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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근법
브루넬레스키는 미술의 영역에서도 또 하나의 획기적인 발견으로 그 뒤 수백 년간 미술을 지배했던 원근법의 발견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단축법을 이해했던 그리스 미술가들이나 공간의 깊이를 능숙하게 표현했던 헬레니즘 미술가들조차도 물체가 뒤로 물러갈수록 수학적인 법칙에 따라 그 크기가 작아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고전기의 미술가들 중에 가로수가 늘어서 있는 길이 지평선 상의 한 점으로 사라지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미술가들에게 이 문제를 수학적으로 해결하는 수단을 제공해 준 사람이 바로 브루넬레스키였다.
투시 원근법: 소실점을 기준으로 선을 연장시켜 그 선을 기준으로 입체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소실점의 개수에 따라 1,2,3점 투시로 나뉜다. 예를 들어 도시의 건물을 표현할 때 위에서 바라본 도시는 3점 투시를, 건물 모퉁이에서 바라본 건물들은 2차 투시를, 입구 정면에서 바라본 건물은 그릴 때 1점 투시를 사용한다.
공기(대기) 원근법: 멀리 있는 사물이 가까이 있는 사물보다 흐릿하게 보인다는 점을 이용하여 색채를 흐릿하게 사용하여 거리를 묘사하는 방법
성 삼위일체> 1425년경 마사초作 프레스코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교회
마사초(1401~1428이탈리아)는 대단한 천재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28살이 되기도 전에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당시 회화에 있어 완전한 혁명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위 작품은 원근법을 사용한 최초의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보면서 우리는 마치 벽에 뚫린 구멍으로 진짜 교회 안을 들여다 보는 착각을 일으킨다. 마사초가 인물들을 원근법적인 틀 아래 배치함으로써 강조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바로 이런 효과였다.
우리는 손으로 그들을 만져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바로 그 느낌이 이 인물들과 그들의 의미를 우리에게 보다 가까이 접할 수 있도록 해준다.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들에게는 미술에 관한 새로운 방법과 발견이 언제나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그들은 언제나 그런 방법과 발견을 매개로 하여 그 주제가 갖는 의미를 보는 사람이 보다 친근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십자가위의 성자,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성부, 이 둘 사이의 비둘기 모양이 성령이다)
<세금내는 예수> 1426년경 마사초作 프레스코, 페렌체 카르미네 수도원
그림의 정중앙을 보면, 예수가 12제자들과 함께 사도 베드로의 고향(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성문에서 로마의 세리가 통행세를 내라고 길을 막아선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자 예수께서 제자들 중 으뜸인 사도 베드로에게 “저기 연못으로 가 고기의 입을 벌려보면, 입 속에 은화 한 닢이 있을 것이니 그걸 세리에게 주라”고 신호한다. (푸른 옷을 입은 베드로가 3번 그려져 있음)
피렌체 카르미네 수도원 브란카지 예배당
사후에 가장 많은 제자를 둔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화가 마사초(Masaccio, 1401~1428년)를 꼽는다. 후대 르네상스 화가들이 이 화가의 작품을 베끼기 위해 카르미네(Santa Maria del Carmine) 수도원의 조그마한 예배당으로 몰려들었다. 미켈란젤로도 수시로 이곳 예배당을 방문했다고 한다.
<성 게오르기우스> 1415~16년경 도나텔로作 대리석 피렌체 바르젤로 국립박물관
브루넬레스키의 건축, 마사초의 회화와 더불어 조각에서 르네상스 양식의 창시자였던 도나텔로(1386~1466). 위 작품은 무기 제조자들의 조합이 주문한 것으로 그들의 수호 성인인 성 게오르기우스를 묘사한 것으로 피렌체의 한 교회외부의 벽감壁龕 속에 세워두기 위한 것이었다. 한치라도 양보하지 않을 결심을 한 사람처럼 두 다리를 굳건하게 땅에 박고 당당하게 서 있다. 그의 얼굴에는 중세의 성인들이 가지고 있던 망연하고 고요한 아름다움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고 활력과 집중감으로 넘쳐 있는 것만 같다. 방패위에 손을 얹고 마치 적이 접근해오는 것을 주시하는 듯한 그의 모든 태도는 도전적인 결의로 긴장된 것처럼 보인다. 이 조각상은 젊음의 혈기와 용기를 매우 탁월하게 표현한 모습으로 지금도 언급될 만큼 유명하다.
<청동 다비드像> 1444~1446년경 도나텔로作 피렌체 바르젤로 국립박물관
다윗이 골리앗의 머리를 밟고 있는 이작품은 전체적으로 여성적인 느낌을 주는데, 이러한 사실 때문에 다비드상을 양성으로 해석하는가 하면, 심지어 도나텔로(1386~1466)가 동성애적 성향을 가졌다는 주장이 펼쳐지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비드상이라고도 한다.
<가타멜라타 장군 기마상> 1453년 도나텔로作 이탈리아 파도바 산 안토니오 성당 앞 광장
말을 탄 자의 수직선, 장군이 가진 칼과 지휘봉으로 구성된 날카로운 대각선, 커다란 말의 수평적인 중량감 및 말의 네 발이 만드는 여러 개의 삼각형이 기묘한 교차를 보여주고 있다. 말의 왼쪽 앞발 아래에 있는 구슬은 물리적 평형을 갖기위해서도, 대좌臺座에서 전진하려는 말을 저지시키는 데에도, 실제상의 필요에서나 장식적인 면에서도 다 같이 동상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인체와 마찬가지로 마체馬體에도 해부학적인 정확함을 추구하였고, 다리와 코에 정맥이 부풀어 나오게 했고, 또 두부의 딱딱한 구조와 피부에도 극명한 현실의 관찰을 볼 수 있으며, 안장의 모포와 갑옷의 옷감 성질에 대해서까지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고대에 대한 공감과 철저한 사실과 근대적 지성, 이것을 무기로 하여 그는 초기 르네상스의 이상을 실현하였다.
<聖女 마리아 막달레나> 1457년경 도나텔로作 나무에 채색 높이188cm 피렌체 두오모 미술관
회개를 하고 있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더 이상 힘이 없는지 기도를 하기 위해 두 손을 모을 수도 없는 모습이다. 고행에 고행을 마다하지 않은 그녀의 몸은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아있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렇게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우리 몸의 실체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도나텔로가 표현했던 것의 본질은 늙고, 추하고, 껍데기만 남은 마리아 막델레나의 몸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거룩한 여인의 숭고한 정신이다. 참되고 높은 정신적 숭고함을 가장 추한 물질로 나타낼 수 있었던 도나텔로, 이것이 바로 도나텔로의 위대한 예술성일 것이다.
<날개를 접은 헨트 제단화>
<날개가 펼쳐진 헨트 제단화> 1432년경 얀 반 에이크作 패널에 유채, 벨기에 헨트(겐트)
聖 바보 성당
* 얀 반 에이크(1395~1441)
는 대부분 플랑드르지방(현 벨기에, 네델란드)에서 일을 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거대한 제단화이다. 많은 장면을 담고 있는 이 제단화는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되어있다. 반 에이크의 새로운 미술 개념을 무엇보다도 놀랍도록 보여주는 부분은 양 날개 부분의 안쪽에 그린 그림인 타락후의 아담과 이브의 모습이다. 성경에는 선악과를 따먹은 뒤에야 그들은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았다’고 적혀 있다. 그들의 손에 든 무화과 잎사귀에도 불구하고 정말 완전히 벌거벗은 모습이다.
이 점에서 반 에이크는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 전통을 결코 완전히 버리지 않았던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대가들과 진정으로 대치된다. 고대 미술가들은 밀로의 비너스나 아폴론 벨베데레에서 볼 수 있듯이 인물의 형상을 ‘이상화’했다. 반 에이크는 이런 것을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벌거벗은 모델들을 그의 앞에 세우고는 후세들이 그의 지독한 정직성으로 인해 다소 충격을 받게 될 정도로 그들을 충실하게 그렸을 것이다. 그가 심미안을 지니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아르놀피니의 약혼>1434년 에이크作 목판에 유채 60×82.2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유화물감의 창시자는 얀 반 에이크(1395~1441)이다. 그 이전부터 안료를 달걀에 섞어 사용하는 템페라로 화가들이 그림을 그렸지만 정교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에이크는 아마인유를 이용해 여러 시도 끝에 갖가지 기법을 정착시켰다. 유화의 발달은 특히 초상화 부분에 대단한 영향을 주었다. 유화물감으로 인물들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 에이크의 예술은 아마도 초상화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아르놀피니의 약혼’은 장사차 네델란드에 왔던 이탈리아의 상인인 조반니 아르놀피니와 그의 신부 잔느 드 쉬나나를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이탈리아에서의 도나텔로나 마사초의 작품 못지않게 그 나름대로 새롭고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 작품은 미술사 최초로 모델의 전신을 그려 넣은 2인 초상화이다. 그리고 이 그림에는 현실 세계의 단순한 구석이 마술처럼 갑자기 화면 위에 정착되었다. 여기에는 온갖 것들이 다 있다. 카펫과 슬리퍼, 벽에 걸려있는 묵주,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솔, 창틀 위에 있는 과일 등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우리가 아르놀피니 부부의 집을 직접 방문한 것만 같다. 이 그림은 아마도 그들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엄숙한 순간, 즉 그들의 약혼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거장이 그림에서 눈에 잘 띄는 곳에 라틴어로 ‘얀 반 에이크가 입회했노라’라고 그의 이름을 써넣은 것을 보면 그들의 엄숙한 행위의 현장에 있었다고 증언하는 공증인과 같이, 아마도 이 화가는 한 사람의 증인으로서 이 중요한 약속을 기록해달라고 요청받았을 것이다. 우리는 뒤의 벽에 걸려있는 거울에서 그 장면이 모두 반영되고 있는 것을 불 수 있으며, 또 화가이자 증인인 반 에이크 자신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수태고지> 1440년경 프레스코 프라 안젤리코作
프라 안제리코(1387~1455)는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수사修士로서 그가 1440년경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에 그린 프레스코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것들에 속한다. 위 그림은 그가 어느 수도사의 방에 그려놓은 ‘수태고지’ 그림이다. 우리는 그가 원근법을 구사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즉각 알 수 있다. 성처녀가 무릎을 꿇고 있는 회랑은 마사초의 유명한 프레스코의 둥근 천장만큼 실감나게 표현되었다. 그의 그림에는 거의 운동감이 없으며 실재의 단단한 인체를 암시해주는 요소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성화를 아름답고 단순하게 그리고 싶을 뿐이다. 이 그림이 지닌 겸손한 분위기 때문에 보다 감동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성 야고보> 1455년경 안드레아 만테냐作 프레스코
이 장면은 성 야고보가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도중에 개선문 앞에서 호송행렬을 잠시 멈추고 절름발이를 치유하는 전설을 재현한 것이다. 고고학적 전문 지식을 가지고 건물과 복식들을 묘사해 젊은 만테냐(1431~1506)를 단번에 인문주의자로 만들었다. 이탈리아 파도바의 에레미타니 성당 벽화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폭격을 받아 소실되었다.
<죽은 그리스도> 1478년 만테냐作 캔버스에 유채,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안드레아 만테냐(1431~1506 이탈리아)는 대상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는 원근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인물들을 단단하고 형체가 있는 존재들처럼 보이게 하기위해 조각처럼 묘사했다.
<동방박사의 경배> 1475년경 보티첼리作 패널에 템페라 111×134cm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는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로 꼽힌다. 보티첼리는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부유한 후원자였던 메디치 가문의 주문을 받아 알레고리 그림(여러 가지 의미가 수수께끼처럼 숨어있는 그림)을 제작한 것으로 유명하고, 로마 교황청의 부름을 받고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동방박사의 경배>는 보티첼리가 ‘델 라마’라는 부자의 부탁을 받고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성탄절의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과는 어울리지 않는 욕심이 끼어들어 있다. 그것은 이 그림의 제작을 부탁한 델 라마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당시 피렌체를 장악한 메디치 가문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위해, 보티첼리에게 동방박사와 수행원들을 메디치 가문 사람들로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메디치 가문 사람들에게 아부하고 자신이 그들과 친하다는 사실을 이 그림을 통해 널리 알리기 위해서 였다. 하지만 이 그림이 그려진지 얼마 되지않아 델 라마는 사업에 실패하고 정치적으로도 어려운 처지가 되어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다만 그림의 아름다움은 오늘날까지 남아 성탄의 기쁨을 변함없이 전하고 있다. 전경의 가장 오른쪽 사람이 보티첼리.
<봄> 1482년 산드로 보티첼리作 패널에 탬페라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봄>의 이야기는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왼쪽으로 진행된다.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짝사랑하는 요정 클로리스를 납치해 결혼을 하게 되고, 미안함을 느끼고는 클로리스를 꽃의 여신 플로라로 만들어 준다. 그러니까 아래 그림의 도망치는 여자와 꽃을 뿌리는 여자는 사실 동일 인물인 것이다. 그림의 중앙에는 비너스가 등장한다. 그리고 여신의 머리 위에는 그의 아들 큐피드가 날고 있다. 보티첼리는 나무 사이로 비치는 하늘을 아치형으로 그려 마치 여신의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은 시각적 효과를 유도한다. 여신다운 고고하고 도도한 표정과 빽빽한 숲이 만들어낸 명암의 대비가 여신을 더욱 여신답게 하고 그림 전체에 안정감을 더한다.
여신의 아들 큐피드는 꽤나 장난기가 많다. 하는 행동을 보면 영락없는 또래 애기와 다를바가 없다. 그러나 어린 신이 가진 힘은 만만치 않다. 맞으면 처음 보는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화살을 어딘가로 마구 쏘아대고 있는데 녀석의 화살은 누구를 향하고 있을까. 여신의 옆에서 세명의 여인이 춤을 추고 있다. 각각 순결, 사랑,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여신들인데, 가운데 여신은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사랑에 빠진 것이 틀림없다. 아마도 이 여신이 큐피드의 장난의 희생자인 모양이다.
여신의 사랑을 받는 청년의 이름은 상인들의 수호신 메르쿠리우스다. 전령 또는 심부름의 신 헤르메스로 더 유명한 존재이며 지성과 유머의 수호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본질은 '심부름꾼'이다. 신발에 달린 날개가 이에 대한 방증이 아닐는지. 보티첼리는 수많은 이야기 꾸러미들을 한데 모아 자기 나름대로 각색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이를 아름다운 그림 속에 녹여낸다. 어쩌면 아직까지도 후손들이 발견하지 못한 많은 이야기가 그의 그림 속에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가 '시인'의 칭호를 얻은 이유다.
<비너스의 탄생> 1485년경 산드로 보티첼리作 캔버스에 템페라 172.5×278.5cm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이 그림은 기독교의 전설이 아닌 고전 시대의 신화, 즉 ‘비너스의 탄생’을 묘사하고 있는 그림이다. 4세기에서 14세기까지 에덴동산의 이브나 성녀들의 고난을 그린 그림을 제외하고 천 년만에 나타난 누드작품이다. 이 그림을 주문한 후원자는 권세있고 부유한 메디치 가의 일원이었다. 그림에 묘사된 행동은 쉽게 이해된다. 비너스는 조개 껍질을 타고 바다에서 솟아나 장미꽃 세례를 받으며, 꽃의 여신인 플로라를 꼭 껴안은 서풍의 신인 제피로스에 의해 해안으로 밀려온다. 비너스가 땅에 발을 내딛으려 하자 계절의 여신인 호라이가 외투를 들고 그녀를 맞이한다.
그의 그림은 사실상 완벽하게 조화된 화면을 이루고 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는 너무나 아름답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목이 부자연스럽게 길다거나 어깨가 가파르게 처져 있다거나 또는 왼쪽 팔이 다소 어색하게 몸에 붙어 있다든가 하는 점은 그다지 주목하지 않게 된다. 우아한 윤곽선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연에 구애받지 않은 보티첼리(작은 술통이란 의미)의 이러한 자유로운 표현이 우리 해변에 떠밀려온 무한히 부드럽고 섬세한 존재에 대한 인상을 한층 드높여주고 있기 때문에, 화면의 아름다움과 조화에 보탬이 되고 있다. 이 그림은 그 자체로도 중요한 작품이지만, 그 뒤에 나온 수많은 누드화와 미인도의 모델이 되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52~1519)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
라파엘로 산티(1483~1520)
16세기 초엽은 이탈리아 미술에 있어서, 또한 전 역사를 통해서도 가장 위대한 시기였다. 이 시기는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코레조와 조르조네 등 기타 수많은 거장들의 시대였다. 이런 거장들이 어떻게 모두 같은 시대에 태어났는지 의문이 들겠지만, 이런 질문을 하기는 쉬워도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천재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차라리 천재의 존재를 즐기는 편이 좋다.
<최후의 만찬> 1495~1498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作 460×880cm
천재는 재능과는 다른 말이다. 천재라는 말은 새로운 영역까지도 개척해야 얻을 수 있는 영광된 명칭이라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는 누구보다도 이점에서 탁월했다. 그는 미술뿐만 아니라 해부학, 물리학, 광학, 군사학 등 다방면의 자연과학 영역에서 굵직한 발전을 이끌어낸 초인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그림은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리치 수도원에서 식당으로 사용하던 긴 홀의 벽화로 그려진 것이다. 이 그림에는 동일한 테마를 다룬 이전의 그림들과 닮은 데가 하나도 없다.
이 새로운 그림은 드라마가 있고 흥분이 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사도들이 너무 슬퍼서 모두가 예수께 “주여, 나니이까?”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예수는 방금 비극적인 말을 했고 그이 곁에 있던 사람들은 이 계시를 듣고 공포에 놀라 뒤로 움츠리고 있다. 예수의 말이 야기시킨 흥분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에는 혼란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 12사도들은 제스처와 움직임에 의해서 서로 연결되는 세 사람씩 네 무리로 자연스럽게 구별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변화 속에는 너무나 풍부한 질서가 있으며 또한 이 질서 속에는 너무나 다양한 변화가 내재해 있으므로 하나의 움직임과 그것을 받는 움직임 사이의 조화를 이룬 상호 작용을 살펴보려면 끝이 없다.
우리는 이 장면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알지 못해도 여전히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화면 구성을 즐길 수 있다. 인간들의 행위와 반응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그 깊은 통찰력과 우리 눈 앞에 한 화면을 생생하게 전개시켜 보여준 그의 상상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의 한 목격자는 레오나르도가 ‘최후의 만찬’을 제작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이야기한다. 레오나르도는 받침대 위에 올라가 그가 그려놓은 것을 유심히 바라보며 붓 한번 대지 않고 팔짱을 끼고 하루 종일 서 있곤 했었다고 한다. 작품이 이렇게 파손된 상태 속에서도 그가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색의 결과이다. ‘최후의 만찬’이야말로 인간의 천재성이 만들어낸 위대한 기적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
<모나리자> 1503~1506년경 다 빈치作 77×53cm 목판에 유채 루브르 박물관
우리는 너무 유명한 이 그림에 대해서 아는 것이나 안다고 믿었던 것을 다 잊어버리고 이 그림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새롭게 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먼저 감탄하게 하는 것은 리자라는 인물이 놀라울 정도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실제로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녀의 마음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같이 보이기도 한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우리의 눈 앞에서 변하여 볼 때마다 달라 보이기도 한다. 우리를 조롱하는 것같아 보이는가 하면 그녀의 미소속에 어떤 슬픔이 깃들어 있는 것같이 보이기도 한다.
화가는 보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상상할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가령 윤곽을 확실하게 그리지 않고 형태를 마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것같이 약간 희미하게 남겨두면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인상을 피할 수 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의 창안으로, 이탈리아어로 ‘스푸마토’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 속으로 뒤섞여 들어가게 만들어 무엇인가 상상할 여지를 남겨놓는 희미한 윤곽선과 부드러운 색채를 가리킨다. 우리가 표정이라 부르는 것이 주로 두 가지 요소, 즉 입 가장자리와 눈 가장자리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부드러운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게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남겨둔 부분이 바로 입과 눈 부분이다. 모나 리자가 어떤 기분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녀의 표정은 늘 붙잡을 수가 없다.
<흰 족제비를 안은 여인> 1490년경 다빈치作 목판에 유채 54×39cm 폴란드 차르토리스키 박물관
표면은 많이 문질러졌고, 배경은 조정되지 않은 검은색으로 덧칠해졌고, 좌측 상단 구석은 깨진 뒤 수리되었고, 모델의 머리 위에 있는 투명한 베일은 사치스러운 머리모양으로 바뀌었으며 손가락들은 심하게 가필된 등의 많은 손상을 입었음에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들 중에서는 양호한 상태의 작품에 속한다.
<살바토르 문디-구세주> 다빈치作 목판에 유채 66×45cm
1500년도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측되며 이 작품은 오랫동안 유실품이었다. 유럽의 궁정 벽
을 전시해오던 살바토르 문디는 1900년에 영국의 미술품 수집가의 손에 넘어갔다. 그러다 1958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단돈 60달러에 팔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진품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다. 그림은 덧칠과 훼손도 심했다. 2011년 다빈치의 진품임이 확인되었다. 진품 판정 이후에도 이 작품의 진품 여부는 계속 논란이었다. 크리스티는 이 작품을 ‘남자 모나리자’라고 적극 홍보했다. 경매를 앞두고 홍콩, 런던, 샌프란시스코, 뉴욕에서 열린 프리뷰 전시에는 2만7000여명이 몰려 단일 작품 최대 관람객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2017년 11월 15일 뉴욕의 크리스티스 경매에서 4억 5,030만 달러에 낙찰되어 사상 최고액을 달성했다. 매수자는 전화로 경매에 참여했으며, 누가 이 작품을 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세례자 요한> 1503~1506년 다빈치作 목판에 유채 69×57cm 루브르 박물관
어두운 검정을 배경으로 오른손 검지는 위를 향하고, 왼손은 가슴에 댄 채 십자가를 들고 있는 젊은이의 모습이다. 이 인물을 세례자 요한으로 보는 이유는 그가 걸치고 있는 털옷과 십자가 때문이다. 세레자 요한은 광야에서 낙타 털옷을 입고, 벌꿀을 먹고 살면서 고행을 하였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선포하며 회개를 촉구한 선지자이자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준 인물로서, 그가 광야에서 살았다는 점에 근거하여 흔히 낙타 털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 작품은 다 빈치가 평생에 걸쳐 연구한 스푸마토와 키아로스쿠로(화면 전체를 어둡게하고 중심과 강조점만 밝게 처리하여 드라마틱한 효과를 내는 기법)의 테크닉이 함께 사용되었다. 검은 배경으로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젊은이의 표정은 모호하고, 신비로우며, 얼굴의 표현은 극도로 섬세하다. 머리카락과 털옷의 표현 또한 스푸마토와 키아로스쿠로를 극대화함으로써 뚜렷한 선은 전혀 보이지 않으나 인물의 입체감을 보여주는 동시에 어둠 속에서 인물이 베일에 싸여 떠오르는 듯한 신비한 인상을 주는 데 한 몫을 하고 있다.
작품을 자세히 보면 가슴에 대고 있는 왼쪽 팔이 다 빈치의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부자연스럽게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1952년부터 10년에 걸쳐 시행된 작품 분석 결과 'RV' 사인이 밝혀짐으로써 다 빈치의 원작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다만 그림의 일부분에 다른 이가 개입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성 안나와 성 모자> 1503년 다 빈치作 목판에 유채 168×112cm 루브르 박물관
<헝클어진 머리의 여성> 1508년 다 빈치작 목판에 유채 24.7×21cm 이탈리아 파르마 갤러리
<레다> 1510년 다 빈치작 목판에 유채 112×86cm 로마 Borghese 갤러리
제우스는 레다의 아름다움에 반했다. 교녀와의 교합을 노리던 제우스는 독수리에게 쫓기는 백조로 변하여 레다의 품에 안겼고 그녀와 교합하는데 성공했다. 제우스와 동침한 그 날 레다는 남편 틴다레오스와도 동침했는데 나중에 알을 두개 낳았다고 한다. 그 알에서 헬레네, 클리타임네스트라, 카스토르, 폴리데우케스가 태어났는데 이들 중 누가 제우스의 자식인지, 누가 탄다오레오스의 자식인 분명하지 않으며 전승에 따라 다르다. 레다와 백조의 전설은 고대로부터 수많은 예술작품의 모티브가 되었고 특히 르네상스시대에 많이 사용되었다.
<바쿠스> 1497년 미켈란젤로作 대리석 키203cm 피렌체 바르젤로 국립미술관
<피에타> 1498~1499년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作 대리석 174×195cm 성 베드로 대성당
조각상의 구도를 보면 성모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무릎에 안고 있는 삼각형 형태인데, 성모를 예수보다 훨씬 크게 조각해 부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도록 했다. 자연스러운 모습을 반영하면 오히려 부자연스러워지지만, 인위적으로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취해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게 한 미켈란젤로(1475~1564)의 재능이 빛을 발한 부분이다. 성모 마리아의 얼굴은 예수보다 젊게 묘사되어 있는데, 어머니가 아들보다 젊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비판이 조각 완성 당시부터 있었다. 이에 대해 미켈란젤로는 ‘순결한 여자들이 순결하지 않은 여자들보다 젊음을 더 잘 유지하는데, 티끌만큼도 추잡한 욕망의 때가 묻지 않은 육체를 가진 동정녀라면 말할 것도 없다’고 이유를 밝혔다.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이라고도 한다.
<다비드> 1501~1504년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作 (받침을 제외하고)키 410cm 피렌체 갤러리아 델 아카데미
피에타(슬픔, 비탄의 의미)의 유명세 덕분에 20대 초반의 나이에 거장의 반열에 오른 미켈란젤로는 1501년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위원회로부터 다비드를 조각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미켈란젤로에게 주어진 대리석 덩어리는 1475년에 조각을 맡았던 안토니오 로셀리노가 초벌 작업으로 돌을 다듬어놔서 다비드가 골리앗의 머리를 밟고 있는 전통적인 자세를 나타내기에는 대리석의 여유분이 모자랐고, 이에 따라 미켈란젤로는 골리앗을 향해 새총을 쏘려는 자세를 선택했다. 다비드 상이 세상에 공개되자 세간의 반응은 가히 열광적이었다. 화가이자 ‘예술가 열전’의 저자인 조르조 바사리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본 사람이라면 그 어떤 다른 조각가의 작품도 볼 필요가 없다”고 극찬하였다.
현재 다비드 상을 보면 묘하게 비율이 맞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본래 다비드 상이 두오모 성당 중앙 돔 천정 아래 끝선에 올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얼굴의 높이가 약 50m지점에 위치하게 된다. 바닥에서 올려다보는 사람들에게 조각상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게 된다고 판단한 미켈란젤로가 일부러 다비드의 머리 부분을 크게 제작하였다. 현재는 그 높이에서 보지 않으므로 머리가 살짝 크게 보이는 것이다. 또 다비드 상의 눈을 보면 하트 형태로 눈동자가 만들어져 있는데 이는 햇빛을 받으면 마치 눈이 이글거리는 느낌으로 나타나도록 표현한 것이다.
<성 가족도> 1506년 미켈란젤로作 패널에 템페라,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이 작품의 모티프가 15세기 피렌체 미술에서 새롭게 드러나는 것은 아기 예수의 양아버지인 요셉의 역할이 특히 부각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요셉은 성모의 남편으로 아기를 직접 안고 그녀에게 건네주고 있는데 과거 성화에서는 볼 수 없는 점이다. 성 프란체스코 때부터 15세기 말경 프랑스에서는 요셉이 공경 받는 새로운 경향이 있었으며 이런 영향을 받아 미켈란젤로가 요셉의 역할을 능동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닌가 학자들은 짐작한다.
<아담의 창조> 시스티나 천장화 일부
여기에서 우리는 조물주의 모습을 본다. 미술가들 뿐만아니라 미켈란젤로라는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도 수십 세대를 통해서 각인되어 떠오르는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은 미켈란젤로가 그의 천지창조에서 그려보인 그 위대한 비전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형성되고 만들어 졌다고 하여도 절대로 그것은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손을 뻗치자 아담의 손가락에 채 닿기도 전에 이 최초의 사람은 마치 깊은 잠에서 막 깨어난 듯 그의 창조주인 아버지 하느님의 자애로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미켈란젤로가 하느님의 손길을 이 그림의 중심에 두어 초점으로 만들고 의연하고 힘찬 창조의 모습을 통해서 신의 전지 전능함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든 방법은 미술의 가장 위대한 기적 중의 하나이다.
<모세> 1513~1515년경 미켈란젤로作 대리석 로마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
구약성서는 시나이산에서 십계명 석판을 들고 내려오는 모세를 묘사하고 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다가서자 얼굴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광선(ray)에 해당되는 히브리어가 ‘keren’인데, 성경이 라틴어로 번역될 때 이 단어가 ‘horn(뿔)’으로 잘못 번역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라틴어판 성서를 읽은 사람들은 모세가 뿔이 났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도 그런 오류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죽어가는 노예 or 잠자는 노예 > 1513~1516년경 미켈란젤로作 대리석 높이229cm 루브르 박물관
그들이 나에게 말했다. “만일 잠자는 노예를 발견하면 그를 깨우지 마시오. 그는 자유를 꿈꾸고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만일 잠자는 노예를 발견하면 그를 깨우고 자유에 대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칼릴 지브란-
<십자가를 쥔 그리스도> 1521년 미켈란젤로作 대리석 키205cm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로마 판테온 신전에서 2분거리)
<최후의 심판> 1533~1541년 미켈란젤로作
1533년에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명으로 시스티나 경당에 그려진 벽화로 1534년 교황의 선종으로 일시 중단되었다가 이어 교황이 된 바오로3세가 다시 이 작업을 의뢰함으로써 결국 1541년에 완성되었다. 하지만 그림을 보고 추기경을 비롯한 성직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그림에서 대부분의 인물이 나체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수의 모습이 기존의 성화와는 다르게 아폴론에 가깝게 묘사되고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등 과격한 묘사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수많은 성직자들과 추기경들은 “이런 나체화는 성당에 어울릴지 않는다”고 탄원했다. 그래도 이 그림을 인정한 바오로 3세 생전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지만, 바오로 3세가 선종한 이후 소집된 1564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비속한 부분은 모두 가려져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져 결국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다니엘레 다 볼테라가 그림의 인물에 옷을 그려 가리는 것으로 일단락이 된다. 하지만 이 때문에 볼테라에게는 현대까지도 ‘기저귀 그리는 화가’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명이 따라다닌다.
최후의 심판 오른쪽 하단에는 미켈란젤로에게 사사건건 간섭을 한 체세나 추기경을 ‘지옥의 수문장 미누스’로 그려넣었다. 미누스의 귀는 당나귀귀로 표현되었는데 당나귀의 귀는 무지의 상징이고 또 성기마저 뱀이 물고 있게 그려, 인간의 성적 방종에 대한 하느님의 가혹한 심판을 보여준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미켈란젤로 본인의 얼굴도 있다. 그림의 중간에 사도 바르톨로메오가 들고 있는 살가죽의 얼굴이 미켈란젤로의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