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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모교여! 빛나라, 모교여! - 영덕 초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식-
김 경 남 ( 영덕 초등학교 50회 졸업생 )
2011년 4월 23일 오전 8시. 내 고향이며 모교가 있는 영덕으로 향했다. 오늘은 무슨 날이런가? 코흘리개 시절 몸을 담고 공부했던 초등학교가 문은 연 지 100살(上壽)이 됨을 총동창회 주최로 축하하는 날이란다. 버스는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다르고 흐르는 차창 밖에는 핑크빛 산수화가 흐르고 있다. 영덕에 가까워지면서 연분홍빛 복사꽃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눈물이 났다. 도로에는 가로수로 진붉은 꽃타래를 달고 있는 꽃나무가 늘여 서 있는데 너무나 요염하다. 우리 여동기생이 재경영덕군향우회장 김승호 선배에게 냅다 물었다 “저 꽃은 무슨 꽃이예요?” “ ……영덕꽃 ” 이처럼 천외기발한 명답이 또 있을까! 차 안 선후배들이 전부 깔깔거렸다. 그래, 고향을 지키는 꽃은 복사꽃 외에도 다 영덕꽃이다. 아름다운 고향 산천이여! 너는 옛 그대로인데 이 내 몸은 도회지 때가 덕지덕지 묻어 돌아왔구나. 원전을 지나쳐 오면서 부모님 산소를 찾아뵙지 못하는 불효에 가슴이 저려왔다. 낮 12시 50분. 50년 만에 다시 밟아보는 모교의 운동장, 땅은 옛 땅이로되 교사는(校舍)는 현대식 건물로 오똑 서 있었다. 어렸을 적에 몸담았던 그 시커먼 목조 건물의 옛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그리움에 젖는다. 울긋불긋 사람꽃이 출렁거리고 여기저기 달아맨 축하현수막이 출렁거리는데 식을 안내하는 마이크는 온 교정을 목청껏 울려대고 ‘(경) 영덕 초등 개교 100주년 (축)’이라고 써 붙인 대형 무대 아래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모교 선후배들로 앉을 자리가 이미 없다. 운동장가장자리를 에워싸듯 설치한 텐트에는 늦게 도착한 이들이 기별 표시한 텐트 아래에 모여 앉아 자신의 이름이 적힌 명찰을 가슴에 부치면서 마치 초등 1학년이 된 양, 웃고 떠든다.. 1시. 드디어 100주년 기념식 거행. 1부에는 국민의례, 연혁, 추진경과 보고, 감사패, 공로패 수여, 모교 교육발전기금 전달을 하였다. 이어 박근무 총동창회장이 기념사를, 안연호 초등학교장이 환영사를, 김윤순 교육장이 격려사를 하였다. 운동장에 우뚝 세워진 100주년 기념석. ‘기는 산같이, 마음은 바다같이’ 라는 뜻의 사자성어 ‘氣山心海(기산심해)’가 무게 4,5톤, 높이 6m 웅대한 자연석에 새겨져 있다. 이 글은 50회 졸업생이며 현재 재직중인 교사인 서예가 황수일의 작품이며 기념석 마련은 49회 졸업생들의 성금과 추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기념석의 가르침이 길이길이 모교 후배들에게 새겨질 것으로 기대한다. 볼거리로는 체육관에서의 황수일 서예가의 수묵화서전이, 역사전시실에는 역사 자료가 전시 되어 문화예술의 멋과 역사의 산 증거물의 가치를 일깨워 준다.. 뭐니뭐니해도 100주년 기념행사 중 백미는 100년사를 기록한 『영덕 초등학교 100년 』 출판물이다. 타블로이드 다음으로 큰 크기인 국배판으로, 770쪽의 방대한 분량이다. 얼마나 무거운지 상경하여 저울에 올려 보았더니, 우메, 2,3 kg이나 되었다. 책의 무게만큼이나 이 책 안에는 학교의 100년 세월에 걸친 역사가 사진으로, 화보로, 연대별 기록으로 장엄하게 펼쳐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이만한 책을 엮어내기까지의 측량할 수 없는 어려움과 그 노고에, 감탄하고 찬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1966년 12월 5일 본관 건물이 화재로 전소되어 과거의 교력(校歷)이 전무한 상태인데도, 총동창회장님과 100주년 김동수 기념사업추진위원장 및 추진위원회의 초인간적, 헌신적인 정열과 노고의 산물이어서 모교의 동문으로 무엇 하나 일한 것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은 죽어 없어져도 이 책은 영원히 고향을 지켜 주고, 모교를 뽐내게 하고,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을 우쭐하게 할 생각을 하니 나는 이 책이 자랑스럽고, 내 모교가 자랑스러워 죽을 지경이다. 자축포도주 축배의 시간! 2007년 10월, 모교의 운동장 땅 속에서 3년 6개월이나 알알이 희망을 키우다가 백주년 기념에 즈음하여 땅 위로 그 붉게 영글은 꿈을 토해 낸 포도주이다, 이 날을 위해서 탄생한 세기적 포도주이며, 아무렇게나 목구멍에 넘겨서는 절대 안 될 불세출의 자축주인 것이다. 2부, 복사꽃 한마당 잔치. 축제를 알리는 악단의 연주가 울려 퍼지고 남일해, 안다성 박 건, 김상배, 배일호, 박정은, 방주연, 이해리, 현 당, 고영준, 꼬마 가수 외 10명, 품바 각설이, 코러스, 무용단 등장. 초청가수들의 노래가 온 교정을 메아리치고, 무용수들의 고운 춤은 흥을 돋운다. 난데없는 꽃샘바람이 머리카락을 날리고 운동장을 회오리쳐도 자리를 뜨지 않고 노래도 따라 부르고 춤도 어깨동무하는 동안에 탁자 위에는 연신 떡, 과일, 마른안주, 술, 음료수, 가자미 볶음. 새우회가 오른다. 교가 제창. “밑불손 고불봉 드높이 솟고~” 얼마 만에 불러보는 모교 교가인가! 목이 메인다. 오후 6시쯤. 볼거리, 놀거리, 먹거리가 풍성했던 초등 100주년 생일잔치가 막을 내렸다. 운동장을 뒤로 하고 동기생들은 끼리 모임을 갖기 위해 창포로, 삼사로, 강구로, 시내로 흩어졌다. 아마도 이 날 밤, 고향의 밤하늘 밑에서, 동문수학 시절의 이야기로 밤을 하얗게 밝히거나, 한 켠에서는 잠자고 한 켠에서는 고스톱을 하거나, 부어라 마셔라 밤새도록 술잔을 기울이면서 고향의 밤을 이불 삼아 보내기도 하였으리라. 고향 사투리의 멋을 어찌 말하지 않으리. “내, 통세에 갔다 올게.” “그래, 정낭에 갔다 온나.” 그 외에도 “가시나, 자시가, 입빠이, 머라케샀노, 야가, 얼라, 단디, 만다꼬, 괴안타, 우야 꼬, ~하닌기요, ~ 이시더……. 40년 넘게 외지에서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고향말이 아닌가! 봇물처럼 쏟아지는 고향말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고향말, 너와 나를 이어주는 거멀못이 되어 한층 더 정답고 친밀한 분위기로 몰아 넣었다.
그 다음날 아침. 때마침 5일장이 서는 날이다. 장터에서 어제 모교 운동장에서 보았던 출향 선후배들이 여기저기에서 미주구리, 문어, 보리새우, 미역, 횟감 등을 사고 있었다. 외지에 살고 있으면서도 고향의 맛을 잊지 않고 특산물을 사려는 그 애향심에 가슴이 뭉클해왔다. 낮 12시. 귀경 버스에 몸을 실었다. 덕곡동을 지나 화개를 지나가면서 다시금 눈에 들어오는 복사꽃밭의 화려한 배웅, 무릉도원의 복사꽃도 저렇게 예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볼 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에 눈시울이 다시금 뜨거워졌다. 정지용 시인은 시 ‘향수’에서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하며 고향을 그리워하였다. 다른 시 ‘고향’에서는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하며 실망하였다. 그렇다. 옛 모습 그대로의 고향이 아니건만 항상 가슴 속에서 애인 같이 자리 잡고 있는 존재는 고향이라는 것을 나 또한 어찌하랴……. 한편, 이번 모교 방문에서 또 한 가지의 즐거움을 누렸으니, 하경하고 상경하던 이틀 동안 전세버스 안에서의 모교 선후배들과 친교를 다진 점이다. 70대의 대선배( 박계천 회장)에서 40대의 막내후배에 이르기까지 인생관과 삶의 행로가 달랐어도 자기소개, 여러 놀이, 노래자랑으로 마음의 문을 열었다. 이는 오로지 동향과 동문이라는 끈 하나로 거뜬히 가능했던 까닭이었으리라. 버스는 점점 회색빛 도회지로 들어가고 마음도 서서히 회색빛에 스며든다. 뜻 깊은 기회를 부여한 주최측과, 고향과 모교 나들이에 나서고, 동참하고, 동고동락했던 모든 동문 선후배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오늘 밤에는 고향과 모교를 다시금 찾아가는 꿈을 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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