전 한국군 공로 결의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보자는 노력을 시작했다. ‘한인 베트남 참전용사들은 미국 군인들과 동등하게 희생을 치렀기 때문에 이들의 희생을 기려야 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이 워싱톤주를 시작으로 괌, 하와이, 뉴저지, 버지니아, 메릴랜드, 오레곤. 펜실베니아 주의회에서 통과되어 드디어 2013년 7월 연방의회 통과를 위해 상정되었다. 결의안이 비록 법적인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인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공로를 연방의회 차원에서 최초로 공식적으로 발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아무런 실익도 없는 이 결의안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런 노력이 2023년 11월에 조 바이든 대통령이 ‘미주 한인 베트남전 참전용사 보훈법(Korean American VALOR Act)에 서명하게 만들었다. 이 법은 한국군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후 미국 시민권을 얻은 한인 참전용사들도 연방정부가 미군 참전용사에 제공하는 의료혜택을 받게 해준다는 내용이다. 이 마저도 치료는 미국에서 하지만 돈은 한국에서 내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아직 실질적으로 진행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월남전은 미국인들이 월맹공산군과 싸운 전쟁으로 이해하고 있을 뿐 다른 국가의 군인들이 참전했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미국인이 월남전의 사상자들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은 월남에서 죽은 58,000여 명의 미국인뿐이다. 어쩌다 한 번씩 이야기되는 그룹은 그 전쟁에서 죽은 수 십만 명의 월남인들이다. 미국인에게는 5099명이나 전사한 한국인들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존슨 행정부로서는 한국군을 고용하는 것은 미국에게 ‘피와 재화의 상당량’을 절약하게 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미군 병사 한 명을 파월할 때 13,000$을 일 년에 써야 했지만 한국군으로 대신할 때는 5,000$에서 7,800$만 지불하면 되었던 것이다.
미국이 베트남전에 쓴 돈이 총 1조 110억 달러인데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한국이 받아온 총액은 10억 3600만 달러였다. 병력은 10%를 채워주고 돈은 0.1%를 얻어온 것이다. 여기에서 똑바로 직시해야 할 사실은 미국이 제공한 액수가 아니고 한국은행 통계에 잡힌 액수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미국에서 받아서 국고로 들어오지 않은 액수가 얼마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온라인이 있는 시대가 아니어서 매달 미군사고문단(MAC-V)을 통하여 현금으로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주월사령부에서 수령한 달러의 일부를 장교귀국박스(A Box)담아 C-46 수송기 편으로 빼돌려 서울공항으로 보냈다는 주월사 수송병이었던 고 장성관 전우의 증언이 있었다. 그 후 돈의 향방은 전후 미국 상원 사이밍턴 청문회에서 밝혀진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