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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원이야기
 
 
 
카페 게시글
경상북도(이야기) 스크랩 옥성서원 이야기
관보 추천 0 조회 118 11.12.15 19: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옥성서원(玉成書院)
소 재 지 :  상주시 외남면 신상리 104
(원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시 외남면 신상리.)
건 축 주 :  신잠(申潛)
건축시기 :  1633년(인조 11)


건축 배경
옥성서원은 신잠(申潛)이 상주 목사로 부임하여 세운 18개의 서당 중의 하나인 수양서당(首陽書堂)이 그 모태이다. 처음에는 외남면 구서리 옥봉 아래에 위치하였다. 1630년 이준등이 주도하여 서원으로 승원하자는 논의를 하여 난계(蘭溪) 김득배(金得培)와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을 배향하며 서원으로 승원하였다.
1636년 가을에 상주 향교에서 후계(后溪) 김범(金範)을 추향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다가 1647년 김범과 이준(李埈)을 추배하여 네 분을 모신 서원이 되었다.
1648년 대홍수로 옥봉이 산사태로 무너져 서원이 묻히게 되자 위패를 수선서당으로 모시다가, 1710년 현재의 자리로 새롭게 건물을 지어 서원을 복원하였다. 이때에 월간(月澗) 이전(李?)을 추배하였다. 1871년 훼철되어 단소를 설치하여 제향하였다. 1977년 사림들의 중론으로 복원되어 지금까지 내려온다.


건축 구성
전체적인 구성은 정면에 서원을 출입하는 외삼문이 있으며, 강학 공간인 명륜당이 전면에 자리하고, 다섯 분의 위패를 봉안한 묘우가 뒤쪽에 있는 전학후묘형이다.

- 경현사(景賢祠)
옥성서원의 묘우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깔끔하게 손질된 화강암으로 기단과 계단을 설치하였다. 묘우에는 김득배, 신잠, 김범, 이준, 이전 다섯 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신문과 동서 세 개의 문 모두 널문으로 되어 있다.

- 내삼문(內三門)
강학공간에서 묘우로 출입하는 문으로 삼칸 솟을대문으로 지었다.

- 명륜당(明倫堂)

도남서원의 중심 건물인 강당의 이름이다. 정면 4칸의 측면 2칸 팔작지중 건물로 정면 가운데에 옥성서원이란 현액이 걸려 있다. 건물은 1977년 복원하여 연륜은 오래 되지 않아 깔끔하다. 당호가 명륜당이다.


현판
명륜당(明倫堂)
강당 마루 왼쪽 위에 게시되어 있다. 예전의 현액이 보관되어 지금까지 걸려 있다.
옥성서원(玉成書院)
강학당인 명륜당 처마에 걸려 있는 현판이다. 테두리에 꽃무늬를 둘렀다. 처음 건립할 때는 신잠이 직접 옥성서원이라 쓰고 걸었으나, 산사태로 유실되고 현재의 현판은 근래에 제작된 듯하다.

내력과 기능

향사일
춘기향례(春期享禮) 3월 15일
추기향례(秋期享禮) 는 지내지 않는다.

- 내력

옥성 서원은 처음에는 김득배와 신잠 두 분을 배향하였으나 1647년 김범과 이준을 추향하였으며, 1648년 대홍수로 서산의 옥봉이 무너지자 위패를 청리면에 소재한 수선서당에 옮겨 봉안하였다. 1710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며 이전을 추배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7년 사림의 발의로 복원되었다.
옥성서원은 지역의 현안 문제를 협의하는 장소로 상주의 서원 중에 가장 많이 이용되었으며, 회합의 결과물인 결정 통문이 가장 많이 작성된 서원이다.

- 향례
향사 전날 유사는 묘우 내외를 청소하고 제기를 깨끗이 씻어 놓는다. 희생이 도착하면 모든 제관은 복장을 갖추고 나아가 살펴보고, 모든 제구들이 제자리에 놓여 있는가를 확인한 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예행연습을 한다.
유사는 삼헌관의 자리를 묘정 가운데 설치하며, 북쪽을 향하여 서편이 상석이다. 제생들의 자리는 그 뒤로 차례로 설치하며, 삼문 밖의 자리는 동쪽 문 앞에 차례로 늘어서게 마련한다.

- 배향위치

신문(神門)에서 바라보면 맨 왼쪽부터 문충공(文忠公) 김득배, 신잠, 김범, 이전, 이준의 순으로 배향되어 있다.



관련유물
- 양선생사기(兩先生祠記)
이준이 옥성서원을 창설하여 김득배와 신잠 두 선생을 배향하여야 하는 이유를 상세하게 기록한 글이다.

관련인물

관련인물
- 주향자
- 김득배(金得培)
1312(충선왕 4)∼1362(공민왕 11).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호는 난계(蘭溪)이다. 아버지는 판전의(判典醫) 녹(祿)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에 보직되었으며, 그 뒤 전객부령(典客副令)으로서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홍건적의 괴수 위평장(僞平章)과 모거경(毛居敬)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함락하였으며, 정주(靜州)에서는 도지휘사 김원봉(金元鳳)을 죽이고 인주(麟州)까지 함락시켰다. 이 때 그는 도지휘사가 되어 서북면도원수 이암, 부원수 경복흥(慶復興)과 더불어 적에 대비하고,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분전하여 서경을 탈환하고 압록강 밖으로 적을 격퇴시켰다.

1360년 10월에 지공거가 되어 진사를 뽑고, 정몽주(鄭夢周) 등 33인을 급제시켰다. 1362년에 안우, 이방실,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2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의 지휘로 적의 괴수 사유(沙劉), 관선생(關先生) 등을 베고, 적 10여 만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고 이들을 격퇴시켰다.

평장사 김용(金鏞)이 거짓으로 조서를 꾸며 안우, 이방실, 김득배에게 정세운을 살해할 것을 명하자, 이들은 그것을 믿고 정세운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죄를 입어 안우, 이방실이 살해되었으며, 그도 처벌을 면할 수 없게 되어 도망하여 산양현(山陽縣)에 숨었으나 체포되어 상주에서 효수되었다.

정몽주가 왕에게 청하여 그의 시신을 거두고 제문을 지어 그의 억울한 죽음을 개탄하였다. 1392년(공양왕 4)에 그의 누명이 벗겨지고, 상락군(商洛君)으로 추봉되었으며, 태조 원년에 문충(文忠)으로 시호하였다.

-신잠(申潛)
1491(성종 22)∼1554(명종 9).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자는 원량(元亮)이며, 호는 영천자(靈川子) 또는 아차산인(峨嵯山人)이다. 숙주(叔舟)의 증손자이며, 종호(從護)의 아들이다.

1519년(중종 14)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으나, 같은 해에 기묘사화로 인하여 파방되었다. 그 뒤 20여 년간 아차산 아래에 은거하며 서화에만 몰두하다가, 인종 때에 다시 복직되어 태인과 간성의 목사를 역임하고 상주목사로 재임 중 죽었다. 문장에 능하고 서화를 잘하여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고 하였으며, 특히 묵죽(墨竹)에 뛰어났다고 하였다. 상주 목사 재임 중에 사망하였으며, 상주에서의 치적은 길이 남는다.

- 김범(金範)
1512(중종 7)~1566(명종 21). 본관은 상주이다. 자는 덕용(德容)이며, 호는 후계(后溪) 또는 동계(桐溪)이다. 1540년(중종 35) 진사시에 장원하였고, 1566년(명종 21) 천거로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다시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옥과(玉果)현감이 되었으며, 명종의 부름으로 조식(曺植)과 함께 학문과 정치에 관해 진언하였다.
만년에 주자학에 전심하여 많은 후진을 가르쳤다. 인조 때 효자정문이 세워졌고, 상주의 옥성서원(玉成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후계문집(后溪文集)?이 있다.

- 이전(李?)
1558(명종 13)∼1648(인조 26). 본관은 흥양(興陽)이다. 자는 숙재(叔載)이며, 호는 월간(月磵)이다. 수인(壽仁)의 아들이고, 준(埈)의 형이다.
동생 준과 함께 류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퇴도(退陶)의 학설을 배워 주자서(朱子書)를 전심으로 공부하였다.
임진왜란 때 준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적중에 포위된 적이 있었는데, 동생을 데리고 적진 탈출에 성공하여 형제가 무사할 수 있었다. 뒤에 준이 감복하여 화공을 시켜 이 모습을 그리게 하고 〈형제급난도(兄弟急難圖)〉라 이름하였다. 당시의 명공, 거경들이 이 일을 가영(歌詠)하였다고 한다. 1603년(선조 36) 사마시에 합격하여, 세마를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 때에는 지례현감을 제수받았으나 사퇴하였다. 평생을 학문강마와 후진양성을 위하여 진력하였다.

- 이준(李埈)
1560년(명종 15)∼1635(인조 13). 본관은 흥양(興陽)이다. 자는 숙평(叔平)이며, 호는 창석(蒼石)이다. 수인(壽人)의 아들이다.
류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1582년(선조 15)생원시를 거쳐 159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민과 함께 안령에서 적에게 항거하려 하였으나 습격을 받아 패하였으며, 그 뒤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의병 몇 천 명을 모집하여 고모담(姑姆潭)에서 왜적과 싸웠으나 또다시 패하였다. 1594년 의병을 모아 싸운 공으로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597년 지평이 되었으나 류성룡(柳成龍)의 국정운영에서의 잘못 등으로 인하여 공격을 받을 때 함께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같은 해 가을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군비를 정비하는 등 방어사(防禦使)와 협력하여 일하였다.

1604년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광해군 때 제용감정(濟用監正)을 거쳐, 교리로 재직중 대북파의 전횡이 심해지고, 특히 1611년(광해군 3) 정인홍이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를 비난하자 그에 맞서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바뀌자 다시 교리로 등용되었다. 인조 초년 이귀(李貴) 등 반정공신을 비롯한 서인 집권세력이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廢世子)를 죽일 때, 은혜를 베풀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다가 철원부사로 밀려났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였고, 조도사(調度使)에 임명되어 곡식을 모았으나 화약이 맺어지자 수집한 1만여 섬의 군량을 관에 인계하였다.
선조에서 인조대에 이르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국방과 외교를 비롯한 국정에 대하여 많은 시무책(時務策)을 제시하였으며, 정경세와 더불어 류성룡의 학통을 이어받아 당시의 학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남인세력을 결집하고, 그 여론을 주도하는 중요한 소임을 하였다.
저서로는 ?창석집(蒼石集)?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마을이야기

상주 > 시내권 > 외남면
- 동쪽은 남원동(南院洞)과 청리면(靑里面)을 접경하고 있으며, 남쪽은 공성면(功城面), 서쪽과 북쪽은 내서면(內西面)과 접한다. 북부, 서부, 남부는 해발고도 500m 내외의 산지로 이루어지고 하천은 저지인 동부로 흘러서 남천(南川)으로 유입한다.
사과, 복숭아등 과수 재배가 많으며, 특히 감 생산이 많아 2005년 9월 『전국 최초 곶감특구지역』으로 선정되어 양질의 곶감을 생산하고 있다.

시내와 풍산을 잇는 군도가 국도와 연결되고, 동쪽에 위치한 청리면의 청리역을 이용할 수 있어 교통이 편리한 편이다. 2007년 11월 상주-청원간 고속도로 개통으로 남상주 IC가 인접해 있어 교통의 요충지로 각광받고 있다.

옥성서원이 있는 신상리(新上里)는 1,2,3리로 나눈다.
들이 넓게 펼쳐져 있는 평지에 자리한 농촌마을이며, 하천이 남동 방향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합류한다. 수자리, 상산천리, 신하리 등을 병합하면서 신하와 상산천의 이름을 따 신상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구래들, 곰살미, 옥성, 천수박골, 용산재마을 등이 있다. 구래들마을은 들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곰살미마을은 곰이 살았다는 산 아래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고, 옥성마을은 옥성서원이 있었다 하여 불리어지게 된 이름이다.

천수박골마을은 천석꾼이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용산재마을은 흔평리 용산으로 넘어가는 고개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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