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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락/낙민초등학교 총동창회 원문보기 글쓴이: 허석경(41회)
유락국민학교 마지막 “9인제 배구”선수
- 지금은 배구가 6인제 이지만 내 어릴 적에는 9인제였다. 한참 꿈 많던 어린 소년의, 운동과 함께 한 작은 성장기를 올려보고자 한다.-
나는 어릴 적 수안동에 살았는데, 같은 동네 사는 “박광호” 라는 -나보다 한 살 많은-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야구 글러브를 갖고 노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 나도 부모님을 졸라 야구글러브를 마련하여 박광호에게서 공 던지는 법, 공 받는 법 등을 배웠다.
그때부터 난 야구에 필이 꽂혔다. 다시 부모님을 졸라 야구 배트, 야구공 등등을 마련해, 틈만 나면 친구들을 모아서 학교 운동장, 동래 경찰서 운동장 등에서 야구를 하였다. 요즘은 동래 경찰서 운동장에서 못 놀지만 내 어릴 적에는 동래 경찰서 운동장이 우리 놀이터였다.
야구 말고도 재미있는 놀이들이 많기는 하였다.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깨또놀이(숨바꼭질)”, “잡기놀이(술래잡기)”, “아구루마” 등등의 놀이를 하였는데, 우리동네에서는 독특한 놀이 명칭을 사용하였다. 숨바꼭질을 “깨또놀이” , 술래잡기를 “잡기놀이”, 술래를 “담바”라고 하였다.
숨바꼭질을 할 때에 담바(술래)가 담벼락이나 전봇대에 머리를 갖다 대고 100까지 헤아린 후 숨은 친구를 찾아 다니다가 발견하면 ‘아무개 깨똥’ 하면서 머리를 갖다 댄 곳을 먼저 터치 하면 잡힌다. 숨었던 친구가 술래 보다 빨리 달려가서 술래가 머리를 갖다 댄 곳을 먼저 터치 하면서 “깨똥”하면 산다. 아무튼 “깨똥”이라는 독특한 용어를 사용하였다.
여러 가지 놀이 중에서 제일 박진감 넘치는 놀이는 “아구루마”이다. “구루마”는 일본말로 주로 자동차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어릴 적 우리 동네에서는 달구지를 “구루마”라고 하였다. “아구루마”는 ‘애들이 만든 달구지’라는 뜻이었지 않나 싶은데, 아무튼 “아구루마” 놀이 할 때는 술래가 세 명 이다. “가위 바위 보” 를 하여 진 차례대로 꼴찌는 ‘말’ 노릇을 해야 하고, 그 외 2등 술래, 1등 술래 두 명은 ‘마부’가 된다. 말은 엎드리고 마부 두 명이 엎드린 말의 머리를 양 쪽에서 잡아 “말달구지”를 만든다. 3명의 술래가 100까지 숫자를 세는 동안, 술래 아닌 친구들이 말 등에 올라 타면 살고, 타지 못하든지 말 뒷발길에 차이면 죽는 놀이이다. 마부들은 말을 이리저리 잘 조종하여 다른 친구들이 말에 올라타지 못하게 하고, 말은 나름대로 끊임없이 뒷발질로 올라 타려는 녀석들을 견제해야 한다. 날쌘 친구들은 그 와중에 기회를 봐서 잽싸게 말 등에 올라 탄다.
만약에 말(술래)이 키가 작고 약한 아이일 경우에는 쉽게 여러 명이 올라탄다. 그러면 말이 무게를 못 버티고 자빠지고, 그걸 “짜구”났다 하며, 그 술래 세 명이 다시 술래가 된다. 그런데 약한 아이가 계속 ‘말’을 하면 자꾸 “짜구”난다. 그럴 경우에는 합의 하에 마부 중에 한 명이 대신 말이 되어 준다.
말에 올라타지 못해 죽은 친구가 세 명 이상이면 죽은 친구 중에서 3명의 술래를 정하고, 술래 세 명은 풀려난다. 만약 죽은 친구가 한 명 뿐이면 1등 술래만 풀려나고, 2등 술래는 1등 술래가 되고, 말은 2등 술래가 되고, 죽은 친구가 말이 되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재미있는 놀이도 내 사랑 야구 에는 비할 수가 없었다. 내가 국민학교 5학년(1964년)때 우리 학교에 야구부가 있었는데 감독 선생님이 박상주 선생님이셨다. 난 야구 선수가 되고 싶어서 우야든동 선생님 눈에 띄어보려고 학교 운동장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야구부들 연습 할 때마다 난 외야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흘러나오는 볼을 주워서 홈플레이트에 던졌다. 내 어깨가 그런 대로 괜찮다고 나름 과시하는 거였다. 박상주 선생님이 지나가는 길목을 지켰다가 우연을 가장하여 야구 배트를 쥐고 그럴 듯한 똥폼도 잡고, 틈틈이 친구들을 규합하여 눈에 띄는 곳에서 야구 시합도 하고… 어떻게든 박상주 선생님 눈에 들어 야구선수가 되고 싶어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무심하게도 박상주 선생님은 나에게 눈길 한 번 안주셨다.
야구시합을 할 때 파울볼을 “할로볼”이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일본식 발음이지 싶다. 우리는 할로볼을 “할마이 볼”이라고 하였다. 귀에 잘못 들리는 대로 발음한 거지만, 파울볼과 허리 굽은 할마이가 어쨌든 이미지가 맞았던 모양이다. 야구시합 구경하다가 타자가 파울볼을 치면 구경꾼은 일제히 “할마이 볼”이라고 외치곤 하였다. 타격이 약한 타자를 보고 요즘은 솜방망이라고 놀리는데, 그 때 우리는 “무시(무우) 빳다”라고 놀렸다. 그 때의 우리 동기들 지금쯤 모두 할바이, 할마이 되었으리라.
어쨌든 야구 선수가 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러던 어느 날, 운동장에서 얼쩡거리고 있는데, 배구부를 지도하시는 허원석 선생님이 배구공과 배구네트를 들고 나오면서 나더러 배구네트 치는 걸 도와 달라고 하셨다. 배구네트 치는걸 도와 주는 와중에 느닷없이 “너 몇 학년이야” “5학년입니다” “너거 담임선생님 누구야” “성병태 선생님입니다” “그래 너거 담임 선생님한테 이야기 할 테니까 니 오늘부터 배구 선수 해라”
그 당시 허원석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서 제일 무서운 호랑이 선생님이셨다. 싫다고 하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그 강력한 카리스마에 눌려 찍소리 못하고 그날 부로 유락국민학교 배구선수가 되었다. 당시 배구시합은 9인제(극동식)와 6인제(국제식)가 있었는데, 국민학교 배구시합은 9인제였다.
우리 학교 9인제 배구선수 팀에 선수는 달랑 10명이었다. 9명은 6학년(40회)이고, 한 명은 5학년(41회)인 나였다. 야구가 정말 하고 싶었는데 얼떨결에 끌려와 억지로 배구를 하다 보니 배구 기초부터 배웠지만 실력이 좀체 늘지 않았다. 6학년 9명은 주전선수, 5학년인 나는 후보선수로 배구 연습을 하였다. 연습 도중 실수하면 기합도 받고 얻어 맞기도 했다. 한 번은 수비 연습 도중 한 명이 볼을 토스 하면서 방귀를 뿡 뀌니까 다른 한 명이 볼을 받으며 방귀를 뿡 뀌었다. 연달아 방귀를 뿡뿡 뀌어 대니 그 무서운 허원석 선생님도 웃고 우리도 웃었던 재미있는 추억도 있다. 수시로 내성국민학교로, 명륜국민학교로 연습게임을 하러 갔는데 가끔 멤버 체인지를 하여 나로 하여금 실전 감각을 익히게 하였다. 그때마다 실수 할까 봐 긴장되어 죽을 지경이었다. 다행히 내 포지션이 “후위 레프트” 였기 때문에 시합 때 나에게 공이 올 확률은 적었다. 간혹 전위나 중위에서 볼 처리하다가 흘러나오는 볼을 잘만 받아 올려 주면 되었고, 서어비스 실수만 하지 않으면 되었다.
9인제 배구는 먼저 21점을 내면 한 세트를 이기는 규칙이었다. 서어비스를 두 번 넣는데 첫 번째는 “강서브”를 넣고, 실수하면 두 번째는 “안전서브”를 넣었다. 두 번 모두 실수 하면 “더블 폴트”로 한 점을 실점 하는데 “더블 폴트”를 “따~볼”이라고 하였다. 이 또한 일본식 발음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그러던 어느 날 6학년 선수 중 한 명이 -내 기억으로는 9인제 배구 중 제일 중요한 포지션인 중위 센터를 맡은 핵심 멤버로 기억 하는데- 허원석 선생님과 며칠 간 소곤소곤 이야기 하더니 어느 날부턴가 보이지 않았다. 그 선수가 중학교 입학 시험 때문에 부모님이 배구를 못하게 해서 중도에 선수를 그만두게 되었다고 나중에 선생님이 우리에게 이야기 해 주셨다.
9인제 배구시합에서 선수 10명 중 한 명이 그만 두었으니 선수는 달랑 9명. 한 명이라도 다치면 시합에 출전 못 할 사태가 되었고, 졸지에 나도 본의 아니게 후보에서 주전 선수가 되고 말았다. 내가 정말 존경하고 좋아하는 담임 선생님이 연습 할 때 구경 나오곤 하셨는데 그 때마다 실수 할까 봐 바짝 얼어서 주눅이 들곤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시합날이 다가왔다. 대신동 공설운동장으로 몇 분 선생님과 함께 우리 선수들이 갔다. 동래 전차역(전철역이 아님)에서 전차를 타고, 서면에서 운동장행 전차를 갈아 타고, 공설운동장에 가는데 그 길이 왜 그리 멀던지.
제일 키가 큰 6학년 김용재 선수가 중위 레프트 겸 우리팀의 유일한 공격수였는데, 선생님이 속공 플레이도 지도하였지만 잘 되진 않았었다. 시합 내내 공은 거의 중위센터로 가는데, 중위센터를 위시하여 수비수들이 공을 전위센터로 토스하면 전위센터가 볼을 띄워 주고 중위레프트 공격수가 강스파이크를 하는 아주 단조로운 공격 패턴을 가지고 시합을 하였다.
오전에 첫 시합은 봉래국민학교와 붙었다. 우리동네 애들이 응원 와서 내 실명을 외치면서 “허석경 파이팅”하는데 안 그래도 시합 경험도 없고 첫 시합이라 바짝 얼어 붙어 있는데 어찌나 창피 하던지. 저놈의 새끼들 쓸데없이 와가지고 사람 쪽 팔리게 한다고 속으로 욕하면서 시합을 하였는데 다행히 우리 학교가 이겼다. 더 다행스런 것은 시합 내내 내 쪽으로는 공이 거의 오지 않았고 중위에서 대부분의 공격을 처리하였다는 것이다. 공격수의 공격도 그 날 따라 상당히 좋았다.
어쨌거나 이겨서 기분 좋았다. 점심 먹으러 선생님들과 근처 국밥집에 갔다. 곰탕인지 설렁탕인지 모르겠지만 선생님 중 한 분이 “너거 이거 먹을 줄 아나?” 하니까 6학년 중 한 명이 “없어서 못 먹습니다.”라고 씩씩하게 대답하였다. 진짜로 국물이 어찌나 시원하던지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나 싶었다. 선수들 모두 국물 한 방울 안 남기고 그릇에 구멍이 날 정도로 닥닥 긁어 깨끗이 비웠다. 오후 시합에서는 어느 학교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쉽게도 시합에 지고 말았다.
실전에 참가 한 후 자신감이 붙어서 그런지 나의 배구 실력이 갑자기 엄청 좋아졌다. 그 당시 선생님들끼리 편 갈라서 친선 배구 시합을 자주 하셨는데 시합 전 어느 선생님이 나와 토스 연습을 하였다. 내가 토스를 정확하게 잘 하니까 그 분이 허원석 선생님 보고 “선생님, 요놈 토스 하는 것 좀 보소. 진짜 잘 하네.”하고 칭찬하였다. 그 말에 허원석 선생님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던 것이 기억난다.
해가 바뀌어 6학년이 되었는데 5학년 때 담임 이셨던 성병태 선생님이 6학년 때도 담임이 되셨다. 무척 기뻤는데 그만 학기초에 수정국민학교로 전근 가시고 다른 선생님이 새로 담임이 되었다. 그 당시는 중학교도 원하는 학교에 입학 시험을 치고 들어가던 때이다. 그래서 중학교 입학 시험 대비 하느라고 방과 후에도 바로 집에 안 보냈다. 학교에서 보충수업도 하고 시험도 치고 자습도 하는 등 오후 늦게까지 있다가 하교 하였다. 하교 후 집에서 저녁 먹고 바로 담임선생님 댁에 가서 과외수업을 받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갔다. 담임선생님이 자기 제자들을 사적으로 따로 불러 과외 수업을 하면 안되지만 그 시절에는 그런 일이 다반사였다. 공부에 지쳐 매일 잠이 모자랐다. 학교에서는 점심 먹고 오후만 되면 잠이 와서 파리약 먹은 파리처럼 비실비실 맥을 못 추었다.
그러던 6학년 늦봄 어느 날, 드디어 다시 배구부가 결성되어 연습을 시작 하였는데 나는 중위센터를 맡았다. ‘배구부들 연습하라’고 6학년 각 반마다 허원석 선생님 반의 전령이 뜨면, 나는 담임선생님에게 나간다고 보고도 안하고 괴성을 지르며 용수철처럼 운동장으로 튀어나가곤 하였다. 교실에서는 비실거리다가도 운동장에만 나가면 왜 그리 기운이 펄펄 나던지. 감독선생님 나오길 기다리면서 배구공을 하늘 높이 쳐 올렸다가 손으로 받고, 올렸다가 받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신나게 날뛰었다. 그때는 실력이 붙어 선생님들이 연습하는 모양을 구경하러 오시면 더 신바람 나서 잘 하였다.
시합은 여름방학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6학년 1학기, 오후 시간은 잠도 오는데 지겨운 공부 안하고 운동만 하면 된다고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배구선수들 연습하러 나오라는 전갈이 없었다. 잠은 오고 몸은 뒤틀리고 운동장이 눈에 아른거리고 죽을 지경인데 하마나 오늘은 연락 올까… 기다려 봐도 연락은 없었다. 한 일주일 기다리다가 도저히 못 견뎌서 허원석 선생님을 찾아갔다. 요즘 왜 배구선수들 연습 안 시킵니까 따지듯이 물었더니 올해는 배구시합에 출전 안 하기로 했다는 대답이셨다. 정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와요”하고 성질 내면서 물었더니 작년까지는 “9인제”로 시합 하였는데 올해부터는 “6인제”로 시합이 바뀌었다고. 그런데 우리 학교에서는 6인제 배구를 지도해 본 경험이 있는 선생님이 한 분도 없어서 출전 안 하기로 하였다고 하시는데 정말 야속하기 짝이 없었다. 그 다음날부터 오후 시간이 왜 그리 지겨운지. 그 어려웠던 오후 시간…
그럭저럭 시간이 흘러 졸업하였다. 내가 유락국민학교에서 9인제 배구 실전 경험이 있는 마지막 졸업생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 년 앞서 졸업한 8명의 40회 선수와 내가 유락국민학교 마지막 9인제 배구선수인 것이다.
지금도 나는 배구와 야구를 무척 좋아한다. 동문회 등 친선 모임에서 경기가 있을 때는 배구 선수, 또는 야구 선수로 활약한다. 아내는 내가 배구 선수로 뛸 때 참 멋지다고 한다.
나에게 배구를 가르쳐주신 허원석 선생님, 그리고 한번만 봐주었으면 하고 애타는 나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박상주 야구 감독 선생님, 그립습니다.
또한 8명의 40회 마지막 9인제 배구선수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가끔 궁금해진다.
2013년 7월 5일
[40회 졸업앨범에서 발췌,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필자]
첫댓글 유년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재밌는 글 감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