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사라호 태풍 만나다
이영백
상세한 일기예보나 정보도 없던 그 국교 3년 시절 추석날 아침이다. 밤새 비바람이 몹시도 몰아쳐댔다. 종백씨 집에서 차례지내고 나오는데, 동네 방죽이 터져 황토물이 벼농사 지어 놓은 들판을 휩쓸어 버렸다. 방죽에는 황 영감집이 있었는데 둑 터지면서 들판 속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 지붕위에 황 영감이 타고 “살려 달라!”고 손짓하고 있다. 아무것도 못하고 발만 굴렸다. 마침 아랫마을 사람들이 밧줄 던져 목숨만은 구하였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날 사건이 1959년 9월 17일 추석날 아침에 온 태풍번호 6564, JTWC지정번호 14W, 국제명으로 사라(SARAH)호라는 태풍이었다. 역대 태풍 중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다. 가장 높은 카테고리 5급 태풍이 한반도를 강타한 것이다. 얼마나 원통하였으면 “눈물의 연평도”유행가에 “태풍이 원수더라. 한 많은 사라호”라는 가사까지 전해 오겠는가?
일본기상청에서는 대한해협으로 관통하였다고만 하였고, JTWC에서는 정확하게 경남 충무(통영) 앞바다에서 시작하여 거제-진해-부산-울산-포항을 지나갔다고 하였다. 고향 토함산 너머 경주시 시래동에도 방죽이 터지고 논바닥을 휩쓸었다. 벼를 바로 세우느라 아이, 어른 없이 동원되어 흙탕물을 씻어 내고 벼를 곧추 세웠다. 이후 생산량이 급감하고 말았다.
사라호 태풍의 피해는 사망 849명, 부상 25,433명, 이재민 37만여 명, 선박피해 9,329척, 경작지 유실 21만여 정보 등 총 피해액 약1,678억여 원이다. 그 시절 화폐단위로는 “환”단위라 여기에다 10배를 곱해야 나온다.
그 때는 저수지도 없고, 비가와도 물을 모으지 못하였다. 민둥산으로 사태가 나고, 물이 모여 큰 힘으로 변하면 사행천을 넘친다. 농사지은 것을 묻으며 황토물이 광란 질주하던 때이었다. 사라호 태풍이 지나고 동네 방죽도 견칫돌로 짜고, 둑이 높아졌다. 그 둑에 지금 자동차 다닌다.
정부의 정책을 비판만 할 줄 알았다. 아무도 바로 세우려고 하지 않던 시대이다. 죽어나는 것은 농민뿐이다. 혁명 후 유비무환 정책이 나중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사회가 안정되어 갔다. 이런 사정을 현대 사람들은 알까?
사라호는 지난날의 태풍이름이지만, 호된 태풍의 맛을 보게 된 것이다. 태풍은 자연의 힘으로 만들어 인간을 괴롭히니 우린 늘 대비하자.
첫댓글 엽서수필 시대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