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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47
요한계시록 12:13-17
여자와 용의 전쟁
본문은 하늘에서 광야로 장면이 바뀌어 여자와 용의 싸움을 전한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대로 일련의 이 말씀들이 창조 이전에 있었던 어떤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하여 복음의 실제적인 면들을 말씀한다는 것이다.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지라”(13절). 용은 하늘에서 내어쫓긴 것을 인식하고 아들을 낳은 여자를 박해한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대로 여자는 교회이고 여자가 낳은 남자,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니 용의 공격 대상은 여자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지라”라고 말씀한다. “박해”의 헬라어 ‘디오코’는 ‘뒤쫓다, 추구하다, 박해하다’라는 뜻인데 70인역에서 히브리어 ‘라다프’(추적하다, 뒤따르다, 사냥하다, 박해하다)를 번역한 단어로 적의를 가진 사람에 의해 추격당하는 것(창 31:23), 원수가 뒤쫓는 것(출 15:9)을 의미한다. 7절이 ‘싸워야만 했다’라는 의미라고 하였다. 즉 이는 예견된 일이고 있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싸움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0-12)
그러나 여자는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 원수가 끝까지 쫓아서 박해하나 교회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 있다. 그래서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14절)라고 말씀한다.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구약의 말씀을 배경으로 표현되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 19:4)
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 32:10-12)
“독수리 날개”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여자가 아예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넘겨받은 것으로 말씀한다. “두 날개”를 이상한 영적 해석으로 ‘말씀과 기도’로 보고, 이 땅의 교회들이 위기에 직면하면 마귀의 박해라고 여겨 말씀으로 무장하고 기도로 물리치면 된다고 생각하나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이 땅의 교회라고 간판 붙인 교회는 망해야 한다. 주성교회는 망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망하거나 없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자를 큰 힘을 가진 독수리로 비유한 것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혜와 구원의 능력을 나타낸다.
“양육”(헬, ‘트레포’), 즉 기르고 먹이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라고 하였는데 뱀(용)이 박해하는 것은 “마흔두 달”(11:2)이지만 교회가 박해를 견디는 상태가 잠시 잠깐이라는 의미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로 표현하였다. 이는 곧 종말의 때를 의미하며 지금 종말의 상태이다.
“광야 자기 곳”이라고 하였다. 광야는 교회가 존재하는 자기 장소이다. 성도가 스스로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하여 찾은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인도하신 곳으로 곧 말씀을 좇아 이르게 된 곳이다. 광야란 먹고살기 위해 파종하고 추수를 하는 곳이 아니며 의지할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삶의 현장이다. 이런 현장에 여자를 두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라는 광야 교회에 대해 신명기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신 8:2-6)
예수 그리스도께 행하셨듯이 그대로 그의 몸 된 교회요 성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선하심, 인자가 추적하여 사로잡으신다. 다윗은 언약 안에서 그 의미를 알고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라다프)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5-6)라고 하였다. 다윗은 언약 안에서 그렇게 추적당하여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였다.
그 핍박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를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15절)라고 밝혀준다. “여자의 뒤에서”라고 표현한 것은 출애굽 때 이스라엘을 뒤에서 추적하는 상황을 연상시켜 준다(출 14:8). 에스겔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겔 29:3)
“큰 악어”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 ‘탄닌’은 ‘용, 뱀, 바다 괴물’이라는 뜻이다. 애굽 왕 바로를 ‘용, 뱀’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런 모티브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라고 하여 마치 애굽의 바로가 이스라엘 앞에 홍해로 가로막게 한 것 같은 뉘앙스를 준다. “물에 떠내려가게”라는 말 ‘포타모포레토스’는 ‘포타모스’(강, 시냇물)와 ‘포레오’(항상 지니다, 입다, 착용하다)의 합성어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자이다. 그것을 아는 뱀(용)이 자기 입의 물, 곧 비진리의 말을 항상 지니고 입은 상태로 만들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는 뱀에게 해를 당하지 않고 늘 말씀 안에 있도록 만드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은 뱀을 집어 올려도 해를 받지 않고 어떤 독을 마셔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로 십자가의 증거를 보여주며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란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자로서 말씀의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뱀, 즉 마귀와의 대적에서 해를 당하지 않고 죄의 권세에 매인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곧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이다.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16절). 교회가 세상에서 박해를 당하는 것처럼 보이니 땅은 여자를 돕는다. 그러나 사실은 교회를 돕는 것이 아니라 땅적 존재들이 뱀이 드러내는 비진리가 진리인 줄 알고 좋아서 그저 삼켜버리는 것이다. 흔히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교회를 도와 비진리를 삼키는 형국이고 용이 원했던 일이다. 그래서 “용의 입”에서 나온 물을 “땅의 그 입”이 삼킨다고 표현함으로 서로 동질의 존재임을 말씀한 것이다.
그러므로 외형적으로 십자가를 걸고 종교적 모습을 갖추었다고 교회라고 착각하지 말라. 물론 우리가 어떤 교회를 보면서 주님의 몸 된 진짜 교회인가 가짜 교회인가 구분하여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일치하는가를 늘 점검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말씀 안에서 우리 머리가 잘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로 교체되고 그의 몸 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가를 늘 확인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전하였다.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성경 읽고 기도하며 십일조 하고 주일성수하며 4부 화음으로 아름다운 찬양이 있는 엄숙한 예배에 참여하는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 복음의 복음 됨을 제대로 인정하고 있는가를 늘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 말씀의 본질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형식에 매일 수밖에 없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17절). “그 여자의 남은 자손”이라고 하였는데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 여자의 후손(씨)의 남은 자들’이다. 즉 여자가 낳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온 남은 자들, 곧 교회를 의미한다. 그래서 “자손”은 단수이고 “남은 자들”은 복수로 표현하였다.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기 때문에 성도를 핍박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공격이다.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요 15:18-20)
‘그 여자의 후손의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다. 여기서도 “계명을 지키며”라는 말씀은 ‘테레오’로 말씀을 마음에 품고 새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 말씀이 마음에 새겨진 자들이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다. “가진”(헬, ‘에코’)이란 ‘소유하다’라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격으로 표현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신 증거의 말씀이 된 자들이 남은 자들이라는 의미이다.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라는 말씀은 한마디로 거짓이며 비진리 위에 서 있다는 뜻이다. “모래”는 언약의 상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창 22:17) 자기 스스로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여기는 자들(마 3:9, 눅 16:24,30, 요 8:33,39)은 거짓이라는 비진리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을 행위로 지키는 자들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을 지은 어리석은 자들이며, 말씀이 새겨져 말씀이 된 자들은 지혜로운 자들이다(마 7:24-27)(2023081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