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여량이라는 곳을 관광하고 있었다
그곳 폭포는 삼십 길이나 되었고, 그 물거품이 사십 리나 튈 정도로
험하여 자라나 물고기 등도 헤험칠 수 없는 곳이었는데 한 사나이가
그곳에서 헤험치는 것을 보자마자 공자는 그가 고뇌가 있어 자살을
한다고 판단해 먼저 제자들을 보내 그 사나이를 건지게 하였다
그 사나이는 수백 보의 거친 물길을 지나 물 위로 모습을 드러냈는데
머리카락이 물결에 풀어진 채 노래를 부르며 둑 바로 아래 잔잔한
물에서 헤험치자 공자가 가까이 다가가 물어보았다 나는 그대가
귀신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자네는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군
그렇게 헤험을 잘하는 방법(도)이라도 있는 것인가?
(최고 경지의 수영선수에서 수영을 잘 하는 방법을 묻자)
이에 그 사나이가 말하길 없지요 내게 특별한 방법(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시작했으나 삶에 깃들어 명령을 이루고
있을 뿐인데 그것은 물이 소용돌이쳐서 빨아들이면 나도 같이
들어가고, 물이 물속에서 밀어내면 나도 같이 밀려 나오는
물의 길을 따르는 것으로 그것을 사사롭게 여기지 않고
그냥 내가 물을 건너는 방법인 것이지요
그러자 공자가 과거에서 시작했으나 삶에 깃들어 명령을 이룬다는
그대의 말은 무슨 의미인가란 말에 그 사나이가 대답하길
내가 육지에서 태어나서 육지에 편했던 것이 과거이고,
내가 물에 깃들어 물에 편해진 것이 삶이고,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는 것이 명령이지요 (달생)
이 이야기를 인생의 궁극적 정답은 무엇이고,
나는 누구이며, 온전한 참음 무엇인가라는
궁극적인 질문에 답을 찾아 철학은
분별의 쳇바퀴을 끝임없이 돌리므로
문화와 문명을 발전과 발달시키는 철학서 등을 만들고
불교는 싯달타 등이 부처나 불법이 정답이라고
불경 등을 만들고, 유교는 공자 맹자 등이
도덕천의 인이 정답이라고 사서삼경 등을 만들고,
도교는 노자 등이 유무상생의 도가 정답이라고
도덕경 등을 만들고, 기독교는 모세와 바울 등이
야훼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가 정답이라고
성경을 만든 것처럼
장자를 대단한 선생이나 정답으로
이미 결론을 내어놓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말들로 분별하여
장자를 도구로 스스로 대단한 선생이 되는
무례한 오지랖을 펼치고 있지만
이 이야기의 본질은 최고의 고수처럼 물고기보다
헤험을 잘하여 물에서의 삶이 땅에서 사는 것처럼
편안한 사람에 대한 유불리를 세상의 가치 기준을 따라
분별하려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사는 것처럼
물에서 편하게 살 수 있는 기술이나 능력은
무한의 반복 훈련으로 적응된 명령일 뿐으로
결국 그런 대단한 능력에도 인생의 궁극적 정답의
온전한 분별이나 정답이 없다란 넉두리로 바로 알 때
참이 없고 모든 것이 헛된 이 세상에서
세상의 가치 기준을 따라 원인이나 이유나
결과 등의 유불리를 분별하여 연합이나 야합하여
상생이나 공생하려고 정답처럼 철학서나 종교의
경전 등을 만들어 스스로를 속이는 삶이나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수행하는 삶은
바른 정답의 삶이 아닐 뿐 아니라 우리란 이념을
진짜 나로 착각하여 내가 원하는 너로 변화시켜
정복하여 다스리려는 감탄고토의 연기인
무례한 오지랖이 된다
따라서 온전한 지혜는 무분별 지혜이고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기쁨과 평안과 자유가
온전한 조화를 이룬 행복을 소유하여 누리는
사랑으로 혼자서는 불가능하고 또 너와 내가 아닌
스스로 거듭난 온전한 우리만 가능할 뿐 아니라
부모 등 보호자가 없이 가능한 어린 아이의 삶이나
야훼 하나님 없이 가능한 에덴동산 아담과 하와의
삶으로 결국 스스로 만든 나만의 에덴동산에서만
온전한 행복을 소유하여 누리는 무주상의 삶인 진짜
사랑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