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낭콩과 찐빵 / 김미옥
푸른 은유가 흘러 다니던 밤을 보내고 밝아오는 아침 눈을 떴다. 새벽 네 시 반이면 어김없이 날아와 노래를 불러주던 이름 모를 새가 오늘은 스케쥴 조정을 한 것인지 여섯 시가 지나도록 기척이 없다. 사람이 아닌 미물을 기다리며 초조해하는 마음 처음인지라 간밤에 꾸었던 꿈이 개꿈이기를 바라며 힐금힐금 창밖을 살핀다. 주방으로 건너와 아침을 준비한다. 하루쯤 굶는다고 무슨 사달이 나겠는가마는, 나를 위해 메뉴를 정하고 나를 위해 식단을 차리는 일에는 이유가 있기에 게을리할 수 없다, 냉장고 문을 열고 먹을 것을 찾아 구석구석 빠르게 살핀다. 아무리 봐도 구미 당기는 음식이 없다. 이럴 땐 포기도 빨라야 함을 알기에 다시 냉장고 문을 닫고 빵집으로 달려갈 채비를 한다.
빵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느끼하게 번지는 버터 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고급스럽지 못한 입맛을 가진 탓에 담백한 식빵이나 단팥 도넛이 아니고선 다른 빵에 시선을 두지 않을뿐더러 아무리 갓 구운 빵 앞에서도 먹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런데 오늘은 몸이 먼저 반응을 하고 오묘하게 이끌리는 것을 보니 별일이지 싶다. 먹음직스럽게 생긴 빵들을 훑어보다가 버터 맛이 강하지 않을 것 같은 서너 가지 빵을 사 들고 매장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와 ‘시나몬 롤 식빵’ 한 조각을 손으로 뜯어 커피에 적셔 입으로 가져간다. 적당한 단맛과 계피 향이 하루를 살아갈 마중물이 되어 잠자던 세포를 일으켜 깨우고 기운을 얻게 한다. 천천히 마시던 커피가 바닥을 드러내고 빵 접시도 부스러기만 남았다. 이렇게 빵과 커피를 마시다 보면 가끔 추억을 만나게 되는데 오늘도 마찬가지로 유년의 기억 한 자락 가슴을 헤치고 나온다.
요즘처럼 먹을 것이 풍부하지 않았던 옛날엔 계절에 따라 간식거리도 달라졌다. 봄이면 밀가루를 넣은 쑥개떡과 쑥버무리, 여름이면 감자와 옥수수, 가을이면 고구마가 우리의 유일한 간식이자 최고의 먹거리였다. 그러나 내가 먹고 자란 유년의 여름 간식은 감자와 옥수수가 아닌 찐빵이었다. 장마가 시작되고 강낭콩이 익어가는 칠월 중순쯤이면 엄마는 사 남매를 위해 밀가루 찐빵을 만들어 주셨다. 사카린을 넣은 밀가루 반죽에 얼룩덜룩 무늬가 있는 강낭콩을 듬성듬성 섞어 무쇠솥에 쪄낸 빵을 솔직히 나는 좋아하지 않았다. 어린 내 입맛엔 무르게 푹 삶은 부드러운 팥소를 듬뿍 넣어 동글동글 모양도 예쁘고 달디달게 만든 찐빵 가게의 빵이 더 맛있었으니, 엄마가 만들어 준 빵은 자연스레 상다리 아래로 밀려 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찐빵 위에 하얀 설탕을 솔솔 뿌려주는 그 맛과 어찌 비교가 되었겠는가? 그런데도 엄마는 이런 속내를 모르고 강낭콩을 삶고 양푼에 밀가루 반죽을 치대고 또 치대어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쳐 가며 찐빵을 쪄내곤 하셨다. 그렇게 팥이 아닌 강낭콩을 넣은 찐빵이 대여섯 차례 쪄지고 나면 여름은 끝자락을 보이고, 빵을 빚는 엄마의 모습을 볼 때마다 여우 주둥이처럼 뾰쪽하게 나왔던 내 입은 정상으로 들어가곤 했다. 어디 그뿐이랴? 하루는 엄마가 쪄주신 빵이 먹기 싫어 책상 서랍에 몰래 넣어두었다가 쉰내가 나고 곰팡이가 생겨 발각되고 말았다. 몇 날 지나지 않아 친구 셋이 함께 찐빵을 사 먹고 나오다 친구 엄마한테 들켜 꾸지람을 들었던 기억과 강낭콩은 왜 심었는지 모르겠다며 껍질을 까며 투덜댔던 기억이 선명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 찐빵은 첨가물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건강한 빵이었고 사랑이었건만, 배부른 투정으로 엄마의 심기를 건들었던 철부지 어린 딸은 지금 어른이 되어 옛날을 기억하며 담백한 빵을 찾아 헤매고 있으니 아이러니하고 엄마에 대한 미안함에 목젖이 따끔거린다.
밥 대신 빵 한 조각을 먹으면서 꺼낸 시큰한 기억 한 페이지를 다시 덮어놓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물에 젖은 손을 닦고 돌아서다 벽에 걸린 달력에 시선이 가 닿았다. 수채화 같은 풍경이 달력 위 칸을 채우고 그 아래 검은 글씨에 붉게 그려놓은 동그라미가 눈에 띈다.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본다.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사흘 후 엄마 추도 일이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고,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결에 오돌오돌 솜털이 일어섰던 이유가 따로 있었음을 달력에 표시해 두었던 동그라미를 보고 난 후에야 알았다. 동이 터오면 어김없이 찾아주던 새소리가 멈춘 이유도 우연이 아니었다. 개꿈이기를 바랬던 간밤의 꿈도 그냥 꾼 꿈은 아니었다. 엄마가 세상에 아니 계신 지금, 강낭콩 콕콕 박힌 엄마표 찐빵 하나 호호 불어가며 먹고 싶은데 다시는 맛볼 수 없고 다시는 찾을 수 없어 울음보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먹을 것 앞에서 토라졌던 지난날을 반성하며 새하얀 이를 드러내 놓고 환하게 웃으시던 엄마를 그려본다.
목백일홍 꽃가지에 노랑나비 한 마리 날갯짓을 멈추고 앉아 있다.
약력
• 이름 김미옥
• 필명 예람
• 한국 문인협회 회원, 전인문학회원 현대문학사조회원
강서문인협회회원, 세계모던포엠 작가회원 장성문인협회 편집국장
• 수상 : 강서문학상 본상, 현대문학사조 대상 모던포엠문학상 금상
•저서 : 다시, 봄
•공저 : 풍경 꽃비에 울다, 수직과 수평의 경계에서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