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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제 116편
=====116:1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 이 문구의 무자적 번역은 '여호와께
서 목소리 나의 호소를 들으시기 때문에'인데, 여기서 '목소리 나의 호소'는 히브리어
원문상 '이트 콜리 타하누나'(* )로서 다소 해석하기 난해한
부분이다. 전통적으로는 '콜리'(* )를 '나의 음성'으로 해석하는데 이는 끝 어
미 '이'(* )를 1인칭 소유격인 '나의'(my)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를 여격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으나 그다지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 또
한 '타하누나' 역시 이와 같은 어미를 가지고 있는데, 원문상 '콜리'와 '타하누나'에
는 접속사 '와우'(* )가 없으므로 이를 개역 성경의 번역대로 해석하는 것은 다소 무
리가 있는 듯하다. 따라서 '콜리'의 어미는 목적 소유격(the objective genitive)으로
보는 것이 원문의 의미를 좀더 살려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어구는 '여호와
께서 자비를 요청하는 나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러나 이를 좀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타하누나'라는 말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단어는 '호의를 보이다', '은혜롭다'란 뜻을 가진 히
브리어 '하난'(*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일차적으로 '호의 또는 은혜를 요청하는
간구'란 뜻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다니엘은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구속을 간구하는 기
도에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단 9:18). 여기서도 알 수 있다시피 시인의 간구는 단
순히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일방적인 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근거
한 간구인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도 무조건 자신의 요구 사항만 하나님께 나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호소하면서 자신의 요구 사항을 하나님께 제시해야 할
것이다.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 하나님을 경배하는 가장 근본적인 자세는 하나님을 사랑
하는 마음임을 보여준다. 또한 본문은 하나님 외에 그 어떠한 존재로부터도 기쁨을 누
리거나 안식을 얻을 수 없음을 천명한 것이다. 한편, 본문의 히브리어는 '아하브티'
(* )인데 어떤 이는 이 말의 어미를 3인칭 단수 목적 소유격 어미로 해석하
여 '그의 사랑'(his love)으로 이해한다. 이럴 경우 본절 전체는 '여호와께서 그의 사
랑 안에서 나의 간구를 들으셨다'는 뜻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이런 주장의 근거로는
사 63:9의 내용이 제시되는데 이곳의 '베아하바토...후 게알람'(* ...
)은 '그 사랑으로...구속하셨다'라고 번역되고 있다. 그리고 다음가 같은
성경 구절에도 이와 유사한 어구가 등장한다.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렘 31:3). 그러나 이런 해석이 가능하긴
하나 여기에는 맛소라 사본의 모음에 대한 변경을 요청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맛소라
사본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는 입장에서 굳이 이렇게까지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116:2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 본절 서두에는 이유나 시간 등의 뜻을 나타내는 히
브리어 접속사 '키'(* )가 쓰이고 있는데 영어로는 'that', 'for', 'when' 등으로
번역된다. 본절외에 1절에서도 이 접속사는 시인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를 설명하
는 의미로 쓰였는데 둘다 강조적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어떤 주석가들
은 이를 '진실로'라고 번역하는데 타당성 있는 주장인 것 같다(M. Dahood). 참조로 칼
빈(Calvin)은 이를 시간의 접속사(when)로 보아 '...할 때'라고 이해하기도 했다. 하
나님은 구할 바를 당신에게 아뢸 것을 명령하셨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
를 건지리라'(50:15)고 약속하셨다.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우베야마 에크라'(*
)로서 문자적 의미는 '그리고 나의 날들 동안에 내가 부르리라'이다. 여기
서 '에크라'는 '부르다', '선언하다'란 뜻의 히브리어 '카라'(* )의 미래형인데
'카라'는 '소리쳐 부르짖다', '큰소리로 읽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요셉이 애굽에 팔
려갔을 때 보디발의 처는 요셉을 모합하면서 자신이 소리쳐 보르는 것에 놀라 요셉이
자신을 겁탈하려다가 도망하였다고 말할 때 이 말을 사용하였으며(창 39:14), 예레미
야는 유다의 심판을 경고하는 중에 이 말을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렘 3:4). 한편, 칼빈은 여기에 '카라'의 미래형이 쓰인 것을 두고 1절의 '들으시므
로'라는 동사와 연결시켜 이 둘이 시간의 전후 관계를 나타낸다고 보았다. 즉, 1절의
동사는 과거 시제로 해석하고 본절은 그에 대한 결과로서 미래 시제로 해석하여야 한
다는 것이다. 비록 이 두 동사 모두가 미래 시제로 기록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관용적
표현으로서 흔히 이렇게 표현된다는 것이다.
=====116:3
사망의 줄이 - 히브리어 원문은 '헤블레 마웨트'(* - )인데 여기서
'줄'로 번역된 '헤블레'는 '줄'뿐만 아니라 '집단', '무리'란 뜻도 가지고 있다. 사물
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붓고 난 후 그가 선지자의 무리를 만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삼상 10:5). 그러나 이보다는 속박이나 구속의 상징으로 쓰이는 것
이 더 보편적인 용례이다(사 5:18). 그리고 이 단어의 어근인 '하발'(* )은 '묶
다'란 뜻의 동사인데 피엘(Piel)형은 '고통을 주다'란 뜻을 가진다. 여기에 근거해서
이 단어를 살펴보면 욥 39:3에서의 번역과 같이 '고통', '괴로움'의 뜻을 지니는 것으
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거기서는 하나님이 욥의 무지를 지적하면서 사슴의 산고(産
苦)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데 '헤벧르'가 바로 그런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이를 종합해
보면 이 '사망의 줄'이란 제물을 묶어 죽이는 것처럼 죽음의 고통에 속박되어 있는 상
태를 뜻하는 것이다.
나를 두르고 - 이 말의 원어는 '아파푸니'(* )로서 고통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시인을 괴롭히는 사망의 줄이 시시 각각 그를 죄어오면
서 그가 극도의 위기에 처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음부의 고통이 - 이는 '사망의 줄'과 대구를 이루는 말로서 원문은 '우메차레 쉐
올'(* )이다. 어떤 학자는 '고통'에 해당하는 '메차레'를 '사자'
(messenger)와 관련있는 말로 보고 사망이 사자를 보내 그의 계획을 실현하고자 하는
내용으로 해석한다. 그 근거로서 그는 잠 16:14을 들고 있다:"왕의 진노는 살륙의 사
자와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쉬게 하리라." 또한 어떤 학자는 이 '메차레'를
'그물'로 보고 구약에서는 그물이 사망의 고통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
(Fry). 이 어구는 또한 사냥꾼이 사냥감을 쫓아 좁은 길로 몰아넣어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비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유다의 멸망을 슬퍼하는 중에 예레미야는
비유로 이렇게 노래하였다:"그 모든 핍박하는 자가 저를 쫓아 협착한 곳에 미쳤도다"
(애 1:3). 이렇게 볼 때 시인은 사망이라는 사냥꾼에게 쫓겨 이제 더 이상 사망으로부
터 달아날 수 없는 막다른 길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게 미치므로 - 이 문구의 히브리어는 '므차우니'(* )로서 '마를 찾아
만났다'는 뜻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욥의 한탄에는 무덤을 찾아 얻으면 기뻐할 것이
라는 내용이 있는데(욥 3:22), 이 역시 같은 의미이다.
=====116:4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 이는 기도뿐만 아니라 찬양의 노래에도 흔히
등장하는 공식적 문구이다. 3절에 언급된 바와 같이 극심한 환난에 직면한 시인은 유
일한 돌파구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고자 했다. 오직 여호와의 도우심을 바라봄으
로써 문제 해결의 전환점을 마련하고자 하는 시인의 믿음과 열망을 본 시편에서 거듭
반복되는 내용이다(2, 13, 17절등).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 '구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 )는 '애곡
하다', '슬퍼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사 19:8에는 애굽의 심판 장면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으며 거기서 '아나'는 '탄식하다'란 말로 번역되고 있다. "어부들은 탄식
하며 무릇 나일강에 낚시를 던지는 자는 슬퍼하며 물에 그물을 치는 자는 피곤할 것이
며."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 '영혼'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네페쉬'(* )는
'살아있는 실체', '생명', '자아', '인격', '소망', '감정'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욥 14:22에는 '네페쉬'가 인간의 내적인 존재란 의미로 쓰이면서 '마
음'으로 번역되었다. 또한 레 11:46에는 이것이 '생물'이란 말로 번역되었다. 종합적
으로 고려해 보면 시인은 여기서 자신의 생명을 구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한
편, 우리는 이를 영적인 측면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
=====116: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 '은혜로우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눈'
(* )은 성경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킬 때를 제외하고는 쓰이지 않는 말이
다. 이는 '긴급한 상황에 처한 채무자의 부르짖음을 듣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말로서,
신자들의 고통의 부르짖음에 귀기울이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가리킬 때 쓰인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성품을 천명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로라 여호
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
34:6). 그리고 '의로우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디크'(* )는 '정당한',
'바른'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정당한 행동이나 올바른 처신을 가리킬 때 주
로 쓰이는데 창 38:26에는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잉태한 것을 두고 유다가 그녀의 항
변을 듣고 그것을 '옳다'고 인정하는 의미로 이 말을 사용했다. 또한 하나님의 의로우
심은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세의 마지막
노래 중에는 하나님의 이 같은 정당하고 올바른 통치가 언급되고 있다(신 32:4). 따라
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은 평화와 안식의 나라이며 불만과 불평이 존재할 수 없는 곳
이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 역시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세상의 불의와 정직하지 못
한 것을 타파하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시켜야 할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 '자비하시도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훔'(*
)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동정심을 가리킬 때 주로 쓰이는 말이다(merciful,
KJV;full of compassion, NIV).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레헴'(* )이란 명사는
'어머니의 자궁'을 뜻하며, '라함'(* )이란 동사는 '사랑하다', '동정심을 갖다'
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점을 감안하면 이 '라훔'이란 말은 어머니가 자기 자식의 희
노 애락에 함께 공감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인생에 대해 세심한 애정을 베푸시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겠다. 오엘 선지자는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
할 것을 촉구하며 이 표현을 사용하였다(욜 2:13). 한편, 우리는 여기서 누구를 기도
대상으로 섬기고 따라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자녀가 자기 부모를 두고 다른 사람
에게 부르짖지 아니하는 것과 같이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제쳐 두고 다른 어떤
것에 기도드린다는 것은 참람(僭濫)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도의 대상은 은혜로우사
기도에 귀기울여 주는 분이 되어야 하며 의로우시고 공평하신 분이 되어야 하고 또 자
비로우사 우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분이어야 한다. 이런 자격과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제외하고 누가 있겠는가 ?
=====116:6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 '어리석은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페티'(* )는 '마음이 열려 있는 자', '단순한 자', '무슨 말이든 믿는 자' 등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서는 경험이 부족하며 무력한 자라는 뜻을 암시한다
(Anderson). 따라서 교훈을 따르지 않는 완고한 어리석은 자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
리고 '보존하다'에 해당하는 '솨마르'(* )는 '지키다', '지켜 보다', '보존하다'
의 뜻을 가지고 있다. 창 37:11에는 이것이 '마음에 간직하다'는 뜻으로 쓰였다. 여기
서 시인은 자신을 어리석고 어린 자라고 묘사하면서 자신의 힘으로는 악한 자들의 계
략을 막을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만이 자신을 지켜 주실 것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능
력과 은혜는 자아를 포기하고 자신의 능력을 믿지 않을 때 발휘된다는 사실을 깨달아
야 하겠다.
내가 낮게 될 때에 - '낮게 되다'의 히브리어 '달랄'(* )에는 이외에 '연약하
다', '비틀거리다', '실패하다', '매달리다'란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욥은 광산의 갱
내에서 광부들이 매달려 흔들거리는 모습을 이 단어를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다(욥
28:4). 따라서 이는 불안정하고 위험하며 모든 것이 고갈되어 버린 때를 가리키는 말
로 이해할 수 있다.
나를 구원하셨도다 - 이는 시인이 극한 상황에서 건짐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선언하는 내용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어리석고 보잘것 없는 자라 할지라도 안
전하며 결국 그들에게는 승리가 주어질 것이다.
=====116:7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 시인은 여기서 대화의 대상을 자기 영혼에
게로 돌린다. '평안함'을 뜻하는 히브리어 '메누하'(* )는 '휴식'이란 의미뿐
만 아니라 '휴식을 취하는 장소'를 가리키기도 한다. 미가 선지자는 동족(同族)의 재
산을 빼앗고 교만하게 사는 것이 이스라엘의 '쉴 곳'이 아님을 지적하면서 떠나라고
말한다(미 2:10). 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안식'할 곳이 하나님이 주시는 가나안
당임을 말하고 있다(신 12:10). '메누하'는 또한 평화와 태평 성대(太平聖代)를 뜻하
기도 하는데 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하는 기도를 마치고 백성들을 축복하며 '태평'에 대
해 언급하였다9왕상 8:56). 이상의 내용을 검토해 볼 때 '평안함'이란 하나님이 허락
하셔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안식과 평화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평안함'이란
것이 이 세상에서의 부귀나 일시적인 평화가 아니라 영적이면서도 역동적인 평화도 포
함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 이 구절은 접속사 '키'(* )에 의해 인도되는
원인절로 볼 수 있는데, 그러하다면 하나님의 후대하심으로 평안함 속에 거할 수 있다
는 뜻이다. '후대하다'의 히브리어 '가말'(* )은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데
'관대하다', '젖을 떼다', '무르익다' 등으로 해석된다.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일 수 있
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사울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나 '선대한' 것
을 오늘 나타내었나니"(삼상 24:18). 모세의 마지막 노래에는 이것이 '보답하다'는 뜻
으로 쓰였다(신 32:6). 시인은 배은 망덕(背恩忘德)한 인생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함께
해 주심과 구원 베풀어 주심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한다.
=====116:8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 '사망'에 해다하는 히브리어 '마웨트'(* )는 자
연사(自然死) 또는 질병으로 인한 죽음을 가리키며 죽음의 상태나 죽음의 장소도 뜻한
다. 시인이 어떤 종류의 난관에 처했는지를 알 수는 없지만, 좌우간 생명의 위협을 느
낄 정도로 심각한 위기로부터 벗어났음에 분명하다.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 이는 하나님이 시인을 후대
해 주신 내용이며 시인이 자신의 영혼을 향해 평안함에 돌아가라고 명령하는 이유이
다. 하나님은 사망에서 그를 구해 주셨고 더 나아가 큰 은혜를 베푸사 슬픔의 원인을
제거해 주셨으며 그의 발걸음을 하나하나 지켜 주사 넘어지지 않게 하신 것이다. 하나
님의 은혜와 역사는 오늘을 사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적용되고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시인의 신앙을 본받아 하나님의 구원과 후대하심을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어야 하겠
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평안한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
을 망각하고 항상 불만과 원망 속에 물질적인 것만 찾아 다니기 때문이다.
=====116:9
내가 생존 세계에서 - '생존 세계'는 '산 자의 땅'으로 버역할 수도 있겠다. '생
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임'(* )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수식하는 형용사인
데 하나님을 수식할 때에는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사신 분을 뜻한다(수 3:10). '생존
세계'를 이러한 뜻과 결부시키면 아마도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는 곳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시인은 사망의 세계에서 건짐 받았기 때문에 앞으로는 그의 장래의
삶을 하늘에 계신 여호와의 면전에서 살아가고자 다짐하였던 것이다.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 '행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형 동사인 '할라크'
(* )는 구약 성경에 매우 자주 언급되는 말들 중 하나이다. 이것은 '걷다', '행동
하다', '연습하다', '돌아다니다'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본문에서 이
말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 이 세상에서 형통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116:10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 - 히브리어상으로 볼 때 영역본 중 RSV의 번역이 가장 원
문에 가까운 것 같다(l kept my faith, even when I said..., ...라고 말할 때조차도
나는 믿음을 지키고 있었다). 즉, 기자는 심각한 역경 중에서도 진정한 믿음의 교훈을
굳게 부여잡았던 관계로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VanGemeren), KJV는 70인역(LXX)의 해석과 동일하게 '나는 믿었으며, 따라서 ...라고
말했다'(l believed, therefore have l spoken)라고 옮겼다. 한편, 사도 바울 역시 본
문을 70인역에 근거하여 인용한 바 있다(고후 4:13). '믿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
만'(* )은 '세우다', '진실하다', '신뢰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흔
히 사용하는 '아멘'이란 말도 '아만'에서 파생된 부사로서 '확증적으로', '진실로'란
뜻이다. 그런데 이 동사가 히필(Hiphil)형으로 쓰이면 주로 '굳게 서다', '신뢰하다',
'믿다'의 뜻으로 쓰인다(신 1;32;사 7:9). 본문에서 시인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외
면하지 않고 구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체험한 결과, 이를 토대로 하나님을 더
욱더 신뢰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 이 문구의 히브리어는 '아니 아니티 메오드'(*
)로서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내가 크게 고난을 당하였다'란 의미
와 '내가 재난에 의해 유린되었다'란 의미로 번역할 수 있다. '큰'으로 번역된 '메오
드'는 '많음', '풍부함'이란 뜻을 가진 남성 명사인데 부사로도 쓰이는 말이다(창
1:31). 그런데 어떤 학자는 '메오드'가 히브리어 전치사 '멤'(* )과 재난이나 곤경을
뜻하는 히브리어 '에드'(* )가 결합된 것으로 보고 후자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
다. 18:18에는 '욤 에디'란 말이 나오는데 개역 성경은 이를 '재앙의 날'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석하든 간에 이 어구는 시인이 사경(死境)을 헤매었던 위기의
순간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해석상의 난제는 없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 보아야 할
점은 시인이 비록 과거의 고난을 재차 회상하고 있긴 하지만 새로운 시각으로 자신이
당한 고난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즉, 사람들이 엄청난 불안과 쓰라린 고통을 자
기에게 안겨주었긴 하지만 하나님은 거기서 건져주셨고 이로 인해 시인은 더욱 굳건한
신앙관을 확립하고서 자신의 고난을 회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116:11
모든 사람은 거짓말장이라 하였도다 - '거짓말장이'에 해당하는 '코제브'(* )
는 '거짓말하다'란 뜻의 '카자브'(* )에서 나온 말로서 '위증하다'는 의미뿐만 아
니라 '우상'을 가리키기도 하며(암 2:4), 주로 '식언(食言)하다', '약속을 지키지 않
는다'는 뜻으로 쓰인다(민 23:19). 한편, 혹자는 시인이 여기서 모든 사람을 가리켜
거짓말장이라고 한 것을 다소 냉소주의적인 자세로 세상을 비관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아마도 그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고 또 큰 고난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다소 왜
곡된 태도를 취했으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은 그 근거로서 본절 서두
의 '경겁 중에'라는 말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후 문맥을 고려할 때, 본문은 당
황하는 중에 잘못 발설된 말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의 고백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인은 온갖 시련과 두려움의 상황 속에서도 어떤 인생의 도움도
기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Alexander).
=====116:12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 문자적 해석은 '나에 대한 그의 모든 유익한
것들을'이다. '은혜'에 해당하는 '타그물로히'(* )는 '적절하게 대우
하다', '선대하다' 등의 뜻을 가진 '가말'(* )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유익한 것',
'수여된 것'이란 뜻으로 쓰인다. 이 단어의 어미 '히'(* )는 순수한 아람어 어미이
지만 시적인 표현으로서 히브리어 시에서 가끔 쓰인다. 산문체에서는 이 말 대신에 여
성형인 '게물라'(* )가 많이 쓰이는데 이는 주로 '보응', '보복'의 뜻으로 번
역된다(렘 51:56). 한편, 하나님이 시인에게 허락하신 유익한 것들의 내용은 죽음에서
의 구원뿐만 아니라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으며 또한 하나님이 함께 하시으로 생겨나는
여러 가지 영적인 축복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무엇으로 보답할꼬 - 문자적으로는 '내가 무엇을(어떻게) 여호와께 돌려드러야 할
까 ?'로 번역된다. 여기서 '무엇'(어떻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 )가 의문 부
사로 쓰이게 될 경우, 이것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나타낸다. 이렇게 의문
부사로 해석하면 이 어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갚는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표현하는 것
으로 이해된다. 유다는 그의 동생 요셉에게, 베냐민의 자루에서 요셉의 잔이 발견된
사실을 설명할 수가 없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한다:"우리가 내 주께 '무슨'말을 하오리
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어떻게' 우리의 정직을 나타내리이까"(창 44:16). 그
리고 '보답할꼬'에 해당하는 '아쉬브'(* )는 '되돌아가다'란 뜻의 '슈브'(*
)에서 나온 말이다.
=====116:13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 '구원의 잔'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하다. (1) 감사제의
일부로서 드려졌던 전제(奠祭, 민 28:7). (2) 구원을 은유적으로 나타낸 표현. 이 경
우 이는 여호와의 진노의 잔과 대조된다(사 51:17;렘 25:15). (3) 어떤 특정한 시련과
연관되는 잔(민 5:16-28 참조). (4) 감사제의 식사 때에 사용하는 포도주 잔. 이중에
서 첫 번째 견해가 가장 무난할 것 같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이 잔은 감사의 표현으로
서 여호와께 드려지는 그 무엇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Anderson).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 우베쉠 에화 에크라) - 분
자적으로는 '그리고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라'는 뜻이다. 아마도 이것은 공중
집회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며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로 쓰이는 공식
적 어구인 '카라 베쉠 예화'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것 같다. 한편, 본 구절은 앞 구절에
서 언급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의 내용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보답이란 것은 극히 부족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점을 잘 알고 계
시므로 은혜에 보답하려는 인간의 최대한의 노력과 성실한 자세를 보시는 것이다. 우
리의 감사 예배가 하나님께 어떤 큰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감사
와 찬송을 기꺼이 받으시고 기뻐하신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감사에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116:14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앞에서'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그다-나'(* -
)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원래 '...앞에서'란 전치사는 '네
게드'(* )인데 여기에 '아'(* )와 '나'(* )가 첨가되어 있는 것이다. '아'는 전
치사 '네게드'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나타내는 접미사인 것으로 보이며, '나'는 이중
전치사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가나안 셈계 북서부 방언에는 이런 이중 전
치사가 흔히 등장하는데 이 방언에 따르면 전치사 '베'(* )는 '벤'(* )으로, '라멕'
(* )은 '렌'(* )으로, 쓰였다고 한다. 즉, 이중 전치사란 단순형 전치사와 여기에
'눈'(* )을 덧붙인 강조형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아마도 시인은 여기서 전 회중 앞에
서 공개적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드려야 했기 때문에 이 같은 강조형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 '서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데르'(* )
는 원래 '이렇게 해 주시면 저렇게 하겠다'는 형식의 약속을 뜻한다(삼하 15:7, 8).
한편 서원에 관한 구체적 내용은 민 30:1-8 강해, '서원(誓願)과 맹세에 대하여'를 참
조하기 바란다. 그리고 '갚다'에 해당하는 '솰렘'(* )은 '완수하다', '끝맺다',
'보답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왕상 7:51;렘 51:56). 한편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위급한 순간에 시인이 하나님께 서원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를 성실하게 이행
하는 모습에서 지난 날 고통스러운 상황을 망각하지 않고 약속을 지키는 신실한 신앙
자태를 배울 수 있다.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 이 구절의 문자적 번역은 '성도
의 죽음은 여호와의 눈에 귀중하다'이다. '성도'에 해다하는 히브리어는 '친절한',
'경건한', '자비로운' 등의 뜻을 가진 형용사 '하시드'(* )의 복수형인데, '하
시드'란 말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랑을 나타내는 '헤세드'(* )란 말과 같은 어
근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본문의 '성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성품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삼하 22:26). 그리고 '귀중히'에 해당하는 '야
카르'(* )는 '값이나 가치가 높은', '영광스럽고 찬란한', '영향력 있고 무게가
많이 나가는'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욥 31:26). 요컨대, 시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생명은 불신자들의 생명처럼 무가치한 것이 아니므로 결코 아무
런 가치없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확신있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성도
의 생명이 때로는 사악한 자들의 손에 무참히 짓밟히는 일이 있어도, 그래서 세상 사
람들의 눈에는 성도의 생명이 때로 무참하게 또 아무런 영광도 없이 훼파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성도의 생명을 귀중하게 보시는 것이다. 이 구절은 분명, 성도의
사후(死後) 세계가 하나님의 면전에 펼쳐질 것임을 나타내는 것으로까지 보아도 큰 무
리가 없을 것이다. 한편,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에 동사가 없는 것에 착안하여 '야카
르'란 형용사를 이 말의 동사형인 '야카르'의 피엘형으로 보기도 하나 해석상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리고 '죽음'에 해당하는 본문의 히브리어는 '마웨타'(* )로 기
록되어 있는데 다른 곳에서는 주로 '마웨트'(* )로 기록된다. 이것은 아마 '마웨
트'의 감상적인 표현이거나 아니면 운율을 맞추기 위한 소유격 어미 '헤'(* )가 첨가
된 것으로 보인다.
=====116:16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 시인은 여기서 다시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데
히브리어 본문에는 '아나 예화'(* )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나'(*
)는 '아나'(* )로도 표현되는 일종의 감탄사인데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아 !',
'이제 !', '당신께 간구하오니 !' 등으로 번역된다.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
다하라"(창 50:17). 시인은 4절에서도 이 말을 사용하면서 위기에 처한 자신을 구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란 어구 앞에는 시간, 이유 등
의 뜻을 담은 접속사 '키'(* )가 쓰이고 있으므로 이 구절은 '내가 주의 종인 까닭
에 기도하옵나이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 '여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마테카'
(* )인데 이것은 '아마'(* )의 자기 비하적인 표현으로 주로 여종 자신이
자기를 칠할 때 쓰이는 말이다(룻 3:9). 아마도 시인은 여기서 자신의 신앙심 깊은 어
머니를 가리키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여종의 아들'에 해당하는 '벤-아마테카'(*
- )를 어떤 주석가는 '당신의 신실함의 아들'(Dahood, NIV 난하주)로 해석
하여 10절의 '내가 믿는 고로'란 말과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는 '아마테카'를 시인의 모친으로 해석한다. 이는 시인이 출
생 전 곧 어머니의 태(胎)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여 주의 종으로 택함받
았음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 이 말의 히브리어는 '피타흐타 레모세라'(*
)이며 '풀다'에 해당하는 '피타흐타'는 전통적으로 완료형인 것으
로 해석되는데 어떤 주석가는 4절의 경우에서와 같이 감탄사 '아나'(* ) 다음이기
때문에 명령법으로 해석하여 '나의 결박을 푸소서'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
하기도 한다. 그리고 '결박'은 3절에 언급된 '사망의 줄'과 연결되는 말이다.
=====116:17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 본절과 18절은 13, 14절
과 평행을 이루며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 한편 '감하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는 '제바흐 토다'(* )인데 '제바흐'는 '희생', '제사'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감사'에 해당하는 '토다'는 원래 '손을 펼침'이란 의미인데 함축적으로
'자복', '경배' 혹은 '감사(제)' 등을 뜻하는 말이다. 율법에는 감사제가 화목제에 포
함되어 드려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
희생'과 함께 그 예물에 드리되 그 전체의 예물 중에서 하나씩 여호와께 거제(擧祭)로
드리고 그것을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들에게로 돌릴지니라"(레 7:13, 14).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표로서 그 서원을 갚고 있는데
이와 유사한 형식의 서원이 물고기 뱃속의 요나 입에서도 나온다:"나는 감사하는 목소
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
이다"(욘 2:9).
=====116:18
내가...서원을 여호와께 갚을지라 - 이 구절은 원문상 14절과 똑같은 것으로서 하
나님 앞에 공개적으로 서원을 갚는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는 내용이다. 우리는 하나님
께 은밀한 곳에서도 감사하고 찬송을 드려야 하지만 또한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들 앞
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감사 찬송을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16:19
네 가운데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토케키'(* )에서 어미 '키'
(* )는 강조 접미사로 흔히 설명된다. 따라서 '베토케키'는 '...안에'란 뜻의 전치
사 '베'(* )와 '사이', '중간'의 뜻을 가진 명사 '타웨크'(* ), 그리고 강조 접미
사 '키'로 구성되어 있다.
여호와의 전(殿) 정(庭)에서 - 직역하면 '여호와의 집의 마당들에서'이다. '정'에
해당하는 '하체르'(* )는 '둘러싸인 곳', '울타리', '궁정', '왕실' 등의 뜻을 가
지고 있는데 '성막 뜰' 혹은 '성전 뜰'을 가리키기도 한다(출 27:9). 혹자는 이를 성
전 뜰을 가리킨다고 보고 여기서 이 시의 작시 연대가 포로 귀환자들에 의한 성전 재
건 이후라는 근거를 삼고자 한다. 그러나 스 3:8에 의하면 이 성전 재건 이전에도 '하
나님의 전'이라고 표현한 바 있으므로, 이 근거로서는 불충분하다 하겠다(Alexa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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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성경의 직역과 의역
전주대학교 기독교학부 200012018 라황용
개역 안에 있는 의역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은 일반적으로 소위 직역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경향으로 볼때 직역의 성격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의도적으로 직역을 시도한 시험적 직역에 비하면 개역은 의역의 면모도 보여 주고 있다.
의역임을 난외주에 밝힌 경우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처음 이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히, "벨로 이슈메우 레콜 하오트 하리숀, 그 첫 이적의 표징의 소리를 듣지"(출4:8).
둘째 이적의 표징은 믿으리라(히, "레콜하오트 하악하론: 마지막 징표의 소리는")(출4:8).
네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애굽의 물들과 하수들과 우나와 못과 모든 호수 위에 펴라(히, "야드카: 네 손")(출7:19)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히, "에츠바 엘로힘: 하나님의 손가락")(출8:19〈15〉)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히, "높은 손으로")(출14:8)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히, "내 앞에": 히, "하나님")(출20:3)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히, "하나님") (출21:6)
그들이 또 정금으로 거룩한 패를 만들고(히, "면류관의 패")(출39: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손을 들어")(민14:30)
사십년을 광야에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목자")(민14:33)
네가 이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꿰뚫려")(민16:14)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뜬 자")(민24:3)
너도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백성")(민27:13)
포도원의 소산이 다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히, "성물이")(신22:9)
난외주의 표시없는 의역
개역이 히브리어의 숙어적 용법을 우리말로 의역했음을 난외주에 밝힌 경우이지만 그러한 표시가 없이 의역된 본문은 이것들보다 훨씬 더 많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에서도 같은 종류의 의역을 볼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켜 이집트의 바로를 만나게 하시는데 모세는 주저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4:10). 그러나 히브리어 "비 아도나이로 이쉬 드바림 아노키 …키 케바드 -페 우크바드 라숀 아노키"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주님, 용서하고 들어주십시오. …나는 말의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입의 무거움과 혀의 무거움이기 때문입니다"가 된다. 우리말에서는 입이 무겁다고 하면 과묵한 성격이나 신중한 성격을 일컫는 표현이지만 히브리어에서는 언변이 없음을 일컫는 표현이다. 우리말에는 혀가 무겁다는 표현이 어눌하다는 표현은 아니다.
문법 구조의 조정, 첨가와 삭제와 은유적 표현의 변경을 한 경우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이것은 이사야서 59장 1절의 개역 번역이다. 히브리어 본문 "헨 로-코츠라 야드-아도나이 메호쉬야 벨로 -코브다 오즈노 메셰모아"를 글자대로 번역한다면 "보아라, 주의 손이 구원으로부터 짧지 않고 그의 귀가 듣기로부터 무겁지 않다"이다. '손이 짧다'는 것은 그런 대로 우리에게도 원문의 의미를 전달한다. 그러나 '귀가 무겁다'는 것은 우리의 은유가 아니다. 우리의 경우는 '귀가 어둡다'이다. 개역의 '귀가 둔하다'도 의미를 전달에 무리가 없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2). 이것도 원문에 대한 구조 조정과 첨가와 삭제가 행해진 점에서 볼 때 의역이라고 할 수 있다. 히브리어 본문 "키 임 - 아보테켐 하유 맙딜림, 베네켐 레벤 엘로헤켐, 베핫토테켐 히스티루 파님, 믹켐 밋슈모아"는 개역의 문체를 따라 직역해 보면 "오직 너희 죄악들이 너희(사이)와 너희 하나님 사이에 갈라짐이었으며 너희 죄들이 너희들로부터와 듣기로 부터 얼굴을 감추었다"이다.
숙어적 표현을 삭제해 버린 경우
( )는 삭제해 버린 숙어를 번역한 것이다.
주여 (용서하고 들어주소서!)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4:10)
주여 (용서하고 들어주소서!)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출4:13)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영광입니다, 혹은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가 왕과 왕의 신하와 왕의 백성을 위하여 어느 때에 구하여 이 개구리를 왕과 왕궁으로 끊어서 하수에만 있게 하오리이까(출8:9)
개역 안에 있는 직역
숙어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문자 그대로 번역한 대표적인 예는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잠 25:21-)
하나님께서 노아가 만든 방주의 문을 닫아주시는 장면에 "무릇 기식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창7:15-16)는 묘사가 있다. 여호와께서 노아를 방주에 넣으시고(?) 방주 문을 닫으셨다는 것을 히브리어로 이렇게 표현한 것일까? 우리 말의 문 닫고 들어오라와 같은 종류의 말이까?
아브라함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와 단을 쌓은 일과 관련된 묘사에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13:3-4)는 말이 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카라 베 솀아도나이)는 단순히 글자 그대로 "여호와여!하고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아니라, 여호와를 예배하는 것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야곱의 아들들인 시므온과 레위가 그들의 누이 다말이 욕본 일로 하몰 일가를 약탈하자 야곱이 아들들을 꾸짖는다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창34:30)라는 번역은 히브리어 '히브이쉬'(바아쉬의 히필형)의 직역이다. 히브리어 냄새를 내게 하다 는 혐오의 대상이 되게 하다라는 뜻이다.
호세아서에서 직역된 난해
"저희가 (제사장들이) 내 백성의 속죄 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저희의 죄에 두는 도다"(4:8).
제사장들이 백성의 죄에 마음을 둔다는 것이 무엇일까? 히브리어 '나사 나프쇼 엘(∼에게 자기의 마음을 두다)'은 "∼을 간절히 바라다", "몹시 그리워하다"이다. 호세아의 예언 선포 특히 4장 4-10절을 보면 제사장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죄도 그만큼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7절). 제사장이라는 것들이 백성이 바치는 속죄 제물로 생활을 유지하기 때문에 백성이 죄를 자꾸 지어 속죄제물이 끊임없이 들어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시켜 백성들의 불성실한 회개를 꾸짖는 말씀 가운데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집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리니라"(호6:11)는 말이 있다. 이 구절은 언뜻 보기에는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는 유다 백성에게 복을 베풀어 풍년을 약속하시는 말씀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히브리어 "감 -예후다 새트 카치르 라크"(유다여, 너에게도 추수가 정해져 있다)는 "유다야 , 너를 심판할 시기도 정해 놓았다"는 심판 예고의 말씀이다.
북이스라엘 왕궁 안에서 일어난 반란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포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저희는 다 간음하는 자라 빵 만드는 자에게 달궈진 화덕과 같도다 저가 반죽을 뭉침으로 발효되기까지만 불 일으키기를 그칠 뿐이니라"(호7:4).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표현을 달리하여 "저희는 다 간음하는 자라 그들은 빵 만드는 자가 달군 화덕처럼 뜨겁다"라고 하면 여기까지는 그런 대로 뜻이 통한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 "저가 (빵만드는 자가)반죽을 뭉침으로", "(빵 만드는 자는 반죽된 뭉치가) 발효하기 까지만 불 일으키기를 그칠 뿐이니라"는 논리적 연결이 잘 안된다. 아마 빵만드는 자는 화덕에 불을 계속해서 지피는 모양이다. 그러기에 그 화덕은 언제나 달구어져 있고 뜨겁다. 다만 반죽된 것이 발효되는 기간에만 화덕에 불을 지피지 않을 뿐 그 밖의 시간에는 계속하여 불을 지피기 때문에 사실 화덕은 늘 달아 있는 셈이다. 악한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 바로 뜨겁게 달아오른 화덕과도 같다는 말일 것이다.
참고도서
민영진,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 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1996.
*.2008년 10월 25일 토요일 마타 사무실에서 오후6~저녁 8시까지 기도 중에 나온 말을 휴대폰에 기록해서 내 번호로 문자 보내
찾아 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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