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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은 게으르거나 노력하지 않은 때문일까. 지난 25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이기우 신부) 주관으로 열 린 ‘한국 사회의 빈곤과 교회의 역할’ 세미나는 방치돼 있는 ‘빈곤 문제’를 모처럼 깊이 있게 성찰 하는 자리였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조각상 앞에서 ‘빈곤’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세미나는 인구 의 20%가 부의 80%를 지배하는 지구촌과, 경제력이 세계 10위권이지만 빈곤층은 더욱 늘어만 가는 한 국의 현실을 전제로 했다. 참석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인간적 양심을 몹시 괴롭히는 가난의 문제를 교회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를 논의했다. 주제 발표는 가톨릭정의평회위원회 위원인 한홍순 한국외대 교수가 맡았다. “가난은 힘 없음을, 가난을 벗어날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시장에 접근할 힘이 없음 을 말한다. 가난은 일종의 착취다.” 한 교수는 가난을 개인의 문제에서 사회의 문제로 원위치시켰 다. 그는 “빈곤이 더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자원이 부족하거나 경제성장이 미흡해서가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욕망과 권력 때문”이라며 우선 가난한 이들의 세계에 들어가 이들이 겪 고 있는 부당한 대우와 소외감과 무력감을 가능한 한 함께 나누고 연대하는 그리스도교적 소명을 실 천하는 길을 제시했다. 그는 빈자를 온정의 대상으로만 여겨선 안되며, 함께 하고 연대하는 것의 중 요성을 강조했다. 발표에 이은 토론에서 노길명 고려대 교수도 “빈곤 문제는 치료적 방법으로는 해 결될 수 없다”며 “빈곤을 유발하는 사회 체제를 변혁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 이강서 신부는 “사회에서 빈곤의 문제를 방치하고선 행복도, 평 화도 있을 수 없다”고 경고했다. 또 도시 빈민들과 직접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는 프라도수녀회 소 속의 정순옥 수녀는 “외국인노동자가 월급을 못받고 밤늦게 외국인노동자상담소에 찾아왔을 때 그곳 에서 지어준 밥을 함께 먹으며 안도하고 행복해가는 모습을 볼 때, 주는 것보다 많은 것을 받게 된 다”며 “가난한 이들이 우리를 재촉하고 놀라게 하고 감탄케하고 부활의 능력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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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요한 20,1-2.11-18) |
교황 베네딕토 16세(78)가 부드러워졌다. 과거 근엄했던 모습과는 딴판이다.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 이 4월 19일 265대 교황으로 선출됐을 때 가톨릭 내 보수파들은 환영했다. 반면 개혁주의자들은 실망 했다. 그러나 2개월여 만에 상황은 달라졌다. 지지자나 반대자나 모두 “교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 씬 복잡하고, 섬세하며, 인간적으로 따뜻한 분”으로 여기고 있다고 뉴욕 타임스는 최근 전했다. 과거 그는 교리를 강조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인공 수정을 엄격히 제한한 이탈리아 법을 지 키기 위해 정부 정책에 개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딱딱했던 그의 강론은 최근 들어 눈에 띄게 부드러 워졌다. 죄와 징벌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많이 강조한다. 흡입력과 카리스마를 겸비했던 고 요한 바오로 2세에는 그가 못 미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네딕토 16세는 나름대로의 ‘낮은 모 습’으로 신자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예수회의 케이스 페클러 목사는 최근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목격한 교황의 모습 에 즐거운 충격을 느낀다. 그는 깊은 기도와 참된 영성을 지닌 지도자다. 매우 지적이고 탁월한 신학 자이기도 하다”라고 밝혔다. |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19-27) |
이는 최근 들어 실시된 각종 여론 조사 결과들에서 과반수 이상이 배아 복제 연구에 찬성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가톨릭 네티즌들은 배아 복제 연구에 대해서 대다수가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 다. 이처럼 배아 복제 반대 의견이 다수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은 최근 주교회의의 반대 성명 이나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의 발언 그리고 마산교구장 안명옥 주교의 사목서한 등에 따라 배아 복제 반대에 대한 교회의 입장이 상당히 신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킨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조사에서 특히 가톨릭 네티즌들의 72%는 교회가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하는 것은 『옳다』고 생각 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94%의 절대 다수가 교회의 배아줄기세포 반대 이유를 어느 정도라도 알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 같은 내용은 가톨릭신문과 서울대교구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가 공동으로 실시하는 정기 네티즌 설문조사 ‘가톨릭 Poll-Catizen에게 묻는다’의 첫 조사 ‘배아줄기세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에서 드러났다. 이번 조사는 6월 30일부터 7월 14일까지 보름 동안 가톨릭 신자 네티 즌들을 대상으로 실시했으며, 총 393명의 ‘가티즌’이 참여했다. 조사는 세 가지 항목을 동시에 실 시했는데,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에서는 반대한다는 의견 이 261명(66%)이었고, 찬성한다는 응답이 100명(25%)으로 나타났다. 잘 모른다는 응답은 32명(8%)이 었다. 두 번째 질문인 ‘가톨릭교회가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하는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에 대해서는 284명(72%)이 ‘옳다’고 응답했고, 71명(18%)이 ‘옳지 않다’고 대답했다. ‘잘 모른 다’는 응답은 38명(10%)으로 나타났다. 세 번째 질문 ‘교회가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하는 사실 과 이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안다’가 231명(59%), ‘매우 잘 안다’ 가 136명(35%)로 나타났다. 반면, ‘별로 알지 못한다’는 23명(6%)이고, ‘전혀 모른다’는 응답은 단 3명 뿐이었다. |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마태 16,24-28)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앙이 아닌 순수 논리와 수학을 근거로 할 때도 97%가 확실하다고 세계적 인 종교 철학자가 18일 주장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종교 철학자 리처드 스윈번교수는 이날 호 주 멜버른에 있는 호주 가톨릭 대학에서 가진 공개 강연에서 “부활의 문제는 신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는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한 뒤 수학 공식을 통해 예수 이야기를 조명해봤을 때 97%가 정확하다 고 말했다. 호주 언론들에 따르면 그는 “우선 신의 존재를 전제하고 그 다음은 신이 인간의 모습으 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면 신이 예수가 살았던 것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해야한다”고 말했다. 그는 신약 학자들은 예수 부활에 대한 증 거가 4대 복음서에 나온 증인들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고 지적한 뒤 “이는 증거의 5%밖에 안 된 다”며 그러나 수학을 통해서 보면 확률은 97%에 달한다고 말했다. 그가 내린 이 같은 결론은 나름대로 복잡한 계산절차를 거쳐 나온 것이지만 간단히 얘기하면 신이 존재할 확률은 50대 50이라는 단순한 명제에서부터 시작된다.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 날 확률도 50대 50이라는 명제가 나온다는 게 스윈번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그러나 복음서들이 예수 의 생애와 부활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을 가능성은 10분의 1이며 부활이 사실이 아닌데도 이러한 여 러 가지 증거들이 남아 있을 가능성은 1천분의 1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는 “신의 존재에 대한 증 거는 부활에 대한 논거가 되고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증거는 부활을 부정하는 논거가 된다”며 신은 인간들의 죄 값을 치르고, 인간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인간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인간의 모습 으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호주 뉴사우스 웨일스 대학의 콜린 서덜랜드 수학과 교수는 부활은 수학으로 입증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며 “일반적으로 수학은 하나 가 진이면 다른 무엇도 진이라는 논리가 가능하지만 가설이 분명해야한다”고 지적했다. |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마태 22,34-40) |
수도회 수장인 노트켈 볼프(Notker Wolf) 수석 아빠스를 비롯한 교회 관계자들은 8월 5일 함경북도 라선시 연주동 현지에서 북한 당국 관계자와 시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라선국제가톨릭병원 개원식을 갖고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북한 땅에 가톨릭교회 이름으로 일반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대단 위 시설이 세워지기는 분단 후 처음이다. 성 베네딕도수도회 독일 오딜리아연합회를 비롯해 한국교회 등이 함께 하고 있는 국제가톨릭의료봉 사협회의 지원으로 건설된 가톨릭병원은 앞으로 종합적인 의료시스템을 구축해나가며 북한 주민들의 건강 증진에 기여하게 된다. 노트켈 볼프 수석 아빠스는 『가톨릭병원은 평화와 협력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고 밝히고 『이 병원이 새로운 협력을 위한 이정표가 되길』 기원했다. 라선국제가톨릭병원은 대지 5000여평 지상 3층 연건평 1530여평에 100병상을 갖추고 있으며, 진단 과 실험 설비를 비롯해 외과 안과 이비인후과 산부인과 치과 등에 필요한 진료 장비와 물리치료와 소 독, 보조 설비 등을 갖춘 기초적 종합병원 규모로 의사 간호사 등 80여명의 종사자들이 다양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게 된다. 특히 수도회측은 북한과의 계약을 통해 외국인 의사를 파견할 수 있다는 조 항을 명시함으로써 향후 한국인 의사가 북한에서 진료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라선국제가톨릭병원 개원에 초석을 다진 대구대교구장 이문희 대주교는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 교회의 관심과 지원으로 북한에 병원이 건립돼 기쁘다』면서 『한국교회가 힘을 합쳐 남북간 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노력해나가는 것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인류 평화에도 크게 기여하는 중요 한 과업』이라고 말했다. |
"저기 신랑이 온다. 어서들 마중 나가라!"(마태 25,1-13) |
만 세대(54.6%)가 1119만채를 보유하고 있는데, 그중 89만 세대가 두 채 이상의 집을 소유하고 있으 며, 전체 세대의 5%에 불과한 이들이 소유한 주택은 전체의 21%(237만채)에 달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자기 집」에 대한 집착은 매우 강하다. 그것은 바로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하지 만 오늘날 땅과 집은 주거 수단이라는 고유의 의미를 잃고 재테크의 가장 유력한 수단으로 간주되 고, 부익부빈익빈의 현상을 심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사회문제이다. 정부는 부동산 투기의 문제가 지 닌 심각성을 의식하고 수십 차례에 걸쳐 그에 대한 대책을 수립, 추진했다. 그 실효성에 대한 문제 제기는 둘째 치고 이는 결국 우리 사회에서 부동산 투기가 반드시 척결돼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반증 한다. 신앙의 차원에서도 땅과 집을 매개로 한 투기 행위는 비윤리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서울대교 구 사회사목담당 교구장 대리 김운회 주교는 지난 2003년 12월 28일자 특별담화문에서 『토지나 주택 의 보유와 거래를 재산 증식의 기회로 삼는 일은 집 없는 가난한 이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대죄 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투기 목적으로 집을 과다 보유함으로써 가난한 이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하는 이들이 신앙인들이 라면 이들은 그 자체로 대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개신교에서도 이러한 문제의 심 각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 개신교계 인사 91명이 지난 8월 29일 「토지 정의를 위한 기독인 선언」 을 발표하고 『교회와 기독인의 부동산 투기로 큰 고통을 받아온 가난한 이웃들에게 진심으로 용서 를 구한다』며 『교회와 기독인들은 부동산 투기를 중단하고 토지 불로소득을 자발적으로 지역사회 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화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역시 사목헌장 제69항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과 가족을 위하 여 넉넉한 재화를 소유할 권리를 가진다』고 말했다. 하지만 하느님의 선물로서 재화의 획득과 사용 은 그에 합당한 정당한 노동을 통해서 이뤄져야 한다. 더욱이 부동산 투기처럼 결국은 가난한 사람들 을 더욱 고통에 빠지게 하는 행위는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다. 부자 청년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당신을 따르도록 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라면, 정당하지 못 한 부동산 투기에 열을 내는 것은 결코 신앙인의 자세와 모습이 아니다. |
"그들도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을 할 것이다."(루가 5,33-39) |
을 되새기고 그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서 매년 9월을 순교자 성월로 지내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신앙 의 후손들인 우리는 이 아름다운 시기를 맞으면서 깊은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우리는 신 앙 선조들의 굳건한 순교의 정신을 얼마나 우리의 신앙과 일상 생활에서 묵상하고 실천하고 있는가 를 자문할 때, 자신 있게 나서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와 신자들은 103위 순교 성인이라는 신앙의 보물을 지니고 있다. 또한 새로 124명의 신앙 선조들의 시복시성을 위해 애쓰고 있다. 하지만 과연 이 엄청난 신앙의 보화가 주는 메시지를 우리 가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순교자들을 현양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지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우리는 103위의 순교 성인들에 대해서 얼마나 배우고 익히려 노력했었는가. 한때 한국 교회 안에서는 이들 순교 성인들을 현양하려는 노력이 공동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붐을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시성식 때의 그 벅찬 감격이 사그러지면서 우리는 이제 순교 성인들의 삶 과 정신에 대해서 점점 잊어가고 있다. 또한 새로 124명의 선조들에 대한 시복시성이 추진되어, 시복 재판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지만 정작 우리 신자들은 이분들의 삶과 정신에 대해서 거의 아는 바가 없고 현양에 힘쓰는 이들도 적다. 시복시성은 단지 성인을 재산처럼 보유하는 것이 아니며, 시복시 성 자체만으로 의미가 완성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위대한 믿음의 삶을 살아간 그분들의 삶에 대해 배우고, 그 정신을 내 일상에서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할 때에만 시복시성의 의미 는 완전히 우리 곁에 머물 것이다. 한국 교회는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졌다. 한국고유의 영성과 신심은 순교 신심에 다름 아니다. 한 국 교회의 신자들에게 순교 신심이 결여된다면, 그것은 자신의 고유하고 독특하며, 가장 고귀한 신앙 의 자산을 잃는 것이다. 우선 순교자들에 대해서 배우기 위해서 노력하고, 배운 것을 생활에서 실천 하기 위해서 투신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9월은 그렇게 하기에 가장 좋은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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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이 어떻게 소경의 길잡이가 될 수 있겠느냐?"(루가 6,39-42) |
설과 함께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인 한가위가 됐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하는 우리 선 조들의 말씀은 한해의 추수로 풍성한 수확과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넉넉하게 지니는 우리 민족의 지혜와 마음가짐을 일러준다. 한가위, 곧 추석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감사와 사랑 나눔이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서 한 해의 수확 을 거둘 수 있음은 단지 자기의 노력에 따른 것일 뿐만 아니라,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결실을 거둘 수 있도록 햇빛과 비를 내려준 하늘에 감사하는 마음이 그 하나이다. 그리고 그렇게 땀 흘려 얻은 풍성한 수확을 이웃과 함께 기뻐하며,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수확한 결실을 나누는 것이 또 다른 의미일 것이다. 결실의 계절이니만큼 이웃과 나누는 정, 또한 풍성했다. 그래서 한가위는 개 인적인 노력, 그리고 개인적인 수확으로 자기 잇속을 차리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감사하고, 이웃에 고마워하며, 그 수확을 공동체가 함께 즐기고 누리는 기쁨과 감사의 때이다. 그것 은 공동체의 명절이요 축제인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모두가 함께 사랑과 감사가 넘치는 한 가위가 될 수 있도록 이웃을 돌아보는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없는 이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에게 명절은 오히려 더 큰 소외감과 좌절감을 주는 때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잃고 복지시설에서 명절 을 지내는 아이들, 살기가 힘들고 사랑을 잃어버려 양로원에서 노년의 외로움을 달래는 어르신들, 다 니던 회사가 부도가 나서 명절 지내기가 녹록하지 않은 실업자 가장들에게 명절은 삶의 무게를 더해 줄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눈을 돌리고 우리가 받은 것에 감사하고, 그것을 이웃과 나누기 위해 마음을 쓴다면, 우리 곁에 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는 큰 힘이 될 것이다. 우리가 얻은 것은 우리 노력만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은총과 기쁨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며, 우리는 이에 감사하고, 받은 것을 이웃과 나누어야 한다. 한 해의 수확을 감사하는 마 음은 그 수확을 이웃과 나누려는 마음을 잃었을 때 참된 감사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더도 말고 덜 도 말고 한 번쯤이라도 이웃을 돌아보는 마음을 갖는 것이 한가위를 맞는 우리 민족에게 하는 하느님 의 당부이다. |
"예수와 열두 제자들을 따라다니던 여자들이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의 일행을 돕고 있었다." (루가 8,1-3) |
오늘날 우리를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가난일까? 홍수.화재.교통사고와 같은 재난일까? 아니면 에이즈와 같은 질병일까? 혹은 뉴욕의 쌍둥이 빌딩을 한순간에 부숴버릴 수 있었던 테러리즘 일까? 이러한 모든 것은 우리에게 뜻하지 않게 고통을 가져오는 것들이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도 희 망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그러한 일들을 또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를 고무한다. 수녀회의 일로 말레이시아 사바에 머무르는 동안 커다란 홍수를 만났다. 특히 텔리폭이라는 가난한 동네 전체가 물에 거의 잠기게 되었고 그 피해는 너무도 큰 것이었다. 그곳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 는 수녀원도 일부 물에 잠겼지만 그곳이 워낙 긴급해 대부분의 수녀들이 그곳을 방문했다. 무서운 비 바람 속에 나무들은 뿌리째 뽑혀 있었고 엉성하게 판자로 지은 집들은 있던 자리에서 떠내려가 물에 잠기고, 집기들이 흙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수마(水魔)가 뒤흔들고 간 고통의 현장에서 도움을 주려 고 갔던 수녀들은 오히려 희망을 선물로 받고 돌아왔다. 우리는 도움을 준다는 입장으로 갔으나 더 큰 것을 얻고 온 것이다. 어느 집에선 찾아간 우리에게 자신의 집은 떠내려간 물건도 많지 않고 피해 도 작으니 더 큰 피해를 본 집을 도와주라고 오히려 갖고 있던 음식을 나눠주었다. 또 폭우 속에서 남편을 잃고 천식에다 만삭의 몸을 하고 있었던 인도네시아 노동자의 아내는 남편이 자신과 아이들 을 살리기 위해 달려오다 죽었다며 눈물을 흘리며 남편의 사랑과 이웃의 도움에 감사했다. 폐허가 된 동네로 젊은이들이 삽과 청소 도구를 들고 먼 곳에서 달려와 바지를 걷어붙이고 들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수녀원의 싱가포르 후원자들은 돈을 모아 보내왔다.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는 친구는 물에 잠겨 어려움에 처한 청소년기숙사를 도와 달라는 글을 신문에 실어주었다. 그곳의 방문에 동참 했던 젊은 사제 지망자는 처음으로 봉사의 삶을 선택한 것에 대해 깊은 의미를 발견했다고 했다. 사람들이 서로 돕는 것은 힘든 고통을 희망으로 바꾸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을 나누면서 문득 한 초등학교 동창을 떠올려 보았다. 산을 좋아했던 동창 친구는 산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암벽 등반을 하는 씩씩한 젊은이가 멋져 보여 좋아하게 되었고 결혼하여 아이도 둘 있다. 그런데 시간만 나면 산으로 향하던 남편이 어느 날 암벽등반을 하던 중 떨어져 의식을 잃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 다. 그야말로 앞이 캄캄한 순간을 맞이한 것이었다. 꼼짝없이 누운 남편, 밀려오는 각종 공과금과 병 원비, 그리고 중학교에 다니는 두 딸을 돌봐야 하는 책임을 떠맡은 그녀는 어느 날 죽을 결심을 하 고 한강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 새벽, 죽으려고 한강으로 가던 버스 안에서 운전하던 여자 기사를 보고 친구가 무심코 물었다고 한다. 그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냐고. 그러자 버스기사 는 죽을 맘만 먹으면 뭘 못 하겠느냐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날로 그녀는 버스회사를 찾아갔고 끈질기 게 대형면허시험에 도전해 마침내 버스기사가 되었다.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남편은 그 뒤 의식을 회 복했고 지금은 허리에 쇠심을 박고 다시 산행을 즐긴다고 한다. 그녀는 그런 남편이 그저 고맙다고 한다. 우리는 삶에서 고통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재난이나 사고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서로 도우며 앞으로 나아갔던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또 다른 체험을 하게 된다. 절망 속 에서도 한 줄기 희망의 빛을 향해 걷는 사람들로부터 고통은 언젠가 부활의 기쁨이 될 것이라는 점 을 배우게 된다. |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루가 9,18-22) |
미국의 청소년 상담가인 마가렛 벳츠는 “오늘날 미국 사람들의 행동을 움직이는 것은 이익과 관 심”이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옳고 그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두려워한 다는 것이다. 둘이나 셋 모이기만 하면 그저 다른 사람들의 탓만 끄집어내려는 우리들의 친숙한 대 화 문화(?)와는 사뭇 달라 생소하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물질주의 사회에서의 윤리 적 가치는 이제 더 이상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말이다. 윤리적으로 악한 일이라 하더 라도 그것이 물질적인 이익을 안겨준다면 어떤 비난이라도 감수하고 기꺼이 행동한다는, 오늘날 지극 히 일반화된(?) 행동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마가렛 벳츠는 ‘이익과 관심’을 물질적, 세 속적 의미에서 사용하였지만 그 의미를 영신적 혹은 초자연적인 것으로 바꾸어 생각한다면 우리 그리 스도인들의 행동도 ‘이익과 관심’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적 가치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그 리스도 신자들의 이익과 관심은 당연히 하느님과의 일치와 사랑에 있기 때문이다. 2000년 교회의 역사를 통해 교회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가는 시기별로 드러난 교회의 특징적 모습 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초기 300여 년 동안은 박해의 시기였고, 이 당시 교회의 관심은 당 연히 박해 중에도 굳세게 신앙을 지키는 것이었다. 중세는 신학 연구가 가장 왕성하게 전개된 시기였 고 또한 누구나 들어도 그 이름을 기억하는 토마스 데 아퀴노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이 가장 많이 배 출된 시기였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역시 교회의 긴박한 관심이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이교도들, 특히 이슬람교와의 수세기에 걸친 오랜 마찰에서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고, 그 필요는 결과적으로 신학의 찬란한 발전이라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19세기 유럽사회를 격변의 소용돌 이로 몰고 간 산업화의 물결은 가톨릭교회에 커다란 위기로 다가왔다. 팽배된 물질주의는 그리스도 적 가치의 무조건적 거부로 나타났고, 당시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영향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생활 의 타락을 부추겼으며, 결국 교회는 수많은 노동자 대중들이 교회를 등지는 위기에 봉착한다. 이러 한 때에 교회는 반 그리스도교 사상들에 반대하는 체계적인 가르침을 제시해야 할 시대적 요청을 받 게 되었고, 당시 레오 13세 교황은 교회는 결코 노동자 대중을 버리지 않으며, 노동자들이 인간으로 서의 품위를 누리면서 생활해야 한다는 교회의 관심을 함축적으로 담은 회칙 ‘새로운 사태’를 반포 한다. 당시 교황의 결단은 교회를 떠나고 있는 수많은 대중들을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한 교회의 결 정적인 관심이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 교회의 관심이란 ‘시대의 징표’를 알아듣는 교회의 참된 지 혜로부터 나타난다. 성령의 능력으로 시대의 요구를 정확히 식별하고, 그런 다음 행동할 수 있는 교 회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관심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생명윤리·평화 ·신자배가운동 등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우리 사회의 가 난한 사람들을 위한 관심, 수많은 병자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또 극복하는 일, 세계 도처에서 끊 이지 않는 전쟁과 테러의 소멸, 그리고 평화… 이 모든 것이 우리 모두가 관심사들이며 또 하루 빨 리 이루어지기를 염원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그 어떤 것들보 다도 우선하여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하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 확립’에 대한 관심이다. 얼마 전 어느 연구소의 설문 조사에서 한 충격적인 내용이 발표되었는데, 우리나라의 천주교 신자들 중 내세가 있다고 믿는 신자들은 불과 30%도 안된다는 것이었다. 대부분 의 신자들이 우리 교회가 가르치는 핵심 교리인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 없이 신자 생활을 하 고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영생에 대한 믿음’없이 자기희생 과 사랑, 복음화, 생명존중, 평화, 하느님 나라의 구현 등은 한낱 구호일 뿐이다. 시대의 징표에 늘 깨어있던 교회가 순교의 영성, 위대한 신학사상, 노동자들의 품위있는 삶에 관심을 가졌고, 그 결과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면 오늘날 우리 교회도 ‘신자들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시대 적 징표에 깨어 있음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교회와 사회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 을 것이다. |
"나를 배척하는 사람은 곧 나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사람이다."(루가 10,13-16) |
인간은 처음부터 삶 속에서 자신의 색깔로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은 기본적 욕구를 가지고 있 다. 이을 잘 살리면 개성 있고 아름다운 모습이 된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그림은 인간이 원하는 색깔 과 그림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롭게도 하느님과 함께 그려가는 또 다른 그림이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에서나 사도직 현장에서 하느님 나라와는 관계 없이 ‘하고 싶은 일’로 채워나가며 -마치 그 성취가 ‘하느님의 일인 양’- 보람으로 알고 만족해 한다. 그리고 이것을 너무도 당연히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물질적인 것에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하 는 일이 그것이고, 지나치게 많은 것에 호기심을 갖고, 많은 것에 시선을 돌리고 호화로움을 찾는 것 이 바로 그런 것일 터이다. 이렇듯 ‘하고 싶은 일’에 사로잡혀 한 공동체를 이끌어가다 보면 많은 경우 슬프게도 ‘우매한 나’때문에 우는 사람,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 교회를 등지는 사람이 생기게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이런 공동체에서는 사람을 살리기 보다는 서로를 각박하게 치닫게 한다. 결국 이런 내 방식대로의 공동체는 한갓 이 세상의 먹거리, 살거리, 입을거리를 놓고 서로가 서로를 상처 내며 피흘리게 하고 허우적거리며 사는 모양새만을 보여줄 뿐이다. 진정한 의미 로 하느님 나라를 위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싫더라도 ‘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하고 그것은 바로 ‘복음’을 나누며 사는 일일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만 하고 있 다’는 고백은 2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우리 모두의 고백이기도 하다. 온갖 풍요로움이 넘쳐나 는 이 세상에서 탐욕과 절제, 뉘우침과 되돌아봄을 반복하면서도 하느님께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해본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내 모습을 어떻게 함께 그려주실지를 기도를 통 하여 고대해 본다. |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루가 11,15-26) |
최근 보도에 따르면 우리나라 지난해 자살자는 1만2000여명으로 하루 평균 3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 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라고 한다. 지 난 10년간 연평균 자살증가율이 1위를 기록했다고 하니 자살률 세계 1위 자리를 차지하는데 별 무리 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얼마전 저 출산율이 세계 1위를 차지했고 이미 세계에서 낙태를 가장 많 이 하는 나라로 기록된 바 있다. 정말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계속 존립할 수 있을까 의 문마저 든다. 충격적인 이 뉴스는 그냥 그렇게 지나가고 말았다. 모든 언론이 놀라움 속에 앞다퉈 보도했지만 이 소식 역시 ‘하루살이’에 머물렀다. 이 엄청난 뉴스를 받아들이는 충격의 강도나 지 속성은 너무 미약한 것 같다. 자살률의 급속한 증가는 국가 경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현실을 반 영한다. 높은 경제성장률이 인간 개개인의 참된 행복을 보장하지 못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는 경제 성장이나 사회 발전이 인간 존재 의미에 기초하지 못하고 있는, 잘못된 성장 방식에 기인하는 것이기 도 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 자살률 1위를 포함, ‘부끄러운 세계 1등’ 에 심각하게 반응해야 한다. 국가와 정부는 물론 사회 여러 기구와 단체들도 ‘모든 국민이 제대로 잘 사는 나라 만들기’에 나서야 한다. 그 중에서도 우리 교회 몫은 가장 크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우리 신자들이 삶으로 증거해야 한다. |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 두셨다."(루가 12,1-7) |
높푸른 가을 하늘을 보노라면 세상 온갖 시름이 씻기는 듯 상쾌합니다. 이 가을이 우리에게 주는 교 훈은 ‘놓음’과 ‘나눔’이 아닐까요? 이웃 고통을 함께 끌어안아 나눌 때에 우리 인생의 마지막도 가을처럼 가볍고 고울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도 생생한 나비… 카트리나의 피해로 이웃의 아픔이 여 전한데, 다시 들려온 파키스탄 카슈미르 지진 소식에는 망연할 여유조차 호사인 듯싶습니다. 인간에 게는 삶의 마지막 시간을 품위를 지니고 인간답게 죽을 권리가 있습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 이 한 생명의 출생 못지않게 중요한 삶의 과정인 까닭입니다. 이웃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들과 고통 을 나누고 구체적 돌봄으로 위로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교회는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 온갖 곤경을 겪고 있는 사람들 얼굴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에게 받은 교훈은 엘리사벳 을 돕기 위해 ‘길을 떠나고’ 십자가 아래에서 고통으로 함께 하신 성모님을 닮는 것이며, 강도당한 사람을 도우려고 ‘가던 걸음 멈추고 그 사람을 돌보느라 하룻밤을 보낸’ 사마리아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당한 재앙이 하느님 경고라고요?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이 고약해 하느님 진노 가 하느님 벌로 쏟아져내린 것이라고요? 세상 누구도 그런 엄청난 비밀을 말할 수 있는 지혜는 갖고 있지 못합니다. 오히려 세상이 이렇게나마 이어져가는 것은 이 세상에는 소돔과 고모라가 갖지 못했 던 열 사람의 의인이 섞여 살아가는 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상을 구하는 열 분은 하루 양식을 위 해 기쁘게 일하는 사람이며, 궂은 일의 고달픔에도 하루가 무사할 수 있었음을 감사하는 분들일 것 도 기억합니다. 우리 하느님은 숨겨진 작은 일을 눈여겨 보시며 약한 자의 눈물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시는 분이시니까요. 이 땅의 아픔이 어찌 날벼락같은 재해뿐이겠습니까? 오늘도 배고프고 헐벗 은 우리 이웃들이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그들 몫을 빼앗긴 채 힘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느님 의 친교만이 가장 품위있는 인간 삶이고 완성인 것을 알리기 위해 우리 모두가 세상 아픔을 돌보는 호스피스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삶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하는 호스피스 마음으로 이웃을 대할 때에 우리는 하느님께 아리따운 의인일 것을 믿습니다. 모든 임종자에게 하느님과 친교가 이뤄지시길 진심 으로 기도드립니다. “야훼께서 대답하셨다. 그 열사람을 보아서라도 멸하지 않겠다”(창세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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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 (루가 12,54-59 |
주역에 보면 무왕불복(無往不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나 간 것은 반듯이 다시 돌아온다는 뜻입 니다. 과거는 과거로 영원히 단절된 시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 재생산된다는 동양의 역사관을 반 영한 것이지만 한 개인의 삶 속에서도 과거는 현실의 삶을 옭아매고 현실의 나를 재단하는 경우가 많 습니다. 사제가 된 이후 좀 나아진(?) 모습을 인정받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신학생 때 의 수줍고 열등감에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이 아니라 조금은 생동감 있고 의젓한 모습으로 친구들이 보 아주기를 바랐지만 돌아오는 눈길은 여전히 과거의 잣대로만 바라다보는 눈들을 확인할 뿐이었습니 다. 그럴 때마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는 성서 말씀을 떠올려 보기도 했지만 별 위 안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 피정에서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 싶 은 유치함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고상함이 아니라 제 자신이 단 한번도 다른 사람을 인정해 본 적이 없다는 것 말입니다. 정작 인정받고 싶어하면서도 나는 그들을 과거의 잣대 속에 옭아매고 있었고 과 거 속에서 그들의 말과 행동을 바라다보고 있었습니다. 정작 과거를 떠나지 못한 것은 그들이 아니 라 ‘나’였음을…. 과거로부터 변화된 나를 인정받고 싶다면 과거와의 단절이 아니라 너를 바라다보 는 내 눈을 먼저 변화시켜야 합니다. 과거는 지나가는 법이 없기에 오늘의 나를 구속하겠지만 그것으 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지울 수 없는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과거 속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나만 인정받고 싶었던 속 좁음을 깨닫고 나의 변화에만 머물며 너의 변화를 인정하지 못했던 어리석 은 삶으로부터 회개하게 될 때, 비로소 내 부족했던 과거는 관계의 단절이 아닌 새로운 관계 회복의 출발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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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루가 6,12-19) |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는 흔히 그 자체로 명예롭게 여겨지고, 가난은 천시된다. 우리는 재물뿐만 아 니라, 권력과 학벌, 혈연과 지연, 외모에 이르는 온갖 차별적인 질서를 정당한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 간다. 제도화 이후 교회마저도 이러한 현세 질서에서 자유롭지 못한지 이미 오래다. 하지만 예수의 실천은 이러한 차별이 온당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세리 자캐오가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 고, 등쳐 먹은 일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고 말했을 때, 예수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습니 다.”(루가19,9)라고 말씀하신다. 재물이란 많이 가져서 사람들 사이에 차별을 만드는 수단이 아니 라, 베풀어서 차별을 없애는 수단으로 삼을 때 구원이 있다는 말씀이다. 현세 삶에서 가난은 차별대 우를 받는 조건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선택해야 하는 자별적 가난은 스스로 차별 당하는 처지를 선택 함으로써, 차별 당하는 사람을 섬기고자 하는 결단이다. 차별대우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렇게 차별 을 없애시는 하느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방식이 그러하였다. “여러분 가운데서 크게 되고 자 하는 사람은 여러분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마르10,43) 예수는 차별대우를 받던 죄인 들과 세리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을 차별대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였다. 우리는 차별 을 없애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차별대우를 받는 조건인 가난은 우리의 실천을 통하 여 하느님으로 채워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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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 주시고 또 생선도 주셨다." (요한 21,1-14) |
가 넘쳐나기를 기원한다. 오늘 우리는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인류의 죄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상 그 어떤 존재도 넘어설 수 없었던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고 일어선 바로 그 순간을 기념한다. 부활의 기념은 단지 그 유례없는 역사적 사건을 회상하고 상징적으로 기리는 것 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회에서 거행하는 기념의 행위는 그 위대한 구원의 업적을 그 때와 똑 같이 재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년 똑같은 부활절을 맞지만, 언제나 새롭게 구세사를 체험하 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성업을 매 미사 때마다 재현하고 체험한다. 미사 중 에 사제의 손으로 거행되는 성찬례를 통해서, 우리는 인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의 희생을 재현하 고 그 현장에 함께 하며, 그 살과 피를 받아 모심으로써 위대한 구원의 역사에 동참한다. 이처럼 그 리스도의 희생과 부활은 그분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 한가운데 놓여져 있고 그 때문에 그 리스도인들의 삶은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 그리고 그 희망을 간직함으로써 현세를 하느님 나라로 만 들어가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에 불타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얼마나 그분 의 부활을 신뢰하고, 그 구원의 손길에 민감한지를 성찰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부활이 전해주는 영원 한 생명에 대한 희망과 신뢰를 얼마나 간직하고 있는지 우리는 깊이 되돌아봐야 한다. 세상을 향한 복음의 선포가 힘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이 부활의 희망을 얼마나 뜨겁게 열망하는지 를 반성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의 일상 삶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향기로 가득 차 있는지 를 살펴보고, 우리의 미지근한 신앙을 돌아봐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온 세상을 향한 복음 의 선포이다. 부활의 기쁨은 단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온 인류를 향해 선포돼야 한 다. 하지만 그 부활이 참으로 생명력 있게 선포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의 뜨거운 신앙의 모범이 필요하다. 부활하신 예수의 영광이 다시 한 번 온 인류에 희망의 메시지로 전해지기를 빌면서, 부활 대축일을 함께 경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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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달라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요한 6,1-15) |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합당한 이유와 답변을 지니고 계시 지만 누구도 그 이유를 물어서는 안된다고. 어떤 과부의 외아들이 10세에 사고로 죽었습니다. 너무 나 애통한 나머지 매일같이 그 이유를 물었다고 합니다. 천사가 하루는 이 부인을 데리고 지옥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이 아들이 수명을 다하고 죽었을 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이해 못할 수많은 일들에 의미없는 일이란 없다고 합니다. 다만 그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 를 발견하지 못할 뿐이지요. 신앙은 언제나 이 의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하느님 은 어떤 악에서도 선을 유도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희망은 우리에게 어둠을 저주만하 기보다는 한자루의 초에 불을 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해롭고 무엇이 이로운지는 하느 님만이 아십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시편 저자처럼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 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시편23,4) 하고 노래해야 할 것입니다. 일이 꼬이고 잘 안될 때 그 속에 하느님의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얼마나 자주 원망 의 화살이나 이유를 묻기에 급급합니까. ‘좋은 일은 서둘러 하고 나쁜 일은 뒤로 미루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일이 생각날 때 뒤로 미루고 나쁜 일은 서둘러서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에릭 프롬은 ‘사랑의 예술’에서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의 배려요, 관심이다 사랑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라고. 나는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사랑은 미루지 않는 것이다” 라고. 자꾸만 미루다 보면 그 사랑의 대상은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 스도의 보혈이라는 값비싼 선물을 받고 이제 우리는 어떻게 그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할까요? 예수님 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서둘러야 합니다. 시간은 언제까지나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 다. “살아 있을 때 사랑해야지 죽으면 못하잖아”하시던 어느 분의 절박한 음성이 귓전을 맴돌고 있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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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요한 6,52-59) |
지구의 오염이 날로 심각해져가고 있다. 지구의 오염은 단순히 악취 발생이나 미관을 해치는 정도 를 넘어 여러 재난의 형태로 그 정도가 점점 더 커져가는 양상을 보이며 인류에게 위기의 수준까지 다가오고 있다. 이러한 위기의 원인에는 산업문명 등의 여러 가지 요인을 들 수 있다. 그 요인들 중 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은 없는가? 하느님을 세상의 창조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 창조 주 하느님으로부터 피조물을 잘 돌볼 책임을 부여받은 그리스도인들,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성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기에 지구의 오염과 생태계의 파괴에 대한 책 임은 그 누구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생태계가 이 지경까지 온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근본 적인 신앙의 문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문제의 신앙이란 현실과 신앙을 분리하려는 이원론적 신앙 관이다. 현실 세계를 하늘에 있는 영원한 나라로 가는 중간지점 정도로만 여기는 신앙관에서는 세상 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구원, 모든 피조물의 구원을 바라신다는 사실을 놓치기 십 상이다. 또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로 대량폐기물을 발생시키는 것이 산업자본주의의 속성이기는 하지 만 그것은 물신주의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간 나약한 신앙의 문제이기도 하다. 물질의 획득으로 편리 함과 안락함을 추구하고 그것으로 행복을 맛보려는 신앙인은, 가난함이 진정으로 행복하다는 그리스 도의 진리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물질을 우상숭배하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도 지극히 물질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 대가로 물질적 축복을 바라고, 신앙생활의 방법에서도 편리한 방법으로 가려고 한다. 지구환경의 오염과 그로 인한 재난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하는 징표이다. 징표를 보고 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느 별나라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하려는 것인가? |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내가 세상에서 가려낸 사람들이다." (요한 15,18-21) |
마산교구가 최근 교구 차원에서 가정기도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다고 한다. 교구민들의 내적쇄 신 출발점을 가정에서 시작하겠다는 교구의 결연한 의지가 돋보인다. 해체되고 무너지는 가정의 위기 속에서 가족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며 가족애를 체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새삼 강조하지 않아 도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부끄럽지만 많은 신자들의 현 실태다. 핵가족화로 인한 통교와 친밀감의 부재, 이혼율의 증가, 이기주의와 쾌락주의로 인한 미혼가 구의 증가와 생명경시 풍조 만연 등은 이제 가정 붕괴라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 이러 한 가정 붕괴의 위기에는 우리 신앙공동체의 책임도 크다 할 수 있다. 마산교구장 안명옥 주교는 가 정기도 동참을 호소하며 교구민들에게 보낸 사목서한을 통해 『한국교회가 신앙공동체의 내적 성숙 은 뒤로한 채 양적 팽창에만 매달려온 느낌이 없지 않다』면서 『그 결과는 믿음이 삶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삶이 믿음으로 수렴되지 못하는 신앙과 삶의 괴리로 드러나게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사도적 권고 「가정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의 가정은 작은 교회』라고 밝히면서 『가정은 자녀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부름받은 첫번째 공동체이기 때문』이라고 말했 다. 가정사목은 우리 교회가 피해갈 수 없는 시대적 요청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가정사목의 출발점 은 바로 가정기도에서 시작돼야 할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간에 얼굴 한 번 보기 힘들고, 또 모처럼 가족들이 함께 모여도 TV 시청이나 컴퓨터 등으로 시간을 때우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이젠 벗 어나야 한다. 시작은 힘들겠지만 가족들이 시간을 정해 지속적으로 기도모임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 다. 안명옥 주교가 사목서한에서 지적한 것처럼 가정기도는 가족 서로의 상처를 낫게 해주고 삶을 되 돌아보며,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깨닫게 해 줄 것이다. 특히 기도는 모든 시련을 이겨낼 수 있 는 힘과 용기를 준다. 앞으로 이 운동이 널리 확산돼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 운 성가정을 일구어 나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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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0-23ㄱ) |
주의와 다원주의 풍조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칫 신앙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그리스도교의 참 의 미와 중요성을 망각하기 쉽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지켜나가 고, 그러면서도 열린 자세로 우리 사회와 문화를 복음화하고 복음 선포의 소명을 충실하게 실천해나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적인 신앙 자세가 요구된다. 삶의 실천은 교회의 가르침과 하느님 말씀 을 정확하게 배워 익힘으로써 더욱 풍성하게 이뤄진다. 교회가 무엇을 말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고서 는 복음적인 삶과 신앙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각자 처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교회의 가르침 을 배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과 공동체가 모두 교회 서적 읽기를 생활화해야 한다. 신앙생활의 한 부분으로서 전례, 기도생활, 자선과 봉사 등의 기본적인 교회 생활에 책읽기가 또 다른 신앙생활의 하나로 더해져야 한다. 교회 서적을 읽음으로써 교회의 가르침을 익히는 것은 신 앙생활에 있어서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수반돼야 하는 필수적인 것으 로 자리잡아야 한다. 책과 함께 하는 신앙생활이 곧 우리 한국교회 신자들의 신앙생활의 풍토가 돼 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최근 들어 한국교회 안에서는 책읽기의 열풍이 불어오고 있다. 이러한 바람을 더욱 불러일으켜 지적인 신앙생활의 큰 파도로 이끌어내는 것은 교회 지도자들과 출판사들의 몫이고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은 그 관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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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요한 21,15-19) |
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정보통신혁명은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와 생활의 편리성을 제공해 주는 문 명의 이기심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보통신혁명이 주도하는 오늘날의 디지털 전자사회가 마 냥 장미빛 유토피아인 것만은 아니다. 숙련된 노동자들이 인공지능과 첨단 로봇에 밀려 생산 현장에 서 사라지고 있으며, 인터넷 공간은 음란물과 각종 일탈적 행동으로 날로 혼탁해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삶은 이제 컴퓨터와 휴대전화 없이는 온전히 유지되기 힘들 정도로 기계 의존 적 삶으로 변해가고 있다. 오늘날 어떤 경우에 과학기술은 인간 삶의 도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을 지배하는 비인간화 사회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정보통신혁명은 더 새로운 차원의 세 계를 향해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계속해나갈 기세이다. 그것은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현재 의 정보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더욱 고도화된 유비쿼터스 시대를 의미한다. 우리말로 ‘편재한다’는 뜻 정도로 해석되는 유비쿼터스(Ubiquitus)란 말 그대로 우리의 주변에 존 재하는 모든 사물이 네트워크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지금 책상 위에 놓여있는 컴 퓨터는 박물관 진열장 안으로 사라지고, 생활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기기와 물품이 컴퓨터와 인터넷 의 기능을 수행하는 세계를 의미한다. 지금까지 인터넷 혁명이 현실 세계를 컴퓨터 네트워크 속으로 집어넣는 과정이었다면 유비쿼터스 혁명은 반대로 컴퓨터 네트워크를 현실세계의 구석구석에 집어넣 는 과정이라고 비유할 수 있겠다. 따라서 유비쿼터스 혁명은 현실 세계와 사이버 세계라는 기존의 이 분법적인 경계 자체를 허물어뜨리고 현실 세계의 네트워크화, 현실 세계의 사이버화를 구현한다. 장 자가 말했던, “인간인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걸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인간인 나로 변해있는 것일 까?”라는 호접몽의 세계가 마침내 실현되는 것이다. * 다음주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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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1-12) |
그렇다면 유니쿼터스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되는가? 이를테면 냉장고는 음식을 신선하게 보관하 는 전통적인 기능에 더하여 스스로 인터넷 쇼핑몰에 식품을 원격주문하는 인터넷 냉장고로 탈바꿈한 다. 가스 오븐은 요리 사이트에 접속하여 정보를 다운로드해서 스스로 음식을 조리한다. 화장실 변기 는 소변 성분을 분석하여 그 사람의 건강 상태를 의료 사이트로 보내주어 건강진단 기능을 하게 되 며, 욕실의 욕조도 그 사람의 신체 상태에 가장 적절한 성분과 온도를 함유한 물을 자동으로 받아주 게 된다. 또 전동 칫솔은 치아 상태를 점검하여 자신의 주치의에게 정보를 전송해 주는 단말기 역할 을 한다. 또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요금을 지불하느라 자동차가 길게 늘어설 필요도 없어진다. 센서 가 자동차 번호판을 판독하여 휴대전화 요금으로 통행료를 부과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다양한 생활용 품 속에 컴퓨터칩을 집어넣어 인터넷으로 연결시키려는 실험들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유니쿼터스 는 가사노동의 경감이나 건강관리, 교통체증 해소 등에 획기적인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 나 이러한 혜택을 얻는 대가로 우리는 다른 중요한 것을 잃게 될 것이다. * 다음주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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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리라. 하느님을 믿어라."(마르 11,11-25) |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프라이버시가 사라지고 철저한 전자감시가 이루어지는 빅브라더의 세계이다. 유비쿼터스 시스템을 구현하는 필수 요건 가운데 하나가 우리 생활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 IP주소를 부여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지금까지 사용해 오던 32비트의 IPv4 주소체계를 128 비트의 IPv6 주소체계로 전환하는 방식을 통해 비로소 가능해졌다. 43억 개의 주소밖에 만들지 못하 던 IPv4 체계는 IPv6 체계를 통해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주소를 생성할 수 있게 된다. 조금 과장해 서 말하자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래알 하나하나에까지도 IP주소를 할당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주 소 자원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세상의 모든 사물에 고유한 IP주소가 부여된다면 그 때문 에 빚어질 프라이버시 문제는 실로 가공할 수준으로 치달을 것이다. 냉장고와 가스오븐, 화장실의 변기와 욕조, 그리고 전동 칫솔과 자동차 번호판에 이르기까지 모든 개체마다 RFID가 장착되고 고유한 IP주소가 부여된다면 모든 행적의 감시와 기록이 용이해지며, 심지 어 특정 집안의 재산목록까지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인터넷 냉장고와 인터넷 가스오븐은 오늘 저 녁 당신의 식탁 위에 어떤 음식이 올라왔는지, 그리고 당신의 가족들이 무엇을 얼마나 많이 먹는지 속속들이 기록하고 그 정보를 쇼핑 사이트에 제공해 줄 것이다. 인터넷 변기와 인터넷 욕조 그리고 인터넷 전동 칫솔은 당신도 몰랐던 자신의 건강정보를 의료 사이트에 알려주게 될 것이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의 판독기는 통행료만 부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언제 어디를 다녀왔는지도 기록해 놓을 것이 다. 이처럼 모든 네트워크가 편재하는 유비쿼터스의 시대는 뒤집어 보면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에 대 한 전자감시 시스템이 편재하는 프라이버시의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 다음주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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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마태 11,25-30) |
유비쿼터스 시대의 또 다른 그늘은 인간의 배제와 실업의 위험이 편재하는 사회이다. 일례로 슈퍼마 켓의 계산대 풍경을 생각해 보자. 여기서 우리는 과거에 바코드의 도입이 가져온 유통혁명의 전망과 그 결과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코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유통혁명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전 망되었다. 하나는 생산자 영역에서 상품의 판매량과 재고량에 대한 정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제공 해 준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소비자 영역에서 빠르고 편리한 계산 처리로 쇼핑환경이 향 상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산자 영역에서 혁명은 이루어졌지만 소비자 영역에서의 혁명은 실현되지 않았다. 바코드의 도입으로 계산대에서 처리 속도가 빨라지자 슈퍼마켓 운영자는 인건비 절감 차원에 서 계산원의 숫자를 줄여버렸기 때문이다. 계산원의 손을 일일이 거쳐야 하는 바코드 대신 RFID가 상 품에 장착된다면 계산 시간은 바코드 시절보다 훨씬 획기적으로 단축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줄어든 계산 시간만큼 슈퍼마켓 종업원의 숫자 역시 이에 비례하여 획기적으로 줄어들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이 배제된 채 사물과 사물의 네트워킹만으로 모든 업무가 처리되는 유 비쿼터스 시대는 곧 영화 속에서 암울한 디스토피아적 미래로 그려진 매트릭스의 출현을 예고한다. 그 밖에도 수없이 문제점들이 많다. 정보격차의 심화와 보편적 정보접근권의 침해, 인터넷 중독을 능가할 유미쿼터스 중독, 각종 신종 범죄 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공포와 위험이 우리앞에 도사리고 있다. 빛이 밝으면 그늘도 짙은 법이다. 유비쿼터스가 제공하는 편리함과 풍요로움을 얻는 대가로 우 리는 또 다른 소중한 것들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잊지 말아야 한다. 장밋빛 약속 이면에 드리 워진 짙은 그림자를 해소할 제도적 정책적 장치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기술문명을 향해 맹목적으 로 달려가는 것은 무작정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의 처량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유비쿼터스 시대는 우리에게 어느 정도 시간적 여유를 남겨놓고 있다. 설령 과학기술의 발달 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 하더라도 이로부터 야기될 수 있는 사회적 현안과 문제점들을 사전에 철저 히 점검하고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다. 인간 중심의 성찰적 정보화에 대한 진 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야 할 시점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그것들을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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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그 여자를 범했다."(마태 5,27-32) |
한 반응은 다양했습니다. 그런데 교황 장례미사의 전 과정을 TV로 지켜본 70대 어느 여교우는 사제 인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제가 신심이 부족한 탓인지는 몰라도 장례식을 보면서 느 낀 점은 예수님은 가신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는데 예수님의 죽음과 교황님의 장례식 은 뭔가 좀 어울리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장엄하고 대단했지만 순간 ‘이것은 아닌데!’라는 생각 이 스쳤거든요. 제가 좀 부족하고 몰라서 그런것 같아요. 이것도 죄인가요?”저는 다소 의아했습니 다. 그분의 신분과 연령, 환경과 배경을 보아서는 이런 생각을 할 분이 아니었는데 교황의 장례식과 십자가의 예수님, 그것도 가시관의 예수님과 연계했다니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그 숱한 언론인 중, 그 숱한 가톨릭인 중 그리고 신학자 중 그 누구도 언급하지 않은 것을 평범한 이 여교우가 지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삶의 신학, 민중신학의 바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요한바오로 2세는 두 번 한국을 방문하셨기에 그 일화가 우리에게 많이 알려지고 보도되었기 에 더욱 친근함을 느낍니다. 저는 이 기회에 지금은 시리아로 전임된 전 주한 교황대사의 말을 기억 하고 싶습니다. 이분은 늘 우리 사제들을 만날 때마다 교황님의 뜻이라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 습니다. “교황님은 참으로 한국을 사랑하십니다. 아니, 한국이 일치와 평화를 이루기를 바라십니 다. 더구나 북한의 굶주린 동포들을 꼭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혹시 남한 정부의 실정법이 금하더라 도 그 법을 넘어서서 북한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복음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남북이 손잡고 대화해야 합니다. 누가 남북의 일치와 통일을 원합니까? 미국입니까? 일본입니까? 또는 중국과 러시 아가 원합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이른바 6자회담의 구성국인 강대국들 중 그 어느 나라도 결코 남북 의 일치와 평화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려워하고 방해를 합니다. 때문에 여러분 스스로 이 난 관을 극복하고 어떤 일이 있더라고 손잡고 대화하고 굶주린 북한 동포를 무조건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또한 교황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말에 힘을 얻고 매우 기뻤습니다. 그리고 한편 부 끄러웠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지도자 중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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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마태 6,19-23) |
2004년 말 현재 한국인의 53.5%가 종교를 가진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 20년새 9.7% 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종교를 믿는 이유도 “복을 많이 받기 위해서”(15.6%)나 “죽은 다음 영원한 삶을 얻으려 고”(7.8%) 등을 제치고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는”(67.9%) 심리가 압도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갤럽이 31일 발표한 ‘2004년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에 따르면 84년에는 43.8%이던 신자수 는 이후 89년 49.0%, 97년 46.9%로 나타났으며 이번에 처음으로 비신자(46.5%) 수를 앞질렀다. 여성 (9.8%)보다 남자(10.4%)의 증가율이 높다는 점도 눈에 띈다. “왜 종교를 믿는가”라는 물음에 응답 자들의 67.9%가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고”라고 대답했으며 나머지는 “복을 많이 받기 위해” (15.6%) “죽은 다음 영원한 삶을 위해”(7.8%)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7.0%) 등을 이유로 들었 다.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고”라고 대답한 응답자의 비율은 84년 57.8%에서 2004년에는 10.1% 포인 트 증가했다. 반면 “죽은 다음 영원한 삶을 위해”라고 대답한 응답자는 지난 20년새 3.6% 포인트 줄어들었다. 종교를 믿는 이유는 종교별로 크게 차이가 났다. 개신교 신자의 경우 “죽은 다음 영원 한 삶을 얻기 위해”라고 응답한 사람이 22.7%인데 비해, 불교신자는 1.8%로 낮게 나타나 대조를 이 뤘다. 한편 종교 별 신자수는 불교(24.4%), 개신교(21.4%), 천주교(6.7%)의 순이며, 지난 20년 새 증 가율은 불교 5.6%, 개신교 4.2%, 천주교 1.0% 였다. 민족종교, 이슬람교 등 기타 종교를 믿는 사람 의 수는 0.9%에 불과해 한국인들은 ‘빅3종교’를 크게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종교의식 조사는 한국 갤럽이 지난 1984년 첫 조사를 실시한 뒤 5~7년 단위로 진행하는 것으로, 이번에는 전국(제주 도 제외)의 성인남녀 1500명을 집으로 방문해 면접 조사하는 방식을 택했다. |
"아기 이름은 요한이다."(루가 1,57-66.80) |
최근 황우석 교수의 배아 연구 결과 발표에 대해 언론의 분별없고 지나친 반응과 특히 일부 신자들 까지도 열광의 분위기에 합류하는 것 같아 이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명확한 입장을 밝히고자 합니다.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연구는 난치병 환자들의 치료를 위한 세포치료제인 줄기세포를 확보하기 위한 연구로서, 이를 위해 인간 배아, 즉 수정란과 같은 생명을 복제해서 치료적으로 활용하겠다는 의도를 갖는 연구입니다. 황우석 교수의 난치병 치료를 위한다는 이 연구에 대해 수많은 국민이 난치 병을 극복하고 ‘경제강국’이 되리라는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지만, 이러한 기대보다는 오히려 인 간 생명의 존엄성이 극도로 훼손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실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연구에 대하 여 가톨릭교회는 명백한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며, 인간배아복제와 그 파괴를 수반하는 연구의 즉각적 인 중단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황우석 교수의 이번 연구는 인간 생명체인 배아를 인위적으로 복제하여 파괴하는 반생명적 행위를 수반하고 있습니다. 인간배아를 복제한다는 것은 실험실에서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생 산해 낸다는 의미로서, 이는 부부의 사랑으로 임신되는 ‘인간생명으로서의 수정란’과 동일한 인간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이미 1997년에 이 세상에 태어난 동물인 ‘복제양 돌리’를 기억하실 줄 압니다. 황우석교수의 연구는 복제양 돌리가 만들어진 방법과 동일한 방법으 로 인간배아를 만들고, 그것을 활용해서 배아줄기세포를 생산해내는 것입니다. 비록 복제된 배아라 할지라도 이는 분명 인간 생명이며, 따라서 인간배아에 대한 실험이나 조작, 파괴는 인간 존엄성을 심각하게 짓밟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복제된 인간배아를 활용해서 치료제를 만들고, 의약품을 만드 는 일이 마치 그 자체로 난치병을 치료하기 위한 숭고한 일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는 명백히 일종 의 살인과도 같이, 인간 배아의 파괴를 전제로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결코 허용될 수 없 습니다. 또 한편으로, 교회가 이번 연구에 대해 심각하게 염려하는 것은 복제인간의 출현 가능성이 한층 더 높아졌다는 점입니다. 황우석 교수는 인간복제를 원하지도 않고, 또 기술적으로도 불가능하 다고 말하지만, 이 연구는 또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어 끝내 복제인간을 출현시키고 말 것입니 다. 이번 연구에서 성공했다고 하는 줄기세포의 추출은 그 직전 단계에서 여성의 자궁에 착상되어 복 제인간으로 출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히려 난치병 치료를 위한 줄기세포의 성공적인 분화 보다도 기술적으로 훨씬 더 용이하다는 것이 다른 동물들의 복제를 통해서 이미 잘 드러나고 있습니 다. 지금까지 양과 염소, 고양이, 원숭이가 이와 같은 방법으로 복제되어 세상에 태어났고, 앞으로 도 계속 태어날 것입니다. 온전한 인간생명인 배아를 복제하여 질병 치료에 이용하는 것은 결국 한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 다른 인간을 이용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니 근본적으로는 인간생명을 죽이는 행 위이자 인간의 존엄성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가 분명합니다. 의학과 생명과학의 목적은 생명을 보 호하고 지키고 살리는 일입니다. 비록 실험실에서 복제된 인간배아라 하더라도 이는 분명 한 인간 생 명으로 결정된 주체이며, 그 주체는 인간 개체로서 자신의 생명에 대한 권리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인간배아를 연구나 실험용으로 활용하는 행위는 인간의 존엄성을 극도로 모욕하고, 인간생명을 파괴 하는 비도덕적 행위로 규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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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마태 9,9-13) |
가톨릭교회는 난치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의 아픔을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배아줄기세포연구를 반대한다고 해서 환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한 생명을 치료하고자 또 다른 생명을 제삼자의 인위적인 개입으로 희생시키는 방법에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는 것입니 다. 다만 구태여 배아줄기세포가 아니더라도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성체줄기세포가 있다는 사실을 말 씀드리고 싶습니다. ‘성체줄기세포’는 성인의 골수나 혈액 등에서 근육, 뼈, 간 등 구체적 장기 세포로 분화되기 직전 의 원시세포를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이는 사람의 혈액이나 지방, 골수 혹은 탯줄 혈액, 태반조 직 등 사람의 몸에서 추출해낼 수 있는 줄기세포입니다. 성체줄기세포는 사람의 생명을 죽이면서까 지 추출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윤리적으로도 논란이 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배아줄기세포에 서 아직까지도 해결해내고 있지 못하는 안전성 측면에서도 아주 탁월합니다. 성체줄기세포의 효능은 이미 임상시험에서 확실히 증명되고 있습니다. 이미 뇌경색증 환자가 정상적으로 걷게 되고, 15년간 휠체어를 타고 있던 척수환자가 일어서게 되었으며, 괴사 상태에 있던 당뇨병 환자의 발이 정상으로 되살아나고 있다는 등의 계속되는 언론 보도는 모두 성체줄기세포치료의 임상시험 성공사례라는 것 을 말해주며, 그 효능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배아줄기세포 치료방법이 임상시험에도 적 용된 예는 아직까지 세계적으로 단 한 건도 없으며, 앞으로도 언제 가능할지도 여전히 의문입니다. 많은 생명과학자들이 줄기세포가 인류의 건강과 생명에 기여하기 때문에 계속 연구, 활용되어야 한다 고 주장한다면 우리 가톨릭교회는 윤리적으로나 임상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성체줄기세포가 당연 히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두 가지 모두를 연구하면 그만큼 난치병 극복의 길이 가까울 수 있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분별해야 할 것은 아무리 좋은 목적이라고 하더라 도 그 목적을 위해 수단이 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로마 3,8 참조), 따라서 인간생명을 파괴하는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생명과학 분야에 대한 우리 가톨릭교회의 관심은 지대합니다. 왜냐하면 생명과학의 발전이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도 있고, 동시에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파멸로 이끌 수도 있기 때문입니 다. 인간배아를 단순한 세포덩이로 여긴다거나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미한 존재로 여기면서 파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우리 사회에 죽음의 문화를 급속도로 확산시킬 것입니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 결 과에 열광하기보다는 우리 사회가 냉철한 이성을 되찾아 생명을 존중하고, 생명의 존엄성을 인정하 는 사회로 거듭나기를 기대합니다. |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마태 10,16-23) |
이달부터 주5일 근무제가 확대됨으로써 이제 우리나라 전체 근로자중 40%가 주2일 휴일시대를 맞게 되었다. 주5일 근무제는 사람들의 생활 방식도 많이 바꾸어 놓은 것 같다. 그중 대표적인 변화는 웰 빙 문화의 등장이다. 근로시간의 축소로 여가시간이 늘어나게 되자 조금씩 조금씩 만족스러운(well) 삶(being)에 대한 인간적 욕구가 표면화되면서 일종의 사회 현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삶의 방식이 단순한 생존의 차원에서 벗어나 정신적 풍요와 육체적 건강을 위해 명상이나 헬스 등으 로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생식이나 유기농 등의 자연식을 매개로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 습들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그리 낯설지 않은 웰빙 문화의 한 모습이다. 그런데 가끔 그것이 명품이 나 비싼 유기농 나아가 건강에 대한 지나친 집착 등의 소비주의 성향을 부추기는 상업적 마케팅 전략 으로 왜곡되는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웰빙은 사전적으로는 주로 삶의 질을 강조 하는 행복, 안녕, 복지 등의 의미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삶의 질’은 주로 행복의 주관적 차원 을 강조하면서 정신적, 육체적, 사회적 조건에 대한 인간의 만족스러운 또는 만족스럽지 않은 마음 의 상태에서 언급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높은 삶의 질은 고통스럽거나 비참한 상태를 제거하여 삶을 만족시키는 데에 그 기준을 두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가난은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질병의 고통 은 행복을 가로막으며, 정신적 및 정서적 불안은 웰빙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가 되고 만다고 생각한 다. 그러나 웰빙이 만족스러운 삶, 건강한 인생을 의미하는 개념이라면 이 개념을 단순히 ‘삶의 질’ 차원에서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육체적으로 건강한, 단지 문화적인 측면으로만 축소시켜서는 안 된다. 고대부터 수많은 현인들이 사유(思惟)의 주요 핵심 주제로 인생을 논하였고, 이는 결국 ‘행 복’ 추구로 귀결되었듯이 행복은 인생의 궁극 목적일 수밖에 없다. 이 행복이 어쩌면 오늘날 우리 가 말하고 있는 폭넓은 의미에서의 웰빙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한 번 주어진 인생을 만족스럽게 살아간다는 것(웰빙)은 어느 누구의 삶에나 공통으로 맡겨진 과제 요 목적이며, 이는 곧 행복을 찾는 삶일 것이다. 그러면 행복은 무엇인가? 철학자들은 예로부터 행복 을 개인의 감성적 요구를 만족시키는 쾌락과 동일시하거나 고통이나 불쾌가 없는 상태, 혹은 자족, 무욕 등의 정신적 독립의 상태라고 정의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행복을 자아나 인격의 총체 적, 영속적 만족의 상태, 초현실적인 종교적 기쁨의 상태로 정의하는 존재론적, 비공리적 의미로서 의 행복의 기준까지도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 행복은 이렇게 삶의 모든 영역에서 찾아가는 것이 며,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고통과 모자람 속에서도 행복은 도망가지 않는다. 비록 풍요롭지 않다 해 도 내 작은 마음 안에서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할 때 그것이 곧 행복일 것이고, 웰빙의 모습이 아니겠 는가? 주2일 휴일 시대와 함께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휴가 계획을 짜기에 분 주하다. 해외여행? 가족여행? 아니면 필요한 공부 보충? 계획을 짜다 보니 길어진 휴가기간이 오히 려 짧다고 투덜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주위에는 여름휴가는커녕 일주일에 하루 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근로자들이 아직도 많다. 비록 물질적인 풍요와 외적인 성공이 내게 당장 따 라오지 않는다 해서 불행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휴가는커녕 구슬 땀을 흘리면서 여름을 난다 해 도 거기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삶의 보람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그래서 희망할 수 있다면 그것이 참된 행복이며 웰빙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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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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