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들의 소리’에 매달 쓴 글들이 모아져서 89년도에 “옛날 하나님 옛날과 요즘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출판을 했다. 당시 내 처치에서 책을 낸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는데 부천의 일터서점 이상훈 사장이 빈들의 소리를 보고 책을 내보라고 권고를 하면서 출판사를 소개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난생 처음 낸 책은 많이 팔리지는 않았으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아마도 당시에는 빈민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와 함께 한국교회와 사회에 대한 고발의 성격이 담긴 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급기야 “옛날 하나님 요즘 하나님”의 여파는 신학대학까지 퍼져서 1992년도 광나루 장로회 신학대학의 초청을 받아서 신앙 강좌를 하러 갔다. 그 당시는 총학생회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을 때여서 그 학교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나 같은 사람도 학생들의 초청을 받아 강사로 나설 수 있었다. 강연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학생처장을 맡고 있는 사미자라는 여 교수와 잠깐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분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변혁운동이 가진 자들에 대한 적개심을 근거로 해서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상대에 대한 적개심이 변혁을 이루는데 큰 에너지가 되기는 하지만 미움은 사랑과 반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사랑으로만이 자랄 수 있는 생명을 파괴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라고 물었다.
나는 짧은 시간에 내 생각을 이야기 할 수 없어 듣고 있었지만 이 분이야말로 참으로 문제를 피상적으로 밖에 보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에게는 증오심과 적개심으로 가득 차있는 것 같이 보이는 학생, 노동자 빈민들은 증오심으로 무장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들의 감정은 그 교수가 아름다운 꽃을 보고 고상한 음악을 들으면서 좋다고 느끼는 것처럼 춥고 떨리고 배고프고 억울한 사람들이 자기의 아픔에서 느껴지는 것일 뿐이다. 다만 그 교수에게는 그런 현실이 자기 현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시끄러운 불협화음으로 들릴 뿐이다.
그날 ”이 강좌가 끝난 다음에 여러분 가운데 1/3만 자퇴하는 역사가 일어나기 바란다.”는 폭탄 선언으로 강연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타 교단의 젊은 목사가 객기로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교단이 필요한 목사는 70 명인데 한 해 700 명의 신학교 졸업생들이 배출되는 것을 염려하는 그 해 교단의 총회장이 전국 교회에 보낸 목회서신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강연이 끝나고 조금은 걱정을 했는데 나이 많은 교수 한 분이 오시더니 “지 목사! 잘했어요. 우리가 하고 싶어도 못하는 말이예요.”라고 해주어서 안심이 되었다. 실제로 그 후 장로회 신학대학은 .한 해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았다. . 2020년에 시드니에서 장로회 신학대학 출신 목사를 만나서 그 사건 이야기를 했더니 “학교 다닐 때 어떤 외부 강사가 와서 1/3만 자퇴하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바로 목사님이셨군요.”라고 해서 함께 크게 웃었다.
2019년도에 뉴욕에서 만난 정영민 목사는 40년 전에 신학생 때 샀던 책을 아직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교인들에게도 돌려서 읽기를 권하고 있었다. 뉴욕에서 책의 인연으로 만난 강창훈 목사는 89년도 나온 책을 읽을 나이가 아니어서 “어떻게 그 책을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헌 책방에서 샀다고 했다. 2000년대에 온라인 활동을 통해 알게 된 김범호는 길거리에서 주었다고 했다. 이러 저러한 경로로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40 년이 지난 지금까지 연결이 되고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옛날 하나님 요즘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인상 깊은 일은 시흥가정의원 박운식 원장이 부친 상을 당하였을 때이었다. 소식을 듣고 상가 집에 들어섰더니 박 원장이 반갑게 나를 맞이하면서 대학 교수였던 아버님이 병석에 누워 계시면서 마지막으로 책을 읽고 기독교에 대하여 평소에 가졌던 많은 의구심이 풀렸다고 좋아하셨다면서 책을 보여주는데 책의 여러 군데 밑줄을 쳐져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귀중한 그 책이 아니라 그 책을 읽은 사람이다. 예수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했지만 읽을 눈이 있는 사람이 읽은 것이 귀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되돌아 보면 주장이 너무 강했지만 당시로서는 스스로 내적 무장을 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때였다. 그만큼 경계가 분명한 비타협적 자세가 필요 했던 시기였다..
한 번은 큰 교회를 담임하는 교단의 선배 목사가 집안에 경사가 있다면서 교역자들을 초청해서 부페 식사를 대접하는 자리에 교역자들의 모임에 가지 않던 나도 어쩌다 뭍어서 가게 되었다. 마침 나를 잘 아는 후배가 부목사로서 식당 입구에서 안내를 하고 있다가 나를 보고 "목사님도 부폐한 음식 먹습니까?”라고 농담을 해서 웃겼다.
빈민 운동을 하는 동안 나는 일 년에 열 건 이상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모두 교회의 교인들이 아니고 고아원의 원생, 무연고 노숙자, 철거민, 노동자 등 안타까운 사연을 가지고 허술하게 죽은 사람들이었다. 이 사회의 경쟁에서 뒤떨어져 처진 사람들, 길을 걷다가 낙오가 된 사람들이어서 뒤처리를 해줄 만한 사람이 없어서 대충 보낼 수밖에 없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에는 형식이 필요 없지만 죽는 일에는 반드시 형식이 필요한 법이다. 나는 이들을 위해서 가장 간략한(‘간소한’이 아닌) 장례식을 집행해야 했었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례식은 주일 오후 예배를 인도하던 고아원에서의 장례이었다. 평소에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과는 도무지 소통을 할 수 없는 어떤 두꺼운 벽 같은 것을 항상 느끼곤 했다. 아이들의 얼굴은 반응이 없는 박제가 된 얼굴 같고 아파서 병원을 가서 의사가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도 그냥 '괜찮다'고 대답을 한다. 왜냐하면 남이 자기에게 가져주는 일체의 관심을 진실한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주일마다 의무적으로 듣는 목사의 설교가 그 애들에게 '껌 씹는 소리'로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름 고 3 남학생이 갑자기 죽었다고 연락을 받고 동부 시립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영안실에는 중학생 이상의 원생들과 보모들, 원생들의 학습을 돌보아 주는 자원 봉사자 대학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안실에서 화환은커녕 사과 한 쪽 없는 영결식을 하고 벽제 시립 묘지에 가서 하관식을 했다.
일생 동안 따뜻한 방에서 잠 한 번 자보지 못하고 어머니가 차려준 따뜻한 밥 한 끼 먹어 보지 못하고 고아원에서 일생을 보내다가 땅에 묻힌 것이다. 냉정을 유지해서 예식을 집전해야 할 나도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대학생들, 보모들이 모두 울었지만 어려서부터 함께 생활을 해왔던 원생들은 끝내 울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남을 위하여 울어 줄 눈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 "이 세상에서는 황태자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거지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만일에 천국이 있다면 불평등이 없는 세상이 아니겠느냐? 그런 날을 만들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악으로 깡으로 살자"는 설교를 했었다.
86년도 안양천 일대의 범람으로 내가 일하고 있던 광명시 하안동의 철거민촌의 피해 상황이 언론에 보도되자 기독교 구호단체에서 구호품을 8톤 트럭 한 대에 실어 보내왔다. 4,000 세대의 대규모 철거민촌에 교회가 25 곳이나 있었지만 구호단체는 교회에 맡기면 선교에 이용할 것을 알기 때문에 개인인 나를 믿고 구호품을 맡기고 갔다. 왜냐하면 사회가 기독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상기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구호품과 함께 나중에 평민당 소속 국회의원이 되어 평양을 혼자서 슬그머니 다녀와서 김대중을 비롯해서 야당을 곤란에 빠트렸던 가톨릭 농민회 회장 서경원,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 여사와도 인연이 있었다고 알려진 계훈제 선생 등이 함께 방문해 주었다. 그들의 방문이 수재민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일은 전혀 없었지만 고통 받은 사람들과 함께 하려고 하는 그들의 마음만은 높이 살만 했다.
여러 기독교 단체에서 급히 모은 물건이라서 여러 가지가 섞여 있기 때문에 품목별, 상태 별로 분류하고. 좋은 물건들은 바자회를 열어서 투쟁기금으로 쓰기 위한 작업을 하려면 노천에서 할 수가 없어서 비를 피할 수 있는 안전한 큰 창고가 있어야 했는데 마침 근처에 최근에 새로 지은 청소년 회관의 강당이 있었다. 보통 때 같으면 내가 접근할 수 없는 곳이지만 비상상황이니 만큼 강당실을 사용하도록 허락이 떨어졌다. 청소년 회관은 정부 산하단체인 청소년 연맹에서 운영하는 최신 연수시설이었다. 동네 청년들이 모여서 일주일 동안 열심히 일을 해서 바자회를 열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돈을 가지고 튀어 버렸다. 가롯 유다는 어디에나 있는 법인데 방심을 한 탓이다.
그 때 나는 날마다 회관을 드나들면서 이 회관에 취직을 해서 일을 하면서 동네 일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빈민촌의 일이라는 것이 매일 일정한 시간에 출근을 해야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당시 그럴만한 빽이 있어서 회관의 말단 직원으로 취직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박희도 대장이 육군 참모총창을 하고 있었는데 처갓집으로 어찌어찌 되는 처지여서 군대생활 때 그 사람 덕을 많이 보았다. 내가 월남전에 참전 했을 때에도 그는 월남에서 대대장으로 근무를 해서 월남전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까닭에 자중하고 조심해서 안전하게 돌아오라고 직접 내게 편지를 보내주기도 했다. 나중에는 그것도 안심이 안 되어서 전투부대에서 빼내서 목숨을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사단 본부로 옮겨주기도 했고 귀국 후 군대에서 사고를 쳐서 남한산성 육군 교도소로 넘어 갈 뻔 한 일도 사단 영창살이로 끝내기도 했었다.
하여간에 나에 대하여 신경을 많이 써 준 고마운 처지라서 부탁을 하면 예비역 대장이 총재로 있는 청소년 연맹 산하단체인 청소년회관의 말단 직원 자리쯤이야 취직이 되지 않겠나 싶었다.
그러나 당시는 한참 군부독재를 상대로 민주화 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되는 시기였다. 비록 정권과는 상관이 없는 청소년 연맹일지라도 인맥을 따라 취직을 하는 것은 떳떳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몇 일을 집 앞의 청소년 회관을 바라보면서 고민 했다. 그 때 생각 난 성경구절이 ‘명하여 돌들을 떡으로 되게 하라’구절이었다.
광야에서 굶주린 예수에게 돌을 떡이 되게 하라는 것처럼 이기기 힘든 유혹은 없었을 것이다.
주일날 모이는 생활교회 식구들은 포장마차 CEO, 대학생, , 헌책방 CEO, 노동자, 3수생, 대학 강사. 현직, 해직 교사들이었다. 비록 예배 시간에 헌금 순서는 없어도 가끔 해직교사 처지에 목사의 생활을 위해서 십일조를 내놓는 눈물겨운 믿음을 보인 이들도 있었고 형편 되는대로 내 생활을 열심히 챙겨주는 고마운 노총각도 있었다. 생활 교회로 모인 이들은 어느 정도 역사의식이나 사회의식의 수준이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 중에는 몇 년을 같이 지내도 생각이 전혀 바뀌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는 장난감이 필요한 법인데 우리는 없었다.
성숙한 성인에게는 더 이상 장난감이 필요 없다. 그러나 어린 아이에게 장난감은 필수적인 것처럼 장난감 신앙이 필요한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주일 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 놀이를 하러 교회에 가는 것이다. 목사는 성경구절을 가지고 요렇게 저렇게 맞추어 교인들의 귀를 즐겁게 할 만한 장난감을 만들고 성가대와 각종 소도구들을 이용해서 종교적인 분위기를 돋운다. 그렇게 만들어진 종교놀이터는 동네 놀이터에서 디즈니랜드 규모까지 다양하다.
우리가 모임을 가지던 카페 3층에 민자당 국회의원의 사무실이 있었다. 하루는 카페에 들렸더니 주인이 울상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경들이 민자당 사무실을 지키느라고 건물 입구에 버티고 앉아 있어서 장사가 안 된다고 했다. 착하고 순진한 카페 주인 부부는 전경들에게 커피도 타다 주고 담배도 사다 주고 별 짓을 다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카페 주인에게 민자당 국회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들 때문에 망하게 생겼으니 전경을 철수 시키든지 카페를 인수해라. 그렇게 안 하면 건물 앞에서 피켓을 들고 데모를 하고 그 모습을 사진을 찍어 각 신문사로 보내겠다.” 라고 했다. 카페 주인이 내 말대로 했더니 그 다음날 경찰을 철수 시켰다.
카페의 주인 쪽에서 애초부터 문제를 잘못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싸움의 본질은 카페주인과 국회의원이나 경찰서장과의 개인적인 싸움이 아니고 집권세력과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생존권의 대결이라는 구조적 싸움이었던 것이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구조와 제도 속에 사는 것이다. 예수가 요한복음에서 ‘세상’이라고 한 것은 구조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는 구조와의 갈등을 “세상이 나를 미워하나…….”라고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이 구조 안에서 상호간에 대화, 타협, 양보, 흥정, 공격, 방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 구조 속에서 싸움을 제대로 잘하기 위해서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은혜와 사랑 보다는 실제적인 이해와 관용,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