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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요한계시록 1장에서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주님을 만나 그의 마지막 소명을 받는다. 2장과 3장에서 당시 주님의 공동체인 교회가 세상에서 직면한 어려움과 박해에 대해 위로와 권면을 듣는다. 주님은 믿음을 잃지 않고 끝까지 이기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하신다. 또한 경고의 말씀도 잊지 않으신다. 이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그들을 모두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1세기의 성도들에게 사도 요한이 전한 메시지의 의미와 그들이 해석하고 적용했던 내용에 대해 관심을 갖고 탐구해야 한다. 아울러 그들만큼 치열하게 이의 적용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4장에는 사도 요한이 하나님 보좌 앞에 올려져 이 모든 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이 그려진다. 그리고 5장에서는 드디어 하나님의 마지막 날에 대한 섭리와 계획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보게 된다. 하지만 그것을 열어 실행할 합당한 자가 없어서 그는 사도적 직임으로 인해 크게 운다. 바로 그때 한 장로가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이신 그리스도가 이에 합당한 희생을 드리셨고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하늘에 올라 하나님 우편에 앉아 세상 모든 왕들의 왕이 되셨고, 이 세상뿐 아니라 온 우주를 다스리시고 계심을 말한다. 하나님의 보좌를 구성하고 떠받치며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수행하는 네 생물과 다른 모든 천사들과 이어서 우주의 모든 피조물들이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그분께 경배한다. 이로써 마지막 날에 대한 하나님의 '반드시 속히 될 일'에 대한 비밀을 알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이 갖추어졌다. 이 과정을 이해하고 거기에 순복하며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만이 이 비밀을 맡아 알 수 있다.
II.
인-나팔-대접으로 이어지는 재앙의 시리즈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이 모든 순서가 기록된 그대로 일직선을 달리는 시간적 순서라고 보는 견해이다. 다른 하나는 이 세 가지 재앙들은 요한계시록이 진행됨에 따라 더욱 강화되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고, 반복되는 많은 병행 구절들은 이것이 시간적 순서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반복된 구조로 된 증거라는 견해이다.* 예를 들면 교부이며 최초로 계시록의 주석을 쓴 빅토리누스(Victorinus †303)는 요한계시록 20장을 천년왕국으로 해석하고, ‘네로의 부활’ (Nero Redivivus) 이론과 나팔들 및 대접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지기보다 병행하는 ‘반복 이론’을 제시했다.**
* Beale, NIGTC, 오광만역, 요한계시록 상, 새물결플러스, p.261.
** Victorinus of Petovium (died ca. 304 8.c.) wrote the fIrst commetary on Revelation: see in 1. Haussleiter, ed., Victorinus. - Aune WBC 요한계시록 주석 1 (p.30)에서 재인용.
*** 이하의 부분은 천안대학교 이동수 교수의 글(요한계시록 해석의 역사)을 세 가지 재앙에 대한 두 시각의 견지에서 재정리한 것이다.
**** Beale의 원문은 아래와 같다. 그는 이 부분의 각주에서 반복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All agree that the dominant themes from 6:1 to 20:15 are, in order of importance, judgment, persecution, and salvation/reward and that these themes are intensified as the book progresses. Many deduce that this progressive intensity is evidence that the book is in chronological order. But the numerous repeated parallelisms point to a structure of recapitulation. I have attempted to show here that the increasing thematic intensity fits better into the broader framework of an “already and not yet” synchronous recapitulation and thematic parallelism than into a futuristic sequential scheme.134 At least one probable reason for the intensification is to emphasize the reality of the three motifs of judgment, persecution, and salvation for a confused church living in the midst p 145 of compromise and doubt. In fact, this is likely why horrific images are used throughout the book, since the evil nature of the institutions with which the readership was beginning to compromise needed to be driven home to them."
134 For other commentators holding to such a scheme of recapitulation see Fairbairn, Interpretation of Prophecy (n. 72 above), 410–11, 415, 427; Barr, “Apocalypse as a Symbolic Transformation of the World”; Steinmann, “Tripartite Structure”; and the commentaries by Kuyper (8–9), Milligan, Hendriksen, Kline, Lenski, Morris, Giblin, Wilcock, A. Y. Collins, Mulholland, and more generally Caird and Beasley-Murray (though the latter is a futurist). Fiorenza (“Eschatology and Composition”; “Composition and Structure,” 364–66) affirms thematic, progressive parallelism, esp. with regard to the seals, trumpets, and bowls, which she conceives of as developing like a conical spiral (The Book of Revelation, 171); she is hesitant in being precise about the temporal framework, except to say that “the breaking-in of God’s kingdom” is the dominant notion, which apparently refers in the main to the present time of the readers “as the short time before the end” (ibid., 46–51). For others, including Dutch commentators, holding to recapitulation within an “already and not yet” framework see the bibliography in Hoekema, Bible and the Future, 223. Cf. Bornkamm, “Komposition der apokalyptischen Visionen.”
Beale, G. K. (1999). The book of Revelation: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pp. 144–145). Grand Rapids, MI; Carlisle, Cumbria: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그러나 티코니우스(Tyconius, ca. 390)는 문자적 해석을 한 빅토리누스보다 풍유적 해석을 한 오리겐의 전철을 따랐다. 그는 1세기 당시의 역사적 배경이나 사건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특정 대상을 지시하는 것도 상징화된 보편적인 요소로 여겨 ‘예루살렘’을 ‘교회’로, ‘바벨론’을 ‘악한 세상’으로 보았다. 이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상주의(idealism) 해석으로 발전하게 된다. 또 요한계시록을 ‘선악의 싸움’으로 보는 보편론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티코니우스의 입장에서 인-나팔-대접의 순서는 전혀 연대기적 순서가 될 수가 없다. 이러한 티코니우스의 견해를 어거스틴(Augustine)을 비롯해 프리마시우스(Primasius), 카시오도리우스(Cassiodorius), 아프링기우스(Apringius), 베데(Bede, †735), 베아투스(Beatus) 등 많은 자들이 따르게 된다. 중세 초기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자신들의 공상 혹은 자기 시대의 필요나 사상에 따라 세부적인 것들이 달라지는 신비적 주석(mystical exegesis)을 하게 되었다.
III.
한편, 동방의 안드레아스(Andreas)는 성경에 삼중 의미(문자적, 영적, 신비적 요소)가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고, 문자적 해석과 영적 해석을 통합하려고 했다. 특히 요한계시록을 영적 해석이 적합한 것으로 보고, 신비적 해석을 통한 요한계시록의 역사적 성취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에 의해 오늘날 소위 역사주의(historicism)가 시작된다. 그후의 사람들은 사도 요한의 예언을 역사의 과정에서 찾아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중세 초기를 지나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중세의 주석가들은 티코니우스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9세기 작가 베렌가우트(Berengaud)는 신비적 해석을 역사적 해석과 결합시켰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인간 역사의 모든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첫 여섯 인들’은 ‘아담에서 예루살렘 멸망까지의 세상 역사’를, ‘첫 여섯 나팔’은 ‘교부 시대에서 기독교 순교자들의 시대까지 말씀의 선포’를 나타낸다고 했다. 이는 인-나팔-대접의 순서를 연대기적 순서로 여기는 것이다.
요아킴(Joachim, †1202)은 더욱 획기적인 해석을 시도했다. 그는 요한계시록과 12세기 사건 사이의 일치점을 발견하려 했다. 그는 역사적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왕국적 통치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역사를 세 부분으로 나누고 첫 번째 천년왕국은 성부에 의해, 두 번째 천년왕국은 성자에 의해, 그리고 성령님에 의해 주도되는 세 번째 천년왕국은 여전히 미래에 두었다. 하지만 그의 이론도 반복 이론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반복 이론을 버린 사람은 리라의 니콜라스(Nicolas of Lyra, †1340)로 그는 요한계시록이 사도 시대에서 역사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예언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 종교개혁 시대에 루터(M. Luther)는 요한계시록 4장 이후를 로마 교황에 반대하는 맥락에서 교회사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경향은 19세기까지 개혁주의 전통으로 남게 된다. 비록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을 쓰지는 않았지만 칼빈(J. Calvin)의 다른 주석에서도 일반적으로 이를 볼 수 있다.
스페인 예수회 신학자인 프란시스 리베랴(Francis Ribeira, †1601)는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가까운 미래와 마지막 사건들에 국한되고, 중간 단계의 역사에는 어떤 일치점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사도 요한이 ‘짐승’이라고 본 것은 ‘교황이 통치하는 로마’는 아니고 ‘미래의 타락한 로마’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요한계시록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쏟았다. 또 그의 동료인 예수회 회원 알카자(Alcasar, †1613)는 철저하게 과거주의자였다. 그는 요한계시록을 교회와 유대교의 충돌을 나타내는 4-11장과 교회와 이교주의의 충돌을 그리는 12-19장으로 나눴다. 그리고 20-22장은 교회의 현재적 승리를 묘사했는데, 그것은 콘스탄틴 황제 때 시작된 것이라고 했다.
종교개혁 이후 17-19세기는 인본주의와 이신론에 입각한 합리주의적인 신학이 주를 이루었다. 이때 역사비평이 등장했다. 개신교에서 처음으로 천년의 미래적 해석을 시도한 비트랑가와 교회사와 천년왕국을 결합하여 해석한 벵겔을 들 수 있다. 18세기의 흐로티우스와 하몬트는 알카자의 입장을 따랐고 그 이후 18세기의 합리주의 주석가들은 흐로티우스의 연구를 토대로 삼았다. 19세기에는 요한계시록의 현대적 해석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리드리히 뤼케가 등장하여 요한계시록을 다니엘서나 에스겔서 같은 묵시문학으로 분류했다. 그는 요한계시록 저자의 환상을 시대사적으로 로마와 네로를 연관시켜 해석했다. 뤼케의 뒤를 이어 드 베테 등이 교회사적 해석을 이어나갔다.
20세기 초에 미국을 중심으로 세대주의적, 전천년적 미래주의 해석이 유행했다. 이러한 해석에서는 기본적으로 인-나팔-대접 시리즈의 재앙을 시간 순서로 본다. 그리고 한국 역시 이러한 경향의 신학을 이어받아 연대기적 입장에서 이 재앙 시리즈를 보아 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Beale과 같은 다양한 현대 주석가들의 주장을 토대로 반복 이론을 이야기하는 국내 신학자들이 많이 등장했다. 송영목, 김추성, 박수암, 이필찬, 권성수 등의 학자들을 들 수 있다.
IV.
Caird는 그의 주석 6장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하늘에 오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하늘 보좌에 앉으시고 그곳에서 메시아와 주님으로 통치하셨다는 것은 초대 교회 전체의 공통된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원수를 그의 발 아래에 두실 때까지 메시아가 통치할 운명이라고 선언한 시편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시 1 장; 참조. 마가복음 xii. 35-37; 사도행전 ii. 33 ff. ; v.31; ii. 55 ff.; Rom. viii. 34; 고전 xv. 25; Eph. i. 20; Col. iii. 1; 히브리어 i. 3, 13; x 12 f., 1 Pet. iii. 22).
요한이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해 전할 새로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최대한 진지하게 전통적 믿음을 취하기를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미 하늘에 확립되었고 궁극적으로 그의 파루시아에서도 지상에 확립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사건은 여기와 지금 지상의 사건도 포함하고(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왕 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리시고,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순종과 충성할 때만 다스린다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이미 '세상의 왕들의 통치자'라고 믿습니다 (i. 5).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을 살아야하는 힘들고 어려운 현실 세계를 그리스도께서 다스린다고 말씀하실 수 없다면, 이는 결코 다스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의 생애 마지막 35 년 동안 요한은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한 기독교 신앙에 도전으로 보일 수 있는 일련의 암울한 사건들을 겪었습니다 : AD 60 년 지진 (Tac. Ann. xiv. 27) : AD 62 년 Parthian Vologeses에 의해 동부 국경에서 로마 군대의 굴욕적인 패배 (Tac. Ann. xv. 13-17); 기원 후 64 년 로마의 화재 이후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 (Tac. Ann.xv. 44); 서기 70 년에 예루살렘이 폐허가되면서 종결된 유대 전쟁 4 년간의 공포, 서기 68 년 네로의 자살과 네 명의 (황제의 자리) 청구인이 제국의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싸웠던 정치적 혼란, 그리고 1 년 동안 로마 세계는 진군하는 군대에 요동쳤다. 그는 서기 79 년에 베수비오 화산의 분출로 나폴리 만의 호화로운 자원들이 없어지고 사람들이 실질적인 질서가 곧장 해체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널리 퍼진 일들(Pliny, Ep. vi. 16), 서기 92 년의 기근들을 (Suet. Dom. 7) 보았습니다. 네 말을 탄 자에 대한 요한의 환상은 그러한 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을 주장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의 상징적 인유는 구약에서 유래되었지만 근본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전달하도록 수정되었습니다. 스가랴의 기병과 병거는 둘 다 땅을 순찰하고 평화로운 상태를 보고하기 위해 보내졌고 말의 다른 색깔은 나침반의 네 방위에서 부는 다른 바람이나 지점에 해당했습니다 (Zech. i. 8-11; vi. 1-8). 그러나 요한의 환상에서 네 가지 색상은 <p. 80> 임무의 차이, 그리고 각각의 새로운 말을 탄 자의 출현은 지구 상에 새로운 재앙의 방출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침략, 반란, 기근, 역병입니다."
그의 이러한 설명은 처음 네 개의 인을 떼었을 때 나타나는 4 마리의 말로 부터 나오는 재앙을 읽고 1세기의 성도들이 받았을 이미지와 메시지를 가늠하기 위한 것이다. 그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사망을 이기시고 세상 왕들의 왕이 되어 다스리시므로, 현실의 고난과 박해 역시 다스리고 계신다는 메시지이다. 그가 주석에서 1세기 당시의 전쟁과 기근, 그리고 역병들을 열거한 이유는 이미 4가지의 인 재앙이 일어나고 있다고 당시의 성도들은 해석했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이 주석을 쓴 시점에서 그는 이미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1세기 이후 일어났던 흑사병이나 스페인 독감 같은 질병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것들 역시 4개의 인 재앙이라고 볼 소지가 충분하다. 그리고 1세기 당시 요한의 독자들에게 주었던 그의 메시지는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만약 인 재앙이 일직선상의 것이라면 케어드의 설명처럼 1세기에 이미 발생했으므로 그 이후에는 다시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아니면 1세기의 것은 인 재앙이 아니고 지금 일어난 것이 맞거나, 아니면 더 미래에 인 재앙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을 해야 한다. 여기서 마지막의 생각은 마치 프란시스 리베랴의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가까운 미래와 마지막 사건들에 국한되고, 중간 단계의 역사에는 어떤 일치점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난점을 극복하려면 인-나팔-대접으로 이어지는 이 재앙들은 세속 역사와 교회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되풀이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제시되는 것이 '이미-아직'의 패러다임이다.
V.
종말의 사건들은 이미 시작되었다. 하지만 아직 그 끝은 아니다. 여전히 반복하여 세상과 교회를 괴롭힐 것이다. 세상 권력은 교회를 핍박하고 어떤 구실만 있다면 억누르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이겼듯이 1세기의 성도들은 로마의 그 모든 박해를 이겨내고 로마 제국 전체에 교회라는 공동체를 건설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십자가의 승리는 오늘도 반복될 것이다. 하지만 믿음을 버린 교회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유물만 남게 되었다. 승리뿐 아니라 타락과 배교도 반복될 것이다. 과연 앞으로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끝이 올 것인가? 여기에 대한 주님의 답은 분명하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마 24:6; 막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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