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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들마을[1] 스크랩 [답사]이문열(李文烈)의 두들마을 에서 - (1/3)
바람산 추천 0 조회 47 14.04.29 14: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답사]이문열(李文烈)의 두들마을 에서 - (1/3)

(2010/05/29 현재)


(사)서울문화사학회의 제236회 답사지로
경북 영양군 일월산지역에 석보면 원리리에 있는 현대문학의 거장작가 이문열(李文烈)의 두들마을과
석계고택(石溪古宅),석천서당(石川書堂),음식 디미방의 저자 정부인장씨(貞夫人張氏 , 1598~1680) 예절관
그리고 광산문학연구소 탐방 전경 입니다 






























































































◈ 이문열(李文烈)과 두들마을

 

-소재지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두들마을은 ‘언덕 위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1640년 석계 이시명 선생이 병자호란을 피해서 들어와 개척한 이후, 그의 후손인 재령 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왔다. 조선 시대 1899년에는 이곳에 국립병원 격인 광제원이 있었다 하여 ‘원두들, 원리’라 부르기도 한다.
 마을에는 석계 선생이 살았던 석계고택과 석계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쳤던 석천서당을 포함하여 전통가옥 30여채를 비롯하여 한글 최초의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쓴 정부인 장씨를 기리는 안동장씨유적비, 이문열이 세운 광산문학연구소 등이 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화매천을 둘러친 절벽 바위에는 석계 선생의 넷째 아들인 이숭일이 새겨 놓은 동대 서대 낙기대 세심대 등 유묵도 뚜렷하게 보인다. 1994년 정부로부터 문화마을로 지정되었다. 두들마을 전통한옥 체험관은 더 없이 맑고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과 한데 어우러지는 전통한옥의 아름다운 선과 건축미 그리고 그 안에 깃든 우리 조상들의 삶과 문화는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깊이와 울림이 다른 삶은 체험하는 기회가 된다.
 영남학파의 본거지이며 지조와 예를 지켜온 선비정신이 살아있는 고장, 가장 한국적인 삶의 문화와 생활방식 그리고 시대정신이 깃들여져 있는 문화의 산물로 우리의 전통 삶의 방식과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다.

 

▶현대문학의 거장 작가 이문열

 

-1948년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에서 출생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基下曲]으로 등단

 

소설가 이문열(李文烈 , 1948. 5. 18 서울~ )은 6·25전쟁 때 공산주의자인 아버지 원철(元喆)이 월북한 이후 어머니 조남현(曹南鉉)과 5남매가 경상북도 안동 등지를 돌아다니며 어렵게 살았다. 1965년 안동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방황하다가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1970년 중퇴하고 사법고시에 전념했으나 실패, 1973년 결혼과 동시에 입대했다. 1977년 대구에 있는〈매일신보〉신춘문예에 나자레를 아십니까〉가 입선된 뒤, 1979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중편〈새하곡 塞下曲〉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해〈사람의 아들〉(세계의 문학, 1979. 6)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이어 〈황제를 위하여〉(문예중앙, 1980. 9)·〈우리 기쁜 젊은 날〉(세계의 문학, 1981. 6)·〈금시조 金翅鳥〉(현대문학, 1981. 12)·〈익명의 섬〉(세계의 문학, 1982. 3)·〈영웅시대〉(세계의 문학, 1982. 9~1984. 6)·〈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세계의 문학, 1987. 6)·〈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일요뉴스, 1987) 등의 문제작들을 발표했다.
1992년 현재까지의 그의 문학세계를 살펴보면, 첫째, 알레고리(allegory)적 관념소설들로, 〈사람의 아들〉·〈필론의 돼지〉·〈칼레파 타 칼라〉 등을 들 수 있다. 이중 출세작〈사람의 아들〉은 신의 아들 예수와 사람의 아들 아하스페르츠 사이에서 동요하는 민요섭과 끝까지 사람의 아들에 매달리는 조동팔의 갈등을 중심으로 절대자 앞에서의 인간의 자유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의 알레고리적 관념소설은 집단이나 조직의 폭력과 군중심리 앞에 선 개인의 자유와 열망을 잘 짜여진 구성으로 보여준다.
둘째, 근·현대사에서 찾은 소재를 바탕으로 능란한 이야기 솜씨를 발휘한 소설들로, 황제를 위하여〉·〈장려했느니, 우리 그 낙일(落日)〉·〈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등을 들 수 있다. 이 소설들에서는 한국역사를 '이념과잉'의 역사로 해석하고 그에 대한 풍자와 냉소를 바탕에 깔고 있다. 특히 전통문화에 대한 회귀욕망과 거부의지 사이의 섬세하고도 치열한 대결을 보여준 〈황제를 위하여〉는 폭넓은 상상력과 고전적인 문체가 두드러진다. 셋째, 앞선 작품보다 더 절실하고 진지한 작가적 고뇌를 그린 소설들로, 〈들소〉·〈금시조〉·〈시인〉등 예술가를 그린 소설과 〈영웅시대〉·〈젊은날의 초상〉·〈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변경〉 등의 자전적 소설을 들 수 있다. 이중 〈영웅시대〉는 일제 말기부터 6·25전쟁이 끝난 1950년대 초반까지를 배경으로, 지은이의 영웅사관과 이데올로기적 허무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소설집으로 〈사람의 아들〉(1979)·〈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1980)·〈어둠의 그늘〉(1982)·〈레테의 연가〉(1983)·〈구로 아리랑〉(1987)·〈변경〉(3권, 1989)·〈귀두산에는 낙타가 산다〉(1989) 등이 있다. 1990년 프랑스에서 〈금시조〉·〈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1982년 동인문학상, 1983년 대한민국문학상, 1987년 이상문학상 등을 받았다.

 

▶광산문학연구소(이문열생가)

 

-위치 :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코스 : 중앙고속도로 서안동IC → 34번 국도 → 31번 국도
          → 911번 도로 → 이문열생가(광산문학연구소)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에서 출생한 ‘이문열은 젊은 날의 초상’, ‘레테의 연가’, ‘사람의 아들’, ‘금시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주옥같은 문학작품을 집필한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작가이다. 오늘의 작가상, 동인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을 비롯한 거의 모든 상의 수상자이며 최근에는 유럽, 일본 등에서도 많은 작품이 번역, 출간되어 한국문학의 정신을 드높이고 있다.
지난 2001년 개관한 광산문학연구소는 이문열이 사재를 보태 지은 곳으로 이문열 생가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 현대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문학도의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는 이곳은 이문열 작가가 매달 한번씩 강의를 하고 있으며, 문학동호인들과의 만남의 시간도 갖고 있다.

 

▷ 이문열씨 '광산문학연구소' 열어


        입력시간 2001/05/15 18:27

고향인 경북 영양군에 '신진작가 위한 창작실로'


수구초심(首邱初心)이던가. 사람이건 짐승이건 나이가 들면 고향을 그리워하고 그곳으로 돌아가려는 애절한 마음이 솟아나는 것. 소설가 이문열(53)씨가 지난 주말 경북 영양군에 광산(匡山)문학연구소를 개소했다. 영양군은 그가 나서 자란 곳이다. 그의 소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와 '변경' 2부의 배경이기도 하다. 이씨는 "과분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해야 할 일을 한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고 말했다.
120평의 전통 한옥으로 지어진 연구소의 절반은 이씨와 가족의 개인공간, 나머지는 후학들의 연구공간으로 활용된다. 연구 공간은 숙사 6개와 강당으로 이뤄졌다. 공사비용은 영양군청과 이씨가 절반씩 부담했다. 연구소는 99년 영양군청의 '이문열 기념관 건립계획'이 시초다.
 그러나 이씨가 "문단의 선배가 많은데 기념관을 짓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라며 고사해 용도가 바뀌었다. 이씨가 당장 집을 옮기는 것은 아니다. 경기 이천에서 부악문원을 계속 운영하면서 한달에 2, 3번 연구소에 내려갈 계획이다. 연구소의 절반인 후학들의 연구공간은 일단 부악문원 3년차 학생들의 집필실로 활용된다.
1ㆍ2년차 학생들은 사서삼경 강독 등 수업을 받아야 하지만, 3년차 학생들은 창작에만 전념하면 되기 때문이다. 앞으로 연구공간이 신진작가들의 창작실로도 사용되었으면 하는 게 이씨의 바람이다.

이씨는 '환갑(還甲)'을 고대한다. 실제로 그는 연구소 건립 계획을 환갑으로 잡았다가, 고향의 호의를 받아들여 일정을 앞당겼다. 환갑이 되면 그는 자택을 영양으로 옮길 참이다. 이씨는 "몸은 왔다 갔다 하지만, 마음은 이미 영양으로 가 있는 셈"이라고 고백했다. 이씨는 자신에게 남겨진 창작의 시간을 10년 정도로 보고 있다. 그는 지난해 '아가'를 발표한 뒤 1년 정도 작품 활동을 쉬었다. 연구소가 자리 잡히는 대로 다시 글을 쓸 계획이다.

 

▶석계고택(石溪古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1호
-소재지 :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318

 

이 건물은 조선 인조(仁祖)과 현종(顯宗) 때의 학자인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9~1674)이 인조 18년(1640)에 세운 고택이다. 선생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통을 이은 장흥효(張興孝)의 문인으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이곳에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선생의 부인인 정부인(貞夫人) 장씨는 부덕(婦德)과 학문을 갖춘 인물로 신사임당(申師任堂)에 비견(比肩)되는 분으로 이문열 장편소설 [선택]의 주인공이 되었고, 아들인 이조판서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은 퇴계 이황의 영남학파를 계승하였다.

이 집은‘一'자형 사랑채와 안채를 ‘二'자형으로 배치하고 토담으로 막아 허실감(虛失感)을 메운 뜰집과 같은 느낌이 들도록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석천서당(石川書堂)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9호
-소재지 :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318


이 서당은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9~1674) 선생이 영해에서 석보로 이사와 세운 석계초당을 후손들과 유림이 중건하여 석천서당(石川書堂)이 되었다. 선생은 퇴계의 학통을 이은 장흥효(張興孝)의 문인이며, 영남학파를 이은 이조판서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의 부친이다. 이 서당은 두들산을 배산(背山)으로 하고 남서향으로 향하고 있는데 평면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좌측에서 첫째와 넷째칸은 통칸방으로 꾸몄고 둘째와 셋째칸은 마루를 깔았다. 정면과 좌우면에 2자의 쪽마루를 내어 평난간을 둘렀고, 마루로 향하게 한 창호는 4분합의 들어 열개문으로 하여 6칸을 1칸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음식 디미방의 저자 정부인장씨(貞夫人張氏 , 1598~1680)

 

"음식디미방"의 저자 정부인 장씨는 두들마을의 터를 닦은 석계 이시명 선생의 아내이자, 조선중기 대학자였던 경당 장흥효의 무남독녀로서, 탁월한 부덕과 식견을 두루 갖추고 재령 이씨 가문을 명가로 만든 인물이다."음식디미방"은 정부인 장씨가 저술한 음식 조리서로서, 오늘날 우리의 전통 음식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의 교본이되는 책이기도 합니다. 경북 영양군에서는 이러한 "음식디미방"의 전통적인 맛을 오늘에 계승하고 있습니다.

정부인 장씨는 선조 31년 경북 안동 금계리(金溪里)에서 태어나서 숙종 6년 83세를 일기로 경북 영양 석보촌(石保村)에서 타계하였다. 만년에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이 대학자이자 국가적 지도자에게만 부여하는 산림(山林)으로 불림을 받아서 이조판서를 지냈으므로, 법전에 따라 정부인의 품계가 내려졌다. 이때부터 '정부인 장씨'라 불리게 되었다.
결혼전까지는 무남독녀로서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으신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선생의 적통을 이으신 부친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를 모시고, 부모에게 온갖 사랑과 훈도를 받으면서 소녀시절을 보냈다. 당시 성인군자의 입문서인《소학》과《19사(세상 돌아가는 실제를 알기 위한 중국 역사서)》에서 소강절의 난해한 천문도수 학문[元會運世之數]까지 제대로 이해하였다.
결혼당시는 내외법이 더욱 강화되어 가는 시대였지만, 남편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과 함께 부부는 서로 손님처럼[相敬如賓], 더 나아가 서로 동지로서 공경하면서, 때를 맞추는 중용[時中]의 모범을 보이는 여성중의 군자로서 살아갔다. 특히 그 재주를 숨긴 채, 한 가정의 평범하게 보이는 딸이자 가정주부이면서도, 그 평범하게 보이는 힘으로 시가와 본가 두 집안을 모두 당시 사회공동체의 기둥이 되는 가문[宗家]으로 일으켜 세우고 더하여 열 자녀를 제대로 키워냈다.
자녀들에게는 늘 '너희들이 비록 글 잘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해도 나는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착한 행동 하나를 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아주 즐거워하여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가르침으로써 과거시험 공부보다 성리학의 학문적 본질[義理]을 하나라도 몸소 실천함을 근본으로 삼았다. 한편 주변 사람들로부터는 '착함을 즐기고 의리를 좋아해서 옛 의리를 설명하면서 주위 사람을 착함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강인함과 온유함을 갖춘 도덕적 품성으로, 나이든 사람이나 과부, 고아처럼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아무도 모르게 힘껏 도왔고, 부인의 글은 시 9편, 서간 1편이 전해지고 있는데, 대체로 공경함, 맑은 심성, 참된 선비라는 성리학적 인간됨을 말하는 내용이다. 결국 정부인 장씨는 만년에 이를수록 숨겨둔 재주와 덕행이 드러나서 칭송을 받았다.
정부인 장씨의 행적을 살펴보면, 왜란·호란 같은 국가적·문화적 위기의 시대를 여성의 위치에서 어떻게 극복해 갔는가 하는 점을 잘 보여준다. 오늘날과 같이 전쟁의 혼란과 사회적 격변을 겪음으로써 '어른'이 존재하기 어려웠던 시절에 여성이면서도 스스로 어른으로 대접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르쳐준 대표적 여성상이다. 그리하여 17세기 이후 조선인들은 정부인 장씨를 맹자(孟子)나 정자(程子)의 어머니와 같은 현명한 분이라고 칭송하였다.


▷ 장씨부인의 생애

 

정부인(貞夫人) 장씨(張氏)의 생애와 관련된 가계에 대한 연구는 김사엽(1960)에서 비교적 간략하게 서술되었고 그 후 김형수(金炯秀)에게서 가계(家系)와 생애, 유품과 유묵에 대한 소개와 고증이 이루어졌다. 필자가 여기에 더 보탤 것은 없으므로 앞선 연구들의 업적에 기대어 장씨 부인의 생애를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장씨 부인의 생애를 이해하는 것은 《음식디미방》을 어떤 관점에서 연구하든 반드시 필요한 기초가 된다.
정부인 장씨는 안동 서후면(西後面) 금계리(金溪里)에서 1598년(선조 31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참봉(參奉)을 지내고 향리에서 후학을 가르쳤던 성리학자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이고, 어머니는 첨지(僉知) 권사온(權士溫)의 딸이다. 19세에 출가하여 재령(載寧) 이씨인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의 계실(繼室)이 되었다. 이시명은 전실(前室) 김씨로부터 1남[상일(尙逸)] 1녀를 얻었으며, 둘째 부인 장씨로부터 6남[휘일(徽逸), 현일(玄逸), 숭일(嵩逸), 정일(靖逸), 융일(隆逸), 운일(雲逸)] 2녀를 두었다. 장씨 부인은 7남 3녀를 훌륭히 양육하였던 것이다.
셋째 아들 현일(玄逸)이 쓴 ‘광지(壙誌)'(1844년에 간행된 '貞夫人安東張氏實紀'에 수록)와 한글로 번역한 장씨 부인의 실기(實紀)에는 부인의 여러 가지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회임(懷妊)함에 언행을 옛 법도대로 하였고, 자애로움과 엄격함으로 자녀들을 훈도하였으며 서화와 문장에 뛰어나 훌륭한 필적(筆跡)을 남기기도 하였다. 흉년 기근으로 민생이 참혹할 때 기민(饑民)의 구휼에 정성을 다하니 사방에서 모여든 행인이 집 안팎을 메워 솥을 밖에 걸어 놓고 죽과 밥을 지어 사람들을 먹이기도 하였다. 의지 없는 늙은이를 돌보아 먹이고, 고아를 데려다가 가르치고 길러 성취(成娶)시키는 등 인덕(仁德)과 명망(名望)이 자자(藉藉)하였다. 부인의 평생 쌓은 유덕(有德)이 이러하기에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지성으로 축수하여 “아무려나 이 아기시님 수복 무강하옵소서. 우리 몸이 죽어 귀신이 되어도 이 은덕을 한 번 갚기 소원이라” 하였다. 친정 부모와 시가 부모를 모시고 봉양함이 극진하여 몸소 효의 전범을 보이시니 그 아래에서 훈육된 자녀들 또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장씨 부인의 행실과 덕이 이렇게 높고 83세에 이르기까지 자녀 훈도(訓導)에 힘을 쏟으니 이로부터 재령 이씨 가문은 더욱 크게 일어나 훌륭한 학자와 명망 있는 동량(棟樑)들이 대대로 배출되었다. 부인은 1680년(숙종 6년)에 83세를 일기로 향년(享年)을 마치었다. 장씨 부인이 생애의 말년을 보냈던 집은 현재 영양군(英陽郡) 석보면(石保面) 원리동(院里洞)의 ‘두들마을'에 있고, 부인의 묘소는 안동군 수동(壽洞)에 있다.

 

▷ 음식디미방의 명칭문제

 

이 책을 자세히 소개하기에 앞서서 그 명칭에 대해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이 책의 명칭에 약간의 혼동과 불분명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명칭은 두 가지이다. 본문의 첫머리에 나타난 권두(卷頭) 서명(書名)은 ‘음식디미방'으로 되어있고, 장정(裝幀)한 겉표지에 쓰인 표지(表紙) 서명(書名)은 ‘규곤시의방(閨?是議方)' 으로 되어있다. 김사엽(1960:671)은 전자가 필사자가 직접 쓴 원명이고, 표지서명은 장씨의 부군 또는 자손들이 격식을 갖추기 위해 새로 지어 붙인 것으로 추정하였다
‘음식디미방'이라는 이름은 이 책의 내용에 썩 잘 어울리는 사실적 명명(命名)임에 비해, ‘규곤시의방(閨?是議方)'이라는 이름은 윤색(潤色)을 가하여 외형상의 격식(格式)을 갖추려 한 것이다. 이런 태도는 책을 저술한 당사자인 장씨 부인의 것이라기보다 그의 부군이나 자손이 이 책의 품격을 더 높이려고 한 조치라고 생각된다.
서지학 혹은 목록학에서 어떤 문헌의 정식명칭을 정할 때 표지(表紙) 서명(書名)보다 권두(卷頭) 서명(書名)을 취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 이유는 표지(表紙) 서명(書名)이 대체로 권두서명을 줄인 것이 많은데 비해 권두서명은 온이름(full name)을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의 경우 표지서명 ‘규곤시의방(閨?是議方)'과 권두서명 ‘음식디미방'이 서로 판이한 것이어서 문제가 된다. 그런데 본문의 첫머리 즉 권두서명 ‘음식디미방'은 이 책의 저술한 당사자가 붙인 이름임이 분명하므로 저술자의 의도를 존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저술자의 의도를 존중하고 책의 내용이 명칭에 직접 반영될 수 있도록 함에는 ‘음식디미방'이 더 적합하다. 그러므로 권두서명을 目錄에 올리는 정식서명으로 간주하는 일반적 관례를 따르고, 위에서 지적한 취지를 살려 이 책의 이름은 ‘음식디미방'이라고 확정하려 한다. 그러나 표지서명으로 번듯하게 쓰인 ‘규곤시의방(閨?是議方)'이라는 이름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이 점을 고려하여 필자는 ‘음식디미방'을 이 책의 원명(또는 1차적 명칭)으로 삼고, ‘규곤시의방(閨?是議方)'을 별칭(別稱, 또는 2차적 명칭)으로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한다.
권두서명인 ‘음식디미방'의 ‘디미'가 어떤 한자어의 음을 적은 것 인지에도 문제가 있다. 김사엽(1960:671)은 ‘음식지미방(飮食地味方)'으로 적어‘디미'가 ‘지미(知味)'를 표기한 것으로 보았으나, 황혜성(黃慧性)(1980 : 5)은 ‘음식지미방(飮食地味方)'으로 적어 ‘디미'가 ‘지미(地味)'를 표기한 것일 가능성은 없다. ‘디미'가 ‘지미(至味,아주 좋은 맛 또는 그런 음식)',또는 ‘지미(至美, 아주아름답다)', 혹은‘지미(旨美, 맛이 좋다)'와 같은 한자어를 표기한 것일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지(至)'와 ‘지(旨)'의 고음(古音)이 ‘디'여서 음상으로 보면 ‘디미'에는 ‘지미(知味)'가 가장 정합하다. ‘지미(知味)'의 뜻은 다음 두 가지로 쓰인다.1. 미각이 예민하여 맛을 잘 앎. 2.‘음식 맛을 봄'의 궁중말. 결국 이 책의 내용과 저술 취지로 보아 ‘음식디미방'은 ‘좋은 음식 맛을 내는 방문(方文)'이라는 뜻으로 풀이 할 수 있다.
‘규곤시의방(閨?是議方)'의 ‘규곤(閨?)'은 여성들이 거처하는 공간인 ‘안방과 안뜰'을 뜻하고, ‘시의방(時議方)‘은 '올바르게 풀이한 방문‘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규곤시의방(閨?是議方)'에 함축된 의미는 ‘부녀자에게 필요한 것을 올바르게 풀이한 방문'이라 할 수 있다.

 

▷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인조 5)∼1704(숙종 30).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승(翼昇), 호는 갈암(葛庵). 참봉 시명(時明)의 아들이며, 휘일(徽逸)의 아우이고, 어머니는 안동장씨(安東張氏)로 흥효(興孝)의 딸이다.
1646년(인조 24)과 1648년에 초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어 복시를 단념하였다. 1652년(효종3) 중형 휘일의 《홍범연의(洪範衍義)》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666년(현종7)에는 영남유생을 대표하여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예설(朞年禮說)'을 비판하는 소를 올렸다. 1674년에 학행으로 명성이 높아지자 영릉참봉(寧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1676년(숙종2)에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삼년상이 끝나지 않아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 이어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임명되었으나 상경하여 사은(謝恩)하고 곧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78년에 공조정랑(工曹正郞)·지평(持平)에 임명되었으며, 외척의 용사와 당쟁의 폐단 등을 논하였다. 1686년에는 《홍범연의(洪範衍義)》를 속성(續成)하였으며, 1689년 산림(山林)에게만 제수되는 사업(司業)에 임명되고, 이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공조참의(工曹參議)에 임명되었으며, 이때 인현왕후(仁顯王后)폐비문제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임술무옥의 신설을 건의하였고, 6월에는 산림유현(山林儒賢)의 벼슬인 제주(祭酒)에 임명되어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이어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제주(祭酒)·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에 제수되어 거듭 사임의 뜻을 표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8월에는 겸직과 함께 대사헌(大司憲)에 올랐고, 9월에는 인현왕후를 위한 소를 올렸으나 왕의 윤허를 얻지 못하고 11월에는 분황(焚黃)을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1690년 이조참판(吏曹參判)·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讚善)에 임명되어 세자책례(世子冊禮)에 참석하였고, 다시 대사헌(大司憲)·이조참판(吏曹參判)에 거듭 임명되었으나 그때마다 사직 상소를 내었다. 1692년에 다시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으며, 경신·임술 무옥의 신설을 건의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어 병조참판(兵曹參判)·자헌대부(資憲大夫)·우참찬(右參贊)·이조판서(吏曹判書)에 연이어 임명되었다.
1694년 4월 인현왕후가 복위된 뒤 갑술환국 때 조사기(趙嗣基)를 신구하다가 함경도 홍원현으로 유배되었다. 다시 서인 안세징(安世徵)의 탄핵을 받아 종성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으며, 유배지에서 글을 가르치며 《수주관규록 愁州管窺錄》을 완성하였다.
1697년에 호남의 광양현으로 유배지가 바뀌었고, 1698년에 갈은리(葛隱里)로 이배되었으며, 1699년에는 방귀전리(放歸田里)의 명이 내렸다. 1700년에는 안동의 임하현 금소역(琴詔驛)에 이거하였다가, 여기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금양(錦陽)에서 집을 짓고 제생(諸生)을 강학하였다. 1701년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석방명을 환수하였으나 압송되지는 않았다. 1704년에 인덕리(仁德里)로 이거하였다가 금소로 돌아와 금양에서 죽었다.

1710년에 죄명이 풀리고 이듬해 복관되었다가 환수되었다. 1718년 영해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853년(철종 4)에 다시 복관되었다가 환수되었다. 1871년(고종 8)에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가 환수되었으며, 1909년에 관직과 시호가 모두 회복되었다.
영남학파(嶺南學派)의 거두로 이황(李滉)의 학통을 계승하여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고 이이(李珥)의 학설을 반대하였다. 저서로는 《갈암집(葛庵集)》과 편서로 《홍범연의(洪範衍義)》가 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肅宗實錄, 國朝人物考)

 

▣기타 명소들

 

◈일월산(日月山)


-위치 : 영양군 청기면, 일월면
-=해발 1,219m

 

일월산은 태백산맥의 남쪽 끝에 위치한 해발 1,219m의 고봉으로 산세가 하늘에 우뚝 솟아 웅장하고 거대하며 산정은 평평하다. 동으로는 동해가 바라보이고 해와 달이 솟는 것을 먼저 바라본다 하여 일월산이라 부르며, 정상부에는 일자봉(日字蜂), 월자봉(月字峰) 두 봉우리가 솟아 있다.
경북 내륙에서 가장 먼저 일출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해마다 해맞이 행사가 있다. 일월산은 일자봉과 월자봉이 서로 마주하고 있으며 제일 높은 봉우리인 일자봉에서는 맑은 날에 동해바다가 훤하게 보인다. 그래서 해맞이 행사때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일출을 보기 위해 몰려든다.

일월산은 음기가 강하여 여(女)산으로 알려져 있고 그믐날 내림굿을 하면 점괘가 신통해진다 하여 전국 각지의 무속인들이 찾아오고 있으며, 무속인들로부터 성산(聖山)으로 추앙받는 산이기도 하다.

 

◈황씨부인당


지금부터 약 160여 년전 순조때 청기면 당리에 살던 우씨(禹氏)의 부인 평해황씨(平海黃氏)는 남편과 혼인하여 금실좋게 살았으나 딸만 9명을 낳아 시어머니의 학대가 극심했다. 황씨 부인은 아들을 낳지 못하는 죄책감으로 얼굴을 들고 시어머니와 남편을 대 할 수 없어 아홉째 딸이 젖 뗄 무렵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말았는데, 우씨댁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했다.

이 무렵 일월산에는 산삼이 많이 났는데, 산삼 캐는 사람이 산삼을 캐려고 자기가 지어 놓은 삼막(蔘幕)에 갔더니, 황씨 부인이 자기의 삼막에 소복단좌(素服端坐)하고 있었다. 더럭 겁이 나 되돌아서려는데, 황씨 부인이 말을 하기에 자세히 보니 분명 살아 있는 황씨 부인이었다. 황씨 부인은 자기 시어머니와 남편의 안부며 딸의 안부를 묻고는 자기가 여기에 있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산삼 캐는 사람은 그렇게 하겠다는 말을 하고 돌아섰으나, 어쩐지 마음이 섬뜩하여 그 길로 산에서 내려와 우씨댁에 가서 그 이야기를 전하였다. 금실좋게 살던 우씨는 부인을 잃고 삶의 재미를 모르고 살던 중 자기 부인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는 곧장 삼막에 가보니, 과연 자기 부인이 앉아 있어, “여보!”하고 달려가 손을 덥석 잡으니 부인은 사라지고 백골과 재만 남았다. 남편은 탄식을 하면서 백골을 거두어 장사지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이 황씨 부인의 한을 풀기 위해 그 자리에 당을 지어 주고 ‘황씨부인당'이라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로는 약 150년 전 순조 때 청기면 당리에 우씨 청년이 일찍 과부가 된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오두막집과 적은 땅마지기만으로 농사를 지으며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았다. 이웃마을 평해 황씨와 결혼하여 아내를 극진히 사랑하며 살았다.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사는데, 아들의 지극하던 효성이 약해지자 사랑을 빼앗긴 청상과부 시어머니의 시샘과 질투는 더욱 심해져서, 며느리의 조그만 실수도 용서하지 않고 학대했다. 그리하여 황씨부인은 차라리 저승에 가서나마 남편과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남매를 집에 남겨두고 우물에 가는 척 집을 나와 일월산으로 들어갔다.

그 뒤 산삼 캐는 사람이 움막 안에서 목을 매고 죽어 있는 낯선 부인을 발견하고 놀라서 산을 내려왔다. 그 때 이 마을에 살던 영천 이씨 명존이란 사람이 황씨 부인이 현몽한 대로 남편에게 알리니, 남편이 황씨 부인의 유골을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 그 후 황씨 부인이 다시 이명존의 꿈에 나타나 “여보시오. 나는 어린 자식을 두고 일찍 목숨을 끊은 죄로 저승에서도 방황하는 혼령이오니, 가난한 우리 남편을 대신해서, 내 외로운 혼령이 쉴 수 있도록 당집을 세워 주시면 여한이 없겠나이다.”라고 말하여, 이명존이 황씨 부인의 현몽대로 당집을 지어 그녀의 원혼을 위로했다고 한다

.또한 옛날 영양군 일월산 밑에 황씨라는 처녀가 살았다. 마을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총각이 둘 있었는데, 그중 몸은 약하지만 마음이 고운 사람을 선택해서 결혼식을 올렸다. 혼례를 올린 날 신랑은 뒷간에 갔다가 오는 길에 마치 칼을 들고 자기를 기다리는 듯한 사내의 모습이 신방에 언뜻 비치는 것을 발견하고, 그 날로 타관으로 도망쳐 버렸다. 신랑이 타관으로 도망친 사실을 모르는 신부는 녹의홍상에 족두리를 쓴 채로 하루 이틀 기다리기를 오년여 계속하다가 결국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낯선 마을에 정착한 신랑은 머슴살이를 하면서, 그 지방에 있는 처녀에게 새장가를 들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날 때 마다 백일을 채우지 못하고 죽기를 네 번이나 했다. 무당을 찾아가 사연을 물어 본즉, 죽은 귀신이 아직도 너를 기다리기 때문에 네 자식은 모두 죽었고, 모두가 사는 방법은 귀신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사내는 무당의 말대로 고향의 옛집을 찾아가서 폐가가 된 신방에 들어가 보니 신부는 초야의 모습 그대로 시체가 되어 풀더미 속에 앉아 있었다. 사내가 툇마루에 앉아 있다가 잠이 들었는데, 신부가 나타나 나를 업어다가 일월산 산마루에 앉혀달라고 부탁하였다. 꿈에서 깨어나 신부의 부탁대로 하자 죽은 신부는 “이제야 하직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이에 사내는 산에 있으면서 바위를 쪼아 족두리를 쓴 신부 모양의 석상을 만들고, 작은 사당을 지어 조석으로 봉양하다가 돌신부 옆에서 눈을 감았다. 오랜 세월이 흘러 사당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1946년 부산에 살던 한 아낙네가 병에 걸려 상태가 점점 악화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한 여자가 나타나, “나는 일월산 황씨부인인데, 나를 파내서 섬기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남편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일월산으로 함께 가서 초막을 짓고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발이 닿는 대로 가다가 웅덩이에서 족두리를 쓴 석상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당집을 짓고 석상을 섬겼다. 그 이후 아낙네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고, 아울러 황씨 부인당의 영험을 받아서 용한 무당이 되었다고 한다.

 

◈감천마을 과 오일도 생가(吳一島 生家)

 

영양읍에서 남쪽으로 10여분 내려가면 감천마을이 나온다. 낙안 오씨 집성마을이다. 마을 중앙에 자리 잡은 오일도 생가는 44칸의 제법 큰 기와집으로 대문채를 가진 ㅁ자형 집이다. 현재 친척이 살고 있으며, 마당 한켠에 서 있는 굽은 향나무는 먼저 간 시인의 분신 같은 생각을 갖게 한다.
오일도 시비는 마을과 조금 떨어진 도로변 소공원에 세워져 있다. ‘저녁놀’이라는 시가 시비에 새겨져 있다. 생가 앞으로 흐르는 하천절벽에는 천연기념물 측백수림이 군락을 이루며 자생하고 있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애국시인인 일도(一島) 오희병(吳熙秉, 1901~1946)이 태어나고 자란 집으로, 그의 조부인 오시동(吳時東)이 조선 고종(高宗) 1년(1864)에 건축하였다. 본관은 낙안(樂安)이며 호는 일도(一島)이다. 그는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와 일본의 릿교대학(立敎大學) 철학부를 졸업하였다. 그는 1925년 문예월간지 『조선문단, 朝鮮文壇』에 「한가람 백사장」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시작하였고, 1935년 2월에는 시전문지(詩專門誌) 『시원詩苑』을 창간하여 5호까지 출간하여 한국현대시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김광섭(金光燮), 이헌구(李軒求) 등과 교유하였고 대표작으로는 「노변(爐邊)의 애가(哀歌)」, 「눈이여! 어서 내려다오」 등이 있다. 이 집은 크게는 정침(正寢)과 대문채로 되었다. 정침은 정면 4칸 측면 7칸의 ‘ㅁ자형 뜰집’이고 대문채는 ‘一’자형이다. 이 집은 조선후기 경북 북부지방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양반가의 살림집 형태를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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