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홍기 목사는 연희전문 교수, 일본 기독교 조선 감리교단
연성국장, 숙명여대 문학부장을 거쳐 외무부 차관과
공보처 장관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는 배신배족의 길을
간 전형적인 친일 반민족 교회 지도자였다.
한국교회사에서 보면,1930년대 중반해서 광복까지의
시기는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 으로 말미암아 신학과
교회 제도가 크게 훼손되는 암흑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일제가 요구한 신사참배와 일본적 기독교의 수립에는
상당수의 기독교인이 동조하여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
큰 오점을 남겼다. 해방 후 이승만 정부하에서 공보처
장관을 지닌 갈홍기 목사도 일본적 기독교 수립 운동에
깊숙이 끼어들은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해방 이후 교회 일각에서 일제하의 과오와 죄과에
대한 비판과 반성의 움직임이 일 때,갈홍기 목사가 속한
감리교회에서는 친일파 교회 지도자들을 비난하는 문서,
"감리교회 배신배족 교역자 행장기"가 1947년 2월 목사와
신도들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이들의 명단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정춘수(교단총리,재단이사장,황도문화관장)
이동욱(총무국장,상임위원,황도문화관부관장)
김영섭(사무관장,혁신교단 총리)
갈홍기(연성국장,상임위원,대화세계 기자)
.........................
갈홍기가 '배신배족의 악행'을 실천하기 시작한 것은
1938년 무렵부터다. 그해 서울에서는 '경성기독교연합회'
라는 일제의 어용 단체가 조직되어 이른바 '종교보국'을
서약하였다. 이때 갈홍기는 서울에 이어 조직된
인천기독교연합회에서 서무 직책을 담당하게 된다.
그후 학병 모집 독려를 위한 '조선종교전시보국회'에서
갈홍기는 이동욱 목사와 함께 감리교 대표로 선정되었다.
갈홍기는 청진과 함흥에서 학병 독려 강연을 하였다.
1944년에 교역자들의 정신을 일본화하기 위한 시책으로
연성회라는 교육 프로그램을 시행할 때에도 갈홍기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황도기독교의 수립'
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또한 황도문화관의 관장이
되어 교역자들에게 일본 정신과 문화를 가르치는 일에
앞장섰다.
갈홍기는 배재고보,연희전문을 졸업하고 같은해에 미국
유학을 하는 등 일제치하에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다. 그는 노스웨스턴대학과 개렛신학교를 졸업
하고 시카고 대학 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해방 이후에도 이승만과의 유착으로 외무부 차관을
거쳐 공보처장에 임명된다. 그는 이승만의 충실한 대변인 역할을 하며 북진통일 찬성 등 극단적인 반공 정책에
동조한다. 사사오입 개헌 과정에서도 안보를 무기삼아
불법 개헌을 동조하였다.
그는 자신을 국민의 충실한 심부름꾼이라고 자처했으나
실제로는 반민족적 친일 활동을 거쳐 해방 후에는
반공주의자로 변신한 친일 기독교인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