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욥기 24:1–25
중심 구절: "성중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들의 참상을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욥기 24:12)
서론: 관념의 성전을 나와 아픈 세상의 현장으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욥기 24장은 욥기 전체에서도 가장 서슬 퍼른 '현실 고발의 현장'입니다. 그동안 욥기의 대화는 "왜 의인이 고난을 받는가"라는 욥 개인의 고통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욥의 친구들은 "네가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는 것"이라는 관념적이고 단선적인 '응보론'의 틀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욥기 24장에 이르러 욥의 시선은 자신의 골방을 뛰어넘어, 생존의 사각지대에서 신음하는 세상을 향해 확장됩니다. 욥은 경계표를 옮겨 가난한 자의 땅을 빼앗고, 과부의 소를 담보로 잡으며, 피땀 흘려 일하고도 굶주리는 약자들의 비참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목격합니다.
이 본문의 풍경은 20세기 프랑스의 천재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시몬 베유(Simone Weil)의 삶을 강력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명문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수로 일하던 엘리트 지식인 시몬 베유는, 책상 위에서 고통을 철학적으로 논하는 것에 환멸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교직을 내려놓고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로 직접 들어갔습니다. 소음과 착취, 인간 존엄성이 파괴되는 그 현장에서 그녀는 약자들이 겪는 극단적 비인간화의 상태, 즉 '불행(Malheur)'을 온몸으로 체험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관념적인 교리와 고상한 언어의 성전에 갇혀 있는 성도와 교회를 향해 묻고 있습니다. "너희는 지금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 본문을 중심으로, 신약적 의미와 철학적 사유를 짚어보며 오늘날 성도와 교회가 결단해야 할 영적 적용점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교리와 관념을 넘어 '에비욘'의 고통을 직시하라
본문 4절은 고백합니다. "세상에서 학대 받는 자(에비욘)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 여기서 쓰인 히브리어 '에비욘(אֶבְיוֹן)'은 단순한 재산의 부족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원적으로 '갈망하다', '바라다'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생존할 수 없어 타인의 도움과 공의가 절실히 필요한 '극빈자, 한계 상황에 내몰린 타자'를 의미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관념적인 도덕 체계에 갇혀 이 '에비욘'들의 눈물을 보지 못하거나 22:6~11절의 엘리바스처럼 그것으로 욥을 정죄하기에 바빴지만, 욥은 신앙의 눈을 들어 이 타자들의 얼굴을 직시했습니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윤리의 시작은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예수님 역시 신약에서 산상수훈을 통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 6:20)라고 선언하시며, 세상이 짓밟고 외면한 '에비욘'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시몬 베유는 공장에서 일하며 "타자의 불행을 가식 없이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사랑의 형태"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첫 번째 경건은 '타자의 고통을 가식 없이 바라보는 눈'입니다. 세상의 부조리와 가난을 "죄를 지어서 그렇다"거나 "게을러서 그렇다"라는 기계적 교리로 치부하지 마십시오. 교회가 세상의 '에비욘'(비정규직, 외로운 독거노인, 사회적 사각지대의 이웃)들의 아픔을 외면한 채 우리만의 성전 안에서 평안을 노래한다면, 그것은 욥의 친구들의 위선에 빠지는 것입니다. 교리는 관념이 아니라 약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현장의 영성'으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둘째, '아나카'의 신음 소리 속에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연대하라
본문 12절은 탄식합니다. "성중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신음하며(아나카)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들의 참상을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여기서 '아나카(אֲנָקָה)'는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치명상을 입고 죽어갈 때 흘러나오는 '극심한 비명과 신음 소리'를 뜻합니다. 세상의 불의와 착취 속에서 약자들은 죽음의 신음을 뱉어내는데,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폴 사르트르나 알베르 카뮈가 말했던 '실존적 부조리(Absurdity)'이며 신의 침묵에 대한 깊은 절망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복음은 이 침묵에 대해 놀라운 반전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 관망하시는 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 부조리한 세상의 고통 한복판으로 직접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가장 비참한 약자의 모습으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세상의 '아나카(신음 소리)'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직접 몸으로 짊어지신 것입니다.
시몬 베유는 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즉각 없애주는 전능한 통치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우리와 함께 고통받으시는 분으로 존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손과 발이 되어 세상의 불행을 나누어 짊어져야 한다".
성도 여러분, 세상의 불의와 참상을 보며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라며 손놓고 방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그 현장은, 도리어 하나님께서 성도와 교회를 '그리스도의 손과 발'로 부르시는 현장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구조적 악을 단숨에 다 개혁할 수는 없을지라도, 억울하게 신음(아나카)하는 한 사람 곁에 다가가 함께 울어주고 손을 잡아주는 '십자가의 연대'를 실천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잇팀'을 신뢰하며 종말론적 공의를 실천하라
본문 1절은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어찌하여 전능자는 때(잇팀)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여기서 '잇팀(עִתִּים)'은 단순한 시계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신 공적인 심판과 정의의 날(Court Days)'을 뜻합니다. 욥은 악인이 대낮에 강탈하고 잘 사는 부조리 속에서, 왜 하나님이 악인을 즉시 심판하시는 '공의의 날'을 당장 보여주지 않으시는지 안타까워합니다.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이 '잇팀(지정된 때)'을 다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욥은 본문 후반부(18~25절)에서 악인이 지금은 높여지는 듯하나 결국 베어지고 베임을 당할 것임을 선언합니다.
신약의 야고보서 5장 4절 역시 노동자의 삯을 착취한 부자들을 향해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며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을 경고합니다.
시몬 베유는 2차 세계대전의 비극 속에서도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나눔과 연대를 끝까지 실천하다가 34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녀는 당장 세상이 바뀌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공의를 끝까지 신뢰하며 오늘 나의 자리에서 선을 행하는 것이 성도의 숭고한 결단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세상은 여전히 부조리해 보이고, 악인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에게는 반드시 공의를 완성하실 '잇팀(하나님의 때)'이 있습니다. 종말론적 최종 심판을 믿는 성도는 세상의 악한 흐름에 타협하지 않으며,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오늘 하루 내 삶의 현장에서 정직과 공의, 사랑의 씨앗을 심어 나가는 자들입니다.
결론: 세상의 눈물을 닦아주는 대안적 공동체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관념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을 버리라고 경고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제도와 시스템을 단번에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몬 베유가 자신의 고상한 특권을 내려놓고 노동자들의 불행 속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었듯,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 역시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ㆍ'에비욘(אֶבְיוֹן, 극빈자)'의 아픔을 외면하는 관념적 신앙에서 벗어나, 약자들의 고통을 가식 없이 바라보는 현장의 영성을 회복합시다.
ㆍ하나님을 원망하는 대신, 약자들의 '아나카(אֲנָקָה, 신음 소리)' 한복판으로 들어가 십자가의 사랑으로 함께 연대합시다.
ㆍ하나님의 '잇팀(עִתִּים, 심판의 때)'을 신뢰하며, 세상의 탐욕과 불의에 물들지 않는 거룩하고 순결한 대안적 공동체를 이루어 갑시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 때, 하나님은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해 침묵을 깨뜨리시고 이 땅 위에 당신의 나라와 공의를 시작하실 것입니다. 이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