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은 자연히 생긴 것이다. 교육에 의해 후천적으로 형성된 모든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하는데 인간은 생물학적인 욕구(이익을 좋아하고 남을 질투하는 것..등)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필연적으로 악한 결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순자는 맹자는 성선설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맹자가 주장하는 인의예지와 같은 선함은 본성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노력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본인 또한, 성악설을 지지한다. 학교 현장에
비추어보았을 때 학생들은 이익을 좋아하는 생물학적인 욕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수업을 할 때 어떤 활동을 시키면 “선생님 이거 수행평가에요?”라고 물어보는 학생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 활동이 수행평가라면 활동을 열심히해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하고 수행평가가 아니라면, 성적에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 자신에게 불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예시로 인간은 생물학적 욕구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학교현장에서 이러한 학생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다. 그러나 순자에 의하면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렇기에 나는 학생들의 이러한 본성을 교육을 통해 꾸준히 변화시킬 수 있는 교사가 되고싶다. 그렇지 않으면 학생들에게 더이상 학교와 공교육의 중요성은 점차 사라져갈 것 이기 때문이다.
순자가 맹자의 성선설을 비판하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인간은 누구나 남의 고통을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제 어떤 사람이 한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았다고 하자. 그러면 누구나 깜짝 놀라서 측 은한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측은한 마음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 오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요,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요. 시비를 가리는 마음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다. 측은 해하는 마음은 인의 단이요,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의의 단이요. 시비 를 가리는 마음은 지의 단이요, 사양하는 마음은 예의 단이다. 인간이 이 사단을 가진 것은 마치 사지를 갖는 것과 같다.
지금 사람들의 본성은 배고프면 받은 먹고자 하고 추우면 따뜻이 하고자 하며 힘들면 쉬고자 하는데. 이것이 사람의 감정과 본성이다. 지금 사람이 배가 고파도 어른을 보 면 감히 먼저 먹지 않는 것은 사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힘들면서도 감히 쉬려고 하지 있는 것은 대신해서 일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사양하고 아우가 에게 사양하며,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일하고 아우가 형을 대신해서 일하는데, 이 두 가지 행동은 모두 본성에 반대되고 감정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렇지만 효자의 도리요 예의 의 형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감정과 본성을 따르면 곧 사양하지 않게 되며, 사양을 하면 끝 감정과 본성에 어긋나게 된다. 이로부터 사람의 본성이 악한 것이 분명하며, 그것이 선한 것은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서이다. 사람들이 선하게 되려 하는 것은 본성이 악하기 때문이다. 대개 엷으면 두텁기를 바라고, 추하면 아름답기를 바라고, 좁으면 넓어지기를 바라고, 가난하면 부유하기를 바라고, 천하 면 귀하여지기를 바라는데, 반드시 자신이 소유하지 못한 것을 밖에서 구하고자 한다. 따라 서 부유하면 재물을 바라지 않고, 귀하면 세력을 바라지 않으니, 진실로 자신이 이미 소유하 고 있는 것은 애써 밖에서 구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이 선하게 되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성이 악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