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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안규수의 '그것이 바로 너다'서평
서序
우리나라 수필가들은 고향 이야기를 즐겨 쓴다. 우리들에게 고향은 각별한 곳이다. 어린 나와 친구들이 있었고 젊은 부모와 친척들이 있었고 늙은 조부모와 선대들의 무덤이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푸른 산과 대지가 있었고 푸른 하늘과 바다가 있었고 푸른 생명들과 푸른 호흡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고향은 그곳에 있지만 뭔가 달라졌고 뭔가 변하였고 기억할 수 없는 뭔가가 사라졌다. 그것들이 무엇일까?
소가 있었다. 소 엉덩이에 항상 마른 소똥이 덧칠해져 있었다. 불쌍하게도 한 번도 누가 씻겨준 적이 없었고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왕성하게 여물을 먹는 소의 거친 숨소리가 있었다. 정게(부엌)가 있었고 가마솥이 있었고 살강이 있었고 청솔가지가 있었고 매운 연기가 있었고 그리고 검은 바닥엔 복돌이 박혀 있었다. 대밭이 있었고 출렁이는 햇빛과 댓잎 그림자가 있었고 대나무와 대나무 사이로 이어지는 끝없는 미로가 있었다. 그것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초라하게 변하거나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갔다. 나는 그들을 다시 호명해서 불러오고 싶다. 모든 것이 다 기억날 것 같다. 모든 그림이 다 그려질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그리움은 채워지지 않고 갈급함은 해소되지 않은 채 소중한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나다. '그것이 바로 너다'. 그것은 우주 만물이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인드라망이며 개체를 뛰어넘는 존재 자체이다. 그것은 고향이며 돌이킬 수 없는 우리의 어린 시절이며 우리가 잃어버린 동심이다. 다 기억하는 것 같아도 절대로 기억하지 못하며 당신이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좀체 간직하기 힘든 게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규수 형의 책을 읽으며 시종 고향을 생각했고 마음 속으로 그와 함께 고향을 찾아갔으며 이제 여러분과 함께 두서없이 그의 책 이야기와 고향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1.
작가 안규수를 나는 개인적으로 형님이라고 호칭한다. 그는 우연히도 내 혈육의 형님과 동갑이시다. 형님은 작년에 돌연사하셨다. 옛날과는 달리 지금은 돌아가시기에 너무 애석한 나이였다. 형님과 안규수 선생님은 나이 뿐아니라 여러 가지 겹치는 부분이 있다. 형님은 나와는 달리 고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고향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생가뿐 아니라 생가터 주변의 논밭과 야산까지 모두 되사셨다. 바닷가 뻘밭 근처에 집까지 지으셨다. 아내와 자식들이 사는 서울보다는 고향에 머무는 날들이 더 많았다. 그날도 혼자 갈대밭 산책길을 걸으시다 쓰러지셨다. 나도 고향을 사랑하고 어린 시절엔 고향에 가고 싶어 고향 가는 꿈도 많이 꾸었다. 고향 가는 황톳길, 바다에서 불어 오는 솔바람 소리, 그리고 가난에 찌들었지만 순박하게 웃던 고향 사람들의 얼굴들이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그리움이 많이 퇴색하였다. 개발로 인해 고향 산천의 모습이 변하였고 사람들은 모르는 얼굴들로 바뀌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고향 가는 일을 꺼리게 되었다. 내 마음 속에 지니고 있던 원래 고향의 모습까지 손상될까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형님은 달랐다. 그곳에서 사시길 원했고 그곳 사람들과 어울렸고 심지어 그곳에 묻히시기를 원하셨다. 나에게는 희미해진 친향토적 유전인자가 그에게는 보다 강렬하게 작용했던 듯싶다. 그런 형님의 모습이 자주 안규수 선생님의 모습과 겹쳤다. 그런 생각이 돌아가신 후에는 더욱 간절해져 언젠가 그가 우리 가게를 방문하셨을 때, 앞으로는 친형님처럼 모실테니 그리 알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한 일도 있었다. 그 분도 고향을 못잊어 평생 고향 근처를 떠나 본 적이 없다고 들었다. 지금도 가까운 순천에 살면서 틈나는 대로 고향 마을(벌교)에 들른다.
그는 스스로를 '변두리 인생'이라 칭한다. 크게 남에게 내세울 만한 게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고향에 뿌리박지 못한 부박함을 탓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향 마을은 이미 쇠락하였고 그리운 사람들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옛 노랫말처럼 '고향에 고향에 돌아가도 그리던 고향이 아니러뇨'이다. 그는 고향을 잃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대인들은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정신적 실향민들이다. 그러나 그의 실향은 단순한 애상적 감상만은 아니다. 고향은 그에게 언제나 결코 지울 수 없는 근원적 실체로 다가온다. 무지개처럼 정작 다가가면 사라지는 고향이지만, 고향은 그에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삶의 의미이며 궁극적 도달점인 것이다. 그가 살면서 추구하는 다면적이고 복합적인 가치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의 순일한 노력이며, 의지의 발로이다. 그가 추구하는 문학도 예술도 심지어 종교까지도 고향의 복원을 꿈꾸는 그의 간절한 정념에 물들어 있다.
2.
그는 돌을 깎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모래성을 쌓는 사람이다. 완벽을 위하여 치열하게 연마하기보다는 느낌과 생각과 이야기들을 끌어모아 늘어놓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는 그가 수집한 이야기들을 어느 순간 놓아버린다. 그의 미학은 견결의 미학이라기보다는 해체의 미학이다. 어쩌면 그것은 그가 평생을 살면서 체득한 인생의 미학일지도 모른다. 그의 미학은 삶의 본질에 닿아 있다. 우리 삶은 흐르는 강물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며 유장하게 흐를 뿐이다. 개체의 삶은 그 강 옆에 쌓아올린 모래성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한껏 쌓아 올리지만 어느 한 순간 강물이 휩쓸고 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는 섬진강을 따라 걸으며 인생의 무상함을 되뇌인다. 강가에는 계절이 쉴새없이 순환하며 강은 어느덧 바다에 이른다.
3.
우리는 죽음을 '돌아간다'라고 표현한다. 원래 있던 곳으로, 아니면 본래 비어있는 허무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는 다시 태어나면 소박한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갈등과 폭력이 없는 삶, 자연과 분리되지 않은 삶, 원래의 순박한 삶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두 어머니가 공존하던 삶, 두 어머니가 자신을 쪼개지 않고 함께 공유하며 사랑해주던 삶, 한 아버지와 한 가족으로 귀일될 수 있는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그는 젊어서 삶과 죽음이 격렬히 요동치던 전쟁(월남전)을 겪었다. 그래서인지 삶을 파괴하고 무화시키는 죽음이 아니라 삶을 끌어안고 편안히 덮어주는 죽음, 모성과 대지로의 회귀이기를 소원한다. 그는 최근에 암으로 인하여 큰 수술을 받았다. 그는 병과 고통이 타인을 더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며, 시련이 주는 쓴 맛으로 인하여 오히려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미로운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덧없이 살았는가를 통감하며 결국 남는 것은 사랑 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언제라도 올 수 있는 죽음 앞에 보다 의연해질 것을 다짐하며 자신이 사랑 받은 만큼 다시 되돌려 줄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의 마지막 기도는 사랑의 땅 고향으로 돌아가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 모든 상처들이 치유되고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4.
그는 박경리의 시 한 편을 빌어 자신의 소회를 밝힌다. 그 시는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남편을 둔 아내로 태어나서 농사지으며 살고 싶다는 소망을 담고 있다. '일 잘하는 남편'이란 박경리 작가의 오랫동안의 결핍에 대한 보상심리일 것이다. '일 잘하는 남편'이란 나도 일 잘하는 아내가 되고 싶다는 소망의 투사일 것이며, 나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외로운 자의 은밀한 은유일 것이다.
그도 박경리처럼 노년에 이르러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삶이 무엇이었는지 돌이켜보게 된다. 과연 우리 인생에 남는 게 뭘까? 우리 인생에 남을 수 있는 게 무엇이고 무엇을 남겨야 할까?
그는 어쩌면 일 잘하는 아들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자연의 섭리와 노동의 가치를 아는 일 잘하는 아들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일이란 혼자만의 작업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함께 하고 이웃과 더불어 함께 해야 하는 공동의 작업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일 잘하는 아들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5.
그는 고향을 잃었다. 아니 우리 모두는 고향을 잃었다. 정확히 고향을 잃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보다 먼저 고향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 내가 태어난 곳? 내 태를 묻은 곳?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 그런데 우리는 왜 고향을 못 잊어 하는 걸까? 왜 고향을 낙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낙원은 신화 속에 존재한다. 우리의 어린 시절은 신화였고 우리의 고향은 신화 속 마을이었다. 우리는 날마다 눈뜨면 새로운 것을 보았고 새로운 소리를 들었다. 세상은 놀라운 것들로 충만해 있었고 밤은 신비로운 별빛들로 가득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던 대밭과 골목길을 그리워한다. 푸른 대밭은 온갖 생명들이 함께 했고 친구 집으로 이어지던 골목길에는 많은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다. 고향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그 설화의 주인공들이었으며 그와 그들은 함께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을 펼쳐나갔다.
우리는 커가면서 고향을 떠났고 또 세월은 가차없이 흘러갔다. 그리고 고향은 변했다. 우리가 변한 건지 고향이 변한 건지 아니면 둘 다 변한 건지 알 수가 없다. 변함은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이치고 자연의 섭리라 해도, 그는 그 변화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신은 변함이 없는데 고향만 변한 것 같아 야속하기까지 하다. 그는 마치 변심한 연인의 마음 속을 헤아리듯이 고향의 변화를 꼬치꼬치 따져묻는다. 왜 변했을까? 그리운 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마당에 가득하던 두엄 더미는 어디로 갔을까? 왜 없어졌을까? 흙벽에 기대 놓았던 괭이며 삽, 쇠스랑과 고무레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는 어린 시절에 아마 수천 년 이어져 온 조상들의 농법과 농기구들을 목격하며 자랐을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친환경 농법이며 자연에서 얻은 것들을 먹고 그대로 자연으로 되돌려 주는 농법이다. 그는 자연 속에서 자랐으며 자연의 일원이었으며 자연과 한 몸이었다. 고향은 곧 자연이었으며 고향은 곧 어머니였으며 고향에서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함께 한 호흡으로 살았다. 그는 곰곰이 생각한다. 고향은 변한 것이 아니다. 그는 고향을 뺏긴 것이다. 고향을 상실한 것이다. 현대의 물질주의와 상업주의에 의하여 온전히 고향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의 고향 이야기는 당연히 실락원에 대한 담화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제 복락원을 꿈꾸고 있을까? 그는 진심으로 고향에 돌아가기를 소원하고 있을까?
6.
고향은 어쩌면 윤색된 기억인지도 모른다. 그는 그의 고향 소화다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총 맞아 떨어져 죽었고 시체가 강을 가득 메웠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시무시한 손가락총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으며 그의 누이가 총살당한 남편의 시체를 찾아 반미치광이처럼 산야를 헤매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에게는 두 명의 어머니가 있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작은 평촌댁'으로 불리웠다. 그의 어머니는 외출할 때면 항상 머릿수건을 둘러 얼굴을 반쯤 가리고 다녔다. 언젠가 어머니는 그를 앞에 두고 그의 존재를 한탄하며 한숨을 내쉰 적이 있었다. 어쩌면 그의 고향은 피와 한으로 얼룩진 곳일 수도 있었다. 또한 현실적으로 고향을 복원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와 유사한 환경을 조성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고립된 삶이며 지속 불가능한 삶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향을 애끓게 그리워한다. 밤이면 오로지 달빛에 의지하여 걷던 그 고향길을 차마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결結
고향은 그에게 작은 소우주이며 지워질 수 없는 내면의 풍경이며 한시도 떨칠 수 없는 자아의 정체성이다. 그가 겪은 모든 죽음과 불행은 고향을 향한 그의 그리움에 한층 짙은 음영을 더할 뿐이다. 고향이라는 그의 낙원은 단지 기억의 윤색이나 허구의 환상만은 아니다. 고향은 그가 반드시 돌아가야 할 궁극의 목적지이며 그의 고향 사람들은 그가 반드시 회복해야 할 원형의 인간상들이다.
우리가 고향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는 항상 따뜻한 휴머니스트로, 명철한 환경주의자로, 그리고 영원히 젊은 이상주의자로 우리 곁을 지켜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