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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의 세번째 부인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비(1418~1441)는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여인이다.
그의 남편 문종은 처복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문종은 14세때 김오문의 딸과 결혼했다. 세자빈이 된 희빈 김씨는
세자보다 나이가 많고 질투심과 독점욕이 강했다고 한다. 세자를 잡아놓기 위하여 별별 미신을 다 좇아다니며
각종 비방을 동원한다. 그 방술로는 세자가 좋아하는 궁녀의 신을 훔쳐 태운 후 가루를 술이나 차에 섞어 마시게 하거나
교미중인 뱀을 잡아 가루로 만들어 타먹이는 등 참으로 다양했다고 한다. 이렇게 여러가지 비방을 동원하게 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발각되어 폐서인 된다. 그의 아버지는 부인과 딸을 음독자살케 하고 본인은 할복자살한다.
두번째 세자빈 순빈 봉씨는 세자와 동갑이었으나 색을 무척 밝혔다고 한다. 병약한 세자는 봉씨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여 점점 사이가 멀어지게 되자 그녀는 여종 소쌍(召雙)과 동성애에 빠지게 된다.
소문이 커져 세종비 소헌왕후가 불러 꾸짖게 되자 오히려 뻔뻔하게도 자신의 엽기소행을 정당하다고 주장하다가
폐출되기에 이른다.이때 현덕왕후 권씨는 세자궁 궁녀로 들어와 있다가 문종의 성은을 입어 임신하게 된다.
순빈 봉씨는 거짓으로 자기도 회임하였다 하면서 임신한 궁녀를 불러다 회초리를 치고 발각되자 유산이 되었다고
거짓말을 하는 등 문제아로 떠오른다.폐출된 후 친정에 와서도 뉘우침이 없이 아버지의 자결권유도 거부하여
결국은 아버지가 딸을 목졸라 죽이고 만다.
그후 현덕왕후 권씨가 세번째로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며 단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24살이다.
세자빈이 죽자 세종 내외는 5일간, 세자 문종은 30일간 상복을 입었다.
조선조 500년 동안 가장 억울하고도 원통한 왕비로는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와 문종비 현덕왕후를 꼽는다.
공교롭게도 두사람 모두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능을 파헤침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자신의 자식들마저 반역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비운의 왕비라는 공통점이 있다.
현재 반월공단이 있는 목내동 능안리에 가면
관우물지(棺井址) 표석이 있다.
현덕왕후의 능은 3개월에 걸친 공사 끝에 경기도
안산 와리산 바다가 굽어보이는 자락에 안치하고
'소릉(昭陵)'이라 불렀다. 능지를 정할 때 노비
지관 목효지가 세종에게 능소가 풍수지리적으로 흉한 땅이라는 상소를 올렸다. 능지가 산의 내룡이 얕고 약하기 때문에 아이를 나면 죽어버리며
또 10여 군데나 길이 나 맥이 끊어져 생기가
이어지지 못하였다.이는 마치 진나라가
만리장성을 쌓느라 산을 끊어 망한 것처럼 좋지
않다고 했다. 또 능지를 둘러싼 좌청룡이 물을
끼고 곧게 달아나는 형세이기 때문에 장자와
장손이 일찍 죽는다고도 했다.
또한 안산은 풍수가들도 꺼리는 고현(古縣)이기 때문에 이러한 곳에 묘를 쓰면 부녀자가 미천하게 되기때문에 매우 좋지 못하다고 했다. 이러한 건의를 받은 세종은 능지를 재조사토록 했지만 결국 신하들의 반대로 묵살되고 만다.
목효지의 말처럼 세종의 장자인 문종은 39세의
나이로 일찍 죽는다. 또한 1456년(세조 2년)
6월26일 창덕궁에서 벌어진 사육신들의 세조 암살기도 사건과 그 이듬해 현덕왕후의 어머니 최씨와 동생의 단종 복위 음모 발각 사건으로 현덕왕후는 폐출돼 서인으로 강등된다. 종묘에서 신주가
철거되고, 왕비의 능도 격하돼 소릉은 파헤쳐지고 시신은 시흥 군자 바닷가 10리 바깥에 내팽개쳐지는 등 수난을 당하게 된다. 그 후 현덕왕후 복위 문제에 대해 여러 차례
논의가 있었지만 번번이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쳐 중단되고 만다.1513년(중종 8년) 2월18일 종묘의 소나무가 큰 벼락을 맞는 사건이 일어난다. 중종이 놀라 종묘에 위안제를 친히 지내고 돌아와 경복궁 사정전 처마 밑에 앉아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지를 여러 신하들에게 묻자 돌아가신 현덕왕후의 일과 관계가 있는 것이라며 복위를 반대하던 신하들까지
한결같이 복위를 주장하게 된다. 마침내 중종은 현덕왕후 권씨의 위호를 추복해 종묘에 신주를 모시고, 문종이 묻힌 현릉 왼쪽 능선에 시신을 이장한다.한편 두 능 사이에는 소나무가 우거졌다. 천장을 마치자 바로 그 나무들이 말라 죽었다.
천장 감독관 장순손이 역군에 명해 말라 죽은 나무를 잘라 내서 그 가운데를 트게 하니 두 능 사이가 막힌 것이 뚫렸다.
또 능을 옮기던 날 안산의 옛날 능지에서는 맑은 하늘에 갑자기 큰 비가 내리다가 조금 후에 그쳤다.
사람들은 다 현덕왕후의 영혼이 하신 일이라고 했다. 현덕왕후는 세조가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던 날에는 세조의 꿈에 나타나 꾸짖으며
세조의 자식들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세조는 그 날밤 20세의 동궁을 잃었고 세조를 이어 즉위한 예종 또한 현덕왕후의 저주 때문인지 즉위 1년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 대노한 세조는 죽은
현덕왕후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녀의 능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능에 이르렀을 때 여인의 곡성이 땅속에서 들려 감히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세조의 엄명으로 능은 결국
파헤쳐지고 관을 들어 내려 했다.
이번에는 고약간 냄새가 나면서 관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도끼로 관을 쪼개려 하였다.
관이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모두가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도망쳐 버렸다. 세조는 직접 나서서 관을 불살라 버리려고 하였으나 갑자기 내린 소나기 때문에 세조는 결국 포기하고 분을 삭이지 못한 채 관을 바다에 던져 버리고 말았다.
관은 바다를 떠다니다 어느 날 양화나루에 닿았다.
이날 새벽 관을 발견한 마을 농부가 현덕왕후의 관인지도 모른채 양지바른 곳에 잘 묻어 주었다.
그 날 밤 농부의 꿈에 왕후가 나타나 자신이 관의 주인임을 밝히고 고마움을 표하며 앞날을 알려줘
농부는 점점 부자가 되었다.그후 조정에서 현덕왕후의 능을 복원해야 한다는 논의가 기회있을 때 마다 제기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513년 종묘에 벼락 친것이 계기가 되어 다시 진지하게 논의가 이루어 졌다.
결국 그녀가 죽은지 50년만에 조광조의 상소로 현덕왕후의 관을 찾아 능을 복구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조정에서는 먼저 왕후의 관을 찾으려 하였으나 자신에게 해가 돌아올 것을 겁낸 농부는 왕후의 능을 숨기고 있었다.
어느날 현덕왕후가 농부의 꿈에 나타나 부탁하여 결국 농부가 관아에 신고함으로써 왕비는 지금의 동구능 동편에
모셔지게 되었다. 당시에는 문종 왕릉과 왕후의 능 사이에 소나무가 우거져 있었으나 나무들이 저절로 말아버려
능이 서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세조의 꿈에 나타나 저주를 퍼부었던 현덕왕후는 어느날 꿈에 나타나
세조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세조는 침을 피하려고 몸을 돌렸으나 등에 맞고 말았다.
그 뒤로 세조는 침을 맞은 부위에 등창이 나 평생을 고생하며 살았다. 세조는 등창을 치료하기 위해 온천욕을
자주 즐겼으며,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사찰을 찾는 일이 많았다.
어느 날 세조가 오대산 상원사로 행차하였다가 계곡에서 관대를 벗어 놓고 목욕을 하고 있을때
등 부위에 손이 닿지 않아 난감해 하고 있었다.이 때 어디선가 동자승이 나타나 세조의 등을 밀어 주었다.
지체 높은 임금의 몸에는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것이 당시의 법도로 이를 어기면 중형을 받기도 했다.
세조는 동자승에게 누구에게도 임금의 등을 밀어 주었다는 이야기를 하지 말도록 당부했다.
세조의 당부를 들은 동자승은 태연하게 "왕은 어디가서 문수동자가 등을 밀어 주었다고 하지 마시오"라는 말을
남기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뒤로 세조는 침을 맞은 부위에 등창이 나 평생을 고생하며 살았다.
세조는 등창을 치료하기 위해 온천욕을 자주 즐겼으며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사찰을 찾는 일이 많았다.
이후 등이 나은 세조는 비로서 부처의 은혜를 받았음을 알고 불교에 더욱 심취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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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즐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