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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보제1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다.
"이 반가사유상의 아름다움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을 초월한 것이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한아(閑雅 :막을수 없는 아름다움)의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숨을 내쉬게조차 한다.
서양인은 모나리자의 미소를 최고로 여겨 '영원한 미소'라고 예찬하는데
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나란히 놓는다면 모나리자의 미소 정도는 당장 안색을 잃을 것임에 틀림없다."
미술사학자 해곡 최순우는 이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의 미소를 아낌없이 예찬하고 또 예찬하고 있다.
동서양의 지성인들이 세계 최고의 걸작품이라고 다투어 격찬하는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다.
"이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을 누가 만들었나?"
여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끝임없이 던지는 질문이다.
"조선인이냐? 일본인이냐?" 한때는 한일간에 뜨거운 쟁점이 되기도 했다.
이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을 모시고 있는 교류지(광륭사) 사찰연혁을 새긴 비석이다.
광륭사의 창건주 泰河勝(하타노 가와카쓰) 앞에 글자를 대폭 삭제한 흔적이 보인다.
광개토대왕비도 파내고 위조한 일본인이다. 충분히 사찰연력 비석도 손을 댔을 일본인이다.
"泰河勝 앞에는 '신라나 백제 등에서 온' 글자들이 있었으나 일본인들이 지웠을 것으로 보인다.
글자 몇 개 지운다고 역사적 사실을 아주 지워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단국대 정영호 박사는 이 사찰연혁비석에서 삭제된 글자에 높은 관심을 보이면서 일본인들의 의도를 의심한다.
미국의 존 카터 코벨 박사는 하타노 가와카쓰(泰河勝)의 인물과 함께 목조미륵반가사유상에 대한 명쾌한 답을 제시했다.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안치된 <고류지(광륭사)>는 603년 한국에서 이주해 온 직물기술자 하타노 가와카쓰
(秦何勝)가 건립한 절이다. 그는 한국계 혈통을 지닌 <쇼토쿠 태자>와 절친한 사이였다.
쇼토쿠 태자가 48세에 홍역으로 급사하자 하타노는 자신이 세운 절, 고류지에 자신이 존경했던 쇼토쿠 태자를
기리려는 미륵보살상을 신라에 주문했다. 신라의 장인은 시일이 촉박하여 청동으로 주조하는 대신 적송 통나무
하나에서 걸작 미륵보살상을 깎아내고 그 위에 금을 입혔고, 그 불상이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다.
봄에 서거한 태자를 기린 금부처가 7월(623년)에 도착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통해서 불상의
일본 도착 시기도 알 수 있다."
존 카터 코벨박사는 서구학자로서는 처음으로 1941년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일본 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20여년 동안 캘리포니아 주립대와 하와이 주립대에서 동양미술사 교수로 재직했던 그다.
일본 국내외에서 많은 전문가들이 유력 증거와 함께 백제나 신라 제작 사실을 제시하면서 일본제작설은 자취를 감춘다.
고류지 영보전 전경이다. 미륵보살반가사유상 등이 봉안되어 있는 곳이다.
황수영 박사는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우리나라에서 만들어 일본에 보낸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첫째 일본의 초기 반가사유상들은 히노기(노송나루)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상은 적송(赤松)을 쓰고 있는 점이다.
적송은 일본에서도 분포하지만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적송의 산출이 많았다.
둘째 제작기법상의 차이이다.
일본의 초기 반가상은 나무의 외피(外皮)로부터 내부를 향하여 조각한다.
이 상은 나무의 목심(木心)에서부터 조각을 시작하고 있는 점이다.
셋째 이 광륭사 상은 한 토막 나무에서 그 전체를 조각해 낸 것이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이만한 불상을 만들자면 몸의 각 부분을 여러 개의 나무로
따로따로 만들어 조립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
넷째, 『일본서기』나 광륭사 관련기록에 623년 신라에서 다른 불구들과 같이
일본에 보낸 불상에 관한 기사가 있어 이 상을 기록에 나오는 상으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광륭사의 창건주가 하타노 가와가쓰(泰河勝)라는 신라계의 호족으로
당시 일본의 쇼오도쿠(聖德)태자와 가까운 관계였다는 점도 고려해 볼 만 한 문제이다.
또 이 상이 경주에서 전래한 한국의 국보인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와
양식이나 연대에서 닮고 있다는 사실도 지적된다."
미륵반가사유상의 출처에 대한 황수영의 주장을 이어서 본다.
"이런 반가사유상은 비슷한것이 우리 나라의 국립박물관에 2개,
그리고 일본의 국보 1호로 지정된 일본 고류지(廣隆寺)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 등
현재까지 알려진것은 모두 3개다. 물론 이외에도 몇 종류가 더 있지만
유명세를 타고 있는 반가사유상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그런데 3개의 반가사유상이 모두 제각각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먼저 유사한 형태이면서도 결코 같은것이 아니라는 점이며,
두번째는 3개 모두의 정확한 출처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양식적 특성으로도 유사한 형태의 불상이 나타나지 않는 관계로
다른 불상과 비견하여 결정하기 어려운 입장으로
문헌이나 출처를 근거로 하여 어느시대의 조성물인가를 판단해야 하지만
그 마저도 일관성이 없어 지금은 그저 삼국시대의 반가사유상이라고 명기하여
이 불상의 출처로 인한 갑론을박을 애써 피하고자 하고 있다.
일본 속의 백제문화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온 홍윤기교수가 그동안 언론에서 밝힌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다.
필자는 그간 수집해온 역사 연구 사료들을 가지고 보다 구체적으로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검토하기로 한다.
우선 신라 도래설이다. 미술사학자 미스자와 스미오(水澤澄夫) 교수는 다음처럼 지적했다.
“서기 603년에 아스카의 왜 왕실에서 쇼토쿠태자에게서 보관반가상을 모셔다 교토 고류지를 처음 세운 하타노카와카쓰
(秦河勝, 6∼7C)는 신라계 사람이다. 고류지의 미륵상이 신라 양식이라는 것만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수긍이 간다”
(‘廣隆寺’ 1975)고 했다.
미술사학자 미즈노 세이치(水野淸一) 교수도 “적송 보관반가상은 신라에서 보내준 것이며,
서울의 덕수궁미술관(일제 치하,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필자 주)에 있는 금동반가상(90㎝)과 똑같다”
(‘法隆寺’ 1978)고 밝혔다.
교토대학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도 그의 저서에서 고류지의 적송 보관반가상은 신라 불상이라며
다음과 같이 썼다.
“현존하는 미륵반가상의 양식은 신라계의 것이라고 하며, 신라에서 보내준 불상이라는 것을 전해주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歸化人’ 1965)고 했다.
히라노 구니오(平野邦雄) 교수 역시 ‘하타씨 연구’(秦氏の硏究, 1976)에서 신라 불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같은 종래의 신라 도래설에 대해 신라가 아닌 백제에서 보내준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백제 도래설도 아울러
살펴본다. 도쿄대학 건축사학과 오타 히로타로(太田博太郞) 교수와 도쿄교육대학 미술사학과 마치다 고이치
(町田甲一) 교수는 공저에서
“보관 미륵보살 반가상(높이 84.3㎝)은 고류지 사찰의 기록에 따르면 스이코천황(推古, 592∼628 재위) 11년(603년)에 백제에서 헌상(獻上)했다고 한다. 하타노카와카쓰는 이 불상을 쇼토쿠태자로부터 물려받아 이 절(고류지)의 전신
(前身)인 하치오카데라(蜂岡寺)를 지었다고 한다. 이 불상의 실제 제작은 7세기 후반에 일본에서 만들었다고 생각되나,
그 양식은 한반도에서 전래한 것으로서, 지난날 경성(일제 하의 서울, 필자 주)의 이왕가박물관(당시 서울시청 앞 덕수궁미술관, 필자 주)에 있었던 청동제의 반가상을 극히 닮고 있다.”(‘國寶·重要文化財案內’ 1963)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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