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미시 산책 / 백정국
Dostoevsky
Charles Bukowski
against the wall, the firing squad ready.
then he got a reprieve.
suppose they had shot Dostoevsky?
before he wrote all that?
I suppose it wouldn’t have
mattered
not directly.
there are billions of people who have
never read him and never
will.
but as a young man I know that he
got me through the factories,
past the whores,
lifted me high through the night
and put me down
in a better
place.
even while in the bar
drinking with the other
derelicts,
I was glad they gave Dostoevsky a
reprieve,
it gave me one,
allowed me to look directly at those
rancid faces
in my world,
death pointing its finger,
I held fast,
an immaculate drunk
sharing the stinking dark with
my
brothers.
도스토예프스키
찰스 부코스키
벽에 기대선다, 총살대는 명령만 기다린다.
그가 집행유예를 받은 건 그때였다.
그들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쏘았다면?
그 모든 걸 쓰기도 전에?
짐작컨대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었으리라.
그의 책을 읽어본 적 없고
결코 읽지 않을 사람들이
수십억이다.
하지만 청년인 나는 알고 있다,
나로 하여 공장을 벗어나
창녀 옆을 지나게 하고,
온밤 나를 들어 올렸다가
더 나은 곳에 나를
내려놓은 것이
그였다는 걸.
심지어 선술집에서
다른 부랑자들과 술을
마시면서도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집행유예가 떨어졌다는 게
기뻤다,
그건 나에게 내려진 유예였으며,
내가 똑바로 쳐다보게 해주었다,
내가 사는 세상의
고약한 얼굴들을,
손끝을 뾰족하게 갈고 있는 죽음을,
나는 꽉 붙들었다,
내 형제들과
악취 나는 어둠을 나누고 있는 흠 없는
취객
하나를.
작품읽기
1849년 청년 도스토예프스키는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가 주도하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모임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성탄절을 사흘 앞둔 12월 22일, 이미 여덟 달의 암울한 수감생활을 겪은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무런 사전 경고 없이 광장으로 끌려나와 다른 죄수들과 함께 총살대 앞에 섰다. 사형수들을 위한 마지막 종교의식이 거행 되었고, 세 명의 죄수들이 먼저 총에 맞아 고꾸라졌다. 그의 차례가 왔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 사형집행을 중지하라는 황제의 명령이 떨어졌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것은 반동세력을 위협하고 길들이기 위해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쏘았다면?”은 섬뜩한 가정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용의주도하게 계획된 일이라고 할지라도 이 사건은 위험천만한 요행수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황제가 변덕을 부렸거나, 현장의 사형집행 장교가 누가 도스토예프스키인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거나, 혹은 총살대의 병사 하나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얼떨결에 방아쇠를 당기기만 했어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는 절대 권력의 이 장난기 어린 만행 이후로도 결코 안전하지 않는다. 총살형은 면했지만 그는 곧바로 시베리아 유형지로 압송되어 4년 동안 매일같이 죽음의 공포와 맞닥뜨리는 고초를 겪었다. 십대에 시작된 간질 발작은 늘 그를 따라다녔고, 고질적인 음주벽과 도박으로 빈번히 나락으로 떨어졌다. 만일 그의 인생에 안나 스니트키나라는 아가씨가 나타나 결혼으로 그를 구원하지 않았다면 문학사는 그를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도스토예프스키로 기억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코스키가 이 시를 쓰면서 떨쳐내기 가장 힘든 유혹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 『백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등과 같은 작품을 쓴 작가라는 것을 에둘러서라도 언급하고 싶은 충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사실 도스토예프스비의 작품들에 대한 언급은 고사하고 이름을 제외하면 그를 연상시키는 유일한 실마리는 모의처형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첫 두 줄 뿐이다. 게다가 그런 연상조차도 그에 대한 관심이 지극한 일부 독자들에게나 허용되는 것이다. 독자의 예측을 빗겨가는 시의 또 다른 특징은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죽은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살아있는 우리가 값을 길 없는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식으로 시가 전개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말고도 훌륭한 소설가는 수두룩하다. 시인의 표현대로 “그의 글을 읽어본 적 없고 결코 읽지 않을 사람들이 수십억”이다. 그래서 시인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력을 화자의 사적 경험의 영역에 한정시킨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와 그의 작품이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고달픈 삶을 살았던 한 작가로 인해 개인의 삶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가 보여주는 개인의 달라진 삶이란 것이 매우 사소하다. 고작해야 창녀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취객 하나를 꼭 잡아준 준 것이 전부이다. 의사 지망생이었던 체 게바라가 젊은 시절 여행도중 나병 환자들을 만나 결국에는 혁명가로 변신했다는 식의 극적 반전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것은 과격하고 본질적인 변화를 암시하는 우발적인 징후이다. 화자가 경험한 진짜 변화는 그가 “세상의 고약한 얼굴들”과 피에 굶주린 “죽음”을 대담하게 직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상과 죽음에 대한 이러한 직시는 모든 혁명가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경험이다. 시인은 도스토예프스키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혁명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시인은 체 게바라와 같이 무력 투쟁을 통한 세상의 변화를 꿈꾸지 않는다. 그에게는 유혈혁명을 일으킬 총이 아니라 명예혁명을 일으킬 다른 무기가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존은 무엇보다도 인도주의적인 면에서 기뻐해야할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부코스키가 기뻐한 근본적인 이유는 생존 그 자체가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가 그 야만적인 사건을 경험한 이후 불후의 명작들을 쏟아냈다는 데 있다. 부코스키는 분명 ‘이기적인’ 독자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이는 밉지 않은 이기심이다. 오히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이기적인’ 독자들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현실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들은 모두 고전의 반열에 올라있다. 냉소적인 얘기지만 고전이란 제목은 유명하지만 좀처럼 읽히지 않는 책들을 일컫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기 바라는 시인의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는 시인지 모른다.
작가소개
찰스 부코스키 (Chales Bukowski, 1920~1994)
독일 태생의 미국의 시인 겸 소설가. 수천 편의 시와 수백 편의 단편소설 그리고 여섯 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화려한 대학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며 젊은 시절 험한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황폐한 미국 사회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하층민들의 일상을 가식 없는 거친 이미지로 그려내 “미국 하층민의 계관시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국내에서는 『우체국』과 『여자들』 같은 소설들이 번역 소개되어 있다.
백정국 교수---------------------------------------------------
고려대 영어교육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에서 미국문학 석사.
Rutgers University - Camden에서 영문학 석사,
University of California - Davis에서 셰익스피어 드라마 연구로 박사 학위 받음.
현재 숭실대학교 영어영문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