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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만은 하지 말자고 다짐했었지
나는 모든 것에서 늦깎이다. 그런데 무엇을 늦깎이라고 말하란 말인가.
스물여덟 살에 첫 데이트를 해 보았으며, 서른세 살에 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서른네 살에 결혼하였다. 서른다섯 살에 첫째를 가졌다. 마흔일곱 살에 내 집을 갖게 되었다. 쉰네 살이면 또래들의 아들은 제대를 하였을 나이인데 첫째가 대학생이 되었다.
아무튼 글은 쓰기 위해서 교육학, 인간학 이런 책을 뒤적이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늦깎이란 자아형성의 단계를 따질 수 없는 것인가 보다. 나는 누구인가, Who am I.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자기소개서이다.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는 것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자기소개서를 쓰라니, 하여간 나는 누구인가. 책을 뒤적인다. 인간의 삶에는 발달 단계가 있단다. 아 그래, 공자도 자아의 발달 단계론을 펼치었다. 공자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단다. 서른에는 입지(立志)요, 마흔에는 불혹(不惑)이라고 하였다. 쉰에는 지천명(知天命)이요, 예순에는 싫은 말도 좋은 말도 없어졌으니 이순(耳順)이 되었단다.
그러나 나는 나이 쉰에 천명을 몰랐다. 지난 대선 때는 식당에 들어가서 경상도 쭛쭛들아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건 실제이다. 작가 이인휘, 정연정 선생을 증인으로 세울 수 있다. 그렇게 늦깎이의 호기를 부리고 밤늦게 술 마시고 자곤 하다가 지난해 7월 쓰러지고 말았다. 나뭇잎이 가을이면 시든다. 천명을 알아 죽음의 대비를 하라는 하늘의 명이었으리라.
자, 나의 늦깎이들 중에서도 서른세 살에 대학에 들어간 이야기만 해 보자.
나는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84학번이다. 그해 최고령 입학자였다. 어떻게 아느냐고? 1984년도의 서울대 최고령 입학자가 신문에 났었는데 나와 동갑이었으니까. 그가 나보다 생일이 빨랐든지 나에게는 탐문이 없었다. 그 신문을 보면서 감동보다는 너도 네 운명을 참 역겨워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앞섰다.
서울대학교는 수석 입학보다 최고령 입학이 더 어려울 게다. 서른을 넘긴 나이에 스무 살짜리와 경쟁하여 이긴다는 것은 생물학적 두뇌로는 불가능하다. 나는 기사의 제목만 보고도 그의 한계와 눈물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내 이야기를 한다. 늦깎이들에게 가능하지 않는 불가능이 없음을 말하고자 한다.
나에게도 늦깎이가 아닌 삶의 측면이 있다. 이른바 조실부모이다. 우리식으로 열두 살, 초등학교 6학년 때 부모를 잃었다. 7남매, 5남2녀의 여섯째였다. 개상도의 비교적 넉넉한 사과밭집 아들이었던 나는 열일곱 살이나 차이가 나는 큰형과 형수의 눈칫밥을 먹게 되었다. 부모의 죽음과 함께 형수는 돌변하였다. 아래 남동생과 바로 위의 누이, 삼남매는 아직 어렸으며 쫓겨났다.
나중에 알게 된 기가 막힌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형수의 삼촌은 카톨릭 신부였고 남매들은 주로 고등학교 교사였다. 형수의 남동생이었던 이쭛쭛 교사는 10여 년 전 전교조 전국 회장의 이름으로 신문에 나곤 했었다. 그들이 어린 삼남매를 고아원에 보내라고 형수에게 부추겼다고 한다. 여기서 길게 쓰면 형과 형수의 추문을 들추는 것이 되므로 이쯤에서 그치자. 독자들이 내가 처한 상황을 짐작하라는 참고이다. 하여간 공부할 처지가 못 되었다.
스무 살 겨울, 부산으로 갔다. 부산의 남포동, 서면 로타리, 중앙동 사거리에서 1960년대부터 4층 빌딩 하나씩 가진 외삼촌들이 셋이나 살았다. 막내 외숙모의 남동생이 시골 땅에서 양계를 하면서 밤나무 농장을 한다고 하였다. 그곳으로 갔다. 경상남도 좌천이었다. 나는 500수의 닭을 키우고 밤나무 묘목 심는 일을 돌보았다. 내 꼴은 어린 시절 우리 집의 접 머슴과 다를 바 없었다. 석 달을 일하였다.
외숙모의 남동생은 미혼이었다. 그에게 짐이 되는 것 같아서 가겠다고 하였다. 그는 석 달 임금으로 500원을 주었다. 하기야 총각이었던 그와 내가 시골 농가에서 하숙 밥을 먹지 않았는가. 당시 하숙비 약 4,000원을 계산하면 3개월 임금으로 1만 2,500원을 받은 셈이다. 그렇다고 500원을 준단 말인가. 육체노동은 고단하였다. 재래식 화장실에서 대변을 보려고 해도 쪼그리고 앉을 수 없었다. 이 농장에 계란을 사러 오던 달걀 장수 아줌마가 나를 보더니 자기를 따라가자고 하였다. 500원짜리 동전을 마당에 내던지고 따라나섰다. 달걀 장수 아줌마 내외는 동백섬 근처 단칸방에 살았다. 나는 그 내외의 다락에 잠을 자면서 동백섬에 나가서 콜라, 껌 등을 팔았다.
스물한 살에 대구 브로크 공장에서 벽돌을 찍었다. 그때 남자 임금이 1,400원, 나는 500원 받았다. 공장의 숙직실에서 자고 주로 라면을 사 먹었다. 비 오는 날에 독서실에 가서 책을 보곤 하였다. 내 몸에서는 기름 냄새가 났다. 여학생들이 코를 막고 자리를 옮기곤 하였다. 스물세 살에 군에 갔고 스물여섯 살에 제대하였다. 제대 후에는 부산 초량 동사무소에서 9급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월급이 4만 2,000원, 2인이 한 방을 사용하는 하숙비 2만 8,000원을 제외하면 1만 4,000원 남았다. 그 돈으로 책을 사보고 저축을 하려고 애썼다. 그때 처음으로 데이트를 하였다.
어느 날 형사의 방문을 받았다. 같은 방에서 사용하던 자는 세무공무원이었다. 그가 자신이 방에 둔 돈이 없어졌다고 나를 고발한 것이다. 200만 원 정도를 두었는데 없어졌다는 거였다. 왜 내가 훔쳤다고 혐의를 두었는가. 월급 4만 2,000원에 하숙비 제하고 1만 4,000원인데 데이트를 하는 걸 보니 자기의 돈을 훔쳐서 여자랑 놀아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때 나는 그에게 어떤 여성이 나에게 양복을 한 벌 사주었다고 자랑을 하였다. 그는 나를 우습게보았다. 나 같은 자에게 누가 양복까지 사주면서 사귀겠는가. 형사는 그녀의 이름을 대라고 하였다. 쪽팔리었지만 이름을 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화로 그녀를 불러내어서 옷을 사주었는지 확인하고 나를 풀어 주었다.
그가 세무공무원이더라도 나와 같은 9급 공무원에 불과하다. 월급은 같다. 그런데 어떻게 발령받은 지 6개월에 200만 원을 하숙방에 둘 수 있단 말인가. 나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는 거금이었다. 세무공무원은 저금을 하면 추적당하므로 하숙방에 그냥 두어야 한다는 말을 넌지시 일러 준 적이 있었다. 자식, 그런 말로 나를 유혹한다고 그 더러운 돈에 내 손이라도 닿겠어.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대책 없이 자신이 돈을 펑펑 쓰고는 많이 축이 난 후에 내가 훔쳐 갔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얼마 후에 같은 그녀와도 헤어졌다. 그녀는 엄청 부잣집 딸이었다. 헤어질 때 내게 쏘아붙이던 말을 지금도 기억한다. 명호 씨는 왜 나에게 자장면 외에 사 주지 않느냐. 거참, 1년을 사귀면서 200원짜리 자장면 외엔 사 준 적이 없었다. 하여간 자장면 데이트는 끝이 났고 나도 희망 없는 9급 공무원에서 사표를 내고 말았다.
스물아홉 살, 춘천 양구, 속초 등지의 군부대 막사를 짓는 막노동꾼이 되었다. 남자 하루 임금이 7,000원, 나는 3,500원 받았다. 체수가 적으니 여자 임금이었다. 무거운 철골에 페인트칠을 하는 등 4~50대 아줌마들과 같이 일하였다. 그러다 일거리가 떨어지자 대구에 있는 누님 집에서 잔심부름을 하였다. 누님은 내가 게를 좋아한다고 꽃게국을 끓여 주곤 하였다. 자형은 그 국을 내던지고는 빨래방망이로 누님의 촛대뼈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심지어 자형은 소파 수술을 하고 와서 아직도 피가 흐르는 누님의 배를 걷어찼다. 나는 떠났다.
결혼 후에 놀고 있는 자형을 보다 못하여 누님은 돈을 벌자고 직접 부딪쳤다. 사진관을 경영하였다. 사진관이 잘 되어 서른 살에 아파트를 사기까지 하였던 누님은 자형의 구타를 이기지 못하여 이혼을 하였다. 누님은 지금도 혼자 산다. 아들도 아파트도 빼앗기었으나 아들 둘만은 엄마라고 간간히 찾아온다.
나보다 세 살 아래인 동생은 연탄 배달, 우유 배달, 가정교사 등을 하면서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제 나이로 입학하였다. 누님이 매 맞던 시절, 그 동생과 내가 자형에게 아무리 하소연 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누구인가, 아니 우리는 누구인가. 부모가 없다. 부모가 없다는 것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음은 동격인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삼남매는 절망하였다. 그러나 자살만은 하지 말자고 다짐하곤 하였다.
누님은 대구의 모 양말 공장, 편물, 홀치기 등을 하면서 동생의 엄마 역할을 능력만큼은 하였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명문 K여중에 합격하였으나 결국 다니지 못하였다. 동생과 나는 역경을 극복하였다. 누님은 왜 극복하지 못하였을까. 여성은 환경의 변화에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가. 아니다 두들겨 패는 데에는 극복이 없다. 조실부모는 모든 것을 앗아가고 만다. 지난해 겨울 누님은 둘째 아들과 약혼자를 데리고 나를 찾아왔었다. 그때 나는 카드 빚에까지 시달리고 있었다. 어여쁜 약혼자에게 용돈 한 푼 쥐어주지 못하였다.
스물아홉 살, 떠돎에 지친 나는 다시 9급 공무원이 되었다. 안동 원호지청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10만 원 봉급에 5만 원 하숙비를 지불하였다. 낙동강에 가서 술을 마시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곤 하였다. 겨울인데도 안동 보조 댐에 풍덩 뛰어들어 수영을 하기도 하였다. 내 영혼과 육신을 학대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책을 보았다. KBS 교육 방송의 불어강좌를 녹음하였다. 새벽 5시에서 20분씩 하는 라디오 프로였다. 술에 취하여서도 방송 시간에는 어김없이 일어났다. 약 6개월이었든가. 단 하루도 빠짐없이 녹음한 것을 지금도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
다행히 『어린 왕자(Le Petit Prance)』를 불어로 읽었다. <르몽드(Le Monde)>지도 어느 정도 읽는 수준에 이르렀다. 왜 불어를 공부하였느냐고. 카톨릭 신학 대학을 4년이나 다닌 형이 나에게 일러 준 말 때문이었다. 세계에서 제일 좋은 대학은 소르본느 대학이라고 하였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소르본느 대학에 가겠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나도 프랑스로 유학을 갔을는지도 모른다.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내가 썼을는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 나는 불어를 모른다.
10만 원 월급에 5만 원 하숙비를 낸 서른한 살의 남자에게 희망이 있겠는가. 나는 이런 직장에 계속 다니면 희망이 없다고 보았다. 부산에서 월급 4만 2,000원을 받을 때 서울 법대 다니던 동생의 아르바이트 값이 7만 원이라고 하였다. 나는 하루 8시간씩, 한 달 25일을 다녀서 받는 4만 2,000원이지만 동생은 일주일에 3시간씩 세 번 나가고 받는 돈이라고 하였다.
에라이 모르겠다. 사표를 내자. 나도 서울대학교에 가 보자. 주변에서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하였다. 그런 것은 모른다. 나는 언제나 됫박 쌀 인생이었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거나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 살아야 했다. 이러다 평생을 그렇게 살게 된다. 퇴직금 70만 원이면 6개월은 버틸 수 있다. 1982년 여름 7월에 사표를 내었다. 신촌의 독서실에서 기거하면서 주소를 옮겼다. 돈이 없어지면 다시 9급 공무원이 되자고 서울시 지방공무원 공채 시험을 쳐 두자. 나는 어디서나 9급 공무원인가. 탄광 노동자를 막장인생이라고 한다. 정직한 9급 공무원도 마찬가지이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낮에 일하지 않고 공부해 보았다. 체력장 시험까지 치렀다. 20점 만점에 16점, 서른세 살 남자의 육체지수이자 지능지수였다. 340점 만점에 체력장 합쳐서 290점을 받았다. 수학 50점에서 거의 10점을 받았다. 그러나 불과 5개월도 채 되지 않는 시간에 거둔 점수였다. 서울대 사범대 불어교육과에 원서를 내었다. 그때는 학력고사 점수만으로 당락이 결정되었다. 면접을 보던 교수가 물었다. 왜 불어과에 지원하였는가. 저는 어린 왕자를 불어로 읽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약 1~2점 차이로 떨어진다고 말해주면서 너무 안타깝다고 말하였다. 이 나이에 이렇게 학문적 열정이 있는 학생을 만날 수 없는데… 그는 말을 잇지 못하였다. 시험 제도가 한스럽다고 말하였다.
곧 이어 서울시 지방 공무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마포구청이었다. 시험 성적이 마포구청에 발령 받은 20여 명 중에서 1등 성적이었단다. 총무과 직원이 말해 주었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책보는 것. 한문책이나 불어책을 보다가 수학책을 본다는 사실만 달랐을 뿐이다. 수학에서 50점 만점에 10점 정도였으니 수학만 만점을 얻으면 학력고사 수석이라도 할 수 있지 않는가. 불합격자의 특징은 기고만장과 과장된 오기로 자위하지 않던가.
처음 두 달간은 이화여대 앞에서 하숙을 하였다. 동숙하는 이가 프로 권투 웰터급 선수였다. 3전 1승 2패, 나보다는 나은 전적이었다. 말을 할 때마다 잔뜩 인상을 쓰고 말하였다. 체육관에서 얻어터져서 입술 안이 헐어서 말하기조차 힘들다고 하였다. 그 입술을 열면서도 나를 형이라고 부르기 좋아하였다. 그는 이화여대 앞에서 짐수레로 팝콘 장사를 한다고 하였다. 섬약한 나는 그의 한방이 무서웠다. 잠잘 방을 구하였다. 보증금 10만 원에 월세 5만 원, 그리고 2만 원으로 밥을 사먹는 생활이었다. 전보다 더 나빠진 셈이었다. 방은 서대문에서 가장 높은 산꼭대기 집이었다. 바로 봉은사 뒷산이었다. 책상 살 돈이 없어서 접이용 베니어 바둑판을 문방구에서 샀다. 베개 위에 바둑판을 올려두고 문제를 풀었다.
공부 방법은 수학 교과서를 풀다가 모르면 자습서를 보고 외우는 식이었다. 나는 책 중에서 수학 교과서가 가장 쉽게 가장 잘 편집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수학 외의 과목은 책만으로 만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수학은 만 점이 가능하다. 각 단원마다 설명을 읽으면서 그래프나 삼각도형의 그림을 몇 번이고 똑같이 그리면 예제를 풀 수 있다. 예제를 풀면 기본문제를 풀 수 있고, 기본문제를 물면 연습문제를 풀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각 단락 끝의 종합문제는 어려워서 풀 수 없기도 한다. 이때는 그 문제부터 풀이 과정까지 깡그리 외우면 된다.
마포구청 주택과에서 6개월 시보기간을 보냈다. 그 후에는 난지도 쓰레기장이 있는 상암동 동사무소에서 근무하였다. 그 당시 건축물 설계도형이 그려져 있던 A3 크기의 청사진 폐지를 얻었다. 그 큰 종이에 수학 문제를 풀기 시작하여 한 장 한 장 쌓아 두었다. 가슴 크기까지 쌓였을 때가 7월 말이었을 게다. 수학 교과서를 3번 풀었다. 10년간 학력고사 문제를 모은 책을 샀다. 모두 풀고 난 후에 평균이 90점이었다. 만세를 불렀다. 암기 과목 공부에 들어갔다. 낮에는 근무하고 밤에만 공부하는 4개월로는 벅찼다. 그러나 넉넉한 성적으로 서울대 국문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불문학은 포기하였다. 돈이 없는데 어떻게 빠리로 간단 말인가.
나는 과외나 학원에 다닌 적이 없다. 세상에 가장 정직한 것이 바로 시험이다. 그 어떤 깡촌에서도 공부하겠다는 집념과 의지만 있다면 강남의 좋은 여건이 당해내지 못한다고 본다. 이순신 장군은 12척의 배로 200여 척을 부수었다. 이순신 장군의 전략과 불퇴전의 용기는 흉내 내기 어렵다. 그러나 시험공부만은 이보다 더 쉽지 않을까.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입술을 깨물면서 공부하는 근면성과 집념을 그 무엇이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사족이지만 마포구청에서 철거반장의 임무를 행하였다. 철거반원들이 삥땅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주는 돈을 받지 않았던 나는 생명의 위협에 가까운 협박을 받았다. 그들의 챙기는 뇌물은 이주일에 그 당시로서 꽤 좋은 주택 한 채를 살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마다하고 수학 문제만 풀었다. 대학에 합격하였을 때 상암동장이 등록금을 보태어 주었다. 또 잠잘 데가 없어진 나는 대학 1학년 때 독서실 등으로 잠자리를 일곱 번이나 옮기었다. 만약 뇌물을 챙기었다면 나는 훨씬 풍족하게 살고 프랑스 유학도 갔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직하게 살지 않으면 정직한 땀이 요구되는 세계에서는 땀의 신령이 반드시 그를 배반할 것이다. 나는 그 어떤 신을 믿지 않으나 땀의 신만은 믿는다.
어려운 여건에 있는 늦깎이들에게 묻는다. 나는 낮에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콩나물 장수 어머니의 아들이 고시나 일류대에 합격했다는 신문 기사를 정말 부러워하였다. 내가 부러워한 이유는 엄마가 없어서였다. 나를 위하여 밥 세끼를 지어서 기다릴 엄마가 없었다.
나보다도 여건이 더 나쁜가. 더구나 나는 머리조차 나쁘다. 좋다고 한들 서른세 살의 나이에 스무 살짜리를 이길 수 있겠는가. 마음을 바쳐 노력하라. 정직과 땀이 가장 좋은 여건이기 때문이다.
늦깎이로서 무언가 하고 싶은 젊은이들에게 나의 당부가 도움이 된다면 주제넘게 한마디 남긴다.
무언가 이루고 싶은가. 자살하지 말라.
송명호 / 서당 훈장으로 일하고 있다. 서른셋 되던 해 1984년 서울대 국문학과 입학했다.
1990년부터 지금까지 300여명의 유생들에게 『사서오경』을 강의해 왔다.
번역서로 『예기집설대전』이 있다.
첫댓글 사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