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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둘레길 15구간 안골길
안골계곡 사패산 서쪽 일대에 있는 계곡으로,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의정부시 가능동에 속한다. 안골공원지킴터에서 안골폭포를 지나 성불사(成佛寺) 위쪽까지 이어지는 계곡이다. 안골 입구의 안골계곡에서 직동공원~호암사 입구~회룡탐방지원센터로 이어지는 북한산 둘레길 15구간의 안골길은 4.7㎞ 거리에 약 2시간 20분이 소요된다. 안골길은 북한산 둘레길 산너미길(14구간), 보루길(16구간)과 연결된다 의정부 민락동에서 흑요석기를 포함하는 제4기층이 발견되어 이미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시대 유적은 아직 발견된 바 없으며,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금오동·고산동·용현동일대에서 간돌칼·간돌화살촉·민무늬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이 지역은 고조선시대에는 진(辰)에 속했고, 삼한시대에는 진한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초기에는 백제에 속했으나 475년 이후 고구려에 속하여 매성군(買省郡, 일명 昌化郡)이라 하였으며,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내소군(來蘇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견주(見州)로 이름을 고쳤고, 1012년(현종 3) 양주의 절도사가 폐지되고 안무사로 개편되었다. 1018년 양주에 편입되었으며, 1308년(충렬왕 34)에 한양부로 개칭되었다. 조선 초인 1394년(태조 3) 다시 한성부로 개명되면서 부치(府治)가 동촌 대동리(大東里 : 현재의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 부근)로 옮겨지고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칭되었다. 1397년에 부치가 다시 옛 치소인 견주(현 양주시 고읍동)로 이전되고 양주부라 불렸다. 1413년(태종 13) 양주도호부로 고쳐지고 속현으로 견주(見州)·사천(沙川 : 동두천시 전역과 양주시의 은현면지역)· 풍양(豊壤 : 남양주시의 진접읍·진건읍지역)의 3현을 두었다. 1466년(세조 12)에 다시 양주목으로 승격되었으나 1504년(연산군 10) 양주목이 폐지되고 왕의 수렵지구로 될 때 의정부시는 잠시 폐허가 되기도 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다시 복구되어 양주목의 소속이 되어 계속 갑오개혁 때까지 양주목에 속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의 팔도제가 폐지되고 23부 336군이 새로 설치되게 되어 양주목이 한성부 소속의 군이 되었을 때 의정부시는 양주군의 시북면(柴北面)·둔야면(芚夜面)지역에 속하였다. 1912년 행정구역개편 때 양주군 32개 면 중 시북면·둔야면지역으로 오 늘의 의정부시의 모체를 이루게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다시 시북면과 둔야면이 시둔면(柴芚面)으로 개칭되었고, 1922년에 주내면 유양리에 있던 양주군청사가 시둔면 의정부리로 옮겨오게 되어 의정부시는 양주군의 심장부를 이루면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938년 시둔면이 양주면으로 개칭되었고, 1942년 양주면이 의정부읍으로 승격되었다. 1950년 6·25사변 때는 수도 서울의 관문으로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이었고, 전쟁을 거치면서 군사도시로서의 변천을 겪기도 하였다. 1963년 1월 1일에 시로 승격되면서 한수(漢水) 이북의 경제·사회·문화·군사·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다. 1980년 4월 1일에는 양주군 별내면의 고산리와 산곡리가 편입되었으며, 1994년 7월 1일 장곡동이 장암동과 신곡동으로, 1995년 3월 2일에는 신곡동이 신곡 1,2동으로 분동(分洞)되었다. 1998년 10월 14일 의정부 1동과 4동이 통합되었고, 2003년 2월 3일에는 호원동이 호원 1,2동으로, 송산동이 송산 1,2동으로 분동되어 현재와 같은 15개 행정동이 되었다.
수락산:노원구 상계동, 의정부 장암동, 남양주시 별내면에 걸쳐 있는 표고 637m의 산이다. 수목은 적으나, 옥류동 · 금류동 · 은선동의 세 폭포가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어 물이 떨어진다는 뜻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수락산 · 도봉산 · 오봉산에는 호랑이가 많이 있어서 세조 9년(1493) 3월에 양주 녹양리 목장에 있는 말 네 필을 물어 갔으므로, 세조는 친히 녹양리에 가서 상호군 조득림과 호군 박수장으로 좌우상대장을 삼고, 오봉산과 수락산의 범을 잡았으나, 호랑이의 피해는 더욱 심하여 할 수 없이 녹양리의 목장을 살곶이로 옮기었다. 이에 따라 호랑이가 또한 살곶이로 몰려와서 말의 피해가 많았으므로 군사를 풀어 범을 쫓는 한편 각 마을마다 부군당을 짓고 산신을 위하여 그 피해를 막게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양주목에 속하였다. 내원암 일대 계곡에 바위가 벽을 둘러치고 있어 물이 굴러 떨어지므로(水落) 이름 하였다는 설과 산봉우리 형상이 마치 목이 떨어져 나간 모습(首落)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불암산 서북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산경표』에는 '한북정맥(수락지맥)에 속한 산'으로 수록되어 있다. 『여지도서』 보유편에서 "둔야면에 있다. 포천 축석령에서 남쪽으로 뻗어 나온다."는 기록이 보인다. 가능동 동 이름은 자연마을인 가좌리(佳佐里)와 어능리(魚陵里)에서 한 자씩 따서 지었다. 1956년 가능리를 가능 1·2리로 분할하였고, 1964년 동제(洞制)가 실시되면서 의정부시 가능1동과 가능2동으로 승격되었다. 1970년 가능2동이 가능2·3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정동인 이 동은 행정동인 가능1~3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가재울(가좌)·선돌(입석)·고든골(직동)·안골 등이 있다. 가능1동은 교외선 철도와 벽제선 도로가 횡단 우회하며 중·고등학교가 밀집되어 있다. 6·25 전쟁 이후 미1군단이 주둔하면서 일부 지역은 기지촌을 형성하였다. 그후 한·미 야전군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다.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안골은 산이 아름답고 계곡 물이 맑아 행락객이 모이는 곳이다. 고든골[直洞]의 원래 이름은 직곡(直谷)이다. 옛날부터 마을길이 구부러짐이 없이 곧게 뻗어 있어 고든골(곧은골)이라고 하였다. 직동에 있는 은혜유치원 자리에는 흥선대원군의 산장이 있었는데, 마을 이름을 따서 직곡산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873년 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외척 세력에 밀려 운현궁을 떠나 이곳 직곡산장에서 은거하였다고 한다.
직동공원
소풍길
일본 효고현(兵庫縣) 히메지시(姬路市)에서 태어났으며, 1945년 귀국하여 마산에서 성장하였다. 1955년 마산중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하였다. 43세가 되도록 독신으로 오랜 유랑생활을 하다가 1972년 목순옥(睦順玉)과 결혼하여 비로소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 뒤 지병으로 죽기 전까지 부인의 지극한 보살핌에 힘입어 왕성한 창작 활동을 보였다
천상병의 문단 활동은 마산중학교 5학년 때인 1949년 7월 『죽순(竹筍)』에 시 「공상(空想)」 외 1편을 처음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6·25 중에는 송영택(宋永澤) 등과 함께 동인지 『신작품(新作品)』을 발간, 여기에 시를 발표하였다. 이어 1952년 『문예(文藝)』지에 시 「강물」·「갈매기」 등으로 추천을 받았고, 1953년 같은 잡지에 평론 「사실의 한계-허윤석론(許允碩論)」, 1955년 『현대문학』에 「한국의 현역대가(現役大家)」 등을 발표하였다. 가난과 무직, 주벽, 무절제한 생활 등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천상병은 1971년 문우들의 주선으로 제1시집 『새』를 뒤늦게 발간하였다. 그 뒤 제2시집 『주막에서』(1979)와 제3시집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1984), 제4시집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1987), 제5시집 『요놈 요놈 요이쁜 놈』(1991)을 펴냈다. 그밖에 저서로 3인 시집 『도적놈 셋이서』(1989), 시선집 『귀천(歸天)』(1989)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1991), 문학선 『구름 손짓하며는』(1985), 산문집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1990),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1993) 등이 있다. 유고집으로 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1993)와 수필집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1994)가 있다. 천상병의 시는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서정을 바탕으로 하여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순수성을 되비쳐 보여준다. 동심에 가까운 이러한 순진성은 가난과 죽음, 고독 등 세상사의 온갖 번거로움을 걸러내고 있으며 일상적인 쉬운 말로 군더더기 없이 간단명료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귀천 1970년 『창작과 비평』 6월호에 발표된 천상병의 시 작품. 시인이 삶에 대한 일체의 욕망과 집착을 초월하여 죽음에 대한 능동적이고 낙천적인 태도를 노래한 작품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라고 반복적으로 읊조리는 표현을 통해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닌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임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이승과 저승을 경계 짓는 공간이 아니라 인간이 온 곳이고 또한 최종적으로 갈 곳인 우주 혹은 영원성을 표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하늘로 돌아간다는 것은 공포의 대상이거나 피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우리들의 본래의 자리이며 소풍이 끝나고 돌아가야 할 안식의 공간을 의미한다. 하늘로 돌아가면서 그가 동반할 것이라고는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과 “노을빛”밖에 없다. 이슬이나 노을빛과 같이 소멸과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소재들은 화자가 이승에서의 삶에 대해 어떠한 미련이나 집착도 가지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시인의 자유로운 달관적 태도를 대변하고 있다. 가난과 슬픔으로 가득했던 자신의 삶을 아름답다고 표현한 것은 시인이 지닌 무욕의 경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비록 삶은 고달프고 힘들지라도 무욕의 시선에서 볼 때에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잠시 다녀가는 “소풍”이므로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미련과 집착을 버리고 죽음을 담담하게 마주할 수 있는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인의 정신이요, 세속을 초월한 달관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화려한 장식적 수사나 현란한 기교를 배제한 채 현실을 초탈한 달관적인 삶의 자세를 간결하고 담백하게 표현하여 내용과 형식의 유기적인 조화를 이끌어 내었다는 데 이 시의 가장 큰 매력이 있다. 결국 그에게 있어 간고함은 사물에 대한 또는 일상적인 삶의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하는, 투명한 눈을 가져다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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