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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신문》 제64호 (2017년 5ㆍ6월 합병호)
동학의 사상과 한국의 근대 다시 보기
- 《해월문집》을 통해 본 최시형의 동학 재건 운동 -
조성환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편집실 주]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원장 박맹수)에서는 작년부터 시작된 중점연구소 과제 「근대문명 수용과정에 나타난 한국종교의 공공성 재구축」 사업의 일환으로 동학 원전 강독을 진행해 오고 있다. 2017년 3월 22일부터는 매주 수요일 오후 3시 - 5시 30분에 원광대학교 교학대학 3층 강의실에서, 초기 동학교서(東學敎書) 중에서 해월 선생의 사적(事跡)과 교단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해월문집》강독을 시작하였다. 《해월문집》은 박맹수 교수가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 천도교수도원에서 발굴한 자료로, 동학 교단의 초기 역사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귀중한 문헌이다. 전문 번역이 시도되기는 이번이 처음으로, 향후의 동학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번 강독에 고정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참석자는 박맹수를 비롯하여, 국담, 김미경, 김봉곤, 송영준, 송지용, 야규 마코토, 오니시 히데나오, 유동종, 정현오, 조성환, 최은희, 허남진, 홍지훈 등으로, 전문 연구자는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도 포함되어 있다(영화감독, 시민운동가, 대학생 등). 이 강독은 모두에게 열려있는 대화모임으로, 《해월문집》 이후에도 계속해서 진행해 나갈 예정이다. 관심 있는 많은 분들의 참여를 바란다.
이 강독을 진행하면서, 《해월문집》의 번역은 김봉곤(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이, 이에 대한 해설은 박맹수(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교수)가, 해설 및 토론 내용의 기록과 주석 작업 등은 조성환(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이 각각 맡았다.
《개벽신문》에서는 원불교사상연구원의 협조로 이 강독의 실황을 지상중계(紙上中繼)하기로 한다. 이 강좌는 단순한 원전 번역과 해설이라는 형식을 넘어서 강독참여자들의 생생한 대화까지도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하나의 ‘공공함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학의 사상과 비전에 대한 공감대가 커지고, 새로운 문명에 대한 비전을 동학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실천이 가속화되는 현 시점에서 이 연재가 21세기 개벽의 중요한 동력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제1강 한국학으로서의 동학
동학의 본질과 해월의 진면목 바로 보기
박맹수 :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참여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먼저 “왜 우리가 《해월문집》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은 “과연 동학이 한국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물음과 같습니다. 즉 ‘한국학’으로서의 동학은 어떤 의의가 있는가? 라는 것이지요.
이 문제를 생각할 때에 먼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동학은 동아시아의 오랜 학문 전통 위에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서구적인 의미에서의 ‘비센샤프트’(Wissenschaft)로서의 학문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학문 위에 서서 그것을 근대라는 새 시대에 맞게 재정립한 것이 바로 동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동아시아 학문 전통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수양과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개인적 영성과 사회적 운동이 ‘불이(不二)’의 관계에 있는 학문이 바로 동아시아의 ‘학(學)’ 개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통이 지난 1세기 동안에 서양의 학문전통이 들어옴에 따라, 앎 따로 실천 따로, 개인적 수양 따로 사회적 실천 따로, 이런 식으로 분화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분화된 관점으로 분화되지 않은 우리의 학문 전통을 해석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해월문집》을 읽어 보면 아시겠지만, 그 안에는 개인적 수양론은 물론이고 대인(對人) 윤리, 사회 공동체론, 초월자에 대한 신앙 등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두 번째는 동학이 오늘날 우리에게 지금과 같이 의미 있는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내던지신 분이 해월 최시형 선생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 선생은 본격적인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타의에 의해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남겨진 숙제가 너무 많았습니다. 이 모든 과제를 38년 동안 감당하면서 자신도 스승이 간 길을 따라 ‘순교’하신 분이 해월 최시형입니다. 그런데 이 38년간의 삶은 한마디로 하면 도망자의 삶이었고 수배자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료가 이곳저곳 흩어져 있고, 그로 인해 사실과는 다르게 왜곡되어 알려져 있기도 하고, 때로는 부분적으로만 이해된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 대표적인 예 중의 하나가, 지금까지 거의 모든 연구자들이 해월을 혁명가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한 종교사상가나 교단지도자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 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이상을 지닌 혁명가로는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제가 지난 30여년 동안 동학을 연구하고서 내린 결론은 최시형은 전봉준 이상의 대혁명가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혁명이 지향해야 할 최종적인 지점을 그는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이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이 이상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해월이 고난의 삶 속에서 초지일관했던 것이 바로 ‘혁명’이 아닐까요?
그런데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최시형은 전봉준과 대립했고, 무력적 저항과는 전혀 무관한 인물이라고 이해해 왔습니다. 그래서 해월은 제쳐놓고 전봉준만 혁명가로 추앙했습니다. 하지만 사료에 나타난 해월의 이미지는 이것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여러 사료들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령 《김낙봉이력》에 의하면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날 당시에 해월은 “시운(時運)이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의하면, “호랑이가 집에 쳐들어 왔는데 앉아서 당할 수만 있느냐?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서 맞서 싸워라!”고 했다고 합니다. 한편 1894년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에는 해월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해월의 시야나 안목은 전봉준의 그것을 훨씬 뛰어 넘는다! 그는 처음부터 뜻이 커서 조선 팔도에 조직을 만들어서 근본적으로 조선왕조를 뒤엎으려고 하였다. 이 거대한 기획의 전라도 지역의 지도자가 전봉준이다.”참고로 이 신문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날 당시에 가장 발행부수가 많았던 신문입니다.
이상의 사료로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동안의 해월에 대한 코끼리 만지기 식의 부분적인 이해에서 벗어나서 종합적인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번에 《해월문집》을 읽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동학사 바로 알기 – 동학농민혁명은 30년 동안 준비된 것
두 번째 이유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동학사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오늘 나눠드린 《동학사료집성I》이라는 사료집은 제가 1995년에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하면서 직접 편집한 것인데 전북 부안에 있는 천도교수도원에서 발굴한 자료를 모은 것입니다. 어떻게 발견하게 되었는가? 편견과 상식에서 벗어나니까 저절로 나오더군요. 무슨 말인가 하면 이 자료가 발견된 호암수도원과 동학농민혁명의 진원지인 황토현과는 불과 10킬로도 안 되는 거리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수백명의 연구자들이 황토현을 다녀 갔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천도교수도원이 있다는 사실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곳에 가 보지 않은 것입니다. 이른바 ‘종교외피설’이라는 역사학자들의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원불교 교무이기도 해서 종교에 대한 편견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1992년에 심층답사를 다녀왔는데, 뜻밖에도 자료가 무려 30여 개나 쏟아져 나오더군요. 보통 일이 아니다 싶어서 KBS에 제보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쪽에서 다시 답사를 가자는 제의가 왔습니다. 그래서 KBS 기자들과 다시 한 번 다녀왔는데, 그날 KBS 9시 뉴스 특종으로 나오더군요.
그때 발견된 자료는 《해월문집》을 비롯해서, 해월의 도장, 1898년 4월에 원주에서 해월을 대신해서 체포되었던 제자 김낙철의 수기 등 다양한 자료입니다. 이 자료의 가치나 중요성은 무엇인가 하면, 그동안 대부분의 동학 연구자들은 겉으로 드러난 혁명만 보고, 그 혁명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겉만 본 것이지요. 그러나 사실 준비 없는 혁명이란 없습니다.
그렇다면 1860년의 동학 창도에서부터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까지의 30여 년 동안 동학은 어떻게 존재해 왔는가? 가령 조직은 어땠고 지도자는 누구였으며 민중들은 왜 동학에 빠져들었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그동안 역사학자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특히 1870년대 후반부터 1890년대 초반까지의 동학교단의 움직임은 베일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해월문집》에는 이 시기의 동학교단의 움직임이 다 나오고 있습니다. 「통문(通文)」을 통해서입니다. 이 사료는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수면 아래에서 진행되었던 역동적인 움직임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해월문집》이 동학 연구에서 차지하는 의미입니다. 이 자료는 단순히 해월의 일대기가 아니라 1870년대부터 1890년대 후반까지의 동학조직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지요.
구체적인 예를 들면, 《해월문집》 152쪽(《동학사료집성I》)에 나와 있는 「통문」을 보세요. 맨 끝에 ‘南啓天’(남계천)이라고 나오죠?
壬辰 八月二十九日 接下 南啓天 (임진년=1892년 8월 29일 접하 남계천)
이 남계천이라는 분에 대해서는 그동안 “익산군 백정 출신으로 해월에 의해 호남 좌우도 편의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정도밖에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동학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지요.
그런데 새로 발굴된 사료에 의하면, 혁명 이전에 합법적인 시위운동을 할 때 굉장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좌도와 우도의 망가진 접과 포, 문제가 있는 접과 포, 서로 갈등 대립하는 접주와 대접주의 문제를 전부 책임지고 해결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해월 다음으로 막강한 리더십과 권력과 실력을 겸비한 인물임을 알 수 있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백정 출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실은 이 사람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 답사도 다녀 보았습니다. 사료에 “전북 익산군 오산면 남전리”에 살았다고 나오기에 두 번이나 가 보았는데, 남전리라는 동네는 있었지만 남씨 성을 가진 인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더군요. 동네 역사를 아는 사람도 없고요.
그런데 뜻밖에 일본에서 그 단서를 찾았습니다. 2010년에 동학농민군을 학살한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가 조선에서 가지고 가서 손자에게 남겨준 문서집이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에 담긴 문서가 모두 80건 정도 되는데 이중에서 35건이 동학 관련 문서입니다. 이중에 한글 문서가 유일하게 하나 있는데, 문서 제목이 「동학지도자 이력문서(東學指導者履歷文書)」입니다. 여기에 동학 조직의 위계가 나오는데, 이것을 보면 남계천이 수운 최제우와 해월 최시형 다음 가는 리더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계천은 혁명 1년 전인 계사년(癸巳年. 1893년)에 죽었다고 나옵니다. 이 남계천의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동학조직의 움직임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활발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해월문집》은, 단순한 해월 한사람의 일대기가 아니라, 1870년대 후반부터 1890년대 초반에 이르는 혁명 직전의 동학 조직의 동향을 알 수 있는 귀중한 1차 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월문집》읽기
(1) 포덕식·입도식·치제식·제수식
김봉곤 : 그럼 《해월문집》 강독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아직 전문 번역은 나와 있지 않고 여러 곳에 번역이 흩어져 있는데, 그것들을 참고해 보았습니다.
먼저 첫 페이지에, 「포덕식(布德式)」·「입도식(入道式)」·「치제식(致祭式)」·「제수식(祭需式)」이라는 네 가지 의식이 나오는데, 묶어서 「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A. 布德式(포덕식=덕을 펴는 의식)
人有願入者, 則先入者傳道之時, 正衣冠, 禮以授之事.
(입도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먼저 입도한 사람이 도를 전할 때에 의관을 정제하고 예로써 그것을 전수할 것.)
김봉곤 : 맨 마지막의 ‘事(사)’ 자는 보통 ‘~할 일’ 또는 ‘~할 것’ 등으로 번역합니다.
박맹수 : 그동안 동학의 종교의식에 대해서는 별로 연구가 되지 않았는데, 그런 점에서도 이 사료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의관을 정제한다(正衣冠)”는 말은 단순하게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동학이 들불처럼 퍼져 나갈 때 해월이 10개 조항의 강령을 하달하는데, 이 열 개의 실천 강령 속에도 “의관을 정제한다”(衣冠整齊)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공개적인 신원운동을 하는 광화문 복합상소 때에도 “(복합상소에 참여할 사람으로) 의관을 단정히 한 사람을 뽑으라”(출처와 원문)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의관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 동학에서 매우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동학이, 1905년에 ‘천도교’로 개칭하면서 공식종교로 인정받기 전까지는, 불법이었다는 사정과 맞물려 있는 것 같습니다.
B. 入道式(입도식=도에 입문하는 의식)
入道之時, 或向東或北設位, 致誠行祀, 焚香四拜後, 以初入呪文, 敬以受之事.
(입도할 때에는 동쪽을 향하거나 북쪽을 향해서 자리를 설치하고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고 향불을 사르고 네 번 절한 후에 초입주문을 하고서 공경하게 받을 것.)
김봉곤 : 먼저 입도자 주문은 《동경대전》에 나와 있는데 “하늘님을 위하면 내 사정을 돌아보시고 영원히 잊지 않으면 모든 일이 잘된다”(爲天主顧我情, 永世不忘萬事宜)입니다. 여기서 ‘設位’(설위)는 보통 “위패를 세운다”고 번역되어 있던데, “의식의 자리를 편다”는 번역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박맹수 : 제 생각에도 “의식의 자리를 편다”는 번역이 좋을 것 같습니다. 보통 1860년대에 동학이 퍼져가는 과정을 ‘처남포덕’이라고 하고, 1880년대에 들불처럼 전파되는 과정을 ‘마당포덕’이라고 하는데, 마당포덕의 입도식은 기록에 나옵니다. 홍종식의 「동학난실화」를 보면 “접주 집 마당에 상을 하나 놓고 청수(淸水)를 떠놓고 의관을 정제하고 선생과 제자 주문을 외우고”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렇게 청수를 떠놓았다는 기록은 많이 나와도 위패를 설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곳의 ‘位’는 ‘위패’라기보다는 ‘자리’나 ‘식전’의 의미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조성환 : 그렇다면 해월이 말한 ‘향벽설위’(向壁設位)나 ‘향아설위’(向我設位)라고 할 때의 ‘位’도 ‘자리’로 보아야 하나요? 제 생각에 이곳은 입도식이라서 하늘님을 향해 제사를 지내는 것이기 때문에 위패를 안 모시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박맹수 : ‘향벽설위’나 ‘향아설위’에서는 ‘위패’라는 의미이지요. 위패를 (유교식 제사를 지낼 때처럼) 벽 쪽에 놓을 것인가 내 쪽에 놓을 것인가의 문제니까요.
그리고 자리를 펴는 방향이 왜 동쪽이고 북쪽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서쪽일 수도 있고 남쪽일 수도 있는데요. 가령 오행사상과 연결시켜 생각해 보면 동쪽이 ‘생명’을 상징하기 때문에 동쪽이라고 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조성환 : 그렇다면 ‘향아설위’는 “나를 향해 위패를 세우라”는 말이 되는데, 나의 신위도 썼다는 것일까요?(이 문제는 추후에 재론키로 함)
C. 致祭式(치제식=제사지내는 의식)
入道後, 致祭節次, 設位四拜, 後讀祝而卽誦降靈呪及本呪之事.
(입도한 후에 제사지내는 절차는 자리를 펴고 네 번 절한 후에 축문을 읽고 곧바로 강령주문과 본주문을 외울 것.)
김봉곤 : 참고로 《동경대전》에 소개되어 있는 「축문」과 「본주문」 그리고 「강령주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a. 축문 : “조선에 태어나 살면서 욕되이 인륜에 처하여 천지의 덮고 실어주는 은혜를 느끼며 일월이 비추어 주는 덕을 입었으나, 아직 참에 돌아가는 길을 깨닫지 못하고 오랫동안 고해에 잠기어 마음에 잊고 잃음이 많더니, 이제 이 성세에 도를 선생께 깨달아 이전의 허물을 참회하고 일체의 선에 따르기를 원하여, 길이 모셔 잊지 아니하고 도를 마음공부에 두어 거의 수련하는데 이르렀습니다. 이제 좋은 날에 도장을 깨끗이 하고, 삼가 청작과 서수로써 받들어 청하오니 흠향하옵소서.”
b. 강령주문 : “지극한 기운이 지금 여기에 크게 내리기를 기원합니다.”(至氣今至願爲大降)
c. 본주문 : “하늘님을 모시면 조화가 정해지고 영원히 잊지 않으면 모든 일이 정해진다”(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定)
D. 祭需式(제수식=제사음식을 바치는 의식)
設其醴酒, 餠麵魚物, 果種脯藿, 菜蔬香燭用之, 而以肉種論之, 雉則例用, 需之多少, 隨其力而行之也.
(단술과 떡과 국수와 생선, 과일과 포, 채소와 향과 초 등을 사용한다. 고기에 대해 논하면 쇠고기는 의례적으로 사용하고, 제수의 양은 형편에 따라 한다.)
김봉곤 : ‘醴(예)’는 ‘단술’을 말합니다. 제사 지낼 때 ‘청주’ 같은 것이죠. ‘餠(병)’은 ‘떡’이고, ‘脯(포)’는 저며서 말린 고기, ‘雉(치)’는 꿩고기를 말하는데 대부분 ‘쇠고기’라고 번역합니다. ‘例用(예용)’은 “통상 쓴다” 또는 “늘 쓴다”는 뜻입니다. ‘力(력)’은 그 사람의 ‘형편’을 말합니다.
D. 先生布德之初, 以牛羊豬肉通用矣. 至於癸亥八月, 先生顧予傳道之日. 此道兼儒彿仙三道之敎, 故不用肉腫事.
([수운] 선생께서 덕을 펴시는 초기에는 소고기와 양고기와 돼지고기를 통상 썼다. 계해년(1863) 8월에 이르러, 선생께서 나에게 도를 전해주는 날에, 이 도는 유불선 삼도의 가르침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고기 종류는 쓰지 말라(고 하셨다).)
김봉곤 : ‘양(羊)’은 우리나라에는 없으니까 아마 염소고기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顧(고)’는 ‘돌아보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보면 아주 초기에는 고기를 썼다가 1863년에 최시형이 제2대 교주가 되고 나서는 그냥 청수만 올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학의 초기 제례의식의 변천과정 – 천제(天祭) 이야기
박맹수 : 앞의 「포덕식」·「입도식」이 동학에 처음 참여하는 입도(入道)와 관련된 의식이라고 한다면, 뒤의 「치제식」과 「제수식」은 제사와 관련된 의식입니다. 동학 시대 초기에는 크게 세 번의 제사를 지냅니다. 해월은 스승인 최제우가 순도한 뒤에 지금의 경상북도 일월산 자락에 숨어 들어가는데, 어느 정도 탄압도 누그러지고 제자들과 연락도 되니까 함께 모여 1년에 세 차례의 제사를 지냅니다.
첫 번째는 수운이 순도한 3월 10일의 기제사(忌祭祀)이고, 두 번째는 수운이 득도한 4월 5일이고, 세 번째는 수운이 태어난 10월 28일의 탄신제입니다. 제수식은 이때 쓰는 의식입니다. 해월은 이 세 차례의 제사를 통해서 제자들을 결집하고 동학 재건을 도모합니다.
동학의 의식은 1870년에 강원도로 옮겨 가면서 체계화되고 정리됩니다. 거기에서 구성제(九星祭)와 인등제(引燈祭)라는 의식을 차례로 창안하여 시행하는데, 이 의식의 궁극적인 목적도 동학의 재건과 조직화입니다. 이것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네트워크를 만들고 비용을 마련합니다.
그 성과가 '다시 개접'(開接)이라는 좀 더 체계적인 의례로 귀결되는데, ‘개접’이란 정기 훈련이나 수련회를 말합니다. 원래는 수운이 시작하고, 개접한 이후에 모임을 마치는 것을 '파접'(罷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수운이 순도한 뒤로 십여 년 동안 못하다가, 십여 년 만에 회복된 동학 조직을 근간으로 해월이 강원도에서 다시 개접을 한 것이지요. 이처럼 개접은 동학 조직이 살아나는 변화를 상징하는데, 이것을 만들어내는 결정적인 원동력이 바로 동학의 제사입니다. 즉 제사는 동학 재건의 효과적인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의식을 정비한 다음 작업은 경전 편찬이었습니다. 1880년에 《동경대전》 초판이 나오는데, 그 간행 비용을 댄 사람들이 모두 이 제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입니다. 사실 어떤 운동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요인의 절반 이상은 재정 문제입니다. 1860년에 동학이 탄압받기 시작한 뒤에 어떻게 갑오년까지 성장해 올 수 있었는가의 비결도 바로 이런 방식의 재정조달에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정부쪽 기록에도 동학의 종교의식 관련 내용이 나옵니다. 수운을 체포한 선전관 정운구의 보고서(書啓)와 수운을 심문한 경상감사 서헌순(徐憲淳)의 심문기록(狀啓)이 《승정원일기》와 《비변사등록》에 실려 있는데, 이 자료를 보면 수운이 살아 있을 때에 초하루 봄에 산에 올라가서 천제(天祭)를 지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천제가 동학의 중요한 종교의식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동학 내의 기록에는 천제에 관한 내용은 거의 안 나옵니다.
그리고 천제뿐만 아니라 주문이나 부적도 동학에서 먼저 시작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주문을 대중화시킨 것은 증산도를 창시한 강증산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실은 수운 최제우가 원조입니다. 강증산은 그것을 민중들의 마음속에 확실하게 심은 사람이지요. 부적, 즉 영부(靈符) 역시 수운이 먼저 시작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점은 민초들이 수운의 등장을 계기로 천제를 지내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그럼 여기에서 천제가 지니는 사상사적 의미에 관심이 많으신 조성환 박사님께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동학 이전까지는 그럼 누가 천제(天祭)를 지냈을까요?
조성환 : 제가 ‘천재(天才)가 아니라서….(웃음)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최종성 교수님의 논문 「숨은 천제, 조선후기 산간제천 자료를 중심으로」(《종교연구》53, 2008)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도 민중들이 숨어서 천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또는 조직(교단) 차원에서 천제를 지내게 된 건 역시 동학에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조선시대에는 원칙적으로 그 누구도 천제를 지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리학적 질서에 따르면 오직 중국의 천자만이 천제를 지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선 초기에 천제에 관한 논쟁이 나옵니다. 조선이 중국의 제후국인 이상 천제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다수의 주장에 대해 변계량이라는 학자가 반론을 펼치는데, 그것의 핵심은 “우리 동방은 단군이 시조인데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지 중국에서 책봉한 제후가 아니다. 따라서 천제를 지내도 상관없다. 실제로 지난 천여 년 이상 천제를 지내왔는데 이제 와서 폐지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입니다(《태종실록》 16년 6월 1일). 이것을 기록한 사관은 변계량의 이 주장을 ‘동국사천설(東國祀天說)’이라고 하였는데, 저는 보통 ‘동국제천설(東國祭天說)’이라고 부릅니다. “동국, 즉 동방의 나라에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왔다는 주장”이라는 뜻이지요.
변계량의 이 주장은 제천행사와 단군신화를 교묘하게 끌어들여서 천제를 지내야 한다는 새로운 학설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13세기의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단군신화에는 천제와 관련된 이야기는 없습니다. 천제에 관한 기록은 3~4세기 무렵에 쓰여진 중국의 역사책 《삼국지》《위지》의 「동이전」에 나옵니다. 이 사료에 의하면 고대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분포하던 부족국가들이 대부분 제천행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국중대회, 음주가무” 또는 “비단 옷을 입었다”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보면, 전국적인 축제 같은 분위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공회(公會)’라고도 표현했는데, 직역하면 ‘공공모임’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설이나 추석 같은 전 국민적 행사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당시 중국인의 눈으로 보면 대단히 이색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국에서는 천자 한 사람만이 천제를 지낼 수 있는데, 이 동이족 국가들은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다 함께 천제를 지내기 때문입니다. 저는 바로 이 점이야말로 중국의 ‘天’과 한국의 ‘하늘’이 갈라지는 결정적인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중국에서 天(천)은 공식적으로는 천자만이 소통할 수 있는 대단히 제한된 존재이고, 그래서 제천의례도 천자에게만 허용된 정치적인 행사였던 반면에, 우리나라의 하늘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그래서 제천의례도 모두가 참여하는 공공적인 행사였고, 이것이 집단적으로 부활된 것이 중국적인 천하 질서가 깨진 구한말이었다는 것이지요.
동학을 비롯하여 천도교, 대종교, 증산교, 원불교와 같이 식민지시대를 전후로 탄생한 이른바 민족종교들이 하나같이 천제를 지냈다는 사실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하늘’이야말로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대변하는 상징적 존재이자 자신들을 보호해 주는 신령한 존재였음을 의미하니끼요. 그것이 사상적으로는 퇴계의 경천사상이나 다산의 천주교 수용 또는 동학의 “인내천”(모두가 하늘이다) 등으로 나타나고, 문학적으로는 윤동주의 「서시」나 박노해의 「너의 하늘을 보라」 등으로 표현되며, 언어적으로는 한글의 창제원리(초중종 삼성(三聲) 중의 초성), ‘하느님’이나 하늘이 붙은 다양한 명사어로 나타나고, 종교적으로는 천제 등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박맹수 : 감사합니다. 그럼 철학적으로 보면 한국인에게 ‘하늘’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조성환 : 그것은 동학에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한국인의 하늘사상이나 하늘관념이 하나의 학문 형태로 집대성된 것이 바로 동학입니다. 그것은 동학을 ‘천도(天道)’라고 부르는 것으로도 알 수 있는데요, 동학의 “사람이 하늘이다”는 사상은 민중들에게 강한 자존감과 주체의식을 불어넣어 주었고, 그래서 역사를 변혁시키는 주체로 거듭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것도 유독 한국에서만 가능했던 이유는, 전통적으로 한국에서는 ‘민’이 주체라는 사상이 강했고, 그것이 고대 부족국가에서 모두가 하늘에 제사지낸다는 제천의례로 표현되었고, 동학에서는 “모두가 하늘을 모신다”는 인내천 사상으로 재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즉 ‘하늘’은 곧 ‘민’ 그 자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맹수 : 잘 알겠습니다. 그럼 종교학을 하시는 허남진 박사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허남진 : 저는 동학 내부에서의 ‘천’에 대한 의례의 변천 과정에 주목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늘을 바라보는 고천제를 지내다가, 그 다음에는 하늘에 있는 별을 본 따 제사 지내는 구성제, 그리고 마지막에는 멀리 있는 하늘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시천주나 향아설위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박맹수 : 예. 확실히 최종적으로 정리되는 것은 ‘향아설위’라고 보아야겠지요. 향아설위는 1896년, 해월이 죽기 1년 전에 설파한 사상입니다. 그러니까 초기의 유교나 도교의 영향이 산발적으로 보이는 게 구성제 단계라고 한다면, 향아설위는 거기에서 벗어나서 동학 이론이 정립된 시기의 이론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김봉곤 교수님, 유교에서는 천제를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김봉곤 : 유교에서는 보통 자기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초월적인 것을 제사지내는 것은 ‘음사’(淫祀)라고 해서 경계합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조상 제사를 지내고, 천제는 역시 천자만이 지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반란을 일으킬 때에 보면 대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산천에 지냅니다. 가령 1860년대에 변산에서 일어난 민란 당시 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시작하지요. 그래서 천제를 지내는 것은 동학에나 와야 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허남진 : 그럼 동학에서 천제를 지낸 다음에는 어디에서 천제를 지내나요? 증산교인가요?
조성환 : 대종교에서도 지내고 증산계의 여러 계파에서도 지내고, 여기저기에서 다 부활되는 거죠.
박맹수 : 동학 이후에 증산교를 창시한 강증산이 “나는 후동학이다”라고 했고, 이어서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은 세상 사람들이 강증산을 비난하자 “증산 선생은 선지자다”고 옹호했고, 수운의 무덤에 가서는 “자기가 자기 무덤에 절하는 것을 보았느냐?”라며 자기가 수운의 환생이라고 한 것을 보면, 종교의식도 약간의 형식은 달라졌을지 몰라도, 동학-증산교-원불교에 흐르는 기본정신은 이어지고 있다고 보아야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원불교의 경우에는 사실을 합리화하려는 경향, 근대적인 이성적인 것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강한데, 그것을 원불교 교리에서는 ‘진리적 신앙’이나 ‘사실적 도덕’ 등으로 표현합니다. 이렇게 보면 원불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비적인 것을 근대적인 것으로 바꾼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초기 기록을 보면 신비적인 흔적들이 다 있습니다. 소태산도 처음에는 아무런 기반이 없으니까 증산교에서 천제 지내는 것을 보고 천제를 지내게 됩니다. 이것이 이후에 원불교 의례가 제도화됨에 따라 다 제거되게 되지요.
조성환 : 참고로 한국과 하늘의 관계에 대해서 보충설명을 드리면, 최제우가 ‘동학’을 ‘천도’라고도 했는데, ‘동학’은 지역을 중심으로 붙인 명칭이고 ‘천도’는 주제를 중심으로 만든 개념입니다. 즉 이때의 ‘동’이 지역적으로 한반도 일대를 가리킨다고 한다면, 동학은 곧 한국학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는데, 그 한국학의 테마를 왜 하필 ‘하늘’로 잡았을까요? 아마도 한국=하늘이라는 의식이 강해서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천제를 부활시킨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동학에서 왜 천제를 지냈는지에 대한 연결고리가 잘 잡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박맹수 : 잘 알겠습니다. 그럼 일본의 경우에는 어떨까요? 야규 박사님, 제3자의 입장에서 다른 각도로 한 번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야규 마코토 : 《고사기》나 《일본서기》와 같은 고대 일본의 역사서를 보면, 신들이 신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여기에서는 신들이 말을 하는데, 천리교(天理敎)나 오오모토교(大本敎)와 같은 근대의 신종교에 오면 알려주지 않던 신이 지상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계시를 준다는 모티브가 강합니다. 신도에서는 하늘에 있는 신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하늘에게 직접 제사를 지내는 경우는 없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