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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하느님의 공동체 계획
글쓴이: JTB, 최초작성일: April 29th, 2008, 최종수정일: April 29th, 2008
앞으로 수차례에걸처 소공동체 활성회에대한 우수한 글/ 좋은강의를 서울교구 자료실에서
이곳으로 옯겨 보겠습니다. '"공동체를통한 복음화"에 대한 개념확립에 도움이 되도록 하느님께 기도합니다.(권혁윤
세례자오한)
1부. 공동체라는 개념
1. 공동체라는 말의 의미
1) 우리말
공동체라는 단어는 혈연 또는 지역, 나아가 정신적으로 연대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혈연은 가족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가족 공동체이며 지역은 일정한 지역 안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는 공동체이다.
본당은 일정한 본당의 지역 안에 거주하는 신자들의 집단을 본당 공동체라 한다. 같은 신앙을 통하여 모인 공동체를 신앙공동체라 한다.
2) 한자말
공(共)은 한가지 공의 의미뿐만 아니라 법될, 공경할, 무리 공의 의미를 가진다. 하느님을 법으로 공경하는 무리의 하나된 모습이라는 뜻이다.
동(同)은 같을 동의 의미뿐만 아니라 한가지, 무리 동의 의미도 있다. 모여서 화합하는 무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체(體)는 몸이라는 의미와 함께 지체를 뜻한다. 따라서 공동체(共同體)란 의미는 우리가 하느님을 마땅히 공경하여야 할 지체로서 한 무리를 이룬다는 의미이다.
3) 서양말
영어로 공동체는 Community이며 이 Community는 Communion(친교, 사귐, 영성체)과 Unity(일치)라는 의미의 합성어이다. 친교와 사귐을 통하여 일치를 이루는 모습을 공동체라 하며 우리가 미사 중에 영성체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을 바로 Communion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느님과의 사귐의 극치를 말하고 있다.
2. 심리학적인 면
공동체라는 의미는 심리적으로 다음의 4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대화, 사귐, 목표, 활동이다. 공연장이나 야구장, 극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공동체라고 하지 않는다. 공연이나 야구, 영화를 보러 온 것이지 대화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공연이나 영화를 보고 나면 모두 뿔뿔이 흩어진다. 사귐은 반드시 대화를 필요로 하고 또한 대화가 깊어져서 사귐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모인 이들이 아무런 목적 없이 있거나 그 목적이 다르면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 목표를 가졌으면 반드시 그 목표에 도달하려는 수단이나 도구가 같아야 하는데 그것을 활동이라 한다. 활동을 함께 해야 공동체로 느끼게 된다.
요사이 우리의 본당들은 규모가 커지면서 대중화되어 가고 있다. 이처럼 본당의 모습이 공동체이어야 하는데 대중화되어 간다는 것은 공동체로서 본당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당신은 본당에서 이웃과 대화를 합니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또는 본당의 사목 목표를 아십니까? 라는 질문에 대하여 대화를 하지 않거나 사목 목표를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공동체로서 함께 알아야 하고 함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당에 적을 두고 있는 신자로서 아무런 소속감도 없이 본당 신자들과 사귐이 없거나 함께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활동이 없다면 결코 그 집단은 공동체가 아니다. 단지 대중화에 빠져 있을 따름이다.
3. 신학적인 측면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 유대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1고린 12,12-13)
몸은 여러 지체로 구성되어 있고 이러한 지체가 한 몸을 이루듯 한 공동체도 여러 사람들을 구성원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여러 지체들은 모두 똑 같은 지체가 아니라 다양한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을 바로 공동체라 하는 것이다. 본당이라는 개념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한 분의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을 모두가 아버지라고 신앙을 고백하는 행위를 통하여 삶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모임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며, 우리 각자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며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다.
2부 하느님의 공동체 계획
“하느님은 세상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모든 피조물을 인간이 다스리게 하심으로써 공동체 계획을 완성하신다.”
“하느님은 구원시초부터 우리를 개인적으로 부르시지 않고 공동체의 지체로 뽑으셨다.” (사목헌장 32항)
1) 공동체이신 하느님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창세 1,26)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은 창조하시고 이 인간의 모습을 당신을 닮게 만드셨다고 표현하신다. 당신의 모습을 복수로 표현하는 것은 바로 삼위일체를 염두에 두고 있다.
“이제 이 사람이 우리들처럼 선악을 알게 되었구나.” (창세 3,22)
아담이 범죄한 후 동산에서 몸을 숨기고 있을 때 동산을 거닐다 숨어 있는 아담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대목에서 역시 당신을 복수로 표현하고 있다. 완전한 삼위일체의 모습을 구약에서 이미 다 표현하였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창조와 구원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삼위일체의 온전한 공동체임을 드러내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사랑의 공동체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창조주를 알아 사랑할 수 있으며 창조주로부터 세상 만물의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만물을 다스리고 이용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외롭게 창조하지 않으시고 태초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었다.” (사목헌장 12항)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깊은 본성으로부터 공동체로 창조하셨다. 인간의 창조는 플라스틱 용기를 만들 때 뜨거운 사출기(밀어내는 기구)를 통하여 플라스틱 용기를 만드는 것처럼 하느님에게서 뜨거운 사랑이 분출하여 나오는 것을 연상하여 보라. 하느님은 당신의 모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강조하신다.
부부가 서로에게 헌신하는 삶을 살면 어딘지 모르게 닮은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부자지간에도 외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눈에 나타나지 않는 마음씀이 닮는다고 한다. 그것은 같이 생활하고 함께 이해하는 과정을 통하여 자신도 모르게 서로 닮아 가는 것처럼 하느님은 공동체적인 삼위일체를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닮은 인간도 공동체로 창조하셨다. 아담과 하와의 창조를 통하여 부부가 되게 하시고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주셨다. 새 가정은 세상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게 하셨다. 아담에게 필요한 짝 하와를 창조하실 때에 잠자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비뼈 하나를 뽑아 만드셨다는 표현은 바로 서로에게 긴밀한 관계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도 사랑하며 살게 하시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도록 하셨다. 하와의 창조에 아담이 얼마나 기뻤는지를 보여주는 표현은 다음과 같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다”
이렇게 애타게 고대하던 바를 얻은 모습의 표현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중요한 구성원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 사랑의 공동체를 축복하셨다.
3) 공동체의 분열
사람이 낙원에 머물 때는 하느님과 사람이 공동체로 살았다. 하느님과 더불어 낙원에 머물며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을 아는 열매를 따먹고 나서는 알몸이라는 것이 부끄럽게 여겨져 동산을 거니시는 하느님의 눈길을 피해 몸을 숨겼다.
“카인은 아우 아벨을 ‘들로 가자’고 꾀어 들에 데리고 나가서 달려들어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창세
4,8)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게 되었다. 죄가 들어와 두 형제를 갈라놓았다. 죄는 부끄러운 것이며 자연히 숨기고 감추게 된다. 이렇게 죄책감이
드러나는 결점을 감추게 하며 숨기게 한다. 이것은 분열과 단절의 시발점이 되었고 아담은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또한 그 결과에 대한 책임으로 낙원에서 추방당하여 더 이상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죄로 인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은 죄로 인한 이기심으로 싸우게
되고 다투게 된다. 결국 죄는 모든 단절의 원인이며 또한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요인이다.
“인간은 마귀의 유혹을 받아 역사의 시초부터 제 자유를 남용하였고 하느님께 대립하고 하느님을 떠나서 제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을 알았지만 하느님께 마땅한 영광을 드리지 않았고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은 흐려져 창조주보다는 오히려 피조물을 섬겼다.” (사목헌장 13항)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나는 과연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 (로마 7,24-25)
4) 예수님은 화해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자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며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길을 제시하신 분이시다. 죄로 말미암아 분열되고 이기심으로 인하여 화해하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셨다. 희생제물이란 바로 화해를 위해 대신 속죄의 제물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며 제자들에게 성령을 파견하셨다. 이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죄로 분열된 하느님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오신 화해자임을 드러내셨고 예수님의 부활, 승천후에 이 모든 사실을 알게 해주시려고 오셨다. 부활을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한 화해의 삶을 가르쳐 주신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마태 12,50)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1고린 3,16)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1고린 6,19)
성령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며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 되고 교회를 전파하게 하신다. 또한 교회가 믿는 이들의 공동체임을 드러내게 하시며 이끌어 주신다.
공동체라는 의미를 살펴보면서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신 공동체이시고, 우리가 각자 개별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도 공동체를 통하여 완성하신다는 것을 성서의 가르침을
통하여 알게되었다.
공동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우리들의 모습을 잘 인식하고 우리가 세상 안에서 먼저 하느님의 사랑이 충만한 소공동체를 건설함으로써
죄로 말미암아 분열된 공동체를 재건하여야겠다.
제2강 기초공동체는 왜 필요한가요?
글쓴이: JTB, 최초작성일: April 30th, 2008, 최종수정일: May 1st, 2008
소공동체를 위하여 : 제2강 기초공동체는 왜 필요한가요?
이용호 신부
·이 글은 대구 복자성당에서 있었던 최병화(요셉) 님의 대림절 특강을 이용호 신부가 정리한 내용임을 밝혀 드립니다.
기초공동체라는 용어는 ‘교회의 기초공동체’, ‘그리스도인의 기초공동체’, ‘소공동체’, ‘반신회’, ‘반모임’이라는 용어들과 함께 혼용되어 왔다. 그러나 기초공동체는 일정한 지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본당의 기초가 되는 소규모 단위의 공동체를 의미하는 말이다.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그 본질은 기초공동체에 두고 있다.
1부 기초공동체를 이루어야 하는 근거
1) 교황 바울로 6세의 사도적 권고
교황 바울로 6세의 ‘현대 복음선포’의 사도적 권고 58항에서 ‘교회의 기초공동체’라는 말이 많이 인용되고 있다.
교황님은 1974년 이 권고문에서 “복음화하면서 복음화되는 것”을 역설하셨다.
‘복음화하면서’라는 뜻은 복음의 정신대로 제대로 사는 것, 즉 교회 공동체가 사귐과 나눔과 봉사를 하는 공동체가 된다는 뜻이다. 기초공동체가 생기게 되는 필요성, 요인은 교회가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면서 생기게 되었고 대도시 본당에서는 인격적인 교류가 잘 안되어서 잘 되도록 하기 위해서 생겼다. 교황님은 기초공동체가 정치나 이데올로기에 편향하거나 신심이나 돈에 연류되어서는 안되며 책임의식이나 전체주의 의식으로 퇴색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이 말씀의 요지는 기초공동체는 자신의 근본 소명에 충실하면서 복음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화는 복음의 선포자로서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2) 교황 요한 바울로 2세의 교회
선교사명 51항
“교회의 기초공동체는 복음화의 힘이다.”
기초공동체는 본당공동체의 분권적(일부분)이며 항상 본당에 소속되어 각자의 소속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기초공동체는 이웃과 함께 누룩이 되어야 한다. 즉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봄으로써 이웃 안에서 누룩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대화하기 편한 2%의 ‘살찐 양들’(친한 사람들)만 돌보고, 아흔 아홉 마리의 소외된 양들은 돌보지 않고 있다. 바로 이 소외된 이들을 찾으려는 구조가 바로 기초공동체이다. 예수님도 소외된 이들을 우선적으로 찾지 않으셨는가?
기초공동체란 밖으로는 이렇게 소외된 사람을 찾는 것이며 안으로는 공동체를 체험하는 것이다. 즉 위로받고 위로하는 것을 통하여 공동체를 체험하는 것이다. 흔히 반공동체가 잘 안 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공동체의 맛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5대 독자 외아들에게서 손자를 본 할머니가 며느리 자랑을 안 하겠는가? 시키지 않아도 며느리 자랑을 하듯, 능동적으로 기초공동체에 참여하기 마련이다.
또한 기초공동체는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서도 능동적이어야 한다. 역할이 분담되어야 하는데 예를 들면 반장, 부반장, 회계, 총무봉사자, 말씀봉사자(전례), 어린이를 돌보는 봉사자 등으로 역할을 분담해서 능동적인 참여가 되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능동적인 자세와 참여야말로 기초공동체를 이루는 지름길이라 하겠다.
3) 아시아 주교회의
“말씀이 현존하셔서 기초공동체를 만드셨다.”
2001년 교구장 사목교서 실천사항 중 사랑에 바탕을 두고 신자들이 자율적으로 행하는 것과 요한 바울로 2세의 능동적인 자세로 기초공동체에 참여하라는 말씀은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기초공동체는 복음화의 과정이며 복음 선포인 것이다.
반둥에서 열렸던 아시아 주교회의 폐막 성명 중 기초공동체에 대한 선언문에서는 “말씀이 현존하셔서 기초공동체를 만드셨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1976년부터 교황, 주교님들의 이런 기초공동체에 대한 가르침은 강화되어 왔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처음 듣는 것”이라고 한다. 사실 반장을 하라고 하면 성당에 그만 다니고 싶다고 할만큼 그 직책을 어려워 한다. 기초공동체의 모임이 반상회 정도의 개념에 머물러 있어서 여전히 기초공동체에 대한 의식이 없는 것이 현실정이다.
4) 성경의 근거
마태복음 10장은 열두 사도를 파견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왜 하필이면 열두 제자만 파견했을까? 이것은 제자가 없어서라기 보다는 기초공동체의 모습을 제시하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함께 생활하면서 복음을 선포하는 모습인 것이다.
사도행전 2, 4장에서는 초기교회의 신자들이 기초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하고 공동으로 기도와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도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나눔과 섬김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2부 기초공동체의 구성
1) 지역 우선
일정한 지역 안에 사는 10가구 정도의 20-30명을 단위로 구성한다. 너무 숫자가 많거나 적으면 공동체 형성에 어려움이 따른다.
2) 가족단위의 다양한 구성원을 형성한다
노인, 외짝교우, 소년소녀 가장, 신자가정 등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된다. 신분이나 직업도 다양하다. 쌀가게, 회사원, 기능공, 공무원, 회사중역 등등.
3) 자율성을 가진다
기초공동체 안에서 평신도가 자율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무슨 교회의 법도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산다는 것이 아니다. 자율적으로 한다는 것은 공동체가 할 일을 스스로 계획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물론 지도 신부의 지도를 따른다. 하지만 의존하거나 수동적인 지시만 받아서 하는 것을 탈피한다는 뜻이다.
4) 복음나누기를 한다
이 부분은 참으로 중요한 부분이나 꼭 복음나누기 7단계를 고집하지 않는다.
물론 충분히 습득하여 공동체 전체가 잘 운용할 수 있으면 이 방법은 좋은 결실을 거둘 수 있다. 아직도 공동체 전체가 7단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면, 가장 중요한 부분을 우선적으로 하면 되겠다. 복음나누기 시간이 성경공부를 하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이 시간에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삶에 관련된 생각이나 느낌, 즉 생활을 나누는 것이다.
모임의 시기 역시 매일 하든, 주 1회를 하든, 월 2회를 하든 그 공동체의 사정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지만, 최소한 기초공동체가 잘 되려면 주 1회는 모임을 가져야 가능해진다. 목표를 주 1회로 세웠다면 요일도 그 공동체의 여건에 따라서 결정할 일이다.
5) 모임장소
“그들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 여러분에게 문안해 주십시오.”(로마 16, 5)라는 성서의 말씀에도 각 가정에서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던 모습이 소개되고 있다. 기초공동체도 그 구성원들이 서로의 가정에서 모임을 갖도록 한다.
3부 기초공동체의 성격
1) 신앙공동체이다
기초공동체는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에 항상 말씀이 중심이 된다. 물론 모임에서 우리가 읽었던 성경말씀을 때로는 잘 모르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신약에 ‘성령께서 오셨다’는 표현을 읽고 ‘구약에는 성령께서 안 계셨나?’,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러면 신부님께 여쭈어 보자’ 등등, 다음 모임에 한사람이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온다든지 성경주해서를 찾아 본다든지 해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신앙을 생활 안에서 실천하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체험을 나누는 신앙공동체가 바로 기초공동체이다.
서울 어느 본당의 경우 가두선교를 나갔는데 노력에 비해서 성과가 적어서 평가회의 때 무조건 나가지 말고 이웃에 있는 친분 있는 사람들부터 해 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실제로 이웃에서부터 시작해서 대단히 큰 성과를 얻었는데, 지난 번에는 20여 명에 지나지 않던 예비신자를 약 100여 명 이상이나 성당으로 초대할 수 있었다.
또 어떤 본당에서는 예비신자를 처음 6개월간 소속 기초공동체에 나가게 하고, 6개월 후부터 교리를 시작해서 3개월 교리하고, 그 뒤 3개월 동안은 또다시 소속 기초공동체에 나가게 해서 1년 정도 교리기간을 가졌다고 한다. 신앙공동체 안에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다.
2) 예배와 기도의 공동체이다
가족적인 소규모의 구성원들이 모여서 본당의 전례를 담당하기로 지향을 가지고 함께 기도를 한다. 여덟 살 된 꼬마 아이가 놀이터에서 머리를 다쳤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주선하고 9일기도를 바치기로 했다. 2-3일 지나는 동안에 다행히 아이가 나아서 9일기도가 끝나는 날 파티를 했다. 그런 일을 통해서 사귐의 신비를 체험했다면 고독한 그 가족들은 공동체와 친밀한 관계를 갖게 된다.
1996년 대우 연구소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현대인 7,493명(약 3,190세대) 중 대도시 인구 47%가 하루에 한번도 이웃에 사는 사람과 말을 건넨 적이 없다는 응답을 했다. 현대는 그런 사람이 더 늘어가는 추세이다. 서로 함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기초공동체의 활동이 어느 시대보다 급박하게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다.
3) 성사(혼인, 신품, 세례, 견진)를 준비시킨다
혼인할 자녀들이 어디에서 결혼과 함께 신앙생활을 배우겠는가? 풍부한 결혼생활의 체험들을 기초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알려주게 되고 생활을 통해서 지켜봄으로서 알게 된다. 신품성사를 받게 되는 자녀가 있다면 처음 그 자녀는 바로 공동체 안에서 자라서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는 것이고, 성직자가 되는 과정을 통해서 그 지역 공동체의 자녀들이 자연스럽게 성소를 배우고 익히게 된다. 신학생이 양성되는 첫 단계가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성소의 중요성을 알리고 신학생을 보고 접촉하게 하는 과정을 통해서 아이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성소를 키워가게 된다. 그 외에 세례나 견진성사도 공동체 안에서 교리를 담당하는 봉사자들을 통하여 교육을 받아 성사를 준비하게 된다.
4) 사랑과 봉사를 실천한다
이웃, 형제, 자매를 위해서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과 봉사하는 모범이 바로 복음화의 지름길이다. 이웃에 사는 반원 집을 방문했는데 어린아이가 혼자 집을 보고 있었다. 집안을 청소하고 아이 간식을 챙겨주고 돌아왔다. 일을 나가는 그 자매가 저녁에 찾아와서 인사를 하면서 하는 말이 “저 모임에 잘 나갈게요.”라고 했다.
이웃의 소중함을 알면 공동체는 더욱 활성화된다. 이웃을 방문했는데 감기 몸살로 며칠째 앓아 누워서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콩나물을 사다가 국을 끓여 먹였더니 다음날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났다. 작은 구원을 체험한 그 자매는 꼬박꼬박 공동체에 참석하였다. 이러한 사례는 서로 돕고 서로에게 체험이 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초상이 난 이웃집에는 자녀들이 신자가 아니어서 서먹했지만, 열심히 봉사하며 거들었더니 장례 후에 그 자녀 9명이 교리반에 입교를 해서 세례를 받았고, 그 구역에서는 경로당을 빌려 축하파티를 열었다고 한다. 적극적으로 봉사함이란 이웃이 남이 아니라 하느님이 보내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섬기는 자세이며,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이다.
끝으로 다시 한번 왜 기초공동체가 필요한가?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고 공동체의 지체이므로, 우리 모두는 공동체가 되고 싶어하는 갈망을 지니고 살고 있다. 구약에서 이 갈망을 다 채워주지 못하였으므로, 이 갈망을 채워 줄 대안이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통하여 보여 주셨던 기초공동체이다. 서로 사랑하고 봉사하는 삶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복음화 되고 이웃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기초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통하여 자유와 해방을 알리는 구원을 체험하게 된다. 이런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능동적인 참여를 하자.
제3강 기초공동체와 하느님 백성
글쓴이: JTB, 최초작성일: April 30th, 2008, 최종수정일: May 1st, 2008
소공동체를 위하여 : 제3강 기초공동체와 하느님 백성
이용호 신부
이 글은 지난해 대구복자성당에서 있었던 최병화(요셉)님의 대림절특강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참고문헌>
·베드로 전서 2, 9-10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두운 데서 여러분을 불러 내어 그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을 널리 찬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백성이며 전에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분의 자비를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헌장 2장 전체
기초공동체의 구성원은 하느님 백성이다. 이번 강의에서는 하느님 백성에 대하여 공부해 보자. 베드로 전서 2,9-10에서 전에는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고 또한 자비도 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백성이고 자비를 받는 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교회헌장 2장 전체에서도 하느님의 백성에 관하여 다루고 있다.
1. 하느님의 백성은 소명과 사명을 가진 백성이다.
소명과 사명에 대해서는 자주 들은 것 같지만, 이번 기회에 정확한 말뜻을 정리해 보자. 먼저 소명이란 군대에서 소집영장이 오면 입대하는 것과 같다. 소집을 입대라고 말하기보다는 ‘응소’라고 하는 것이 더 명확한 표현이다. 입대하여 군인이 되면, 무엇보다 군인의 사명은 국토방위에 대한 사명을 지닌다. 나라를 지키는 일에는 참 다양한 일거리가 있다. 소총수가 있고, 대포를 조작하는 이가 있고, 비행기를 조종하는 일이 있고, 밥을 하는 일도 있고, 운전을 하는 일도 있다. 그래서 그것을 세분화하여 주특기라고 한다. 600은 운전, 713은 공병 중에서도 보급, 즉 페인트, 시멘트, 목재 이런 것들을 보급하는 일을 한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소집영장을 주셨다. 초청장을 주시는데, 이것을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한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 이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불림을 받아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 하느님 백성의 사명은 복음선포이다. 군인의 사명이 국토방위이듯 하느님 백성의 사명은 복음선포인 것이다. 복음선포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봉사할 수 있다. 주특기에 따라서 군복무를 하듯 복음선포에도 그 사람의 재능에 따라 다양하다. 글 쓰는 이는 작품을 통해서, 음성이 좋은 사람은 성가대에서 봉사하는 것처럼 사명을 수행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마태복음 25장 14절에서 30절에는 달란트 비유가 나온다. 이 달란트는 재능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 어떤 분은 “저는 아무 재능도 없고 밥밖에 못합니다.”라고 하는데, 음식을 잘하는 것도 큰 재능이다. 남자들이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다 보면,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또 어떤 분이 재능이 없다고 완강하게 반장자리를 사양하시기에,
“발은 튼튼합니까?” “예, 발은 튼튼해요.” “그러면 발로 뛰어 다니며 본당소식만 전하세요.” 라고 한 적이 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그것을 유용하게 사용하지 않고 땅속에 묻어 두었다. 주인이 돌아와서 금화 하나마저 빼앗아 버렸다. 재능의 적고 많음은 중요하지 않다. 있는 재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나쁘다. 예전에 헛간에 두던 대형저울은 추수가 끝나면 쌀가마니의 무게를 재는데 사용했다. 그러나 금은방에 있는 작은 저울은 그 필요에 따라서 늘 사용한다. 큰 저울이 일년에 한두 번 사용하는 것에 비해, 금은방에 있는 작은 저울은 늘 그 자리에서 자주 유용하게 사용된다. 사용 용도가 따로 있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반장이나 구역장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하다 보면 노하우도 생기기 마련인 것을, 처음부터 겁먹지 말자.
2.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과 사귀는 백성이다.
서두에 베드로 전서의 말씀처럼 거룩한 겨레,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은 하느님을 체험하는 백성이다. 하느님을 체험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존 포엘(John Poel)은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에게는 신학도 하느님을 만나게 해줄 수 없다.”고 말한다. 친구들 가운데 유명한 친구가 있다면 “아, 그 친구, 초등학교 동창이야.”라며 자랑할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친구가 되겠다고 하셨다. 요한 15, 14-15에서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하신다. 하느님과 사귐이 모든 이와의 사귐에 바탕이 된다. 이 바탕 위에서 우리는 주위의 형제와 자매, 나아가 전 피조물과도 친구가 된다.
3. 하느님의 백성은 순례하는 백성이다.
우리가 늘 같은 장소에 같은 성당에 나가고 있어도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 모두는 순례하고 있다. 시간이라는 기차를 타고 순례를 하고 있는 것이다. 10년 전의 컴퓨터를 생각해 보면, 무게도 모양도 크고 투박했는데, 요즘은 모양이 작아도 성능은 몇 배나 더 나아졌다.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하여, 교회는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백성을 이끌어 주신다. 이렇게 하느님은 각 시대에 알맞은 방법을 통하여 공동체를 만드시고 주관하신다. 우주 만물을 하느님 안에 일치시키고 새 하늘 새 땅을 창조해 가신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여 에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시고 시나이 반도를 거쳐 선택된 백성을 순례의 길로 부르셨다.
순례의 길, 즉 떠나는 삶은 짐이 가벼워야 한다. 6·25나 1·4후퇴 때를 생각하면 처음에는 가재도구를 비롯하여 온갖 것을 다 들고 나왔다가 얼마 후에 하나씩 버리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아이들마저 버리고 가는 사람이 생겼다. 순례의 길을 떠날 때는 짐을 가볍게 해야 한다. 이것은 순례의 길이 바로 가난(청빈)의 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에서 피정 지도를 하고 우연하게 코트를 한 벌 선물로 받았는데, 그것을 들고 다니느라 고생만 하다가 결국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주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부피가 큰 옷에 너무 욕심을 부려 고생만 하고, 결국에는 다른 사람에게 주게 되고 말았다. 정말 마음이 가난해야 한다. 가난의 두 종류에는 다음의 경우가 있다.
가. 물질적 가난
이 가난은 하느님께서도 배격하시는 가난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소수의 사람들이 자원이나 재원, 재물을 독점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많다. 이것은 정말 나눔으로써 극복해야 할 문제다.
나. 복음적 가난
이 가난은 물질을 귀하게 여기지만 결코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물질이냐 가난이냐, 이 둘이 갈등을 빚으면 먼저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볼쇼이 아이스 발레’ 표를 선물 받았다. 곧이어 전통 악극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표도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두 공연이 같은 날에 열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느 쪽을 가겠는가? 아마도 더 좋아하는 쪽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추운 날 9일기도 참석에 대한 게으름이 생길 때 어떻게 할까, 망설여지겠지만 잘 극복하고 참여하게 될 것이다. 갈등을 뿌리치고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처럼 눈앞에 이득이 생기는 물질이나 재화가 아니고 가난함을 택하는 것이 복음적 가난이다.
다. 헌신적 가난
자신의 삶 전체를 내어놓는 가난함을 택하는 것이다. 수도자들이 청빈을 택하여 자신의 소유물을 갖지 않고 서원을 한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헌신적 가난이다.
순례의 길을 사는 우리에게 헌신적인 가난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복음적 가난을 살려고는 노력해야 한다. 창세기 12장 1절과 4절에서 하느님은 아브람에게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아브람은 야훼께서 분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라는 표현은 짐을 가볍게 한 순례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4. 하느님 백성은 공동체인 백성이다.
하느님의 백성은 한 인격과 같은 백성이다. 어떤 이는 눈의 역할, 어떤 이는 발의 역할, 어떤 이는 손의 역할을 통하여 여러 사람이 마치 한 사람의 모습으로, 한 인격으로 나타난다. 1984년 여의도 광장에서 한국 선교 200주년 행사와 그 후 열린 시성식에서도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을 잘 보여 주었다. 이렇게 선교 200주년을 맞이하면서 한국주교회의에서는 이 사업을 성공리에 잘 마치기 위해서 오랫동안 준비를 해 왔다. 1984년이 ‘전국 일치의 해’였고, 1983년은 ‘교구 공동체의 해’, 1982년 ‘본당 공동체의 해’, 1981년은 ‘이웃 전교의 해’, 1980년은 ‘가정 공동체의 해’로 정해서 진행되었다. 본당과 가정 사이에 꼭 기억해야 할 과제로 이웃을 넣은 것은 참으로 깊은 배려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백성인 공동체에 속해 있으며, 하느님의 백성은 처음부터 공동체로 불림을 받았다.
제4강 기초공동체의 구성단위인 가정
글쓴이: JTB, 최초작성일: May 5th, 2008, 최종수정일: May 6th, 2008
소공동체를 위하여 - 제4강 기초공동체의 구성단위인 가정
이용호신부
이 글은 지난해 대구복자성당에서 있었던 최병화(요셉)님의 대림절특강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어린 왕자」를 쓴 생떽쥐베리는 비행기 조종사로 2차 대전에 참전하여 아프리카 사막을 가로질러 우편물을 배달하는 일을 했다. 어느 날 사막 한가운데에서 비행기 고장으로 불시착을 하게 되었다.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 없는 상황에서 며칠을 생존해 있었다. 드디어 구조대가 도착해 그를 구했다. 구조대는 그를 구조한 다음, 어떻게 그렇게 버틸 수 있는 힘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견딜 수 있는 힘은 물도 아니고 빵도 아닌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소.”
기초공동체의 구성단위인 가정 공동체는 모든 공동체의 기본이요 기초이다. 우리가 말하는 가정공동체는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에 예배의 공동체요, 전례의 공동체이며, 사랑과 봉사의 공동체이다.1. 가정공동체는 말씀을 중심으로 기도하는 공동체이다.
요한 바울로 2세 교황님은 “가정은 기도생활을 통하여 하느님과 대화 할 소명을 갖고 있다.”고 하셨다. 가정기도의 특성은 함께 드린다는 데 있다.
부부, 엄마와 딸, 아버지와 아들 등등 가족 구성원 전체가 다 함께 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늘 가족들이 함께 함으로써 힘을 얻게 되는 것이 가정공동체이다. 두세 사람이 마음을 모아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무슨 일이든지 다 들어주신다고 하셨다.(마태 18, 19-20 참조) 또 다른 복음의 병행 구절에서는 단 두세 사람이라도 함께 기도하면 그리스도께서는 함께 있겠다고 하셨다. 가정기도는 그 특성상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교황님은 부모가 자녀에게 기도를 가르칠 의무가 있다고 하셨다. 아침, 저녁 식사 전후에 그리고 삼종기도를 습관화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가정은 신앙의 교육장이기 때문이다. 교회헌장 11항에는 가정을 일러 “말과 모범으로 신앙을 가르치는 첫 교육장이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교육이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교(敎) : 본받을 효(孝)와
아들 자(子 ), 칠 복(
)으로 구성되어 있다.
효(孝)는 교육내용이고 아들은 교육대상이며, 칠 (복)자는 교육방법이다. 칠 (복)자는 자극을
주어서 부모를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무엇을 본받는가? 그것은
바로 아이들이 말도 못하고 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미 부모로부터 부모의 모습을 보고 본받기 시작하는 것이다. 갓
돌을 지난 어린 아이가 성호를 흉내내며 따라한다. 그런데 아이에게는
TV를 못 보게 하면서 집안에서 어른들이 고스톱을 친다면 교육이 될 리 없다.
한국일보 창사 특집으로 갤럽과 함께 ‘한국인의 의식 구조’라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여기서 어머니의 63%가 아이의 손목을 잡고 새치기를 해 본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아이가 어머니로부터 무엇을 본받겠는가?
육(育) : 해산할 때 돌아 나올 돌( )과 고기 육(肉)으로 구성되어 있다.
돌( )자는 교육의 내용을 알려주는 것이다. 아이가
말과 글을 익히기 전에 이미 부모의 것을 배우고 취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버지의 뼈와 어머니의
살을 빌려 태어난 모습은 기가 막히게 닮아 있다. 뼈는 가문을 나타낸다.
낙지가 멸치 집에 청혼했다가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멸치가 말하기를 우리 집은 그래도 뼈대가 있는 집안이라고 했다나... 育(육)의 의미가 뭔가? 그것은 바로 뱃속에서 기른다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모태에서부터 교육이 시작된다는 것을 뜻한다. 태교는 예전부터 강조되어 온 것이다. 교류분석이론에서도 이 태교가 입증되고 있다고 한다. 부모가 콩이면 자녀도 콩이고 부모가 팥이면 자녀도 팥이다.
교회에서도 이런 가정에서의 신앙 교육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이미 공의회 문헌에서도 ‘말과 모범’으로 자녀를 가르치는 첫 교육장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바울로 6세 교황은 1976년 일반 신자의 알현 장소에서 호소하신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다.
“어머니들이여!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와 기도를 가르치십니까? 어릴 적부터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알도록 하십니까? 병이 났을 때 그리스도의 고통과 성모님과 성인들의 도움을 청합니까? 아버지들이여! 자녀들과 가정에서 기도를 하십니까?...아버지, 어머니 당신들의 생각과 행동의 정직한 모범이 기도와 합쳐지기만 한다면 그것은 바로 교훈과 예배가 됩니다.”
말과 모범으로 그리고 공동기도와 합쳐지면 그것이 곧 예배요, 가치 있는 교훈이라고 강조하셨다. 신앙이 가정을 이끌어가는 데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신앙공동체인 가정은 복음적 식별을 통해서 그 진로를 명확히 한다. 그것은 이 가정이 참된 가정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또 우리가 참된 가정이라는 기준은 복음의 기준에 맞추어 그 기준에서 벗어났을 때는 회심을 통하여 가정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 현 교황님은 “그리스도인이 성화하기 위해서는 회심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유혹이라는 허상을 쫓아 가다보니 결국은 방향을 잃게 되는데, 그 방향을 바로 찾는 것이 바로 복음적 식별이다.
바울로 6세 교황님은 현대 복음선교에서 “교회는 회심하는 만큼이 교회의 모습이다.”라고 하시며 회심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모든 가정은 기초공동체를 이루는 근본이다. 따라서 모든 가정은 기초공동체에 적극 참여하여 신앙을 쇄신해야 한다. 혼자서 쇄신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해야 한다.
2. 가정은 예배의 공동체이다.
예배의 공동체인 가정은 항상 내일의 삶을 봉헌하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며 화해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 죄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뿐만 아니라, 변함없이 사랑하겠다는 부부의 계약에도 예외없이 침투하여 신뢰를 파괴시킨다.
부부 사이의 화해는 빨리 할수록 좋다. 서로의 자존심 때문에 미루다 보면 서먹하고 가정은 급속도로 냉각된다. 이런 가정 분위기 안에서는 하느님께 찬미와 봉헌을 드릴 수가 없다. 또한 가족들이 함께 전례에 참여할 수 없다. 가정은 전례에 참여하여 사귐을 나누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감사의 표현을 신앙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생일날 단순히 음식을 나누는 것보다는 성가를 부르고 생일과 관련된 성서말씀을 낭독하여 그 기쁨을 크게 나누어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 일상의 모든 일이 전례와 신앙으로 연결되어 있다.
3. 가정은 사랑과 봉사의 공동체이다.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은 언제나 그 집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에, 흘러 넘쳐서 주위에 있는 이들과도 친교를 이루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도 드러내게 된다. 우리 가정의 사랑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가정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방문하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것은 사랑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바로 가정은 사랑과 봉사의 공동체인 것이다.
수도자의 청빈서원은 공동체를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포기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삶이다. 우리 가정에서도 내 것이니까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지 않으면 원래부터 우리의 것이 있을 수 없듯이 모든 것을 아끼고 나눔으로써 복음을 실천하는 장소가 되도록 해야 한다. 기초공동체와 서로 협동하여 우리가 동네를 청소한다든지 약수터를 정비한다든지 하는 것은 바로 봉사하는 삶을 가정에서부터 이웃에게로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4. 가정의 역할
가정은 가족 구성원들의 인격을 서로 성장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사목헌장 52항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부부 자신도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아 인간의 참된 존엄성을 향유하면서 같은 애정과 같은 생각과 서로 성화시키는 노력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며 기쁨과 희생이 수반되는 자기들의 사명을 완수함에 있어서 자신들의 충실한 사랑으로써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세상에 계시된 그 사랑의 신비를 증거하게 될 것이다.”
가장의 권위는 가정 안에서 지켜져야 한다. 어떤 결정을 할 때 가장의 권위가 있어야 하듯, 가족들은 서로에게 필요한 권위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어느 회사에 강의하러 갔다가 젊은 과장급 간부들의 대다수가 집에 가면 권한이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녀교육이나 살림살이에 관한 권한 전부를 아내에게 빼앗겼다고 했다. 요사이 아이들은 소꿉놀이를 하는 데도 서로 엄마를 하려고 한다. 우선 가장의 권위가 바로 서야 하겠고, 가족들에게 봉사하기 위한 결정에도 권위가 있어야 하겠다.
가정이 쇄신되고 제 역할을 해야 본당공동체에도 공헌할 수 있다. 기초공동체의 기본단위인 가정공동체가 파괴되거나 해체되는 여러 경우들에서 연쇄적으로 기초공동체에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가정공동체가 바로 본당 기초공동체의 근본이기 때문에 가정공동체의 성장 없이는 기초공동체가 성장할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가정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여야 하는 소명을 받고 있다. 가정성화의 소명은 하느님과의 일치에로의 소명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한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 48)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1데살 4, 3)
마더 데레사 수녀를 일컬어 살아 있는 성인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느님은 당신과 일치하라고 우리를 부르셨다.
하느님은 우리 가정이 교회가 되기를 바라신다. 사도좌의 권고 21항에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교회의 일치의 특수한 표출이고 실현이다.”는 말씀처럼 하느님 안에 우리가 일치, 부부가 가정 안에서 일치, 그리스도가 교회와 일치해야 한다.
이제 가정공동체는 제자들이 모든 것을 내어놓고 공동체를 이룬 것처럼, 우리 가정도 그리스도의 삶으로 쇄신되어야 한다. 기초공동체의 구성단위인 가정공동체가 제 역할을 함으로써 본당의 기초공동체에 책임을 다하도록 하자.
제5강 기초공동체들의 공동체인 본당
글쓴이: JTB, 최초작성일: May 5th, 2008, 최종수정일: May 6th, 2008
소공동체를 위하여 - 제5강 기초공동체들의 공동체인 본당
이용호신부
·이 글은 대구 복자성당에서 있었던 최병화(요셉) 님의 대림절 특강을 이용호 신부가 정리한 내용임을 밝혀 드립니다.
“교회적 기초 공동체는 복음선교의 묘 자리가 되고, 보다 큰 공동체 특히 지역교회의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보편적 교회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현대복음 58장)
1. 본당이란?
‘본당’이라는 말이 성서의 어느 부분에서 나올까? 아마도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대답은 ‘모른다’가 정답이다.
왜냐하면 성서에 본당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본당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공식 사용된 것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이다. 이때 처음으로 본당이라는 제도를 만들게 됨으로써 사용하게 되었다. 주교가 관할하는 지역을 다시 세분화하여 본당이라고 하며 본당은 교구 내의 일정한 지역을 담당하는데, 이 본당의 사목 권한은 역시 교구장에게 있다. 주교는 관할 지역에서 사목권을 행사한다. 교구라는 사목 관할 지역이 넓고 크면 주교는 자신을 대신할 사제에게 관할 지역 일부를 사목하도록 파견한다.
주교가 관할하는 지역에서 타 교구 사제가 미사를 봉헌한다면 반드시 그 관할 주교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 또한 미사 중에 나오는 경문에 “....우리 주교 (아무)와 ....” 하는 부분에서는 반드시 그 관할 주교의 이름이 들어가야 한다.
이렇듯 교회법에서는 사목 관할 주교의 권한을 정하고 있으며, 관할 주교는 사목권한을 교구사제에게 위임하여 사목권을 수행한다. 따라서 교구 안에서도 일정한 지역을 본당관할로 지정하여 본당 주임사제에게 사목을 위임함으로써 일정한 지역은 그 주임사제의 책임 아래 사목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정한 교계제도에 따른 본당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본당은 지역 중심이다. 둘째, 본당은 사제 중심이고 셋째, 본당은 성사중심이다.
本堂(본당)이라는 말에서 흔히 우리가 집 당(堂)을 사용하기 때문에 본당을 생각할 때 건물, 집이라는 개념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여기서의 본당은 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본당을 이루는 공동체 구성원 전체를 의미한다.
트리엔트 공의회가 열린 시기는 우리 역사로 환산해 본다면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임꺽정이 있었던 시대이다. 그 당시 본당의 모습은 피라미드 구조로 되어 있어 모든 일이 사제에게로 집중되어 있던 시대이다. 만일 일반 사회제도라면 벌써 많이 변하고 바뀌었을 것이다.
2. 본당의 유형
본당의 유형은 여러 형태로 발전해 왔고 앞으로도 조금씩 변해 갈 것이다. 주입식 본당과 사목회 중심의 본당 그리고 단체 중심의 본당과 기초공동체 중심의 본당 형태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자.
1) 주입식 본당
주입식 본당은 먹여주며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는 본당으로, 본당 사제는 의사결정에서부터 그 일에 대한 책임까지도 혼자서 져야 하는 형태이다. 따라서 일을 신속하게 처리할 수는 있어도 모든 일의 처리를 혼자서 하다 보니 그 단점이 독단적이라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분주하고 피곤하며 외로워진다. 의견을 교환할 것도, 상의할 일도 없다. 이런 본당에서는 신자 역시 수동적이 되고 불평이 쌓이게 된다.
1917년 교회법에는 평신도는 구원에 필요한 은혜를 청할 권리가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영적이고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받는 수혜자로 평신도를 서술하고 있다. 1983년 교회법의 교정된 교회법에는 평신도에 관한 규정이 많이 바뀌어 있다.
2) 사목회 중심의 본당
사목회 혹은 사목평의회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어떤 교구에서는 사도회라고도 한다. 이런 본당에서는 본당 사제와 함께 사목회가 본당의 일을 논의하고, 소수이긴 하지만 사목에 참여하는 형태로 나아간다. 그러나 사목회는 자문기관이지 의결기관은 아니라고 교회법은 규정하고 있다. 사목회 회원은 본당 사제가 임명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제도는 본당신부에 따라서 운영의 묘를 살리기도 한다. 일의 중요성이나 복음적 식별에서 볼 때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면, 자문기관으로 되어 있는 사목회에게 제한적이긴 하지만 의사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재량을 부여하는 것이다.
1983년 이후에 사목평의회가 출범했고, 교회법 536조 2항에 따라서 사목평의회는 건의, 투표권만을 인정하고 있지만 한국 주교들은 교회법에 따라서 교구 별로 이 제도를 허가하였다. 본당 사목회는 사제가 주재하고 투표로 결정하지 않는 건의, 투표권을 인정하고 있다. 주입식 본당보다는 원활한 참여가 있었지만 사목회 중심의 본당 역시 대다수의 신자들은 쇄신에 참여할 수 없는 형태이다.
3) 단체 중심의 본당
본당이 성장하면서 다양한 단체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서로 도와가면서 본당의 성장을 촉진하게 되었다. 단체들 중에는 신심단체(포클라레, 울뜨레아, 레지오, 기도회 등등)와 친목단체(성가대, 성모회, 연령회, 자모회 등등) 그리고 각종 활동단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단체 중심의 본당에서는 주로 모든 것이 조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본당 사제는 특별히 몇몇 단체에 편중한 사목을 하게 되고, 때로는 단체장의 역할에 직접 관여함으로써 활성화가 저하되기도 한다. 또한 특정 단체에 일의 편중 현상은 과부하가 걸려 갈등이 생기게 된다. 생업과 본당 일을 동시에 하는 단체장에게 본당 일이 과중해지면 어려울 수밖에 없고, 본당 사제의 기호에 따라 단체가 육성되기도 하고 사장되기도 하는 부작용이 있다.
어떤 본당 실태조사에 의하면 한 사람이 친교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은 대개 150여 명을 넘어설 수가 없다고 한다. 보통 시내 본당에서 한 본당을 평균 3000명이라고 가정한다면, 3년 내지 5년의 임기 동안 본당사제는 5% 정도의 신자만을 상대로 사목을 하게 된다. 살찐 양 한 마리를 위해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내버리는 것은 이상적인 본당상이 아니다.
본당이란 하느님 백성으로서 교구 안에서 사제의 지도 아래 기초공동체들이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사귐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사제의 지도 아래 유기적인 공동체라는 뜻은 마치 포도송이에서 포도를 따서 입에 넣는 순간 침이 고이듯, 자율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지는 상태를 말한다.
4) 기초공동체들이 중심인 본당
제5차 아시아 주교회의에서 아시아의 바람직한 본당의 모습은 공동체들의 공동체이어야 한다고 결의한 바 있다. 본당은 예배와 사랑과 봉사의 공동체이다. 기초공동체에서 힘이 모자라서 할 수 없었던 일을 본당 공동체의 차원에서 해야 한다. 즉 대축일에 공동체 전체가 지낼 전례를 준비하고 참여를 위하여 일을 분담하는 일은 소속감을 가지게 한다. 사랑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필요한 것과 어려움을 나누는 것을 배려하는 일이 사랑의 공동체이다.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서로에게 봉사하는 삶으로써 복음을 증거하게 된다.
본당 구조는 원칙적으로 본당의 구성원 모두에게 참여의 기회가 열려져 있어야 한다. 제단체 활동이 활성화되어 서로 돕고, 단체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기초공동체가 참여의 기회를 열어 주고 보완한다면 권한 분배와 책임의 원칙이 생기기 마련이다. 바울로 6세 교황의 말씀처럼 분권적 기초공동체가 모여 본당을 이루어야 하고, 분권적 기초공동체라면 스스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본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초공동체가 활성화되려면 기초공동체에 일정한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 삼위일체를 닮은 인간은 일정한 책임감과 동시에 창조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욕구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끝으로 우리는 여러 형태의 본당을 보았다. 지금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고찰해야만 한다.
최근에 지구장 및 지역장 중심의 사목이 강조되지만, 지구나 지역에 힘이 실리지 않는 까닭은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결정은 당신이, 책임은 내가 진다면 누가 일을 하겠는가? 마치 전장에서 영광은 상관이, 책임은 졸병이 진다면 그 부대는 틀림없이 사기가 떨어지게 될 것이다.
기초공동체에서 반장이나 구역장을 처음에는 임명하지만 나중에는 반이나 구역에서 결정할 수 있도록 재량을 주어야 한다. 이렇게 일정한 권한과 책임이 병행되는 기초공동체의 운영의 미를 살리면 활성화는 어렵지 않다고 본다.
아직도 기초공동체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참여하지 않거나 비평만을 일삼는 것은 변화에 역행하는 것이며, 편리만을 추구하는 것에서부터 빨리 벗어나야 한다. 또한 기초공동체가 우리 본당의 기본조직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기꺼이 참여함으로써 본당에 소속감을 가진 구성원이 되도록 노력하자.
제6강 기초공동체의 내적 활동
글쓴이: JTB, 최초작성일: May 7th, 2008, 최종수정일: May 10th, 2008
소공동체를 위하여 : 제6강 기초공동체의 내적 활동
이용호 신부
·이 글은 대구 복자성당에서 있었던 최병화(요셉) 님의 대림절 특강을 이용호 신부가 정리한 내용임을 밝혀 드립니다.
“내가 이 사람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이 사람들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며 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 사람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 23)
기초공동체의 외적활동이 복음선포라면 기초공동체의 내적활동 목표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즉 사랑을 실천하여 일치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우선 과제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여기서 ‘하라.’는 명령어이다. 명령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하는 것은 계명의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이고, 이 계명을 지키는 일은 사랑을 통해서 일치를 이룸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성부께 기도하셨다. 이 일치는 기도의 차원이다. 사랑보다 더 높은 차원을 말한다. 일치를 위하여 하느님이 우리를 부르셨다. 일치는 우리가 성화를 이루는 최고 영성이며 필수과목이다. 그래서 기초공동체의 내적활동의 목표는 일치이고 우리 구역, 반 공동체도 바로 일치를 이루어야 하겠다.
1. 일치는 핏줄과 같은 사랑이다.
예수님은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웃 사랑을 강조하셨다. 이 이웃 사랑은 핏줄과 같은 사랑이다. 사랑이 짝사랑이면 차라리 쉽다. 일방적으로 해 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화살표가 일방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고 오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만이 아니고 내가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어야 하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들지 못하면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사랑하게 하려면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 주어야 한다. 어떤 꼬마가 귤과 바나나를 가지고 있었다. 그 옆에 있는 아이가 과일을 먹고 싶어하자 귤을 하나 주었다. 그런데도 옆에 있는 애는 만족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바나나를 먹고 싶은데 귤을 주니, 귤을 얻어먹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나나가 아까워서 주지 못하고 약간 덜 좋아하는 귤을 양보했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흡족하게 하지는 못했다. 예수님은 “남이 바라는 대로 해주어라.”하고 말씀하셨다. 서로 사랑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것은 수난적인 사랑이다. 우리 몸에서 핏줄을 통하여 피가 돌듯이, 사랑이 끓어지면 피가 통하지 않는 동백경화나 협심증이나 심근경색에 걸려 중병을 앓다가 결국은 죽게 된다. 수난하지 않고 자신이 아끼는 최고의 것을 내어 주지 못하면, 그것은 결국 끼리끼리 노는 것이 되고 수난이 없는 사랑이 된다.
친구 중 한 명이 어떤 여인과 사랑해서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해서 한 집안에 살면서 며느리는 시어머니, 시누이와 갈등을 겪게 되었다. 결코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서로 양보하지 않았고 고부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그 골이 깊어 결국에 이들 부부는 갈라서게 되었다. 수난적 사랑이 아니면 분열이 오고 그 분열은 단절을 가져온다.
2. 일치의 수덕은 대화이다.
대화는 일치에로 나아가는 덕목 중에 하나다. 즉 덕을 쌓듯이 대화는 성화를 이루어 준다. 그러면 대화란 무엇인가? 대화는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며 서로의 마음을 주고 받는 것이다. 한자 受(수)는 예전에는 준다는 의미와 함께 받는다는 의미로도 사용했으며, 원래는 준다는 의미는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엔 손을 사용하여 무엇을 준다는 의미로 授(수)를 사용하는데 그것은 손 手는 원래 (수)와 같은 뜻이라서 手가 앞으로 나와서 사용하여 손으로 주는 것을 받는다는 뜻으로 授를 사용하게 되었다.
마음을 주고 받는다는 의미가 될 때, 바로 마음(心)이 들어가 애(愛)가 되며 이것은 마음을 주고받는 것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대화의 본(本)적지는 사랑이고 사랑의 원(原)적지는 하느님이시다.
로마서 5장 5절에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어떤 채널을 통하시든지 우리와 대화하시려고 한다. 라틴어 로고스(Logos)라는 말은 말씀, 예수 그리스도, 대화, 길이라는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대화는 쌍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미국에 전화를 할 때 중계 위성을 통하여 연결이 되듯이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중계국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다. 사람 사이의 마음의 길은 대화로 연결된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길도 예수님이라는 대화를 통하여 가능해진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은 바로 일치의 수덕이 대화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닮은 우리는 대화를 통하여 일치를 이룬다.
물론 대화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말로 다 의사소통을 하지 못한다. 말,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20-30%에 지나지 않고 다른 것, 즉 눈빛, 손짓, 억양, 크기, 길이, 웃음, 울음 등이 70%를 차지한다. 부부 사이에 대화를 할 때 “알아서 하이소.”라는 말 한마디도 억양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진다. 남편이 부인에게 “여보, 삼촌 생신인데 부조를 50만 원 정도 해도 되겠소?” 하고 물었을 때 부인이 “알아서 하이소.”라고 대답했다고 하자. 이 대답의 억양이 아주 높고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면 허락의 의미가 아니라 ‘절대 그렇게 하지 말라.’는 의미가 되고 만다.
울산에서 있었던 일이다. 극빈자 할머니들에게 김장을 해서 나누어 드리는 행사가 있었는데, 김장한 것을 가져온 봉사자에게 “욕봐, 우야꼬.”하고 감사해 했다. 이 할머니가 하신 말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억양을 무시해버린다면 그 만큼의 감동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마음을 담아서 대화를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3. 일치는 다양성을 가진다.
일치는 다양성을 인정할 때 이루어진다. 기초공동체 안에는 직업이 서로 다르고 나이가 10대에서 80대까지 다르며 살림살이가 각기 다르다. 그러나 모두가 서로의 다른 점을 이해하고 수용해야 한다. 오순절 장애자들이 사는 곳에 가면 어떤 정박아는 밥만 먹여주는 일을 한다. 또 어떤 친구는 부지런히 변기만 가져다 준다. 다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배론에 있는 시설에도 가보면 어떤 친구는 하루 종일 신발만 가지런히 한다. 또 한 친구는 방안에 떨어지는 휴지만 하루 종일 치우는 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성한 사람도 기초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가진 능력을 발휘하고 자신의 고유성을 통하여 공동체에 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능력을 공동체에 제공하여야 한다. 그러면 그가 가진 고유성은 풍요로워진다. 들놀이를 간다고 가정해 보자. 각기 쌀, 코펠, 과일, 찌개, 음료수를 가져와 내려놓고 함께 나누어 먹는다. 어떤 이가 쌀만 가져 왔다고 과일을 먹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서로 공유하지 못하는 공동체가 되어, 쌀 가져 온 사람은 쌀만 먹고 과일 가져온 사람은 과일만 먹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일치한다면 기초공동체인 우리의 구역, 반 구성원들은 아주 풍요롭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공동체의 일치가 단 한번의 노력으로 이룰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다양성을 존중하는 노력도 계속되어야 한다. 다양성을 다른 말로 고유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4. 일치는 용서이다.
친교를 이루며 잘 지내다가도 공동체 안에 어떤 일을 결정해야 하거나 변화가 오면 갈등이 생기게 되고, 갈등이 생기면 그 동안 친교를 이루워 왔던 일치의 모습은 큰 위기에 부딪히게 된다. 일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쪽이 죽을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죽어야 했던 것과 같은 이유다. 상반된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면 시간이 지날수록 둘 사이에 골이 깊고 멀어져서 하나되기가 어려워진다. 남북이 대립하는 것은 서로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 때문에 세계에서 그 유래를 볼 수 없는 분단국가가 되었고, 수많은 이산가족이 가지 못하고 오지 못하는 백성이 되었다.
용서는 다리와 같아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게 하는 수단이다. 용서 없이는 일치를 유지하고 이룰 수가 없다. 부부가 자존심 때문에 서로 버티면 버틸수록 화해가 어렵고 일치하기 힘들다. 건물을 지을 때 콘크리이트는 천천히 양생시켜야 좋지만, 용서는 빠르게 할수록 좋은 것이다. 세상에서 지옥을 사는 사람은 23시 50분을 다투어 용서하지 못해 속을 끓이고 살고, 단 10분만 용서하고 평온하게 지내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천국을 사는 사람은 23시간 50분을 서로 용서하고 모든 일에 용서를 하며 사는 사람이다. 완전하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고 살면서 어찌 순탄한 일치 상태만을 바랄 수 있겠는가?
일치에 문제가 생기면 빨리 서비스(AS)를 받으면 된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가전제품이 고장나면 빨리 고쳐야 하듯이, 일치에 문제가 생기면 빨리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 그 서비스는 바로 용서다.
5. 일치는 기도이다.
일치를 위한 마지막 방법은 기도하는 일이다. 예수님이 요한 17장에서 수난을 받으시기 전에 성부께 제자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간곡한 청을 드리신 것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다음에는 성부의 뜻에 맡겨드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일치는 우리의 소명이고 은혜인 것이다. 예수님도 기도하셨듯이 우리도 항상 일치를 위하여 우리의 구역, 반이 활성화되고 서로 다양한 가운데 하나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제7강 기초공동체의 성장 단계
글쓴이: JTB, 최초작성일: May 9th, 2008, 최종수정일: May 10th, 2008
소공동체를 위하여 - 제7강 기초공동체의 성장 단계
이용호 신부
·이 글은 대구 복자성당에서 있었던 최병화(요셉) 님의 대림절 특강을 이용호 신부가 정리한 내용임을 밝혀 드립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께 “당신은 유다인이고 저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떻게 저더러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하고 말하였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하셨다. 그 여자가 저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저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하였다. 그 동네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 여자가 자기의 지난 일을 예수께서 다 알아 맞히셨다고 한 증언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요한 4, 9. 14. 25. 39)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요한 4, 5-42)의 이야기는 먼저 사마리아 여인이 처해 있는 상황, 즉 사마리아 여인이 서있는 우물가에서부터 시작된다. 예상치 못한 예수님의 물을 청하는 모습은 바로 만남이라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시작하여 사마리아 여인에게 사도직을 수행하게 하고, 동네 사람들을 데리고 나오고 믿음의 성장이 서서히 이루어져 가는 모습으로 이끌어 간다.
예를 들어 보자. 강원도 정선이 고향인 청년이 대구에 내려와 취직을 하여 살게 되었다. 그는 무척이나 외롭고 쓸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성로를 걸어가다가 우연히 고향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너무도 반가워서 차를 한 잔 하자며 자리를 같이 했다. 그러다가 고향 친구 소식을 듣게 되었고, 대구에 사는 친구들 모임을 하나 만들자고 의견을 모았다. 이들에게는 외롭다는 갈망이 있고 이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고향 친구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다.
대포(막걸리)를 잘 하는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는 천주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천주교인들은 모이기만 하면 시끄러워 죽겠어...” “뭐가 시끄러운데?” “맨날 형제님, 자매님 이러고 인사하잖아?” 얼마 후에 이 친구가 이번에는 이렇게 말했다. “천주교인들은 꼭 1부는 안 부르고 2부에만 부른단 말씀이야...” 1부에는 불러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던 친구가 6개월 교리반에 등록을 했다. 그리고 그 공동체 형제들이 매주 화요일 교리반이 끝날 때쯤이면 성당으로 와서 그 친구와 한 잔을 해서 어렵게 신자가 되었다. 물론 모임에도 잘 참석하고 있다.
기초공동체에서도 누구를 초대할 것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처음에는 2부에만 참석하고 나중에는 교리반에 그리고 정식으로 1부에 참여하여 기초공동체 일원으로 활동할 수 있을 때까지는 돌보아 주어야 한다.
1) 유아기
기초공동체가 태동하는 단계이다. 유아기라는 단계는 젖먹이에서 유치원에 갈 때까지를 말한다. 유아기의 특징은 주로 먹고 놀기만 하려 들고, 말썽을 피우며 물건을 깨뜨리며 부모에게 아주 의존적인 상태를 보이는 단계이다.
이런 단계에 있는 기초공동체 봉사자인 반장, 구역장은 한마디로 반을 끌어가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진행을 할 때도 너무 7단계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시작기도가 잘 안되면 성가로 하고, 복음나누기가 잘 안되면 그냥 사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옆집 똘이 엄마 흉도 보면서 우정을 싹튀우고, 복음을 수락하는 성숙이 이루어진 뒤에야 염불보다 젯밥에 관심이 더 많은 상태로 변화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도 위기와 갈등은 생기기 마련이다. 6개월 교리반을 수료하고 영세를 받았다고 하자. 내가 바라던 갈망이 채워지고 나면 부담스럽고 귀찮은 일이 생긴다. 즉 처음에는 공동체 모임에서 잘해 주니까 나갔는데, 나가보니 서로 약점이 있는 법이라 술 마시고 다투게까지 되었다. 그러면 이젠 나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이면 싸움질 하는 그런 모임에 왜 가야 하나? 하는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자매님은 TV 미사 중계를 보다가 미사수건을 쓴 장면을 보고, 나도 저것을 한번 써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교리반에 나가서 영세를 받았다고 한다. 처음 미사수건을 썼을 땐 눈물이 다 났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동안은 열심히 다녔는데, 얼마 전 이사를 하고 나서부터는 잘 안 나간다고 한다. 미사수건도 자주 써 보니 아무 감동도 없단다. 또 동락회(동고동락)라는 자생 모임을 만들었는데, 동락회는 한 달에 한 번 주일에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술을 한 잔 하는 그런 모임이다. 한 1년쯤 지나면서 회원 중에 한 사람이 좀 의미 있는 일을 해보자고 제안을 했고, 그 결과 이 본당 출신 신부님을 찾아뵙고 격려하는 일을 해 보자는 데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오랜 진통 끝에 보람있는 일을 하면서 회를 꾸려 가고 있다. 항상 위기가 있고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 공동체는 침체하게 된다. 즉 위기와 갈등을 통해서 성장한다는 말이다.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어떤 대학생이 취직을 위해서 원서를 구입하려고 하니 돈이 모자랐다. 그는 사람을 구한다는 쪽지를 보고 돈을 벌기 위해 식당으로 찾아갔다. 그 식당 주인은 청소와 접시 닦는 일을 도와주면 된다고 해서 일을 하기로 했다. 대학생에게는 청소하는 일이 개인의 일이자 그 식당 일이기도 했다. 청소를 해야만 원서를 살 수 있는 돈을 벌 수 있다. 개인과 식당 일은 통합적인 관계를 가진다. 개인의 일이기도 하지만 식당의 일이기도 한 까닭이다.
우리 개인이 신앙생활을 하지만 그것은 소속된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다. 내 신앙생활이 기초공동체를 통하여 성숙되기 때문이다. 점진적으로 성숙하는 공동체성과 마찬가지로 그 공동체를 통하여 나의 신앙도 함께 성숙할수 있기 때문이다. 선교봉사, 나눔의 체험 등등 내 신앙생활의 쇄신이 기초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기초공동체와 통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유아기의 지도력은 거의 반장 구역장의 역할이 약 90%이며 거의 어버이의 역할을 해야 한다. 반, 구역 봉사자인 반장 구역장은 사목자이다. 사제들처럼 수품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본당 주임사제의 임명과 공동체의 추천을 받아서 임명권이 주어졌다면, 기초공동체의 구성원을 사목 봉사하라는 공인 사목자인 것이다. 일시적으로 옆집에 아픈 사람을 돌보는 경우 임시적 사목을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공인된 사목자는 반 양 반 목자인 셈이다. 유아를 씻어주고 옷을 갈아 입히는 것이 당연하듯, 기초공동체의 태동기는 이렇게 복음화 하면서 스스로 복음화 되는 것이다.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말이다.
2) 청소년기
초, 중, 고등학생을 키우면서 부모들은 공감하시겠지만 이 때는 내부 성찰을 많이 할 때이다. 기초공동체가 원래의 목적대로 살고 있느냐? 아니냐? 잘 통합하고 있느냐? 복음에 비추어 성찰을 거듭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형제를 의식하고 형제애를 나누게 된다. 복음적 이상을 자각하지만 아직 실천에 이르지는 못한다. 동락회에서 좋은 일을 계획하고 나서 실천하는데 6개월이라는 조정 시간이 필요했다. 무슨 일이든지 단번에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처럼 보여도 막상 함께 실천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렇게 시간이 필요한 까닭은 통합을 이루는 데는 갈등을 극복하는 기다림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과 공동체가 통합을 이루는 과정을 보면 일정한 성장의 속도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꼭 선교를 하자고 제안하면 개 잡아먹고 놀자는 의견도 나온다.
청소년기 자녀에 대해 부모는 조언자의 역할에 머물게 된다. 무조건 야단부터 치거나 일일이 간섭하면 청소년들이 싫어하듯, 청소년기의 공동체의 형태는 일방적인 반장, 구역장의 역할보다는 상의하고 의견을 수렴하고 스스로 노력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을 존중하여 소속감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3) 성년기
이 단계에서는 구성원이 성숙한 개인이며 성숙한 공동체가 된다. 이런 모습은 일치의 공동체를 통하여 드러난다. 성년기에 이르면 별로 간섭할 필요도 없이 스스로 노력하고 자발적으로 이상을 실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도자가 양성되어 기쁨이 충만한 구원을 체험하는 시기이며, 계획과 일의 분담과 평가가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갈등과 위기는 있다.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자기봉헌과 변화에 대한 창의력을 발휘하지 못할 때 여전히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단 이 시기에는 10%의 기능만으로도 충분히 공동체의 역할을 다하게 된다.
제8강 기초공동체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요인들
글쓴이: JTB, 최초작성일: May 9th, 2008, 최종수정일: May 10th, 2008
소공동체를 위하여 - 제8강 기초공동체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요인들
이용호신부
·이 글은 대구 복자성당에서 있었던 최병화(요셉) 님의 대림절 특강을 이용호 신부가 정리한 내용임을 밝혀 드립니다.
“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 즐거울까! 형제들 모두 모여 한데 사는 일!”(시편 133, 1)
1. 공동체가 성장하는 필요한 것 중에 첫 번째는 소속감이다
1950년대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될 때만 해도 시골에서는 잔치가 있으면 며칠 내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일을 거들고, 또 초상이 나면 마치 내 집안 일처럼 돕곤 했다. 들에서 일을 할 때도 품앗이를 통한 모내기를 했으며, 명절에는 송편과 음식을 나누어 먹고 새해가 되면 동네 어른들께 세배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래서인지 시골동네에서는 누구든지 형님, 아우, 아저씨라는 호칭으로 빈번하게 불리었다. 마을 일 또한 함께 모여 공동으로 의논하고 결정했으며, 장마에 둑이라도 무너지면 언제 어떻게 부역을 할 것인지를 논의하곤 했다.
기초공동체의 모습은 바로 이런 취락구조와 형태를 같이 한다. 기초공동체 역시 함께 모여서 의논하고 말씀의 전례를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임을 얼마나 잘하느냐 보다는 실제 활동무대가 취락구조의 경우처럼, 함께 나누고 의논하고 결정하는 소속감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취락공동체는 태어나면서부터 시작하여 성장하고, 나아가 명절에는 음식을 나누며 품앗이 과정을 통하여 모두가 마을 일을 공유하고 있다. 기초공동체도 이와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기초공동체는 취락공동체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복음을 나누고 참여하며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모여서 이루는 공동체로서, 어쩌면 인간 취락공동체 보다도 더 뛰어난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호주의 원주민들이 유일하게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자동차인데, 이렇게 구입한 자동차는 형제들을 찾아가는 일에만 사용한다고 한다. 이들은 유대의식이 강해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육감으로 서로의 안부를 잘 맞춘다고 한다. 캐나다 인디언 아이들에게 질문을 해서 대답을 잘하는 아이에게 선물을 주겠다고 하면, 아이들은 하나, 둘, 셋하고는 한꺼번에 손을 쳐든다. 1등으로 손을 들면 그 아이가 왕따 당하기 때문이라는데, 혼자만 1등 할 수 없다는 그들의 교육 때문이란다.
우리는 무한경쟁시대라고 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1등 하는 법을 먼저 가르친다. 1등을 하면 부모의 칭찬과 더불어 먹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을 차지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한다. 이런 행동이 공동체 의식을 몰아내는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이렇게 자라서 성인이 되면, 내 것밖에 모르고 철 대문도 모자라 개조심 간판까지 붙여 놓아야 속이 편하다고 한다. 집안에서까지 이기심을 키우는 잘못된 교육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취락공동체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이 많다.
초대교회, 특히 사도행전 2장에서는 우리 구역 반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소속감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이든 함께 나누고 함께 일할 때 우리 모두는 소속감을 느낄 수 있다.
마틴 루터 킹은 흑인들의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해서 “내 백성이 수모를 당하고 있다.”라는 소속감을 피력했고, 마더 데레사 수녀도 굶주린 이들을 가리켜 “내 백성이 굶주리고 있다.”고 표현했다. 예레미아 예언서의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다.”라는 표현 역시 하느님과 백성이 하나인 공동체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할머니가 손자를 보고 “아이고, 내 새끼”라고 표현하는 것은 바로 할머니 안에 손자가 있고 손자 안에 할머니가 있다는 소속감의 표현이다.
저녁 시장에 나가서 맛있는 찬거리를 보면 누가 먼저 생각나는가, 그것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보면서, 50년 동안 헤어져 한번도 만난 적 없이 또 편지 한번 전화 한번 못했는데도 어떻게 북에 간 아들을 남한의 어머니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들과 어머니 안에 새겨진 소속감 때문이다. 내 백성이라는 말 속에도 이런 소속감이 있다. 내 공동체를 사랑해야 공동체에 소속될 수 있다.
취락공동체가 가지는 같은 마을이라는 것 이상으로 마음속에 남아 있는 정과 사랑은 일치를 이루는 원동력이 된다. 이렇게 같은 마을, 같은 인류, 같은 피조물이라는 차원에까지 소급될 수 있다면 인류는 한가족으로 성장할 수 있다. 때때로 취락공동체에서 가뭄으로 인해 아랫마을과 윗마을의 불화가 생길 수 있다. 서로 물을 먼저 대겠다고 다투기 때문에 싸움으로 비화되는 경우라 하겠다. 집단이기주의를 고집하는 한 이런 모습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제 열린 공동체로 나아가야 할 때다.
2. 목표를 세워야 한다
공동체는 그 공동체가 이루어야 할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사도 바울로는 목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달음질을 하되 목표없이 달리지 않고 권투를 하되 허공을 치지 않습니다.”(1고린 9,26)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를 부르셔서 높은 곳에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나의 목표이며 내가 바라는 상입니다.”(필립 3,10.14)
목표는 기대를 나타낸다. 셋방살이하는 부부가 내 집을 갖고 싶은 기대감을 가질 때 내 집 마련을 위한 목표를 세우게 된다. 어떤 학생이 의사가 되고 싶다는 기대감을 가질 때 의과대학에 들어갈 목표를 세우게 된다. 기초공동체 역시 구성원들이 모이면 서로 이 모임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화하여 기대를 다 표출해서 목표를 정해야 한다. 기대를 다 표출해 보면 참으로 다양한 바람이 있을 것이다. 기초공동체 모임을 통해서 신앙이 성장하기를, 또 어떤 이는 성서공부를, 또 다른 이들은 봉사하는 일을 배우는 것에 대하여, 또 어떤 이는 본당신부의 권유로 마지 못해 나오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대치를 수렴하는 목표를 정해서 따라가야 한다. 목표가 없으면 기대에 어긋나서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겠다는 반발이 생기게 된다. 내 집을 마련하겠다는 의욕이 있을 때 비로소 지출을 억제하고 노력하게 된다.
장개석과 모택동은 서로의 사상은 달랐지만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는 합심했다. 목표를 이루려고 하면 긴박감이 생긴다. 이 긴박감은 서로를 더욱 단결하게 하는 힘이 된다. IMF때 금을 내놓은 것은 공동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결집현상이다. 어려움이 생기면 그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목표를 향하여 뛰게 된다. 그러나 목표가 분명하지 않으면 눈이 내부 안으로 쏠리고 불평불만을 털어놓게 된다.
반장들의 사례발표를 들을 때도 한결같이 무언가 노력하는 공동체는 계속해서 발전하지만, 아무 것도 시도해 보려고 하지 않는 그야말로 목표가 없는 공동체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준다. 나무 작대기에 홍당무를 달아서 당나귀 앞에 갖다 놓으면, 곧장 그것을 먹으려고 앞으로 나아가지만, 아무리 나아가도 먹지 못한다면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반대로 창고 안에 홍당무를 가득히 넣어두고 당나귀를 들여보내면, 당나귀는 그 안에 있는 홍당무를 마음대로 먹겠지만 얼마 후 배가 부르면 더 이상 먹지 않게 된다. 목표라는 것은 지향 활동을 자극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선에서 목표가 수립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목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반 공동체는 복음 7단계만을 강조하여, 마치도 공동체 모임이 7단계로만 고정되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반 공동체가 함께 해야 할 일, 즉 새로 도전해야 할 목표를 세워야 한다. 기초공동체인 반 공동체가 자신들의 기대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갈망을 표출한 다음 목표를 세우고,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하느님 나라를 실현해 갈 때 공동체는 성장하게 된다.
3. 공동체를 위한 내가 되자
우리가 건설하고자 하는 공동체의 모습은 나를 위한 공동체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나로 바뀌어야 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죽음과 부활의 빠스카 운동이 있어야 한다. 공동체란 한 지붕 밑에 모여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의 세계라는 어둠에서 타인 중심의 빛으로 바뀌어야 한다.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필립 2,3)라는 말씀처럼 이기심을 버리고 살아야 한다. 사람이 죽고나서도 30분이 지나야 이기심이 죽는다는 말이 있다. 정말 죽어서도 맨 마지막까지 남아 떠나지 못한다는 이기심을 버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공동체를 위하여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기 위해 자신의 편안함을 버리는 결단이 필요했던 것처럼, 정말 송두리째 끊어 버려야 한다.
형제애는 희생을 요구하고, 정화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회심을 요구한다. 또한 사랑을 배우는 데는 평생이 걸린다. 좌절하지
않도록 성령께 간구하여 공동체를 위한 내가 되도록 기도하자. 공동체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소속감 안에서
목표를 세우고, 공동체를 위한 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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