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감사 (눅 17: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이 시간에 “구원의 감사”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올해도 추수감사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릴 수 있게 된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드립니다. 두 번에 걸친 태풍으로 작물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하나님 앞에 불평하지 않고 하박국처럼 감사하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추수와 맥추감사절을 만들어 놓고 지키는 이유는 감사 자체도 의미가 있지만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대대로 감사의 신앙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서기 1620년 102명의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추위와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한 해 동안 거둔 농사를 가지고 먼저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사를 드렸던 것이 바로 추수감사절입니다. 감사절을 세운 이유는 후세대가 감사를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감사의 중요성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본문에서 감사의 교훈을 배웁니다. 이 시간에는 본문을 구원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왜 구원의 감사를 드려야 할까요?
1. 감사는 강력한 요청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도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다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 감사하러 오고 나머지 아홉은 각각 제 갈 길로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서운해 하셨습니까?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여기 의문표가 3개나 됩니다. 그만큼 감사는 강력한 요청입니다.
그렇게 병으로 고통 받고 멸시 받으며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사람대접도 받지 못하고 격리되어 언제 죽을지 모르던 비참한 사람들이 나음을 입었다면 무엇보다 먼저 할 일이 감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자기 갈 길이 더 바빴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비교적 다른 일에 감사는 하는 편이지만 구원의 감사는 너무 부족합니다. 영원히 멸망할 죄에서 그토록 큰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의 감사는 예배 시간의 순서 속에서 형식적으로 할 때가 많습니다. 구원 때문에 기쁘고 감사하고 행복해서 날마다 감격해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 구원의 감사 부족이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해드리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시50:22에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하셨습니다. 심령이 영적으로 빈곤하고 찢어지고 만신창이가 되었다면 바로 감사 부족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구원의 감사자를 찾고 계십니다.
2. 감사해야 구원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절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나병에서 낫고 감사하는 자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셨습니다. 다른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은 병고침의 구원은 받았지만 구원의 확신은 사마리아 사람뿐이었습니다.
신령한 의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려면 감사해야 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쉬워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고, 그 아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구원자이신 것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아요.
그냥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이에요. 이렇게 쉽게 받는 구원이 어디 있습니까? 너무 쉽기 때문에 정말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인가 도리어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성령의 은혜로 주님이 이루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구원의 확신 속에서 사느냐 하는 것은 다릅니다. 구원 받았다고 해도 모두가 구원의 풍성함을 누리며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차이가 확신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 구원의 즐거움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처럼 진실로 감사하는 사람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택하여 불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날마다 감사해 보세요. 그래서 즐겁기도 하지만 또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하늘 영광의 그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십니다. 성령으로 하늘의 기쁨을 주십니다.
이것을 베드로는 벧전1:8-9에서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 기쁨은 진정 감사하는 자만이 누리는 구원의 기쁨인 것입니다.
3. 감사해야 참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때문에 감사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참 믿음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사례한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다른 유대인들은 다 제 갈길 갔지만 사마리아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15-16절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인이라” 사마리아인이 어떤 사람입니까? 당시 사마리아 사람은 혼혈이라 해서 이방족으로 취급당하던 사람입니다. 당시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 의해 개로 취급 당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남북왕조시대(B.C.721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북 왕국 이스라엘에 이주한 앗수르인들에 의해 혈통적 종교적 융합으로 사마리아인들은 혼혈되어 남쪽 유대인에 의하여 이민족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거기다 나병까지 걸렸습니다. 나병이 어떤 병입니까? 온 몸이 바이러스로 썩어 문드러지는 병입니다. 지금은 불치의 병이 아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율법에 의해 사회에서 격리되었습니다. 가족도 만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다가오면 부정하다고 반복하여 소리를 질러 접근을 방지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깊이 깨달은 자만이 진정 구원의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홉은 왜 주님께 감사하지 못했을까요? 유대인의 선민적 오만함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 같은 감격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육신적 갈망이 컸을 것입니다. 오랜 격리 때문에 쌓인 한이 컸을 것입니다.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고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바라는 소망이 보이는 것이면 구원의 감사는 나오지 않습니다. 물질을 주셔야만 감사하고, 건강을 주셔야만 감사하고, 형통을 주셔야만 감사하는 그 가치관에 어떻게 보이지 않는 구원의 감사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구원의 감사는 아무나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거지 나사로와 같아도 구원 대문에 감사할 수 있는 자기를 비운 자만이 가능합니다. 하박국의 감사를 아시죠? 합3:17-18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한 하박국의 감사처럼 진실로 가난한 심령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진실로 내가 어떤 운명에 처할 죄인이었는지 알고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인지 안다면 내가 구하는 세상적인 것들은 사실상 사치이고 아버지 앞에 만입이 내게 있어도 그 구원의 은총을 다 찬송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시간에 홍해 건너 찬양했던 모세의 노래 곧 어린양의 노래 즉 구원의 노래를 검검하시기 바랍니다. 그 찬양이 있습니까? 그 감격이 있습니까? 이 시간에도 주님은 그 아홉에게 요구하신 것처럼 우리들이 진실로 구원 때문에 감사하며 찬송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참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찾으신 우리 주님은 지금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사마리아인입니까? 아니면 그 아홉입니까? 믿음으로 구원 받을 뿐 아니라 진실로 그 구원을 감사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우리 또한 진정한 구원의 풍성함을 받아 누리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