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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의 청명원님이 지적하신 연원직지에 따르면...
고구려의 패수는 조선 서북도를 넘어 여진의 땅을 건너 요동에 있는 강이라 했으며...
시대에 따른 왕조의 영토축소에 따라 평양과 패수란 지명도 이동됐음을 그대로 적고 있습니다.
이런 분명한 조선사서들 다 무시하고...
근세에나 중원의 주인이 됀 중국 공산당들이 제시하는 지명사전류들만 역사서의 바이블마냥 내미는 학문적 자세는...
전체는 못 보고 하나만 가지고 모든 진리가 내가 보관중인 책속에만 있단 아집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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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원직지 제1권 출강록(出疆錄) 임진년(1832, 순조 32) 11월 24일
맑음. 책문 안에서 떠나 50리를 가, 건자포(乾者浦)에 이르러 머물러 잤다. 여기서부터 교자(轎子)를 버리고 수레를 탔다. 따로 간차적 예급기(赶車的例給記)가 있다. 해가 뜬 뒤에 길을 떠나 몇 리를 가지 못하였는데, 마두(馬頭)들이 한 곳의 큰 장원(莊院)을 가리켜, ‘이것이 통관(通官) 서종맹(徐宗孟)의 집이다.’ 하였다. 서종맹의 선조는 본래 우리나라 사람으로 사로잡혀 여기에 왔다. 그는 한없는 탐욕의 성질을 가져 우리나라 사람의 고혈을 빨아 거부가 되어 북경에도 큰 가사(家舍)를 두었다. 그 뒤에 일이 발각되어 북경에 있는 집은 몰수당하고, 이 집은 그대로 남아 있다 한다. 담헌(湛軒)의 《연기(燕記)》에,
“선래(先來)가 산해관(山海關)을 나올 때에 으레 예부(禮部)의 공문이 있다. 통관이 원래 먹는 뇌은(賂銀)이 30냥인데, 서종맹이 20냥을 더 요구하기에 응하지 않자, 공문을 때가 지나도록 내놓지 않았다. 예부에서 연회 받는 날 상사(上使)가 임역(任譯)을 시켜 바로 시랑(侍郞)에게 말하자, 시랑이 즉시 허락하였다.” 하였으니, 서종맹의 불법 행위가 대개 이런 유이다. 또 몇 리를 가지 아니하여 안시성(安市城) 옛터를 지나고, 이듬해 돌아올 때의 안시성기(安市城記)가 있다. 다시 8, 9리를 가 옛 책문을 지나노라니 촌락이 단지 10여 집에 불과했다. 또 10여 리를 가 봉황산(鳳凰山)을 지나고, 이듬해에 돌아올 때의 봉황산기(鳳凰山記)가 있다. 다시 4리를 가 봉황성 남문 밖에 이르러 따로 봉황성기가 있다. 부사와 함께 점사(店舍)에서 조금 쉬었다. 또 20리를 가 건자포(乾者浦)에 이르러 머물러 잤다. 건자포의 일명은 여온자개(餘溫者介)이다. 일찍이 노가재의 《연행일기》를 보니, ‘부채 두 자루로 꿩 두 마리를 바꾸어 구우니 그 맛이 매우 좋더라.’ 하고, 또, ‘개송(芥松), 엄채(醃菜), 붉은 무[紅蘿葍]가 모두 먹을 만했다.’ 하였다. 그러므로 엄채와 꿩을 구해 오게 하였으나 구하지 못했고, 나복은 별로 맛이 좋지 못하였다. 밤에 정사와 부사를 가 보았다.
간차적 예급기(赶車的例給記)
태평거(太平車)는 노새 두 마리나 혹은 한 마리로 메우는데, 수레 제도는 기용록(器用錄)에 나타나 있다. 그중 건장하고 잘 달리는 것을 가려 재[嶺]를 넘게 하고, 진 땅을 가려면 혹은 좌우로 한두 마리를 더하여 돕게 한다. 수레를 세낸 사람은 여러 가지 짐짝 200여 근을 수레 안에 간수한다. 남은 자리가 그래도 몸을 용납할 만하니, 짐이 없는 사람은 더러 두 명씩 짝지어 탄다. 간차적(赶車的)은 손에 한 길 넘는 긴 장대를 들었다. 끝에 장대 길이만 한 한 가닥의 가죽을 말아서 몰면 두 마리의 노새가 힘을 합쳐 사람의 뜻대로 따라가 어긋나지 않으니, 그 말 모는 제도의 편리함이 이러하다. 옛날에는 우리가 수레를 세낼 때 단지 세은(貰銀)만 주었는데, 누군가가 맨머리로 추위에 떠는 것을 보고 가엾게 여겨 마침 헤진 초피풍차(貂皮風遮) 만듦새가 위발(圍脖)과 같은데 작다. 를 준 뒤에 그만 예가 되어 지금은 돈 두 꾸러미를 대가로 주니 풍차가(風遮價)라 한다. 또 밥 한 그릇을 준 사람이 있었는데, 뒤에 또한 준례가 되어 지금은 돈 일곱 꾸러미를 주자(廚子)에게 주어 매일 점심 때 반드시 밥을 대접하니, 간차적 가반(赶車的加飯)이라 한다. 또 서초(西草) 1근, 유단(油單) 두꺼운 유지(油紙)로 빗물을 방지하는 것. 1장을 으레 주는 규정이 있는데, 그 근본을 따져 보면 모두 풍차가나 가반(加飯)의 유이다. 이듬해 돌아올 때에는 날씨가 춥지 않았으므로 감히 다시 풍차를 요구하지는 않았으나 가반, 서초(西草), 유단(油單) 등은 전례와 같이 내라고 하여 마치 원래부터 있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는 비장이나 역관 이하의 일이다. 서장관의 수레는 예부터 만부에서 수레를 만드는데, 비용은 해서고(海西庫)에서 나온다. 대개 세 사신의 치송을 3영(營)에서 나누어 맡는다. 관서(關西)에서는 상사(上使)를 맡으니, 순영고(巡營庫)라고 하고, 만부에서는 부사를 맡으니, 운향고(運餉庫)라 하고, 해서에서는 서장관을 맡으니, 해서고라 한다. 역(驛)의 말은 멍에를 메우기에 익숙하지 못하고 또 둔하며 무거움을 혐의하여 금상(今上) 무인년(1818, 순조 18)부터 수레 만드는 규정을 폐지하고, 그 비용을 해당 고(庫)에 책임지우고 역마(驛馬)를 쇄마(刷馬)로 바꾸었다. 쇄마의 값은 만부에서 나와 책문에 들어가 수레 세내는 자금이 되는데, 다른 데 비하여 값이 가장 넉넉하므로 유독 예급(例給)하는 그릇된 준례가 없다 한다. 간차배(赶車輩)는 우리나라 오강(五江)의 말 모는 유와 같아 인사(人事)로써 책임지울 수 없다. 그러므로 누차 다닌 사람은 그 폐단을 익히 알아 처음으로 가는 사람이 그들에게 사정을 봐 주는 것을 보면 반드시 엄격하게 금하니, 이는 그 또 한 가지 폐단이 생길까 염려한 것이다. 오직 나의 간차(赶車)는 성이 유가(劉哥)로서 낭자산(狼子山)에 사는 사람으로 퍽 근실하고 남의 뜻을 알아차려 도중에 더러 수레가 뒤집힐 염려가 있었으나, 나만은 무사했다. 대개 그의 힘을 입음이 많았기에 때로 포육(脯肉), 약과, 연초(煙草) 등의 물품을 주었다.
봉황성기(鳳凰城記)
봉황산 서쪽 5, 6리에 조그마한 성이 있는데, 봉황성이라 한다. 《일통지(一統志)》에,
“성은 본래 예맥 땅인데, 발해(渤海) 때에는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를 삼았고, 요(遼) 나라에서는 개주 진국군(開州鎭國軍)이라 하였으며, 원 나라에서는 동녕로(東寧路)에 소속시켰다.” 고 하였다. 심양에서 동북쪽으로 올라선창(兀刺船廠)까지 수천 리 사이에 봉황성이 그 어구를 얽매고 있다. 성 주위는 7, 8리에 지나지 않는데 사방이 반듯하다. 남문 밖은 좌우에 시사(市肆)가 매우 번성하여, 상호[號扁]와 푯말[標木]을 칠을 하기도 하고 금을 바르기도 하였다. 물품이 그 안에 가득 쌓였는데, 휘황찬란하여 족히 처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놀라게 하였다. 이는 하나의 변문(邊門) 벽지에 불과한데 이와 같으니, 중국의 부유하고 화려함은 이로 미루어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성신(聖申)이 두서너 동행(同行)과 성안에 들어가 두루 돌아보고 와서 말하기를,
“성안의 시사가 성 밖만 못하고, 용봉사(龍鳳寺)가 있는데 곧 조그마한 사찰입니다. 또한 유원관(柔遠館), 일명 조선관(朝鮮館)이란 데가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을 유접(留接)시키는 곳입니다.” 고 했다. 여기 풍속은 비록 황족이나 각로(閣老)일지라도 행차에 사람을 벽제(辟除)하지 않는다. 오직 봉황성 사람들이 우리나라 풍속을 익히 알고 성장(城將)의 행차 때는 반드시 우리나라 사람들을 호령하여 내쫓는다고 한다. 연암의 《열하일기》에,
“어떤 사람의 말이, ‘이것이 곧 안시성(安市城)이다.’ 한다. 고구려 방언에 큰 새를 안시(安市)라 하고, 지금 방언에도 혹 봉황을 안시라 하며, 뱀을 백암(白巖)이라 한다. 수(隋) 나라와 당(唐) 나라 때 국어(國語)에 따라 봉황성을 안시성이라 하고 사성(蛇城)을 백암성(白巖城)이라 한 것이다.” 하였으니, 그 말이 퍽 이치가 있는 듯하다. 또 세상에서 전하기를,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이 당 태종(唐太宗)을 쏘아 눈을 맞히니, 황제가 성 아래에서 병력(兵力)으로 시위하고 비단[絹] 100필을 주어 그의 임금을 위하여 굳게 지키는 것을 상주었다.” 한다. 삼연(三淵)이 그 아우 노가재를 연경(燕京)에 보내면서 지은 시(詩)에,
천추에 대담한 양만춘이 / 千秋大胆楊萬春 용 수염을 쏘아 눈동자를 떨어뜨렸네 / 箭射虬髯落眸子 하였다. 목은(牧隱)의 ‘정관음(貞觀吟)’이란 시에는,
이것이 주머니에 든 물건이라 생각했는데 / 謂是囊中一物耳 어찌 현화가 백우에 떨어질 줄 알았으랴 현화는 눈, 백우는 화살. / 那知玄花落白羽 하였다. 두 분이 읊은 시는 의당 우리나라에 유전되는 옛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당 태종이 온 천하의 병력을 동원하여 탄환보다 작은 성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창황하게 군사를 돌렸다는 것은 그 사적(事跡)이 의아스럽다. 김부식(金富軾)이 단지 사서에 그의 성명이 빠진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대체로 김부식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쓸 때 다만 중국 사서(史書)에서 일부를 초하여 사실을 만들었다. 심지어 유공권(柳公權)의 소설을 인용하여 주필산의 포위를 증명했는데, 《당서(唐書)》나 사마광(司馬光)의 《통감(通鑑)》에 모두 기록되지 않았으니, 중국을 위하여 휘(諱)한 것인지 의아스럽다. 그러나 본토에서 전해지는 옛 소문 같은 것도 믿는 것이든 의심나는 것이든 감히 한마디도 싣지 않았으니, 아마도 빼어 버린 것이리라. 내 생각에는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었다는 것은 비록 상고할 수 없지만, 대체로 이 성을 안시성이라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닐까 한다. 《당서》를 고찰하건대,
“안시성은 평양과의 거리가 500리이고,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王儉城)이라 한다.” 하였으며, 《지지(地誌)》에는 또한 ‘봉황성을 평양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는 어떻게 하여 이름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또 《지지》에,
“옛 안시성(安市城)은 개평현(蓋平縣) 동북쪽 70리에 있다. 개평현으로부터 동쪽으로 수암하(秀岩河)까지 300리와 수암하로부터 동쪽으로 200리까지 봉황성이 된다.” 하였으니, 만일 여기가 옛 평양이라 한다면, 《당서》에 이른바, ‘500리’라는 것과 서로 맞는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선비들은 단지 지금의 평양만 알아 기자(箕子)가 평양에 도읍을 했다,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다, 평양에 기자의 묘가 있다고 말하면 믿으나, 만약 다시 봉황성이 평양이라고 하면 크게 놀라며, 요동에 평양이 있었다고 하면 꾸짖으며 괴이하게 생각한다. 이는 단지 요동이 본래 조선(朝鮮)의 옛 땅으로서, 숙신(肅愼), 예맥(穢貊), 동이(東夷)의 여러 종족이 모두 위만조선(衛滿朝鮮)에 복속한 것을 알지 못하고, 또한 오랄(烏剌 랴오닝 성[遼寧省] 부근), 영고탑(寧古塔), 후춘(後春) 등의 땅이 본래 고구려의 옛 강토인 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 후세 사람들이 땅의 경계를 자세히 알지 못하여 망녕되이 한사군(漢四郡)의 땅을 모두 압록강 안에 국한하여, 사실에 억지로 합하여 구구하게 나누어 배치하였다. 그리고 다시 패수(浿水)를 그 속에서 찾아 더러는 압록강을 패수라하고 더러는 청천강(淸川江)을 패수라고 하고, 더러는 대동강을 패수라고 하니 이것은 조선의 옛 강토가 싸우지 않고도 저절로 축소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은 무엇일까? 평양을 한 곳에다 고정시키고 패수는 앞뒤로 당겼다 물렸다 하여 항상 사적을 붙이는 까닭이다. 나는 일찍이 한사군 땅이 유독 요동만 여진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현도(玄菟)ㆍ낙랑(樂浪)만 있고, 진번(眞番)ㆍ임둔(臨屯)은 나타나 있지 않다. 대개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에는 사군을 합하여 2부(府)를 만들고 원봉(元鳳) 원년에는 또 2부를 고쳐 군을 만든 것이다. 현도는 3현(縣)인데 고구려가 있고, 낙랑은 25현인데 조선(朝鮮)이 있고, 요동은 18현인데, 안시(安市)가 있다. 유독 진번은 장안(長安)과 거리가 7000리요, 임둔은 장안과 거리가 6100리이니, 김윤(金崙)의 이른바 “우리나라의 경계 안은 찾을 수 없으니, 당연히 지금의 영고탑(寧古塔) 등의 지역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옳다. 이로써 논한다면, 진번ㆍ임둔은 한(漢) 나라 말엽에 바로 부여(扶餘)ㆍ읍루(挹婁)ㆍ옥저(沃沮)로 들어가니, 부여는 다섯이고 옥저는 넷이다가 혹은 변하여 물길(勿吉)이 되었고 변하여 말갈(靺鞨)이 되었으며, 변하여 발해가 되었고 변하여 여진이 된 것이다. 발해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가 일본(日本)의 성무왕(聖武王)에게 답한 글을 고찰하건대,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가지고 있다.[復高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한사군은 절반이 요동에 있고 절반이 여진에 있으니, 이 둘을 한데 모으면 본래 우리나라의 면적(面積)을 더욱 징험할 수 있다. 그런데 한(漢) 나라 이래로 중국에서 말하는 ‘패수’라는 것이 그 있는 데가 일정하지 않고, 또 우리나라의 선비들은 반드시 지금의 평양으로 표준을 삼아 혼잡스럽게 패수의 자취를 찾았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중국 사람들이 무릇 요동 왼쪽 물을 다 패수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수(里數)가 맞지 않고 사실도 틀리는 것이 많음은 이 까닭이다. 그러므로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강역(彊域)을 찾으려면 먼저 여진을 국경 안에 합친 다음 패수를 요동에서 찾아야 한다. 패수가 확정된 후에 강역이 밝혀지고, 강역이 밝혀진 후에 고금의 사실이 맞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봉황성이 과연 평양일까? 이는 역시 혹 기씨(箕氏), 위씨(衛氏), 고씨(高氏)가 도읍한 곳이면 하나의 평양이 된다. 《당서(唐書)》 배구전(裵矩傳)에,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孤竹國)인데, 주(周) 나라는 기자(箕子)를 봉하고 한(漢) 나라에서는 4군(郡)으로 나누었다.” 하였는데, 이른바 ‘고죽국의 땅’은 지금의 영평부(永平府)에 있다. 또 광녕현(廣寧縣)에 있는 옛날 기자의 사당에는 우관(冔冠)을 쓴 소상(塑像)이 있었는데, 명 나라 가정(嘉靖) 때 병화(兵火)로 불탔다. 광녕 사람들이 더러 평양이라 했고, 《금사(金史)》나 《문헌통고(文獻通考)》에 모두, “광녕과 함평(咸平)이 모두 기자가 봉한 땅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영평과 광녕의 사이가 하나의 평양인 것이다. 《요사(遼史)》에,
“발해 현덕부(顯德府)가 본래 조선 땅으로서 기자를 봉한 평양성(平壤城)인데, 요 나라가 발해를 치고 동경(東京)이라 고치니, 곧 지금의 요양현(遼陽縣)이 그것이다.”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요양현이 하나의 평양이 되는 것이다. 나는 생각하기를, 기자가 처음엔 영평(永平)과 광녕(廣寧) 사이에 있다가 후에 연(燕) 나라 장수 진개(秦開)에게 쫓기어 땅 2000리를 잃고 점차 동으로 옮겨 가 중국의 진송(晉宋)이 남으로 건너가듯 하여 가는 데마다 모두 평양이라고 일컬었다. 지금 우리나라의 대동강(大同江) 가의 평양도 바로 그 하나이다. 패수도 또한 이런 유이다. 고구려의 강토가 때로 늘었다 줄었다 하면 패수의 이름도 또한 따라서 바뀌어졌으니, 중국 남북조(南北朝) 때 주군(州郡)의 호칭이 서로 이랬다 저랬다 한 것과 같다. 그런데 지금의 평양을 평양이라 하는 사람은 대동강을 가리켜 패수라고 하고, 평안ㆍ함경 두 도계(道界) 사이의 산을 가리켜 이것이 개마대산(蓋馬大山)이라 한다. 요양을 평양이라 하는 사람은 헌우(蓒芋) 난수(灤水)를 가리켜 패수라 하고, 개평현(蓋平縣)의 산을 가리켜 이것이 개마대산(蓋馬大山)이라 한다. 비록 어느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으나, 반드시 지금의 대동강을 패수라고 하는 것은 자진하여 강토를 작게 만드는 의논일 뿐이다. 당(唐) 나라 의봉(儀鳳) 2년에 고구려 왕 장(藏)을 요동주(遼東州) 도독(都督)으로 임명, 조선왕(朝鮮王)으로 봉하여 요동으로 돌려보내고, 이어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겨 통할하게 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당 나라가 요동에 있는 고씨(高氏)의 경토(境土)를 비록 얻었으나 소유하지 못하고 다시 고씨에게 돌려준 것이다. 즉 평양은 본래부터 요동에 있으면서 혹 이름이 붙여져 패수와 더불어 때로 이랬다 저랬다 한 것뿐이다. 한 나라 낙랑군(樂浪郡) 치소(治所)가 요동에 있는 것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바로 요양(遼陽)의 평양이다. 승국(勝國) 왕씨 고려 때에는 요동 및 발해의 온 강토가 다 거란에 들어가니, 즉 겨우 자산(慈山), 철산(鐵山)의 두 재[嶺]를 경계로 지켜 선춘(先春) 압록강을 모두 버리고 다시 돌아보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그 밖에 한 걸음 더 나아간 땅이랴? 비록 안으로 세 나라를 합하더라도 그 강토와 무력(武力)이 고씨의 강대(强大)함에 크게 미치지 못한데, 후세의 고루한 선비들이 평양이란 옛 이름만 연모하고, 한갓 중국의 사서와 전기(傳紀)만 신빙하여, 수 나라와 당 나라의 옛 자취에 재미를 붙여 이것이 패수(浿水)이며 이것이 평양이라 한다. 이미 엉뚱하게 틀림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 성이 안시성(安市城)인지, 봉황성(鳳凰城)인지를 어찌 분별할 수 있겠는가?
[주D-001]유공권(柳公權) : 당 나라의 서예가이며 경술가(經術家)이다. [주D-002]배구전(裵矩傳) : 배구(裵矩)의 자는 홍대(弘大), 시호는 경(敬)이다. 수(隋) 나라에 벼슬하여 서역 여러 나라의 경략(經略)이 되었고 요를 정벌한 공로로 우광록대부(右光祿大夫)가 되었다.
燕轅直指 卷之一 十一月 二十四日
晴。自柵內發行。行五十里。至乾者浦止宿。
自此舍轎而車 別有趕車的例給記 日出後發行。行未幾里。馬頭輩指一所大庄院曰。此徐通官宗孟之家也。宗孟之先。本以東人。被擄而至。宗孟性貪饕無厭。吮我人膏血。以致巨富。北京亦有大家舍。其後事發。京第被籍。此家猶存云。湛軒記曰。先來出山海關時。例有禮部公文。通官原食賂銀。爲三十兩。而徐宗孟加索二十兩。而不應之。公文過時不出。禮部領宴之日。上使使任譯直言于侍郞。侍郞卽許之云。宗孟之不法。蓋此類也。又行未幾里。過安市城故墟。 明春回還時。有安市城記。 又行八九里。過舊柵門。村落只有十餘家。又行十餘里。過鳳凰山。 明春回還時。有鳳凰山記。 又行四里至鳳凰城南門外。 別有鳳凰城記 與副使少憩店舍。又行二十里。至乾者浦止宿。乾者浦。一名餘溫者介。嘗見稼記。以二扇換二雉炙之。味佳。又芥松醃菜紅蘿葍。皆可喫云。故使求之。醃菜與雉未得。而蘿葍。別無佳味。○夜。往見正副使。
趕車的例給記
以太平車。 車制。見器用錄。 駕兩騾或一騾。取其健且善走。而踰嶺涉泥。則或左或右。加一二而助之。雇車者以雜卜二百餘斤。藏於車中。而餘地尙可容身。無卜者。或二人耦乘。趕車的手持丈餘長竿。末係一鞗如竿長以驅之。兩騾齊力隨人意。不敢參差。馭法之善如此。舊時。我▣雇車。只許貰銀。人有見其光頭㤼寒。心憐之。適有貂皮敝風遮。 制如圍脖而小 賜之。後遂爲例。今則代以錢二緡。謂之風遮價。又有饋一盂飯者。後亦援以爲例。今則以錢七緡付廚子。每日中火時。必饋飯。謂之趕車的加飯。又有西草一斤,油單 卽厚油紙。用以防雨水者。 一張應給之規。窺其本則皆風遮加飯之類也。明春回還時。日氣不寒。故不敢復討風遮。而加飯西草油單等物。如例徵索。若固有之。此則裨譯以下之事也。書狀。舊自灣府造車。而費自海西庫出。蓋三使治送。自三營分當。關西主上使。稱以巡營庫。灣府主副使。稱以運餉庫。海西主書狀。稱以海西庫。以驛騎不嫺駕軛。且嫌其鈍重。自當宁戊寅。罷造車之規。而責其費於該庫。換驛騎以刷馬。刷馬之估。出自灣府。以爲入柵雇車之資。視他雇直最優。故獨無例給之謬例云。趕車輩。如我國五江驅馬之類。不可責以人事。故屢行者。習知其弊。見初行者假借厥輩。則必切禁之。或慮其又生一弊也。惟余趕車。劉姓人。居於狼子山。頗勤實解人意。在途或有翻車之患。而余獨免焉。蓋賴其力爲多。時饋脯肉藥果烟草等物以賞之。
鳳凰城記
鳳凰山之西五六里有小城。曰鳳凰城。一統志曰。城本穢地。入渤海爲東京龍原府。遼曰開州鎭國軍。元屬東寧路。自瀋陽東北。至兀刺船廠數千里間。鳳城綰轂其口。城周不過七八里。而四面方正。南門外左右。市肆甚盛。號扁標木。或塗漆或塗金。物華充積其中。輝煌絢爛。足令刱覩者爲之奪目。此不過一邊門僻地。而能如此。中國之富麗。推此可驗。聖申與數三同行。穿城周覽而歸。言城內市肆少遜於外。而有龍鳳寺。卽小刹也。又有柔遠館。一名朝鮮館。留接我人之所云。此俗。雖皇親閣老。行不辟人。而惟鳳城人。習知我俗。城將之行。必呵下我人云。燕記曰。或曰此卽安市城也。高句麗方言。稱大鳥曰安市。今方語。或訓鳳凰曰安市。稱蛇曰白巖。隋唐時沿國語。以鳳凰城爲安市城。以蛇城爲白巖城。其說頗似有理。又世傳安市城主楊萬春。射帝中目。帝耀兵城下。賜絹百匹。以賞其爲主堅守。三淵送其弟老稼齋入燕詩曰。千秋大膽楊萬春。箭射虯髥落眸子。牧隱貞觀吟曰。謂是囊中一物耳。那知玄花落白羽。 玄花。目也。白羽。箭也。 二老所詠。當出於吾東流傳之舊。然唐太宗動天下之兵。不得志於彈丸小城。蒼黃旋師。其跡可疑。金富軾只惜其史失姓名。蓋富軾爲三國史。只就中國史書。鈔謄一部。以作事實。至引柳公權小說。以證駐蹕之被圍。而唐書及司馬通鑑。皆不見錄。則疑其爲中國諱之。然至於本土舊聞。不敢略載一句於傳信傳疑之間。蓋闕如也。余謂唐太宗失目於安市。雖不可考。蓋以此城爲安市。恐非也。按唐書。安市城距平壤五百里。鳳凰城亦稱王儉城。地誌又以鳳凰城稱平壤。未知此何以名焉。又地志。古安市城在蓋平縣東北七十里。自蓋平東至秀岩河三百里。自秀巖河東至二百里爲鳳凰城。若以此爲古平壤。則與唐書所稱五百里相合。然吾東之士。只知今平壤。言箕子都平壤則信。言平壤有井田則信。言平壤有箕子墓則信。若復以鳳凰城爲平壤。則大驚。若曰遼東有平壤。則叱爲怪駭。獨不知遼東本朝鮮故地。肅愼,穢貊,東夷雜種。盡服屬衛滿朝鮮。又不知烏剌,寧古塔,後春等地。本高句麗舊彊。嗟乎。後世不詳地界。則妄把漢四郡地。盡局之於鴨綠江內。牽合事實。區區分排。乃復覓浿水於其中。或指鴨綠江爲浿水。或指淸川江爲浿水。或指大同江爲浿水。是朝鮮舊彊。不戰自蹙矣。此其故何也。定平壤於一處。而浿水前却。常隨事跡。吾嘗以爲漢四郡地。非特遼東。當入於女眞。何以知其然也。漢書地理志。有玄菟,樂浪。而眞番,臨屯無見焉。蓋昭帝始元五年。合四郡爲二府。元鳳元年。又改二府爲二郡。玄菟三縣有高句麗。樂浪二十五縣有朝鮮。遼東十八縣有安市。獨眞番去長安七千里。臨屯去長安六千一百里。金崙所謂我國界內不可得。當在今寧古塔等地者是也。由是論之。眞番,臨屯。漢末卽入於扶餘挹婁沃沮。扶餘五而沃沮四。或變而爲勿吉。變而爲靺鞨。變而爲渤海。變而爲女眞。按渤海武王大武藝答日本聖武王書曰。復高麗之舊居。有扶餘之遺俗。以此推之。漢之四郡。半在遼東。半在女眞。跨距包絡。本我幅員。益可驗矣。然而自漢以來。中國所稱浿水。不定厥居。又吾東之士。必以今平壤立準。而紛然尋浿水之跡。此無他。中國人凡稱遼左之水。率號爲浿水。所以程里不合。事實多舛者。爲此由也。故欲尋古朝鮮高句麗之舊域。先合女眞於境內。次尋浿水於遼東。浿水定。然後疆域明。疆域明。然後古今事實合矣。然則鳳城果爲平壤乎。曰。此亦或箕氏衛氏高氏所都。則爲一平壤也。唐書裵矩傳。言高麗本孤竹國。周以封箕子。漢分四郡。所謂孤竹地。在今永平府。又廣寧縣。舊有箕子廟。戴冔冠塑像。明嘉靖時。燬於兵火。廣寧人或稱平壤。金史及文獻通考。俱言廣寧。咸平皆箕子封地。以此推之。永平廣寧之間。爲一平壤也。遼史。渤海顯德府。本朝鮮地。箕子所封平壤城。遼破渤海。改爲東京。卽今之遼陽縣。是也。以此推之。遼陽縣爲一平壤也。愚以爲箕子初居永,廣之間。後爲燕將秦開所逐。失地二千里。漸東益徙。如中國晉宋之南渡。所止皆稱平壤。今我大同江上平壤。卽其一也。浿水亦此類。高句麗封域。時有嬴縮。則浿水之名。亦隨而遷徙。如中國南北朝時州郡之號。互相僑置然。而以今平壤爲平壤者。指大同江曰。此浿水也。指平安咸鏡兩界間山曰。此蓋馬大山也。以遼陽爲平壤者。指蓒芋灤水曰。此浿水也。指蓋平縣山曰。此蓋馬大山也。雖未詳熟是。然必以今大同江爲浿水者。自小之論耳。唐儀鳳二年。以高句麗王臧爲遼東州都督。封朝鮮王。遣歸遼東。仍移安東都護府於新城以統之。由是觀之。高氏境土之在遼東者。唐雖得之。不能有。而復歸之高氏。則平壤本在遼東。或爲寄名。與浿水。時有前却耳。漢樂浪郡治在遼東者。非今平壤。乃遼陽之平壤。及勝國 王氏高麗遼東及渤海一境。盡入契丹。則僅劃慈,鐵兩嶺而守之。幷棄先春,鴨綠。而不復顧焉。而況以外一步地乎。雖內幷三國。其境土武力。遠不及高氏之强大。後世拘泥之士。戀慕平壤之舊號。徒憑中國之史傳。津津隋唐之舊跡曰。此浿水也。此平壤也。已不勝其逕庭。此城之爲安市爲鳳凰。惡足辨哉云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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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 후세 사람들이 땅의 경계를 자세히 알지 못하여 망녕되이 한사군(漢四郡)의 땅을 모두 압록강 안에 국한하여, 사실에 억지로 합하여 구구하게 나누어 배치하였다. 그리고 다시 패수(浿水)를 그 속에서 찾아 더러는 압록강을 패수라하고 더러는 청천강(淸川江)을 패수라고 하고, 더러는 대동강을 패수라고 하니 이것은 조선의 옛 강토가 싸우지 않고도 저절로 축소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은 무엇일까? 평양을 한 곳에다 고정시키고 패수는 앞뒤로 당겼다 물렸다 하여 항상 사적을 붙이는 까닭이다. 나는 일찍이 한사군 땅이 유독 요동만 여진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한사군은 절반이 요동에 있고 절반이 여진에 있으니, 이 둘을 한데 모으면 본래 우리나라의 면적(面積)을 더욱 징험할 수 있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강역(彊域)을 찾으려면 먼저 여진을 국경 안에 합친 다음 패수를 요동에서 찾아야 한다.
위의 홍진영 선생님이 올린 문헌을 보면 한사군이 3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륙조선을 주장하는 문헌이 아니라 반도문헌입니다. 이 것은 기존의 반도사관 식민사관에서 주장하는 논리입니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강역(彊域)을 찾으려면 먼저 여진을 국경 안에 합친 다음 패수를 요동에서 찾아야 한다."
=>저자는 대동강이나 압록강에서 패수를 찾지 말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반도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있습니다. 홍진영 선생님이 올린 연원직지 사료는 명백히 기존의 식민사관 반도사관을 주장하는 글인것입니다.
홍진영 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군요 왜 대륙사관을 위하는 척 하면서 반도사관이라니..
한사군은 한나라에 4군을 두었다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한나라에 장수들이 참형을 당하고 그리 이해가 되는데 조선에 4군을 두었다면 조선 4군이라고 해야 하는것은 아닌지 이상하리 혼돈이 자꾸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