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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경산 지역에 있었다는 고대 초기의 국가인 압독국에 대한 간단한 기록이 남아있다.
삼국사기에는 몇 가지 기사가 보인다.
신라 제5대 임금인 파사이사금 23년(102년)에 안강의 읍즙벌국 및 삼척의 실직국과 함께 경산 땅에 있던
압독국의 왕이 항복해 왔다고 전해진다.
4년 뒤에는 파사이사금이 친히 압독 지역에 행차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진휼을 베풀고 두 달 만에 서라벌로
돌아왔다고 전한다.
40년이 흐른 일성이사금 13년(146년)에는 압독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보내 토벌·평정하고 압독 사람들을
남쪽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에 비해 삼국유사에서는 제6대 임금인 지마이사금 시절에 안강의 음질국(음즙벌국)과 경산의 압량국(압독국)을
정벌하여 멸망시켰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문헌기록을 통해서 압독국에 대해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정보는 매우 빈약하다.
대략 기원 후 2세기 무렵에 경산 지역에는 압독국이라 불리는 작은 정치적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
최고 지배자는 상당한 권력을 가져 왕으로 불릴 정도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정치척인
힘의 크기에서 우세를 보이고 있었던 경주의 사로국(후일의 신라)의 영향력 속으로 편입되었지만, 그에 저항하는
움직임을 보였다가 주민이 다른 곳으로 사민되는 등 탄압을 받기도 했던 사실 정도가 드러나 있을 뿐이다.
압독국은 전모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미지의 나라인 셈이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하나의 고을을 단위로 하여 성립되었던 작은 나라들, 예컨대 영천의 골벌국, 청도의 이서국,
안강의 읍즙벌국, 삼척의 실직국, 김천의 감문국, 의성의 조문국, 상주의 사벌국 등 많은 소국들의 실체가 여전히
안개 속에 숨어 있는 현상과 마찬가지이다.
고대 초기 영남지방의 고을을 단위로 하는 작은 나라들의 성립이나 성장은 비슷한 과정을 거친 것으로 파악된다.
지금부터 약 2천200여년전, 한반도 남부사회에는 엄청난 변화의 회오리가 몰아치고 있었다.
북방으로부터 새로운 금속문화(초기 철기문화)를 가진 주민들이 남부로 이동해 오면서 이미 먼저 와서 정착해 있던
주민들과 결합하여 작은 정치적 사회가 탄생했던 것이다.
그것이 결국 하나의 고을을 단위로 하는 소국으로 발전해 갔으니 압독국은 그렇게 탄생한 작은 나라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압독국이 기원 후 2세기 전반에 경주의 사로국에 정복당하여 그 지배를 받게 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많은 의문을 남기고 있다.
과연 그 시기에 사로국이 주변의 나라를 정복하여 지배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의 국력을 갖추고 있었는지도 의심스럽고,
영천에 있었던 골벌국이 조분이사금 7년(236년)에야 사로국에 항복했다고 하면서도, 영천을 지나야 이를 수 있는
경산의 압독국이 그보다 120여년 먼저 항복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 자체도 사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압독국은 성립에서 멸망이 이르는 역사는 물론 사로국에 합쳐진 뒤의 행방까지도 문헌기록을 통해서는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채 숱한 의문만 남기고 있는 미스터리 속의 신비의 왕국으로 남아 있었다.
◆역사를 말해 주는 옛무덤떼의 뒷이야기
영남대학교 정문에서 도로를 건너 마주 보이는 곳에는 그리 높지는 않지만 봉긋 솟아오른 구릉이 시작되고 있다.
이 구릉은 경산시 임당동·조영동을 거쳐 압량면 부적동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은 구릉을 따라 각종 주택과 상가가 빼곡히 들어차 있어 실감하기 어렵지만, 이곳은 적어도 2천300년 전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유서 깊은 역사의 무대였다.
구릉의 높은 곳에 올라 지세를 조망하면, 구릉을 둘러싸고 작은 지천들을 사이사이에 품은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북쪽에는 유유히 흘러가는 금호강이 눈에 들어온다.
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풍족한 삶을 이어갈 충분한 조건을 갖춘 명당이라고 해도 좋다.
비옥한 땅과 그 땅을 적셔주는 강에 기대어 살아온 우리 선조들이 이런 명당을 지나칠 리 없었다. 임당동과 조영동,
압량면 부적리에 이르는 긴 구릉의 정상부와 사면 곳곳에는 옛 사람들의 무덤인 다양한 형식의 고분이 다수 남아 있어,
이곳에 고대로부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옛 무덤은 과학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먼 옛날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라는 막연한 증거가 될 뿐, 스스로
간직하고 있는 수많은 역사적 비밀을 말해주지 않는다. 임당동·조영동 고분군도 마찬가지였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주관했던 고적조사에서 이 지역에 다수의 고분이 훼손된 채 존재한다는 사실이 보고
되었지만 과학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해방 이후 1980년대 초까지도 그러한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구릉을 따라 많은 주택이 들어서고 구릉 지대가 농경지나 과수원으로 개간되는 과정에서 많은 고분들이
파괴되는 일이 급속히 늘어나게 되었다. 뜻있는 인사들의 개탄하는 목소리가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임당유적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가 시행될 수 있는 계기는 쉽게 마련되지 않았다.
방치되어 왔던 임당유적은 도굴이라는 전혀 엉뚱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발굴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지난 1982년 1월 15일 도하 각 언론에는 신라시대의 둥근고리칼을 비롯한 국보급 문화재 15점을 도굴하여 일본으로
밀반출하려던 도굴꾼 일당 3명을 체포했다는 기사가 대서특필되었다.
그리고 그 귀중한 문화재가 경산시 임당동 고분에서 도굴된 것임이 밝혀졌다. 임당유적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뒤늦은 반성이 이루어져 이 사건을 계기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후 영남대 박물관은 세 차례에 걸친 과학적인 발굴조사를 통하여 사라질 뻔한 많은 문화재와 역사 정보를 제공하였다.
도굴사건이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귀결되는 계기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어쩌면 도굴사건은 임당유적이 간직해 온 역사적 비밀을 후세에 알려주기 위한 옛 선인의 치밀한 포석이었을지도 모르
겠다.
임당고분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지표조사를 통해 고분은 임당동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조영동을 거쳐
압량면 부적리에 이르는 구릉의 곳곳에도 비슷한 형태의 고분이 산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이곳이 바로
미지의 나라 압독국의 중심지였을 것이라는 추론이 힘을 얻어가고 있었다.
자연히 이 지역에 남아있는 문화유적에 대한 적극적인 보존 조치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1986년에 관에서는 이 일대를 택지개발사업지구로 지정하고 택지 조성 공사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 고분에 대한 무차별적인 파괴가 진행되었음은 물론이었다. 공사 강행을 둘러싸고 문화유적에 대한 당국의
몰이해를 비난하는 여론이 크게 일어나자, 당국은 발굴전문기관인 한국문화재보호재단과 영남문화재연구원으로 하여금
이 지역을 발굴하게 하였다. 이후 2008년에 이르기까지 발굴이 이어져 드러난 유적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임당유적은
사적 제516호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임당동·조영동 고분군의 역사적 가치
임당유적의 발굴 결과 수많은 유적과 유물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만큼 그 성과를 짧은 지면에 모두 소개
하기란 불가능하다. 가장 중요한 성과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임당유적은 무덤 중심 유적이라는 점이 재삼 확인되었다. 무덤의 형식은 다양하지만, 시대적으로 나무널무덤
(목관묘)→나무덧널무덤(목곽묘)의 단계를 거쳐 큰 봉분에 많은 유물을 부장한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과 암반을
파내고 나무널을 설치한 암광목곽묘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 조영되었지만,
그 봉분의 크기도 작아지고 부장유물도 줄어들었다.
둘째 출토 유물을 통해 경산지역이 이른 시기부터 경주의 사로국(신라)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음이 확인되었다.
여러 무덤의 형식 중에서 돌무지덧널무덤과 암광목곽묘에서 나온 대부분의 유물은 신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이
었다.
토기는 경주식 토기 일색이며, 출토된 금동관도 경주에서 제작하여 경산지역 유력자에게 하사된 것이 분명하다.
신라는 임당유적에서 이렇게 큰 봉분을 가진 적석목곽묘와 암광목곽묘가 만들어졌던 4세기 후반부터는 경산지역은
서서히 신라에 복속되어 그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셋째, 신라에 복속되기 전에도 압독국은 사로국과 빈번한 교류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나무덧널무덤을 만들었던
3~4세기에 이미 신라식토기가 부장되었고, 무덤의 형식도 좁고 긴 나무덧널무덤(세장방형목관묘)으로 같은 시기
경주의 무덤과 닮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 압독국은 비록 독자성은 유지하고 있었을지라도 조금씩 신라 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임당고분군 구릉에서 흙으로 쌓은 토성이 확인된 점도 중요하다. 압독국의 왕을 비롯한 최고 지배자들은
이 토성 안에 살면서 주변의 백성들을 다스리고 나라를 경영했을 것이다. 아직 부분적인 발굴만 이루어져 토성 내부의
유적은 확인되지 않은 상태로 남은 점이 아쉽다.
이문기
경북대 사범대 학장·역사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