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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일 神父의 - 외줄위를 걷는 人生
13. 서대문경찰서 탐방
82년 새해가 밝았다.
신학원 입학을 앞두고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가슴이 벅차올라 매일심장 뛰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아직 시작도 안한 내가 마치 모든 과정을 마치고 내일이라도 사제서품을 받을 것처럼 기고만장 하였다.
먼저 부산교구 주교님을 찾아뵙고 새해 인사를 올렸고 그의 지시에 따라 추천사제인 주교좌성당 주임사제를 만나 신학원 입학을 위한 추천절차를 밟기 위해 개인면담을 했다.
세상이 온통 나를 중심으로 춤추며 돌아가고 있었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속도감이 느껴지던 시간이 또 있었던가 싶다.
세상이 뭔지 인생이 뭔지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피가 뛰는 대로 달리기만 하면 되는 줄 알던 시절, 단지 막혔던 일이 풀리는 것만으로도 그 쾌감은 굉장하였다.
답답하기만 했던 지난 세월 방황의 고통은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사실 사제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속내를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그렇게 기쁘지만은 않았을 터인데 몰라도 너무 몰랐다.
E.Y.C (기독청년협의회)에서 연락이 왔다.
정초 문익환 목사님 댁에 기청간부들이 문안인사를 가기로 일정이 잡혔다는 것이었다.
권진관 간사를 비롯해 몇 몇 교단 청년연합회 대표들이 문목사님 댁에 모였다.
당시 문목사님은 아직 감옥에 갇혀 있었고 부친이신 문재린 목사님이 간도에서 돌아와 계셨다.
마침 경제인 연합사건으로 13년 간 감옥생활을 하고 막 출감한 사십대 나이의 박성준(현. 성공회대 교수,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남편)씨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항일독립운동으로 오랜 감방생활을 경험하신 문재린 목사님은 장기 수형생활의 후유증을 치료하는 식이요법에 대해 자신이 터득한 생식요법을 소상하게 소개해 주셨다.
요는 생명이 살아있는 곡식과 채소 과일로 섭생을 하라는 것이었다.
13년의 긴 감옥생활에도 불구하고 박성준씨의 얼굴은 막 물로 씻어낸 깨끗한 얼굴에 대학초년생의 진지함과 맑음이 그대로 남아있어 내 가슴을 떨리게 했다.
결혼초에 감옥에 들어갔으므로 아이를 갖지 못해 부부가 교도소당국에 여러 차례 진정을 하고 밖에 있는 부인도 백방으로 뛰어다녔으나 결국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하는 말에는 당국의 비인간적인 처사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감방에서 사상범인 세계 최장 장기수들을 만나 받았던 인상이나 인격적 교류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들은 처우개선을 위해 또 사안에 따라 투쟁을 위해서 아침마다 ‘위대한 김일성 수령동지 만세!’를 외치기도 하지만 실제로 만나보니 도의 깊은 경지를 향해 정진하는 도인 같더라고 했다.
그가 소개하는 감방 안의 세계는 대부분 내가 전혀 듣지 못했던 처음 접하는 세계였다.
문익환 목사님 사모님도 한 말씀 하셨다.
문목사님께 면회 갔더니 ‘나는 동지들과 함께 즐겁게 살고 있으니 바깥에서도 집에서도 밝게 웃으며 살라’ 했다며 우리 가족들도 그래서 어두운 표정 짓지 않고 기쁘게 살고 있다고 명랑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반독재투쟁에 앞장선 대가로 당국의 핍박을 받으며 가정분위기가 매우 어둡고 무거울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문재린 목사님이 자리를 정리하는 기도를 하셨다.
“주님. 올해 꼭 통일하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구순의 나이에 이르렀지만 찌렁찌렁한 목소리의 그 확신에 찬 짧은 기도가 내 마음을 저 깊은 속에서부터 요동치게 만들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올바른 방향으로 굴리려는 선각자의 헌신과 몸부림이 절절히 느껴지는 하루였다.
신학원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10명 안팎의 응시생들이 아침부터 신학교 강의실에 모여 앉았고 안면 있는 얼굴들은 헛웃음과 농담으로 서로 긴장을 풀어주며 시험을 끝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말없이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내 나이 또래의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전날 폭음을 했는지 말상의 긴 얼굴은 흉흉한 낯빛을 하고 있었고 잔인한 성격을 짐작케 하는 노란 눈알에다 앞니는 싸구려 산뿌라로 입혀 그 입을 거침없이 드나든 주먹의 무례함을 짐작케 했다.
우리는 처음부터 알아보았다.
비슷한 종류라는 것을.
시험이 끝나고 상견례 겸 식사와 함께 반주를 한 잔씩 했다.
자기소개를 하는데 인생의 목표를 사제에의 길로 잡은 사람들이라 그런지 부르심의 확인에 대한 얘기가 주종을 이루었다.
그는 서울교구에서 전도사 노릇을 하는 친구의 강권에 할 수 없이 이 자리에까지 오게 되었다고 쑥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적당히 시간도 지나고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춘기라는 이름의 그 친구는 할 말이 있다고 내 손목을 붙들었다.
그리고는 산뿌라 이빨을 드러내며 징그럽게 웃었다. 나도 심호흡을 하며 주먹을 꼭 쥐었다.
오늘 둘 중에 하나가 뻗어야 이 자리가 끝나게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 되었다.
단지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상대가 안주를 별로 탐하지 않는다는 것.
그는 아무 말 없이 탁자 위의 소주잔을 모두 치우고 맥주잔을 주문해 소주를 쏟아 붓듯 따랐고 나 역시 질세라 잔을 돌렸다.
술이 취해 갈수록 술잔을 돌리는 속도도 어지러울 정도로 빨라져 갔다.
여기서 내가 먼저 취하면 죽도록 얻어맞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한다면 술자리 생리에 익숙하지 않은 샌님이다.
이런 유형의 술꾼일수록 상대방이 먼저 나가떨어지면 승리감 때문에 거침없이 주먹을 휘두르는 성향이 농후하다.
건네져 오는 술잔이 진짜 총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코 사양하지 않는 것이 이 쪼그만 땅덩어리에서 사나이로 인정받는 최상의 방법인양 눈을 부릅뜨고 마시고 또 마셨다.
말을 하면 금방이라도 먹은 음식이 넘어 올까 봐 둘 다 입을 꼭 다물고 상대의 눈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술잔을 건넸다.
오기와 자존심 때문에 이제 와서 먼저 일어나자 이제 그만 마시자 할 수도 없었다.
보다 못해 주모가 달려왔다.
죽으려면 자기 집에서 죽지 왜 해필 여기서 돗자리를 깔려고 하냐며 화를 내며 신경질을 부렸다.
그리고는 술병을 치워버렸다.
친구는 막아서는 주모를 슬쩍 피해 말없이 소주를 박스 채로 집어왔다.
우리는 둘 다 총알을 무수히 맞고도 쓰러지지 않는 주윤발이 되어 생사의 경계선을 향해 달려갔다.
나는 밥을 다 먹고도 계속해서 안주를 시켜 먹었다.
그는 여전히 일체의 탁한 것은 싫다는 듯 맑은 소주만 마셨다.
나는 잠시 깜박 의식을 잃었던 모양이다 눈을 떠보니 그의 이마가 내 머리카락에 박혀있었다.
같이 뻗어 버린 것이다.
신학원에 와서 나보다 더한 놈을 만났다.
그는 연세대 신학과를 나왔다고 하였다.
대성당 대학생회에서 지도자라 할 수 있는 후배 한 명이 나에게 정식으로 충고를 하였다.
내가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해서 후배들이 불만이 많다는 것이다.
새해가 시작되면서 대학생회도 교회당국의 심한 활동제한에 힘겨운 저항을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나이가 몇 살 더 많은 나는 큰형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활동의 범위가 커갈수록 운동이 치열해 질수록 대화의 소통구조가 느슨해 져 갔고 성질 급한 나는 무리수를 두고 있었다.
전체 성원이 합의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올해 들어 세 명의 대학생회 학생들이 작년의 왕성한 활동의 여파로 학교에서 유급을 당함으로써 파문을 일으켰다.
나는 사과를 하고 대학생회에서 물러나기로 약속을 했다.
대학생회의 한 여학생이 신학원 입학을 축하한다며 성경책을 선물했다.
그녀 앞에서 포장지를 벗기고 성경을 펼치니 겉 표지 안쪽에 부탁의 말씀이라고 짧게 한 줄로 썼다.
‘형! 사제가 되기 이전에 먼저 참인간이 되기를 기도할 게.’
가슴이 뜨끔하였다.
그녀는 불안할 정도로 진지한 성품이어서 더욱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는 교회에 다시 돌아와 오히려 성정이 더욱 거칠어졌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대학에서 연극을 할 때는 중재하고 화해시키는 일이 나의 주임무이었는데 대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매사에 지나친 문제의식과 투쟁적 태도로 인해 주위사람들에게 염증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따뜻하고 진솔한 인격적 교류보다는 대정부 투쟁에서 길들여진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로 인간을 대하고 있다는 반성이 내 마음 한 구석을 무겁게 하고 있었다.
하루는 청년회 회장이 저녁 해질 무렵 총무인 나를 이끌고 무슨 선교회라는 곳으로 이끌고 갔다.
모 대학 음대 교수라는 분이 선교회를 이끌고 있었고 40평쯤 되는 공간에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열정적으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역정과 하느님 체험에 대해 울부짖는 목소리로 간증을 하며 회중을 감동과 흥분의 도가니로 이끌고 있었다.
청년회회장의 영적 갈급함이 어느 정도인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교수님은 방언으로 기도하게 했다가 어느 순간 딱 그치게 하고 일제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기도하게 했다가 하며 자유자재로 회중을 이끌었다.
나는 특수훈련을 받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싫어서 그만 나가자고 하였다.
회장은 순간 섭섭한 표정을 지었지만 따라와 준 것만 해도 성과가 있었다는 반응이었다.
회장은 내가 사회참여적 신앙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다고 생각했는지 정 반대로 그 대척점에 있는 신앙을 소개하고 싶어 했다.
물론 회장 자신 그 시점 그런 색깔의 신앙에 푹 빠져 있었고 그리고 그런 신앙에서 열렬히 소망했던 구원의 확신을 얻었던 모양이다.
나 역시 종교의 사회구원과 역사구원의 사명에 깊이 몰입해 있었지만 악의 실체라고 여기고 상대해 싸우던 소위 독재정권의 적들과 내 자신의 사고와 행동양식이 점점 닮아가고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진리를 담을 그릇도 못되고 문제를 극복할 방법도 모르는 나는 어느덧 냉소적으로 변한 타인의 시선도 의식하지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저항과 투쟁논리만 앞세우는 기고만장하고 전투적인 인간이 되어갔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이사할 준비를 했다.
신학원 학생은 예전훈련과 영성생활을 위해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이었다.
짝젖과 아편쟁이 아저씨 등 몇 년 동안 정들은 이웃들과 막걸리를 나누며 인사를 나누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딸랑 알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그렇지만 어떤 폭력으로도 뭉개지지 않는 단단하고 따뜻한 인간의 내면을 보여준 이웃 아가씨들이 진심으로 이별의 아쉬움을 표했다.
옆방에 있기만 했지 막상 실제적으로 내가 해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는데도 그녀들은 나의 존재를 든든해했다.
대학연극반 후배들도 대성당 대학생회 학생들도 다들 와서 짐 싸는 걸 도와주었다.
이사를 앞두고 한 가지 고민은 있었다.
내 방의 빈대가 문제였다.
내 짐에 묻어가서 신학교 기숙사가 빈대 천지가 된다면 이건 보통 큰 사건이 아닌 것이다.
왠만한 약으로는 빈대퇴치가 불가능하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짐을 쌌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놀랍게도 신학교에 빈대가 옮지 않았다는 거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유는 단 하나! 내가 겨울동안 연탄 살 돈이 없어 방에 불을 때지 않고 방바닥에 스트로플을 깔고 살았으므로 빈대들이 불 많이 때는 옆방으로 모두 옮겨갔던 것이다.
빈대는 영상 14도 이하에서는 생식을 할 수 없는 것이 그 이유였다.
어쨌든 스무 살 대학입학으로 시작한 흑석동 시절은 8년 만에 그 막을 내렸다.
학교생활이 시작되었다.
매일 아침 조도(아침기도)와 미사로 시작되는 생활은 오후 강의를 마치고 만도(저녁기도)로 끝이 났다.
오후에 신학원 학생과 신학과 학부 학생간에 콜라내기축구시합이 자주 있었다.
춘기는 고등학교 때 주전은 아니지만 축구선수로 뛴 경력이 있어서 그런지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학부학생들과 사생결단의 살벌한 경기를 펼쳤다.
춘기는 그 날도 4대1로 지고서도 시합이 아직 안 끝났다며 금방이라도 주먹으로 팰 것처럼 우겨서 약속된 시간보다 3시간을 더 연장해 역전승을 하고서야 시합을 끝냈다.
지쳐서 다리를 질질 끌며 몸을 씻으러 가는 나를 춘기가 불러 세웠다.
그는 노란 눈알을 고양이처럼 똥그랗게 뜨며
“야! 경일아! 너 축구 신학교 와서 처음 뛰어 보는 거냐?”
“축구 같은 거 가지고 왜 목숨 거냐? 이게 축구냐? 싸움이지.”
“야. 신학교 얘들에게는 끈질긴 근성이 기본이야. 지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면 안 된단 말이야.”
“그래서 이미 진 게임을 네가 골을 넣어서 이길 때까지 4시간씩 억지로 차게 하는 거냐고?”
“아 새끼. 자기가 수비를 개다리로 봐서 진 것은 말 안하고 꼭 심장이 터지도록 뛴 나를 나무라네.
숫자가 모자라니 빠지라고 할 수도 없고.”
몇 번 심하게 구박을 받고 나니 나도 오기가 생겨 공 대신 사람을 차는 공포의 축구로 작전을 바꾸었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모이면 가정이 있는 친구들은 하늘을 쳐다보고 한숨짓거나 아니면 군대얘기 그것도 아니면 시국에 관한 진단과 토론이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무엇보다도 핫이슈는 광주의 5.18항쟁이었다.
당시에는 진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진 바도 없고 완벽한 언론통제로 철저히 비밀에 붙여졌으므로 유언비어만 무성하게 번지고 있었다.
모두들 주워들은 얘기를 흥분해서 떠드는데 유독 춘기만 아무 말이 없었다.
도대체 대화에 끼어들려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아침에 갈아 신을 게 없다며 양말을 얻으러 왔다.
무등양말이라는 상표가 붙은 무좀방지용 흰 양말을 건네니 안색이 싹 변하며
“야! 이 양말 안신을 수 없냐? 진짜 괴롭다.”
“왜? 무좀 옮을까봐?”
“그게 아니라 소름이 끼친다니까...”
“무슨 귀신 영화 봤냐?”
춘기는 광주항쟁 때 군 복무 중이었고 진압군으로 광주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광주의 시민군들이 진압군의 토벌작전에 조선대 뒷산으로 밀려 퇴각하다 총 맞아 죽은 시신들을 그는 들것으로 직접 날랐다고 하였다.
수풀 사이로 편안하게 누워있는 젊은 청년의 시신은 꼭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하였다.
“곤색 양복 흰 와이셔츠 흰 양말 새 구두 모두 그 날 아침에 갈아입고 집에서 나온 게 분명해.
이 양말이 바로 그 양말이야. 무등양말!
들것에 간신히 그 무거운 시신을 올려놓고 둘이서 한 조가 되어 산을 내려오는데 내리막길이라 시신이 들것 위에서 미끄러져서 구두 밑창이 내 등허리에 턱하고 와 닿을 때 그 느낌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야.
꼭 말을 거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악! 하고 비명이 튀어나오지.
온 몸에 힘이 쪽 빠지는데 언제 어떻게 내려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이 달려 내려오는 거야.
그런데 그렇게 죽어 널브러진 사람이 어디 한 둘이냐. 도대체 그 짓을 몇 번을 했겠냐?
말 마. 끔찍하다.”
그는 손사래를 쳤다.
“야. 춘기야. 미안하다. 나는 무좀 때문에 이 양말 밖에 안 신는다. 좀 참아 도고.”
“경일아! 이번 주일에 미사 끝내고 신촌 가서 한 잔 하자. 대학친구들하고 한 잔하기로 했다.”
‘연대 얘들이냐?“
”그래. 흥사단 친구들.“
82년 3월 18일 목요일 오후 2시. 부산의 미국 문화원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열람실에서 책을 읽던 동아대생은 죽고 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는 기사를 보고 나는 직감했다.
작년 E.Y.C(한국기독청년협의회)모임에 갔다가 부산 E.Y.C의 허진수등 몇 친구에게서 보수적 신앙으로 유명한 부산 고신대에 의식이 건강한 학생들 몇 명이 제대로 자리가 잡힌 실전을 겸한 공부모임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었기 때문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고정간첩이나 좌경불순분자의 소행이라며 매스컴을 총동원해 주위에 수상한 사람이 보이면 무조건 신고하라며 2천만 원의 포상금까지 걸었다.
이번 기회에 운동권을 아주 싹쓸이를 해 볼 참으로 눈에 불을 켜고 수사망의 그물에 걸리는 놈은 범인이 아니라도 최소한 불구자를 만들어 의기를 꺾어놓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내가 문화원사건이 가라앉을 때까지 당분간 출입을 삼가는 게 좋겠다고 했더니 춘기는 상관없이 술만 먹고 오자고 나를 설득했다.
더구나 신촌은 연세대 구역이라 어느 정도 보호가 된다며 걱정 말라고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다.
일요일 미사가 끝나고 신촌시장의 허름한 술집에 앉으니 단골집인지 두 명의 춘기친구가 미리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방감이 아랫배에서부터 물밀 듯이 올라왔다.
마시고 난 뒤 바닥에 깔아놓은 술병이 발에 걸리적거릴 즈음 나는 취기가 올라 술도 깰 겸해서 슬그머니 바로 두어 집 건너 해장국집에 가서 선지국밥을 시켜 먹고 있었다.
저녁식사 시간인지 사람이 많아 내 앞자리에도 누군가가 겸상을 위해 수인사를 하며 앉았다.
서른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외모가 매끈한 신사풍의 사내가 광주말을 쓰는 것 같아 내가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그 쪽 사람인 모양인데 광주얘기 좀 아시오? 내가 하도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요.
거기에 아는 사람도 여럿 있는데 5.18나고 난 뒤로는 통 연락이 없소.”
“어디 가서 아무 말도 마시요. 어디 한 두 사람이 죽었깐디요?”
“몇 명이나 죽었답니까? 주로 어디서? 학생들이요 아니면...”
얘기가 한참 무르익으려는 참인데 그 때 옆자리에서 누가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저 놈 저거 빨갱이 아냐? 사람을 아주 교묘하게 갖고 노는데. 빨갱이가 틀림없지?
보시오. 당신 조심하시오. 넘어가면 안 되요.
지금 내가 옆에서 들어보니 당신 저 놈에게 거의 넘어 갔소.”
“허... 사람 참. 말 함부로 하네. 사내자식이 남의 술자리 얘기나 엿듣고. 너같은 놈이 빨갱이야. 짜식아!”
보아하니 장사치인 모양인데 검은 얼굴에 수염이 무성하고 뱃구레가 큰 것이 힘께나 쓰게 생겼다.
내 앞에 마주 앉은 사람은 선병질의 유난히 하얀 얼굴인데다 겁에 질리니까 낯빛이 아예 새파랗게 변해 덜덜 떨기까지 한다.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옆자리의 그 놈은 먼저 가게문을 열고 튀어나가 버리고 나도 떨고 있는 그에게 ‘얼른 자리를 뜨라’고 하고는 태연하게 일행이 있는 술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너스레를 떨며 술을 주고받고 있는데 갑자기 경찰들이 들이 닥쳐 우리를 연행했다.
수갑을 차고 백차에 실려 신촌파출소에 갔다가 다른 친구들은 풀려나고 나만 서대문 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알고 보니 나와 춘기일행은 여러 사람에 의해 각자 별개로 수상한 사람으로 신고 되어 접수되었던 거다.
일제식민시대부터 악명 높은 서대문 경찰서는 겉보기에는 조용하기만 했다.
나는 머리색깔이 유난히 노래보이는 깡마른 사람 손에 이끌려 건물 벽 옆으로 나있는 철제계단을 타고 바깥쪽으로 정보 제1과 라고 팻말이 붙어있는 건물내부로 들어갔다.
넓은 사무실에는 책상이 두어 개 놓여있고 입구에서 오른쪽 벽면으로 다시 문이 별개로 달려있어 그 문 안 밀폐된 공간을 별실처럼 사용하면서 특별한 방법으로 심문을 하는 모양이었다.
놀랍게도 밥집에서 만난 광주신사가 책상 앞에 앉아서 얼굴이 사색이 되어 떨고 있었다.
그는 명동의 삼 사백 석 규모의 매머드 다방 영업부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었다.
수사는 노랑머리가 맡았고 쌀집 주인처럼 푸근하게 생긴 형사는 우리 주위를 빙빙 돌며 수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역할을 맡은 것 같았다.
광주신사가 너무 당황했는지 정신을 잃었는지 노랑머리가 똑 같은 질문을 반복하면서 소리를 점점 높여가자 매번 다른 답변을 하며 나중에는 자기가 하지도 않은 말을 울먹이면서 늘어놓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그의 뺨을 후려치며 ‘정신 차리고 당신이 했던 말만 해’하고 고함을 쳤다.
노랑머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더니 광주신사를 귀가시켰다.
그리고는 자기 담배 한 대를 불을 붙여 입에 물려주었다.
“학생! 담배 한 대 피우고 저 방에 들어가서 개인면담 좀 하자. 알았지?
말 잘 들어. 응? 착하지? 착하게 생겼네.”
어느새 필터에 불이 옮아 붙어 나는 담배를 한 대 더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거절했다.
나는 다시 한 대만 더 피우자고 했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며.
그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담배 한가치를 더 주었다.
머릿속에서 철제 스크류가 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며 갑자기 극도의 공포감이 엄습했다.
이제 몇 분 뒤 저 문안을 들어갔다 나오고 나면 나는 다시는 지금의 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두 번 째 담배를 다 피울 때쯤 노랑머리가 나를 의자에서 일으켜 세우려고 다가왔고 나는 주먹을 꼭 쥐고 심호흡을 했다.
그 때 입구 문이 벌컥 열리며 학생처장신부인 이대용신부님과 채플린이신 문신부님이 춘기와 함께 뛰어 들어오셨다.
“에...이 학생은 사제수련 과정에 있는 성공회 신학원 학생입니다.
그리고 현재 성공회 전국청년연합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청년대표입니다.
신원이 확인되면 일단 학교기숙사로 돌려 보내주시고 경찰서의 요청이 있으면 내일 아침 다시 보내 드리겠습니다.”
학교로 돌아오는 길은 정말 멀고도 멀었다.
나는 누구에게 깔린 것처럼 숨을 쉬기 어려웠다.
승용차 내분위기가 너무 무거워 뭐라고 한 마디 인사치레를 하니 ‘그만 입 좀 다물지’라고 바로 지청구가 날라 왔다.
밤새 악몽을 꾸고 다시 서대문 경찰서에 들어가니 어제와는 다른 사무실에 형사들이 가득 책상 앞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담배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모두들 며칠째 잠을 못 잤는지 눈들이 모두 토끼눈처럼 빨갛게 충혈 되어 있고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했으며 얼굴은 까맣게 타들어가 사람 몰골이 아니었다.
미국문화원 사건의 여파는 경찰서부터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신분을 밝히니 의자를 내 주었다.
칠십이 훨씬 넘어 보이는 타다 남은 고목 같은 인상을 주는 할아버지가 의자에 앉아 있는 내 어깨를 뒤에서 안마하듯 주무르며 가래가 잔뜩 낀 목소리로 점잖게 충고를 하였다.
“이 학생 운동 많이 하는 구만. 학생이면 공부를 해야지. 운동만 하면 공부는 언제 하는 거야?
이제 운동 그만 하고 공부만 해. 알았어?”
거의 죽을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은 병색이 완연한 할아버지에게서 그렇게 강한 음습한 살기가 나온다는 게 참 신기하였다.
서대문경찰서 바깥은 오월의 햇빛이 화살이 와 박히듯 강렬하였다.
학교에 돌아오니 큰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빠야.
어저께 경찰사이드카가 여러 대 와서 오빠 언제 서울 갔는지 용돈 얼마 줬는지 물어서 다 얘기해 주었는데 잘못 말한 것 같아서 오늘 내가 다시 경찰서 가서 돈 액수 정정해서 가르쳐 주고 왔어.
엄마가 지금 거의 잠을 못 자. 진지도 못 들고.
무슨 일 난 거라고.
전화 한번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