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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회-작전의 종결과 작전 분석
1945년 8월 16일, 덴노의 항복 선언이 발표된 지 하루 후 관동군 사령부에도 항복선언이 전달되었습니다. 관동군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 대장은 항복을 받아들이고 전 관동군에 항복을 명령했으나 통신 불안과 소련군의 통신 차단으로 항복 사실이 전달되지 못한 사단도 있었으며 몇몇 사단은 항복을 인정하지 않고 결사항전을 주장했습니다. 그 동안 제1 적기군과 제5군은 무단장을 손에 넣었고 제6 근위전차군은 신경과 봉천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며 후터우 요새 공방전도 끝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한편 만주국의 첫번째이자 마지막 황제이며 청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 아이신교로 푸이는 신경 함락이 목전에 다가오자 만주국의 해체를 선언하고 일본으로 도피하기 위해 신경 외곽의 비행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때 소련군 공수부대가 강하를 시작했고 푸이는 탈출하지 못한 채 소련군에게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소련군에게 사로잡힌 푸이
이틀 후인 8월 18일, 관동군에 만주에 시찰 차 와있던 제2 총군(본토결전을 위해 새로 조직된 부대들) 총사령관 하타 슌로쿠 원수는 제15군과 제2 적기군의 공세로 하얼빈에서 옴싹달짝 못하고 있었습니다.
리즈시절인 중일전쟁때의 하타 원수.
한편 소련군은 야마다 대장보다 계급이 높은(실제 일본군에서 원수는 대장에게 주는 명예직이었지만) 하타 원수가 관동군을 실질적으로 통수하고 있다 판단했는지 극동전략방면사령부의 참모인 게오르기 쉴라호프 대장의 이름으로 하타 원수에게 항복을 요구했습니다.
하타는 항복 요구에 응하여 8월 19일에 바실레프스키와 회동했습니다.
극동에서 벌어진 모든 일의 책임은 나에게 있소.
다른 사람들의 책임은 묻지 마시오.
고려는 해 보겠소.
물론 바실레프스키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8월의 폭풍 작전은 11일 만에 끝을 맺었습니다. 소련은 8월 9일~20일간의 전역에서 만주 전체의 관동군을 삽시간에 포위해 무력화시켰고 몽강자치연합과 만주국을 멸망시켰습니다. 내몽골과 만주는 결국 새롭게 탄생한 중화인민공화국에 넘겨주게 되지만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는 완벽히 손에 넣는데 성공했으며 지금까지 러시아 영토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모든 일본군은 소련군에게 항복하여 전부 시베리아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수는 60만에 달했습니다. 시베리아에 끌려간 관동군의 처우가 어땠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50년대 중반에 소일 협상을 통해 관동군 포로들이 일본으로 귀환했을 때의 증언만이 당시를 짐작하게 해 주는 증거 자료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엇갈리는 상황이라 죽기 직전의 대우를 받았다고 증언하며 일본 극우쪽의 반공, 반러 선전에 동원되는 사람도 있으며 그럭저럭 버틸 만 했다고 증언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관동군 포로에 대한 소련의 처우 문제는 쿠릴 열도 문제와 더불어 현제 러-일 관계에 걸림돌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역사 문제의 축인 러시아 정부가 아직까지도 관동군 포로 문제에 대한 기밀 문서들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김국후 교수가 <평양의 소련군정>을 쓰면서 당시 제25군 정치장교인 레베데프 소장과의 인터뷰에서 그 문제를 언급하자 레베데프는 손사레를 치고 '그건 무덤 까지 가져가야 할 일.'이라 말하며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로 러시아는 관동군 포로 문제를 금기시하고 있으며 일본 정부나 다른 연구자들의 기밀 해제 요청을 아랑곳하지 않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이 문제의 해결은 결국 러시아 정부의 진정성있는 태도 표명에 달려 있다고밖에 말 할 수가 없을 것 같군요.
어쨌든 소련군 입장에서도 만주 전역은 단순한 '소풍'은 아니었습니다. 만주의 험지를 급속도로 통과하는 것은 인적 비전투손실을 강요했으며 무단장, 후터우, 하일라얼 등에서 일본군은 완강하게 저항하며 어떻게든 소련군에게 출혈을 일으킬려고 노력했습니다. 또한 소련군에게 익숙하지 않은 상륙작전은 비슷한 규모의 미군 상륙작전에 비해 더 많은 피해를 입으며 작전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소련군은 작전 기간 동안 12,031명이 전사하고 24,423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장비로는 전차 및 자주포, 돌격포 78대와 야포 및 박격포 232문을 잃었습니다. 소련군의 대부분의 대전차 손실은 일본군 대전차 자폭조에 의한 것으로 소련군은 대전차 자폭조를 스메르트니키(smertnik)라고 부르며 치를 떨었습니다.
일본의 괴뢰 국가인 만주국과 몽강자치연합은 그 길로 멸망해 버렸습니다. 몽강국의 수장인 데므치그돈로브는 탈출하는 데 성공해 장제스의 중경 정부로 가서 장제스와 결탁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국공 내전에서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승리함에 따라 데므치그돈로브는 체포되어 전범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소련군은 만주의 대부분의 공업 기반을 죄다 뜯어가 시베리아 개발에 사용했습니다.
한편 치스챠코프의 제25군은 8월 24일에 함흥에 임시 사령부를 설치하고 북한 사정을 정탐한 뒤 평양으로 진군했습니다. 그리고 8월 26일, 치스챠코프는 평양에 입성합니다.
함흥 비행장에 내리는 치스챠코프
평양에 도착한 치스챠코프를 환영하는 주민들
물론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평양 소련군정 성립과 북한 정권의 탄생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정치적 문제도 있고 잘 모르기도 해서요.
이제 포풍에 대한 분석으로 들어갑니다.
1.애와 어른의 싸움
솔직히 만주 전역의 승패는 모르는 사람이라도 다 예측할 수 있을 문제입니다. 숫적으로 소련군은 보병이 1:2, 전차와 야포가 1:4.2, 항공기가 1:2의 우위를 이루고 있었으며 질적 격차는 너무나도 컸습니다. 일본의 대전차 수단이 빈약하기 짝이 없다는 것은 악명높았으며 T-34를 저지할 수단은 오직 대전차 자폭조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적어도 2~3년 동안 죽을 고비를 넘긴 소련의 베테랑들과 전투 다운 전투 한번 못겪어본 관동군의 전투가 어떻게 될 지는 불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최후방 극동에서 전투 한번 겪어보지 못한 병사들도 소련에 많았지만 이들은 경험 많은 베테랑들에게 노하우를 전수받음으로서 경험 부족의 한계를 많이 상쇄했습니다.
고위 지휘관들의 실력 또한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최강의 책략가 중 한 사람인 바실레프스키 원수가 작전을 총 지휘했으며 산전 수전 다 겪은 막강한 원수인 메레츠코프와 말리노프스키가 전선군 사령관으로 최전선에서 지휘했으며 류드니코프, 루친스키, 치스챠코프, 벨로보로도프, 크릴로프 등 독소전쟁에서 몇년간 구른 경험 많고 유능한 지휘관들이 소련군에 배치된 반면 관동군은 총사령관인 야마다 오토조부터가 실전 경험이라고는 중일전쟁에서 1년 남짓 참전해 놓고서는 기병학교 교관 노릇 하다가 대본영에 배치되어 태평양전쟁 내내 대본영 참모로 일하다가 관동군 사령관이 된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인물이 대본영에서 승승장구 하며 대장까지 오르고 요직인 관동군 사령관직에 배치된 것만 보더라도 일본군 인사 시스템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한 자리에 모인 3 원수
좌측부터 메레츠코프, 말리노프스키, 바실레프스키 입니다.
그런 고로, 8월 폭풍 작전 분석의 중점은 소련군이 '어떻게 이겼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렇게 빨리 이겼냐?'가 될 것입니다.
사실 2차대전의 대표적인 기동전으로 손꼽히는 만슈타인 계힉, 바르바로사 작전, 바그라치온 작전 등도 이 정도의 성과를 내진 못했습니다. 프랑스 전역만 해도 6주가 걸렸고 바르바로사 작전은 3개월이 넘게 걸렸고 전략적으로는 실패였죠. 하지만 8월 폭풍 작전에서 소련군은 자바이칼 전선군의 경우 최대 820킬로미터, 최소 320킬로미터의 최종 진격을 달성했으며 제1 극동 전선군은 최소 200킬로미터, 최대 300 킬로미터를 진격했고 제2 극동 전선군은 제1 극동 전선군과 비슷했습니다. 이런 짧은 기간 동안에 긴 거리를 주파한 기동전은 세계 전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빨리 이겼냐가 전역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2. 전략적 차원의 승리 요인
소련군의 만주 침공은 소련군이 공세를 개시했다는 것 그 자체 만으로도 전략적 기습이었습니다. 스탈린과 몰로토프를 비롯한 소련 정부 인사들은 소-일 불가침조약을 연장하지 않겠다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일본과는 충돌할 의사가 없는 척 하며 일본 정부를 안심시키고 일본의 소련을 통한 서방과의 강화라는 떡밥을 심심하면 던져 주었습니다.
그렇게 일본을 안심시키는 사이 소련은 바그라치온 작전이 한창일 때 부터 대일전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독소전쟁이 끝나갈 때 제5군, 제39군, 제6 근위전차군, 제53군을 통째로 시베리아로 수송했으며 또한 극동군 부대들에 증원할 베테랑 지휘관들과 병력들, 물자들을 철저한 보안 속에 수송했습니다. 이 오랜 노력 끝에 소련군은 작전 개시일인 8월까지 극동에서 전원 공격 준비를 완성하는 데 성공했으며 관동군이 생각하는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또한 소련의 선전포고 사실이 일본에 알려지는 걸 끊어버리기 위해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관의 모든 통신을 차단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결국 일본은 예상못한 소련의 전면적 침공을 받게 되었고 이는 완벽한 전략적 기습으로 다가왔습니다.
결국 전략적 성공은 내게도 공이 있는 것이지.
으흐흐흐흐흐
3. 작전적 차원의 승리 요인
만주 전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보여준 소련군 작전술의 완성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41년~43년 초까지의 무수한 실패와 43년 후반기~44년 초까지의 실험과 성공, 44년 후반 바그라치온 작전의 실행과 베를린 함락까지의 작전적 성공들은 소련군에게 어마어마한 전훈을 남겨 주었고 어떻게 해야 종심작전 이론에 따라 광속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지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독소전쟁 내내 소련군은 작전술 차원에서 쉴새 없이 독일군을 몰아붙이는데 치중해 안 입어도 되는 손실을 지나치게 많이 입은 감이 있었습니다. 쿠르스크 전투 직후 43년 후반기의 우크라이나 전역이 그랬죠. (물론 상대인 만슈타인이 너무 개사기 캐릭터라 그런 것도 있지만 -_-) 바그라치온 작전의 성공 이후에도 마찬가지의 경향을 보였습니다. 소련 지휘관들이 빠른 승리와 작전적 성공을 이루고 싶은 조급함도 있었겠지만 자신들이 죽어라 싸웠는데 뒷북 친(소련 입장에서) 서방 연합군이 독일을 다 차지할 것이라는 생각이 한몫 한 거 같기도 합니다.
8월 폭풍 작전은 이와 같은 작전적 조급함을 떨쳐버리고 철저한 준비와 오랜 검토 끝에 탄생했습니다. 물론 그 만큼의 여유가 있는 것도 사실이긴 했습니다. 서방 연합군이 한반도에 상륙해 만주국을 노리고 북진하는 상황도 아니었으니까요.
소련군은 8월 폭풍 작전에서 투하체프스키가 남겨준 선물인 광정면 동시접촉 이론을 제대로 활용했습니다. 작전적 주공인 제6 근위전차군의 진격을 방해하려는 일본군의 기동 차단 기도는 애시당초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소련 제36군, 제1 적기군, 제5군, 제25군, 제15군, 제17군, 플리예프 기병-기계화 집단 등은 소만 국경 전체에서 동시다발적인 공세를 시작했고 일본군의 발을 죄다 묶어버리는 데 성공해 제6 근위전차군이 종심작전 교리에 따라 뒤 돌아보지 않고 3일 동안 450 킬로미터를 진격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적의 정치적, 산업적 기반인 신경과 봉천으로 급기동하며 관동군과 만주국군 전체의 전쟁 지속 능력 제거와 대대적인 심리적 마비 효과를 일으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제6 근위전차군의 기동은 관동군의 군수, 보급, 손실 인력 충원, 손실 인력 후방 수송과 회복을 철저히 제거했으며 섬멸되지 않은 관동군 60여만명이 계속 저항해 작전이 더 길어져봤자 관동군의 대대적인 멸망을 막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광정면 동시접촉과 함께 수반되는 충격군의 적 방어선에 대한 돌파구 형성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애시당초 주공이 적 주 방어선으로 돌입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죠. 바로 일본의 방어선이 허술한 다싱안링 산맥을 넘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험지를 통한 기동과 기습은 2차대전에서도 큰 효과를 보았었습니다. 만슈타인 계획에 따라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은 기계화부대가 통과하기 부적절하다는 아르덴 고원지대를 통과해 뫼즈 강을 넘어 프랑스 전역에서 신화를 썼고 바그라치온 작전에서 로코소프스키의 제2 벨로루시 전선군은 대대적인 기동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프리퍄티 습지대를 통해 독일 중부집단군을 강타했습니다. 험지를 통한 기동 부대의 진격은 험지의 상대적으로 허술한 적 방어를 무너트리고 적의 심장부로 곧장 향할 수 있다는 강한 장점을 가지게 됬으며 바실레프스키는 이를 적극 이용하려 했습니다.
다싱안링 산맥 넘기는 작전 입안자인 바실레프스키와 작전을 실행해야 하는 말리노프스키 입장에서도 큰 도박이었습니다. 만약 일본군이 다싱안링 산맥의 험지에 완전 편제된 1개 연대라도 제대로 배치해 놨다면 제6 근위전차군이 우격다짐으로 산맥을 넘어도 이미 일본군은 신경과 봉천 주변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었을 것이며 산악지대라는 특성 상 제6 근위전차군 또한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관동군은 기계화부대가 다싱안링 산맥을 넘을 수 없다고 판단했고(사실 상식적인 판단이지만) 바실레프스키는 여러 번의 검토를 거쳐 제6 근위전차군과 제39군에게 다싱안링 산맥을 넘을 것을 명령했습니다. 산맥을 넘는 문제는 각 제대들의 전술적 능력에 달리게 됐지만요. 어쨌든 제6 근위전차군은 산맥을 넘었고 만주국의 심장부로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으며 바실레프스키가 원했던 광경을 보게 만들었습니다.
제1 극동 전선군 지역에서도 상황은 똑같았습니다. 메레츠코프의 병력들은 만주 동부의 구릉과 숲들에서 대대적인 기동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일본군의 예상을 철저히 짓밟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급기동으로 관동군의 마지노선이라 자랑하던 동부 만주의 요새 라인에 구멍을 내버렸습니다. 그리고 무단장을 점령함으로서 만주국의 심장부로 쳐들어갈 발판도 마련했습니다. 바실레프스키, 말리노프스키, 메레츠코프는 험지 기동을 작전의 주 요소로 택했으며 이것들은 전부 성공적으로 돌아가 전 관동군을 압도했습니다.
만주 전역에서 소련군은 숲, 산, 구릉, 습지 등의 다양하고 생소하며 통행을 방해하는 지형에서 빠른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공격 시의 충격력을 보존하며 진격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지형이 주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무난하게 통과하는 전술적 능력을 보이며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기여했습니다. 또한 일부러 험지만을 택한 기동은 험한 지형만 믿고 경계나 증강을 소홀히 한 그 지역의 일본군을 무너트리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근데 군사학적 입장에서야 뛰어난 거지만 사병들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_-
사진:진창에 갇혀버린 트럭 빼내려 달라붙은 소련군 병사들
특히 이 과정에서 전투 공병의 운용은 필수적이었습니다. 소련군은 이 전역에서 대량의 전투 공병을 군단급, 사단급 제대에 배치하고 얼마든지 본부에서 지원이 가능하도록 편제하여 어떤 지형적 난점이든 간에 기동로를 개척하고 도하점을 마련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소련 공병들의 엄청난 노고들은 작전의 성공을 이끄는 전술적 열쇠였습니다.
소련군은 전술적 수준의 기습을 성공시키기 위해 많은 경우 독소전에서 소련군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버린 대대적인 준비 포격을 삭제하거나 최소화하고 독소전에서 얻은 요새 침투술 경험을 통해 조직한 강습 집단을 편성해 일본군 초소, 특화점, 요새 등을 하나하나 걷어 내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소련군 강습 집단의 공격 배치도
이를 통한 일본군 요새 지역에 작은 구멍이라도 뚫리면, 전차 여단급 선견대가 돌격포, 자주포 연대를 수반하고 구멍 속으로 들어가 우회, 포위 기동을 통한 일본군의 기동 차단과 포위를 수행했습니다. 선견대가 고정 요새들을 우회하고 포위함에 따라 일본군이 공 들여 만든 요새들은 무용지물이 되고 하나 하나 점령당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소련 기동 선견대들의 종심 깊은 공격은 2차대전의 모든 기동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일본군에게 대대적인 혼란과 공포를 가져왔습니다.
소련 전차 여단들의 종심 진격은 일본군에게 충격과 공포였습니다.
전술 수준에서 운용되는 여단급 선견대들은 대게 군단 당 하나씩 배치되었으며 공세 목표가 작전에서 부차적 목표일 때는 야전군 직할로만 1개 배치되었고 선견대가 더 많이 필요한 경우는 사단 당 한 개씩 배치되었습니다. 제6 근위전차군과 함께 주공을 형성한 제39군의 경우 유일하게 전차 사단 1개와, 전차 여단 3개를 죄다 선견대로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상 모든 전술적 제대에 기동 제대가 배속된 것입니다. 이것도 모자라 소련군은 야전군 사령부 직할로 독립 전차 여단이나 독립 돌격포 연대 몇 개를 추가로 편성해 필요할 시 언제든지 소총병 군단, 소총병 사단에 임시로 배속될 수 있게 했습니다. 만약 기동 전력의 투입이 힘들 정도로 일본군의 요새망이 빽빽한 경우에는 무지막지한 화력투사로 요새들을 가루로 만들고 보았습니다.
이런 방식을 사용한 소련 기계화 전력의 엄청난 진격 속도는 일본군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고 일본의 방어 계획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파고든 선견대들은 보급선이 허용하는 한에서 어떤 기동이던지 자유롭게 행할 수 있었고 여단장, 연대장 재량에 따라 일본군이 예상치 못한 기동과 돌파를 시행하며 일본군 방어선을 휘젖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전차 단독 진격도 아닌 장갑차나 방호가 되는 트럭에 분승한 기계화보병이나 땅크 데싼트가 1~2개 연대가 수반되는 병력이니 그 제병협동 효과는 어마어마 했습니다.
소련군의 보전 합동 사진
땅크 데싼트는 영원하리라 -_-
또한 모든 공격 시간이 죄다 한밤중이라는 것도 성공을 도왔습니다. 소련군의 야간 침투 능력은 새벽 1시에 공세를 시작해도 무리 없을 정도로 강력해져 있었고 스스로 야간전이 장기라고 믿고 있던 일본군이 비웃음을 사게 만들었습니다. 일본 국경지대 초소들은 밤 사이 정리되어 후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다가 날씨가 장마철이란 것까지 기습을 숨겨주는 요인이 되었으니 기후까지 소련군을 돕는 겪이 되었습니다.
보병들의 공격 대형 또한 이전보다 훨씬 유연해졌습니다. 소련 소총병 연대의 공격 대형은 모든 전선에서 각각 차이점이 있는 대형으로 진행되어 일본군으로 하여금 전체적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이 결과 연재를 쭉 보셨으면 아시듯이 8월 폭풍 작전은 무슨 패턴물처럼 진행되었습니다.
1.소련군 강습 집단과 전투공병들이 침투해 일본군 요새망을 한겹 걷어낸다.
2.소련군 소총병부대들이 무력화된 요새를 접수하거나 온전한 요새에 견제행동을 한다.
3.그 동안 전차 여단, 돌격포 연대 등이 열어 놓은 구멍으로 급속 침투한다.
4.기동 부대들이 우회, 포위, 추격을 통해 관동군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고는 종심 깊숙히 침투한다.
5.의미 없이 버티던 요새들이 간단히 소련군 손에 넘어온다.
6.그리고 소련군은 만주 중부로 진격한다.
결국 소련군은 4년간의 싸움에서 막강한 고수가 되었고 종합적으로 일본군을 압도하게 되었습니다.
5.보급적 차원의 승리 요인
사실 소련군은 독재국가 군대답게 보급, 수송 같은 비전투분야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군대입니다. 하지만 8월 폭풍 작전에서는 거대한 기동전을 위한 자칫 넘어가 버릴 수도 있는 사소한 수준으로 보일 수도 있는 보급적 문제들까지 전부 해결하려 노력했습니다.
험지 기동과 깊은 종심을 돌파하는 작전 목표 달성을 위한 연료의 지상, 항공 보급이 체계적으로 계획되었으며 특히 긴 거리를 주파해야 하는 병력을 위해서 급수 중대까지 조직하는 등 소련군의 보급적 준비도 엄청났습니다.
물론 소련군이 유류 트러블 상황에 대해 크게 대비를 해오긴 했지만 작전에서는 제6 근위전차군과 제39군에 적지 않은 문제가 생기긴 했습니다. 차량으로 보급을 수송하기에는 너무 깊은 종심이었고요. 그럼에도 항공기를 통한 유류 보급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제6 근위전차군의 여단급 선견대들은 지속적인 진격이 가능했습니다.
6. 관동군의 실책들
황군의 정예인 우리 관동군은 패하고야 말았다!
왜냐?!
애송이기 때문이지.
으헝헝 ㅠㅠ
위대한 승리에는 적의 도움이 뒤따른다
-대 몰트케
사실 상대가 서방 연합군이나 독일군이라도 폭풍 작전은 성공으로 끝났겠지만 저런 식으로 광속으로 밀려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상대는 일본군이죠. 소련군이 작전에서 보여준 전략적, 작전적, 전술적 압도를 받아내야 하는 관동군은 너무나도 형편없었습니다. 소련군의 전략적 기습의 성공에는 관동군 사령부와 대본영이 세운 오판이 한 몫 했습니다. 대본영과 관동군 사령부 모두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감안할 때 1945년 가을 까지는 대규모 군사 행동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을 내렸으며 심지어 1946년 봄까지도 그럴 것이라는 심한 낙관론까지 나왔었습니다.
사실 다 망해가는 상황에서 소련의 군사적 상황까지 신경쓰기에는 너무 힘들었다고 변호를 해 줄 수는 있습니다. 문제는 전략적 기습이 작전적 기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련이 작전을 시작했을 때 관동군은 그들의 대소전 시나리오 상황이 아니라며 소련군의 공세를 그저 사소한 국경 지대 충돌이나 소련군의 도발이라고 멋대로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공세 시작날에 야마다 대장은 다렌에 내려가 있었고 제5군은 예흐호에서 회의를 여느라 전방 사령관들을 죄다 불러들인 상태였습니다. 이에 떨어진 작전적 기습효과는 막중했습니다.
한편 관동군이 45년에 변경한 대소전 요강은 소련군의 험지 돌파와 종심 기동 능력을 철저히 과소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소련군은 핀란드와 독일을 통해 42년까지 얻은 정보만으로 소련군이 철저한 약체 군대이며 정면 공격과 인해전술 이외에는 모르는 3류 군대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할힌골에서 주코프에게 어떤 꼴을 당했는지는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근데 독일과 일본의 교류가 그 이후 최소화되며 소련군에 대한 정보 갱신이 42년에 정체될 수밖에는 없긴 했습니다. 지구 반대편에 동맹을 두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_-) 그 결과 관동군은 30년대에 상정했던 방어 병력 배치를 바꾸지 않았으며 험지 방어는 소련군이 험지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 최소화했고 결국 아예 험지만 노린 소련군에게 아무 힘도 못쓰고 돌파당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관동군 사령관 야마다 대장과 제3 방면군 사령관 우시지로 대장의 관할권 다툼이라는 황당한 일까지 벌어졌으니 관동군이 폭삭 망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입니다.
관동군은 소련군을 삼류라고 멋대로 판단하고(아니면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지만) 있었지만 정작 삼류는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붉은 군대는 승리하였습니다!
폭풍이 소련군에게 남긴 것
이 교훈으로 말미암아 소련군은 독소전쟁과 마찬가지로 전 부대의 철저한 기동화, 차량화가 얼마나 유용한지 8월 폭풍 작전에서 한번 더 확인했습니다. 이는 항상 소련의 모든 소총병 사단, 군단에 여단~사단급 기동 선견대를 배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또한 주코프가 국방상이 된 후 전 소련 소총병 사단을 차량화 소총병 사단으로 바꾸는 데 큰 전훈이 되었습니다. 만주 전역은 결국 현대 소련군, 러시아군을 완성시킨 전역이라 보실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 긴 연재를 계속 봐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 드리며 연재를 이것으로 마칩니다.
군 입대 관계로 계획해 둔 다른 연재들은 모두 제대 후로 미룰 수 밖에 없는 것이 아쉽지만 기다려 주실 수 있다면 그때 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참고문헌 목록
1.8월 폭풍:소련군의 만주에서의 전략적 공세, 데이비드 글랜츠.(http://www.cgsc.edu/carl/resources/csi/glantz3/glantz3.asp)
2.8월 폭풍:전술적, 작전적 공세, 데이비드 글랜츠
(http://www.cgsc.edu/carl/resources/csi/glantz4/glantz4.asp)
-위 두 논문이 연재의 주 출처가 되었습니다. 두 논문은 글랜츠가 중령 시절인 83년에 미 레벤워스 육군대학에서 강의하기 위해 쓴 논문으로 후일 글랜츠는 89년에 저걸 보강한 August Storm을 출판하고 2009년에 개정판을 냈습니다. 저거 아니었으면 정말 짤막한 연재가 되어버렸을 겁니다. 짤 찾으려고 구글 돌아다니다가 저런 대어를 낚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글랜츠 대령을 닭치고 찬양합시다!!!
3.독소전쟁사, 데이비드 글랜츠 조너선 하우서 저.
-저 두 논문 발견하기 전에는 이거와 위키피디아 문서로만 쓸려 했었습니다. 연재 초반의 소련군과 일본군 관한 것은 이 책이 출처입니다.
4.타임 라이프 2차세계대전사-원폭과 일본패망 편
-일본 항복 과정의 주 참고자료 입니다.
5.우리의 눈으로 본 일본제국 흥망사, 이창위
-일본 항복 과정의 부 참고자료 입니다.
6.평양의 소련군정, 김국후
-제25군의 북한 진군사 주요 참고자료 입니다.
이거 작년 여름에 시작한 연재가 이렇게 길어질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원래는 단순히 독소전쟁사 수준에서 짤막하게 하려던 것이 논문을 2부나 발견해 버리는 바람에 이렇게까지 와버렸네요. (제 귀차니즘도 한 몫 했지만요 ㅠㅠ) 쓰면서 계속 생각나는 것이, 고작 2주도 안된 전역에 저 수준으로 쓸 것이 많다면 제2차 세계대전의 다른 전투들은 쓸 것이 얼마나 많겠냐는 겁니다. 특히 4년 동안이나 대규모 기동전이 벌어지고 구 소련 자료 공개가 가속화된 독소전쟁은 대체 얼마나 많은 주요 장면들과 이야기거리가 있는 걸까요?
그저 아마추어 밀리터리 오타쿠에 불과한 저지만, 이 연재를 하면서 독소전과 소련군의 본질에 더 깊숙히 다가가고 싶어졌으며 거기서 나온 것을 2대갤에 알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입대 전에 끝내버려서 정말 다행입니다. 끝내지 못하고 입대했으면 봐 주시는 분들이나 저에게도 정말 답답했을 겁니다. 미 육군대학에서 언제 논문 링크 끊을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고요.
어쨌든 모두 봐주셔서 감사드린다는 말씀 다시 드립니다.
그리고 연재에 큰 도움을 준 황신 찬양! 포풍! 포풍이 몰려온다!
하지만 황신의 힘을 빈 덕분에 소련은 '황제' 미국에게 항상 '2'등이었고
제'2'세계의 지도국이 되지만 그런 건 아무레도 상관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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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전부 다 봤는데 감동이...
승리하였습니다.
이제큐햏 군대 가시면 재미있게 군생활 하실듯 ㅎㅎ
꼭 재미있는(?) 병과로 빠지셔서 강력한 밀덕이 되시길!.
그리고 이말은 저주가 되었다.. (도망)
역시 땅개 알보병중에서도 지원화기쪽 아니겠습니까? 남자라면 화력!!(ㄲㄲ)
닥치고 박수~~!!!!
위대한 승리에는 적의 도움이 뒤따른다. - 大몰트케-
진짜 군사사를 뒤지면 찬란한 승리 뒤에는 항상 적의 실책이 따르는 것 같음.
고생하셨습니다..감사합니다 ^^
영어 실력이 보통이 아니시네 ㄷㄷ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좋은 연재 감사합니다~^^
입대해서도 좋은 보직 받고, 좋은 부대 배치되시길~~~
정면 공격과 인해전술 이외에는 모르는 3류 군대 ㄲㄲ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진짜 고생하셨습니다 정말 구하기 힘든 자료를 일일이 번역하셔서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잘 읽었습니다. 훌륭한 연재물에 감사드립니다. ^ ^ ~
수고하셨어요
축하합니다. 참으로 소련군의 만주진출은 일본만이 아니라 중국과 한국의 운명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군요. 한국은 분단, 중국은 소련의 만주 중공업 약탈+공산당의 만주 점령=장개석의 패배로 이어져 중화인민공화국을 낳게 되었네요. 작전기간은 비록 2주일도 안되지만 세계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전역이라고 봐야 겠네요.
오우 잘하셨어요... 도장 꾹!
축하합니다.욕보셨어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