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동국대 불교대학 학장인 서경보스님이 필자를 찾았다. 서경보스님은 자주 찾곤 하기에 평상시의 일인가고 생각하면서 학장실로 올라갔다. 파안의 미소를 지으면서 서류를 건네면서 여기에 다 기록하고 갖추어 제출하라고 하였다. 뭔가도 모르고 서류를 건네받았는데, 이건 인사서류가 아닌가. 가슴이 두근거리고 놀라움과 기쁨이 함께 겹치면서 한동안 멍하였다. 1975년 3월에 임명될 전임강사의 서류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해 왔기에, ‘이번일도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생각을 깊이 하게 됐다.
그래도 불교학과 교수 가운데 마음깊이 헤아려주는 분이 있었기에 신원보증을 부탁드렸더니, 즉시에 그렇게는 못한다고 거절당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는가. 꼭 믿었던 분으로부터 반대의향의 내심을 알게 되었으니, 서류구비를 다른 방향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사실 동국대 불교대학에 전임이 된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격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인사문제는 이선근 박사의 원대한 이상을 실천하는 방법이었다.
지인에 보증 부탁…거절에 가슴 시려
임명된 후 초심으로 학생지도 “행복”
한쪽에서는 반대하고, 다른 쪽에서는 서류제출을 독촉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어서 당시 교무처장과 기획실장의 보증을 받고 제출했다. 구절양장이었다. 필자는 세상을 살면서 남을 괴롭히지도 않고, 신세지는 일도 삼가면서, 어떻게 하면 남을 돕고 사는 인생이 되기를 바라면서 왔는데, 필자의 가장 소원이었던 전임이 되는 때에 주변에서 반감을 사게 되었으니 앞으로의 길이 아득하였다. 어찌되었던 인사위원회에서 통과되고 재단 이사장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게 되었다.
절대로 감정노출을 자제하도록 다짐하였다. 개인연구실 없던 것이 전임강사가 되었으니 커다란 연구실이 생겼다. 책상도 서가도 전화까지 새롭게 구비되니 천하를 얻은 듯 했다. 새벽 일찍 일어나 매일 등교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교수회관 3층에서 남산을 바라보는 것은 기쁨이었다. 그 싱그러움이 가슴 가득히 스며올 때 자신도 푸르름으로 장엄되는 듯 하고 연구하는 것도 잘 진행되고 정말 신바람 나는 교수법이 솟구쳤다. 자만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과의 교수님들을 존경하는 마음을 기울였다.
강사시절에는 항상 경제적으로 곤핍하였다. 온갖 일들을 마구잡이로 많이 하였다. 외부 강의, 법회, 잡문 원고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도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데 전임강사 월급봉투를 집사람에게 내어 밀었더니, 이 많은 돈이 어디서 생겼냐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묻곤 하였다. 그동안 어렵게 살아온 것이 저 눈물에 흘러나온 것이리라.
봉급을 이렇게 많이 받고 보니 학교일을 등한시 할 수 없고, 강의도 성의껏 하여야하고, 학생지도, 사회봉사도 열심히 하였다.
당시 KBS ‘유쾌한 응접실’의 단골손님으로 출연해 열심히 방송하고, 시민들에게 유익한 말씀을 전달했다. 이러한 일들도 모두가 사회봉사의 일환이었고, 학생지도는 동국대 유네스코지부 지도교수가 되어 농어촌봉사운동을 열심히 하였다. 여름 봉사 때는 충남 담배 밭에 갔다. 당시 담배 밭의 더위는 대단했다. 학생들의 얼굴이 땀범벅이 되고, 그 무거운 담배 단을 지게에 지고 건조장으로 옮기고 하면서도, 낮에는 느티나무 그늘에서 자는 낮잠은 참으로 달가웠다. 이 모든 것이 전임강사가 된 이후에 얻어진 영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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