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피 쏟은 것도 처음이고.”방송 데뷔 40년째. 터닝포인트를 찾다 그의 영감이 사진에 ‘꽂혔다’. DMZ 전문 최병관 사진작가를 ‘사부’로 만나 독하게 배웠다. “40년 전 병아리 기자 시절 들었던 니콘FM2가 단종됐더라고요. 어렵게 인터넷에서 두 대를 샀어요. 수동카메라는 현상을 하는 동안 머리로 많은 사진을 다시 찍는 즐거움이 있지요.” 디지 털 시대에 그가 수동을 고집하는 이유다.나무만 찍은 이유가 궁금하다. 아버지의 영향 탓이란다. 황해도 옹진에서 태어난 그는 월남 후 경기 안성에서 초중학교를 다녔다. 농협에 근무하셨던 아버지는 나무 연구에 열심이었다. ‘치산치수(治山治水)’에 대한 관심이 대물림돼 그 역시 경기 마석에서 ‘나무농사’를 짓기도 했다.카메라 앵글 안에서 자연풍경은 ‘보물’과도 같다고 이씨는 말한다. “사진가는 계절 단위로 사니까 해가는 줄을 몰라요. 뭉게구름을 찍을 수 있는 날이 1년에 보름이나될까. 눈을 찍을 수 있는 것도 1년에 며칠안돼요. 수많은 날들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고독한 직업이죠.”
사진은 홍익대 시각디자인학과 재학 당시 부전공으로 배웠다. ‘구직(求職)’ 사진으로 유명한 고(故) 임응식 교수가 가르쳤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을꽤 그렸어요. 미술교사 자격증도 일부러 땄죠. 이북 사람이니 생활적인 장치가 필 요했거든요. 비록 회화가 아니라 사진이지만 소년시절 꿈꾸던 예술로 되돌아온 것은 행운이에요.”대학 재학 중이던 1967년 CBS <명랑백일장>을 통해 방송에 데뷔한 후 여유가 없어 카메라를 손에 잡지 못했었다. 그러다 가수 김세환, 전영록 등 후배들을 끌어모아 연예인 사진동호회 ‘예사랑’을 만들어 ‘줄반 장’을 맡았다며 웃는다.그는 서울 도심 광화문 한복판에서 첫 개인전을 연데 대해 뿌듯해 했다. “갤러리 1, 2관을 통틀어 첫 개인전을 연 사람은 처음이래요. 겁도 났지만 다음 작업에 대한 의무전이랄까. 선언적인 의미가 컸어요. 작품을 걸고 나니흐뭇합니다.”CBS 라디오 진행을 맡고 있는 그는 앞으로 사진에 주력할 계획이다. 평생의 테마는 나무다. “나무만 찍어도 인생이 모자라요. 글로벌한 세상이지만, 난 우리 동네 나무가 좋아요. 인천 소래에 작업실을 둔채 바닷가와 들판,언덕, 논밭을 돌아다녔어요. 나무 같지 않은 나무, 이름 댈 필요가 없는 나무가 테마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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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중에서도 볼품없는 것, 형제나 애인, 가족처럼 이야기가 있는 나무를 찍고 싶다며 꿈을 내비쳤다.이씨는 “일본에선 예순 한 살이 되면 초를 하나 켠다고 해요. 60년 동안 충분히 연습했다는 의미”라며 “인생 삼모작을 뜻 깊게 시작해서 기쁘다”고 했다.“어찌어찌 하다보면 뉘 집 대들보도 되고, 대청마루 깜이 되기도 한다. 개울가로 가면 빨래방망이가 되고, 절간으로 가면 죽어라 두들겨 맞는 목탁이 된다. (중략) 결국엔 제 아무리 떵떵거리던 고관대작에 천하장사라 하더라도 이걸 옷 대신 갈아입고 땅 속으로 가는 법이다. 그게 나무다.”(<내안에 나무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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