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은 항상 슬프더라
素晶 하선옥
며칠 전부터 내리던 비가 땅속을 푸근히 적셨나 봅니다. 집이 바로 산 아래에 있어서 밤중에 화장실이라도 가려고 일어나면 뚜렷하게 들려오는 뽀롱뽀로롱 소리. 해동된 땅속을 뚫고 올라온 동면하고 있던 생물들의 울음소리가 제일 먼저 봄을 알립니다.
봄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지만, 또 다른 이별도 있었습니다. 어제저녁 우리 통로 1층에 사는 지인, 예전 시골 마을에 살 때부터 이곳으로 이사 올 때도 함께 온 오래된 지인입니다. 그전날 전화가 와서는 "형님, 멸치 좀 사야 하는데" 하길래 "지금은 멸치가 안 나오던데" 하며 "우리 집에 멸치 좀 있으니 갖다 줄게" 하고는 어제저녁 마른 멸치 서너 움큼을 봉지에 담아서 들고, 문도 잠그지 않고 두어 계단 내려섰을 때 2층에서 다급하게 "형님이 가?" 하는 목소리가 들리길래 "왜? 왜?" 이러니 "형님, 나 좀 병원에 태워다 줘. 우리 남편이 지금 죽는단다." 이러네요. 전후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나는 그래 알았다 차 키 들고 나올게 내려가자 하면서 절뚝거리며 집으로 가서 차 키만 들고 간신히 계단 난간을 붙들고 내려가서는 차에 태우고 오른쪽 다리를 오른손으로 붙들어 올리고는 인근 병원 중환자실로 향했네요. 조금 전 여섯 시에 중환자실 면회를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중환자실 앞에서 덩그러니 혼자 앉아있노라니 만감이 교차하네요. 나는 이곳에서 내 남편, 내 부모님, 내 동생 두 명 그리고 제부까지 보냈었는데.... 절대로 오고 싶지 않은 곳이었죠. 나도 많은 울음을 삼키고 삼키며 참고 흘려보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잠시 후 문이 열리자 들려오는 통곡 소리.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임종을 맞이했고, 수습하는 시간 동안 멀리 있는 아들 하나, 딸 둘한테 연락하고 집안사람들한테도 연락을 취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도착한 본인의 지인 한 명과 조카 한 명, 나 이렇게 시신을 안치실까지 모시는 엘리베이터에 같이 타고 안치실까지 동행을 하고, 상조실에 앉아서 상조 설명까지 듣고 나니 친척들이 두어 명 도착하는 걸 보고는 집으로 왔습니다. 상조실 의자에 앉았다가 못 일어나는 나를 일으키며 사람들이 왜 그러냐고 묻네요.
나는 겨우 어제 사흘 만에 오른쪽 발목 아래 골절된 깁스를 풀었고,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오른쪽 무릎 연골수술 한 지 삼 주째라 많이 불편하고 아프고 절뚝거렸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상태에서 운전을 하고 왔냐며 놀라며 고마워하네요.
내 나이쯤 되니 인생의 길목마다 달라지는 풍경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준비가 필요한 나이입니다. 칼로 자르듯이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이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되짚어 생각해 볼 자세가 필요한 나이입니다. 우리네 인생살이는 있다, 없다, 니 거다, 내 거다, 미워한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싫다, 좋다에 매일 끌려다니며 살고 있습니다. 내려놓을 수도 없는 우리네 삶 속에 스며 있는 죽고 사는 모습도 우리네 사는 세상입니다.
아지랑이.
손에 잡히지 않는 공기층. 그 아지랑이 같은 행복을 손에 잡으려 애쓰며 살아왔습니다. 꼭 모아 그 머진 손가락 사이로 슬금슬금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은 행복도 손만 풀어 버리면 다 흘려보내고 맙니다. 갈 때는 빈손으로 갑니다. 옷가지 하나도 제대로 걸치지 못하고, 내 거라고 자랑하고 희생했던 가족들 얼굴도 못 보고, 손끝에 피가 맺히도록 긁어모았던 지폐 한 장 손에 쥐지 못한 채 주머니 없는 수의 한 벌 걸친 채 다시 못 올 길을 홀로 갑니다.
오늘따라 나이 든 어르신들의 소박하고 욕심 없고 꾸밈없고 정겨운 미소가 정말 아름답습니다. 먼 길 떠난 분이 그곳에서는 아프지 않기를 소망하며 명복을 빌어봅니다.
2025년 3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