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지않는 논리들
고강진의 피살, 진남포의 피습, 이화영의 납치, 그리고 성기준의 증발.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과는 관계 없이 아침 햇살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캘린더는 이제 11월에서 12월로 접어들었다. 수사실로 들어선 문호를 제일 먼저 맞아 준
것은 대전에서 남아 잔여 수사를 돕고 돌아온 김 형사였다.
"어제 밤늦게 도착했습니다. 기다리다 그냥 퇴근했습니다."
"괜찮아. 고생 많았지?"
"저야 고생한 게 있습니까. 그런데 이번 사건 아무래도 장기전으로 들어가지 않겠어요?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아요."
"글쎄 걱정이야. 단숨에 해치웠으면 좋겠는데, 뭐 달리 보고할 건 없나."
"어제 보고드린 그대로예요. 열차 주변에 그럴 만한 흔적도 없고 또 숙박 업소도 그렇고.
열차와 고속버스 시간표를 조사했는데 대전에서 서울 오는 막차는 10시면 다 끝나요.
고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닌 것 같아요. 범인이 사라진 건 대전 도착 20여 분 내외니까요."
"음--그게 참 이상하단 말야. 김 형사 지금 성기준 씨 집에 좀 갔다 와."
"성기준이요? 누구죠?"
"아, 왜 있잖아. 대전에서 애꾸가 아니라고 박박 우겨대던 사람 말야."
"아, 그 노인 말이에요?"
"음, 어제 일차 갔다오긴 했는데 혹 어디서 연락온 거 없나 알아보고 잠복해 있다가
드나드는 사람들 체크 좀 해봐. 그리고 좀 조심성 있게 움직여, 학자 출신이니까,
그 사람 가족들 말에 의하면 부산 간다고 내려갔다는데 확인 좀 하고."
노인이 학자라는데 김 형사는 약간 놀라는 빛을 보였다.
"정말 신중히 다뤄. 성기준 씨가 부산에서 올라오지는 않았을 거야.
부산에서 그동안 연락이 왔었는지 여부를 알아보고 그 근처에서 출입자 동태를 살펴 봐."
김 형사는 문호가 그려 주는 약도를 들고 돌아섰다.
문호는 그의 등에다 대고 신중히 다를 것을 다시 환기시켰다.
고급 양옥 정도를 생각했던 김 형사는 깜짝 놀랐다.
이공학계의 저명한 학자이며 대학 교수 출신인 그의 집은 의외로 초라한 한옥집이었다.
문패에 분명히 성기준이라고 씌어져 있으니 틀림은 없었다.
이때 대문이 열리며 노인이 나타났다. 김 형사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숨겼다,
어제 대전에서 보아 낯익은 성기준 씨 바로 그 사람이 나오고 있었다.
김 형사는 머리를 갸우뚱했다.
쌍둥이인가 하고 생각도 해 보았다.
대전에서의 목적지는 분명히 부산이었고,
어제 가족들 말로는 부산에 강연이 있어 간다고 했다는데 오늘 아침 집에서 나오고
있으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 만도 했다 부인인 듯한 여자와 젊은 남자가 뒤따라
나오고 있었다.
"운전 기사가 올 시간이 되었는데..."
하며 시계를 보고 중얼거리는 성기준에게
"부산에 꼭 가야 돼요?"
하며 부인인 듯한 여자가 근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려오라니 가봐야지.
웬만해서는 내려오랄 사람이 아닌데 밤중에 전화까지 걸어온 걸 보면 뭔가 급하긴 급한 모양이야."
"집에 차로 가시지 그래요."
"아냐, 불편해. 기사 보고 새마을호표 사가지고 오라고 했으니 곧 오겠지."
김 형사는 숨어서 엿들으며 어리둥절했다.
성기준은 어제 새벽 대전에서 사라졌다. 부산으로 갔을 것이다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성기준은 누군가의 요청으로 또 부산에 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가 어제 경부선 열차를 타고 부산에 간다고 한 그 목적은 무엇인가.
더구나 어젯밤 부산에서 전화가 왔다면 성기준은 어제 내내 서울에 있었단 말인가,
상황을 판단할 수 없는 김 형사는 가까운 공중 전화로 가서 문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저 김이에요."
"어? 왜이래 뭐가 이리 급해,"
"이상한 일이 생겼어요. 성기준 씨가 지금 부산에 간다고 준비하고 있고 가족들이 대문
앞에서 배웅하고 있어요. 어제 부산에서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았나 봐요. 어떡하죠."
"부산엘? 그럼 성기준 씨가 지금 서울에 있단 말야? 어제 집에 갔을 때도 부산에 있다고들
말했는데... 그래 만나 봤어?" "아녜요. 숨어서 들었어요. 제 생각엔 혹시 쌍둥이가 아닌가 해요."
"뒤따라가서 주민등록증 대조하고 일단 이리로 연행해 와... 알았지 실례 안되게 하는 거."
"알았습니다."
김 형사는 수화기를 딸각 내려놓았다. 놀란 것은 김 형사뿐만이 아니었다.
문호도 한참이나 멍청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제의 보고에 의하면 성기준은 부산에서
초청받아 강연차 내려갔고 오늘 오후에 귀경할 것 같다고 했다.
오후에 들렀을 때 부산 무슨 호텔로 전화하는 소리까지 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제 저녁 부산에서 연락받고 오늘 아침 내려가는 김 형사가 보았다는 사람은
누구일까.
성기준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김 형사는 그의 얼굴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수사 회의고 뭐고 당장 급한 것은 성기준의 연행이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몹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만일 그가 대전에서 바로 올라오고 가족들에게 허위 진술하도록
사주했다면 수사상 커다란 전환점이 된다.
그러나 일단 부산으로 갔다가 다시 올라온 것이라면, 낱낱이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하룻만에 부산에 갔다 와서 다시 또 부산에 간다는 이유는 알수가 없었다.
약 30분 후 김 형사가 성기준과 함께 수사실로 들어왔다. 문호가 벌떡 일어나 앞으로 다가갔다.
만일 김 형사의 의견대로 그가 쌍둥이라면 그리고 어제의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의문은 그 자리에서 깨지고 말았다.
"어, 박문호 씨 잘 만났소."
그는 손을 내저으며 문호에게로 다가왔다. 이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은 불만에 찬 듯 볼을 실룩이고 있었다,
"이봐요, 내가 이 사람한테 더 이상 따질수가 없어서 여기까지 내 발로 왔는데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자기 변명을 위한 가장된 몸짓인지 아니면 정말 자기가 이곳에서 지금 어떤 혐의를 받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는지 그는 당당하게 따지며 항의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부산에 있을 때 형사들이 집을 찾아와 자기 신분을 캐묻고 갔다는
말을 듣고 불쾌하기도 하고 또 가족들이 놀랄까 봐 서둘러 귀경한 것인데 이번에는
연행까지 하겠다고 하니 불만이 극도로 치밀어올랐던 것이다.
"자 앉으시죠, 이렇게 모셔와서 죄송합니다. 몇가지 질문 좀 하려고 그럽니다."
"나 참, 아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어저께 당신들이 협조해 달라고 해서 내가 자진해서
증언을 해주었는데 그때부터 이게 대접이 뭡니까?
이래서야 누가 마음놓고 경찰에 협조하겠습니까?"
"자 흥분하지 마시고... 이왕 협조를 시작하신 거니까 끝까지 협조해 주세요. 저희들도
사정이 있어 그럽니다."
"사정이고 오정이고 이거야 원."
성기준은 문호가 권하는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러나 성이 가시지 않는지 계속 ㅉㅉ거리고 있었다.
"대전에서는 정말 여러 가지로 고마웠습니다.
성 박사님께 따로 문제가 생겨 모셔왔으니 너무 달리는 생각지 마십시오."
"뭐요? 나한테 문제가 생겨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두 손을 벌리며 어깨를 움찔했다.
"저 성 박사님. 열차에서 범인을 보셨다고 했죠."
"그렇소. 그래서 내가 부산에도 못 가고 대전에서 내린 게 아니 오."
"선생님은 범인이 애꾸가 아니라고 하셨죠. 분명히 보셨다구요.
그런데 범인은 분명히 애꾸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뭐요? 그럼 범인이 잡혔단 말이오."
성기준 씨는 몸체를 문호 앞으로 내밀며 눈을 크게 떴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구요.
그날 범인을 목격한 승무원과 바바리 여인 외에도 서울역에서 개찰한 역원까지 애꾸를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애꾸라는 것은 이미 조사에서 밝혀졌습니다.
범인이 애꾸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분은 성 박사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여보, 내가 나이 좀 먹었다고 이렇게 대접하기요.
내가 분명히, 그리고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 그 사람은 애꾸가 아니었단 말이오.
내가 누군지 아오. 성기준이오, 성기준. 이래 뵈도 박사란 말이오,
공학 박사. 애꾸를 애꾼가 아니라고 헛말하고 다닐 사람 같소. 애꾸를 잘못 보았다는
얘기오? 아직 그렇게 늙지는 않았소.
원 세상에 뚱딴지 같은 소리나 하고 앉아서 범인을 잡겠다고... 원,
나를 공범자로 생각하는 거요?"
성기준의 태도는 단호하고 분명했다, 학자 출신답게 고지식하고 직선적이었다.
문호는 약간 당황해졌다. 그를 공범으로 내세울 증거는 없다. 범인이 사라진 트릭을
생각하다가 착안한 것이 그의 공범 가능성이었다.
그렇다고 그 가능성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사람이 안개처럼 사라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직 박사님께 공범자라고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박사님을 오시라고
한 겁니다. 다시 그날 밤으로 되돌아가 봅시다. 그날 밤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실 겁니다.
승무원이 23시35분에 순회 점검을 했습니다, 그때 03-03 침대차 밑에 신발이 있었죠.
그리고 10분 후에 나와 보니까 신발도 애꾸도..."
"이 사람 정신이 있나 없나. 내가 애꾸는 없었다고 하지 않았소."
"좋습니다. 여하튼 박사님은 맞은편에 있던 승객이 연기처림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그건 맞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화장실에서 나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소. 경찰은 남이 화장실 가는 것까지 간섭을 하십니까?"
"아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가정을 세워보는 거죠."
"그렇습니까? 경찰에서 세워놓은 그 기발난 가정 좀 들어 봅시다."
"네. 그 가정이란 이런 거죠.
즉 박사님께서는 승무원이 한 바퀴 돌고 돌아간 것을 알고 범인을 불러 화장실에
숨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 다음 뒤이어 박사님도 화장실로 들어가신 거죠.
그리고 승무원이 표를 가지고 재차 나올 때를 때맞춰 박사님도 화장실에서 나옵니다,"
"그래서요?"
"화장실에서 나온 박사님과 승무원은 우연히 마주치게 되죠.
그리고 뒤이어 범인이 증발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차량 내 구석구석을 뒤지죠.
단 화장실만 제외하구요. 왜냐하면 화장실은 방금 박사님께서 나오신 곳이니까 더 찾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표를 찌르는 치밀한 방법으로 경찰과 승무원을 따돌린
거죠. 어떻습니까, 박사님. 제 논리에 빈 틈이 있습니까?”
문호가 성 박사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범인이 사라진 논리를 전개시키는 동안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만 멀뚱멀뚱 떠보이고 있었다.
"거 당신 말하는 거 들어보니 경찰 그만두고 추리 소설이나 쓰는게 훨씬 낫겠소. 이봐요.
당신은 가정을 두고 하는 얘기지만 난 진실을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난 범인이 어떤 놈인지 또 뭣하는 놈인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화장실만 해도 그렇지 내가 재수 없이 그때 마침 사용한 것뿐이고 또 당신네들이나
승무원들이 화장실을 뒤질지 안 뒤질지도 모르고 어떻게 그런 위험한 모험을 한단 말이오.
당신네들 이 찾아보지도 않고 그런 궁색한 추리를 하는 건 무식한 사람들이 흔히 무기로
내놓는 결과론밖엔 더 달리 할 말이있겠습니까?
그리고 오히려 경찰측에 협조한 사람을 의심해요."
"그렇다면 박사님. 범인이 달리고 있는 초특급 열차 속에서 어떻게 사라졌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것도 단 십 분 동안에 말입니다."
문호는 성기준 씨의 논리에 타당성이 있음을 시인하면서도 끝내 그 의혹은 풀지 못했다.
그렇다. 지금 와서 성 박사를 의심하는 것은 결과론밖에는 더 해석할 수 없다.
그러나 범인이 사라진 방법에는 어떤 논리도 대입되지 않았다,
"여보, 그건 당신네들 같은 전문가가 생각할 일이지 어떻게 나보고 묻습니까?"
"좋습니다. 그러면 박사님 가족들은 어제 저희들에게 박사님이 부산에 계시다고 했는데 왜
오늘 또 부산에 간다고 하셨으며 어제는 과연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 또 대전에서는
왜 사라지셨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 뿐만 아니라 열차 관계자들이 모두 애꾸라고 했는데
박사님만 아니라고 했거든요. 이런 것들을 설명해 주십시오"
"이 사랑들 정말 적반하장이라더니. 내가 대전에서 사라지다니. 아니 부산 내려가는
사람 잡아놓고 목격자 진술이 필요하다고 해서 잡아놓고... 좋소. 대전에서 일찍 떠난 건
내 스케줄 때문이었고, 다시 오늘 부산에 간다고 한 것은 부산 친구가 개인적인 일로
보자고 해서 가는 길이오. 또 애꾸 문제만 해도 그렇지 내가 애꾸가 아닌것으로 확실히
본 것을 애꾸라고 거짓말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겁니까? 도대체 당신네들은 왜 내가
부산에만 가면 이렇게 잡아놓고 시간을 빼앗는 거요. 빼앗길..."
"부산에선 언제 올라오셨습니까?"
"어제 오후 비행기로 올라왔습니다."
"..."
더 이상 성기준과 말씨름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무언가 확실하고 선명한 대답이
나오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어떤 경우이건 그의 공범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기로 했다.
이때 성기준이 벌떡 일어나 문호에게 한 마디 던지고 돌아섰다.
"이봐요. 내가 너무 투덜거려 미안한데 사람을 좀 보고 잡아야지. 이 성기준이가 사람
죽이는 데나 가담할 그런 사람같이 보인단 말이오? 나 어제 김만호 씨 부탁으로 부산
강연가는 길이었소. 당신네들 도우려다 이리 된 거요."
"좀 이상하지 않아?"
문호가 김 형사에게 밑도 끝도없이 물었다.
"이상하다뇨. 사건이야 처음부터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한거 아닙니까."
"그런 뜻이 아니구..."
문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었다. 성기준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느낀 것은 그의 감정과잉 노출증세였다.
아무리 고지식한 이공학계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오늘 그가 보여 준 태도나 언행은 분명히
과잉 노출이었다. 하나의 사건을 그래도 자기 생각으로는 가장 조직력 있고 타당성 있는
논리하에 전개한 말인데 소설을 쓰라는 등, 웃기는 얘기라는 등, 학자답지 않게 말하고
있었고 흥분하는 모습이 필요를 넘어선 행위로 보였다. 누가 말하기도 전에 자기가
'공범'이란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사람이란 자기 감정을 조절하지 못할 상황이 되거나 당황스러운 일이 생기면 이를 감추기
위해 표현의 과잉을 가져온다. 그렇다.그는 무언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자기가 말한 대로 소위 학자라는 사람이 경찰에 와서 충동적이고 직접적인 언어를 함부로
산용하고 있다는 것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는다.
그의 언어에서는 공포로 인해 생기는 정신 분열증적 사고의 특성이 그대로 나타나 보였다.
프리드(FREAD)의 말대로 공포의 1차적 과정(primary process) 즉 언어에 논리성
같은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충동의 직접적인 언어 해소가 나타나는 증상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 그는 무언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문호는 그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며 아득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있는 수학의 '답'을 보고 있는
듯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저 회의 시간인데요."
김 형사가 문호를 바라보며 일어났다.
그러나 문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성기준의 말도 전혀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다,
만일 노련한 그리고 경험이 풍부한 형사가 초동 수사를 했다면 어떤 경우라도 화장실까지
수색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실수 때문에 성기준이 공범으로 떠올라지게 되었고 범행 방법에
머리를 썩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 이 방금 사용하고 나온 화장실까지 다시 조사할 만큼
노련해지자면 이런 신비로운 사건과 끊임없이 부딪쳐야 하고 외국의 미스터리 같은 사건들을
끊임없이 공부해야 했다.
대전의 이민우 형사도 노련하기로는 평판이 나 있는 자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역부족임이
입증되었다. 어쨌든 성기준 자신은 공범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맞서고 있고 또 절대 애꾸가
아니라고 고집하고 있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몰랐다. 만일 그가 공범이라면
공범이라는 확실한 증거와 논리가 필요했고 아니라면 아닌 대로 선명하고 타당한 설명을
필요로 했다. 태도로 보아서는 공범이 아닌 것 같고, 상황으로 보아서는 공범이 틀림없는
딱한 사정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문호는 어떤 예감을 느끼며 수사 회의를 시작했다.
문호는 수사 회의에서 일단 업무를 분산시켰다.
그리고 어제 진남포 사건을 수사한 최찬일의 보고를 받기로 했다.
"어제 하룻동안 정말 고생들 많았습니다, 어제 수사에서는 얻은 게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수사 해결 자체에는 아무런 도움된게 없었습니다."
문호는 수사원의 노고를 치하한 다음 최찬일의 보고를 지시했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노트를 꺼냈다.
"이게 참 이상합니다. 열차 사건은 눈에 분명히 보이는 미스터리인데 이쪽은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한 점이 많거든요."
"눈에 보이지 않다니 뭐 어떤 게?"
"그러니까 말입니다.
진남포가 습격당한 시간은 수사 결과 밤 12시 50분부터 1시 10분경,
그러니까 불과 20여 분 동안에 당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사고 주변을 탐문한 결과
그 시간에 사람들이 배회하거나 불량배들이 있었던 흔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아파트 방향으로 사고가 나기 직전에 영업용 택시가 한대 왔고
거기서 뚱뚱한 남자가 내려서 잔뜩 웅크리고 아파트로 가는 것을 보았답니다.
워낙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사람이 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갈매기
주점의 주모가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곳 아파트의 주변 구조였습니다.
마을이 끝나고 조금 더 들어가서 아파트가 있기 때문에 말하자면 아파트는 막다른 길이
되는 셈이거든요. 그러면 자동차에서 내린 사람은 틀림없이 아파트로 들어갔어야 했는데
그 시간에 아파트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경비원의 말이었습니다.
또 하나 차에서 내린 사람이 왜 아파트까지 차를 몰고 들어가지 않고 아파트 멀리서 차를
내려 걸어 들어갔느냐 하는 거죠. 따라서 처음에 저는 이런 추측을 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업용 택시에서 내린 사람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진남포를 습격하고 도망친 것이죠.
그러나 그런 추리에는 너무 억지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진남포는 경비실에서 놀다가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까?
불특정 시간에 불특정 장소로 나간 진남포를 습격하기 위해서 미리 대기한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 일이죠. '대본 외우는 게 골치 아파 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나갔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으니까요. 경비원 말에 의하면 진남포는 7시경 아파트로 돌아온 후 계속 대본
연습하는 소리가 났고 또 과일을 싸들고 내려왔을 때도 별다른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고
했거든요. 따라서 포인트는 주모가 보았다는 택시에서 내린 사람에게로 맞춰야 할 게 아닌가
합니다. 그 사람은 진남포와 면식이 있는 사람이고,
또 12시 50분부터 1시 10분 사이에 아파트 근처 어디선가 만나기로 이미 약속이 되지
않았을가 이런 생각을 한 겁니다."
최찬일은 어제의 수사 상황을 간추려서 보고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문호가 머리를 들었다.
"이 사고는 절대 우발적인 사고가 아냐. 계획된 피습이 틀림없어."
하고는 다시 최찬일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그 자동차를 본 주모가 무슨 다른 얘기 한 것은 없었나? 가령 자동차라든가 사람에게서..."
문호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찬일이 대답했다.
"결국 단서가 될 만한 특징은 두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그 하나는 택시에서 내린 사람은 뚱뚱한 사람이라는 것과 또 하나는 멀리서 희미하게
보긴 했지만 택시 대가리에 별표 모양의 전등표식이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럼 메모들 해."
문호도 수첩을 꺼내 메모를 하면서 하나하나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먼저 최 형사. 최 형사는 그 갈매기 주점에 다시 가서 확실히 그 전등 표식이 별표였는가를
확인하고 그 다음 택시 회사를 수배해 봐. 택시 대가리 표시는 회사별로 서로 다르니까
어렵지는 않을 거야. 다음, 김 형사는 성기준의 집 부근에 잠복해서 드나드는 사람
체크해 보고 특히 S-TV나 혹은 R-TV 사람들 혹은 그쪽 차량 출입을 살펴 봐.
그리고 진 형사와 이 형사는 최 형사를 도와서 안마시술소의 진남포 동생을 수배해 봐.
조사할 내용은 최 형사에게 물어보고 움직이도록... 그리고 난 부산에 좀 갔다와야겠어."
"부산에요?"
갑자기 부산에 가겠다는 말에 어리둥절하던 형사들은 그대로 일어나 지시받은 대로
뿔뿔이 헤어졌다.
부하들을 현장으로 배치하고 난 문호는 저녁차로 부산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부산'. 문호가 느낀 예감은 아무래도 이번 사건의 진원지는 부산이라는 생각이었다,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는 성기준이 부산을 이틀 동안에 두 번이나 내려간 점이다.
사고가 나던 날 그의 목적지가 부산이었는데 다음날 아침 또 부산에 간다고 했다.
그는 부산에 가면서 김만호의 초청이라고 했는데 과연 김만호가 이틀 동안 두 번씩이나
초청했을까 하는 게 의문이었다.
둘째는 열차에서 애꾸를 목격한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강한 악센트의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를 조정한 배후 인물이나 아니면 애꾸 자신도 부산 사람이 아닐까
하는 가정을 세워 본 것이다. 따라서 부산에서의 우범자들 중 애꾸를 찾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부산에서 해야 할 스케줄을 생각하고 있었다.
우선 김만호와 성기준의 관계를 조사하고 다음 과연 김만호가 성기준을 연 이틀이나
초대했을까 하는 의문을 확인해 보고 그리고 왼쪽 검은 자위가 없는 애꾸를 우범자나
블랙리스트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아울러 부산에 내려가면서 침대 열차를 이용하고 도중 애꾸의 범행 방법을 생각하기로 했다.
문호는 책상 유리 밑의 수사 스케줄을 점검했다.
오늘 낮에 할 일은 고강진의 검시 결과 점검을 하고 다음은 S-TV를 찾아가 이화영 납치
사건의 결과를 알아보기로 되어 있었다. 상황에 따라 R-TV의 조남웅도 만나보기로 했다.
"박문호 씨, 전화 받으세요."
수사 스케줄에 골몰하고 있던 문호에게 동료 하나가 소릴 질렀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디래?"
"부산이라는데..."
"부산?"
그렇지 않아도 부산에 뭔가 석연치 않은 것이 많아 오늘밤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문호는 부산에서 온 장거리 전화에 정신이 번쩍들었다. 수화기를 빼앗아 귀에 댔다.
"부산 경찰국 형사 과장입니다. 박문호 씨 부탁합니다."
"제가 박문흡니다. 무슨 일이시죠?"
"왜 서울서 피습당한 진남포라는 배우 있었죠."
"네. 있었습니다."
"그 사람 여동생이란 자가 해운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네? 뭐라고요. 아니..."
"죽은 시체는 동백섬 해변가 바위 골짜기에서 발견되었는데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했어요. 그가 소지하고 있던 핸드백에서
박영숙이란 주민등록증이 나왔고 담배와 성냥이 있었는데 성냥을 살펴보니
'대광 안마시술소'라는 상호가 있었습니다. 시체가 장님이라 흑시나 하고 그 곳으로
전화했더니 인상 착의가 동일했습니다. 유서는 없구요. 진남포 사건과 관계가 있지나
않을까 해서 전화 드리는 겁니다,"
"시체는 분명히 박영숙이죠?"
"네, 틀림없습니다. 주소가 마포구 마포동 진아 아파트로 되어 있구요.
그가 진남포 동생이라는 것도 서울 안마소에서 알려 줘서 알았죠."
부산 시경과 전화를 끝낸 문호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멍청하게 서 있었다,
부우연 안개 같은 것이 머리를 꽉 채우듯 혼미해져 갔다.
"제기랄. 이거 어떻게 된 거야.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얼굴을 껑그리며 주머니에서 담배곽을 꺼냈지만 담배는 한 개비도 없는 빈 곽이었다.
빈 담배곽을 구겨 버린 후 수사실을 막 나가려는최찬일을 불렀다.
"최 형사, 나 좀 봐. 에이 쌍."
"아니 무슨 일이 생겼어요?"
문호는 최찬일을 조용한 회의실로 불러들였다,
"어제 대광 안마시술소에 갔을 때 진남포 동생이 누구라고 그랬지?"
"예, 박영숙이라고 했어요."
"음, 박영숙. 어제 언제쯤 나갔다고 그랬어?"
"오후 한 시경에 나갔다고 그랬는데요. 왜요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그 전날 저녁나절 진남포가 들렀다고 그랬었지."
"맞습니다. 한 두어 시간 있다가 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봐. 이거 굉장히 복잡하게 얽혔어.
조금 전에 부산에서 전화가 왔는데 그 박영숙이란 아가씨가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는 거야. 해운대에서 발견됐다는군. 이거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네? 박영숙이 음독 자살을요?"
"지금 말야, 당장 대광 안마시술소로 가 봐. 가서 종업원이나 주인한테 좀더 자세히 알아봐.
사건 전날의 상황이나 박영숙 주변 그리고 진남포에 대한 정보도 입수해 보고.
무슨 단서가 될 만한 건 모조리 체크해 보라구."
최찬일을 종로로 보내고 난 문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번 사건의 진원지가 부산일 것 같다는 문호의 예감은 더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나타났다.
박영숙이 부산에서 음독 자살했다는 정보를 입수 했을 때 진남포가 부산의 남포동에서 뼈가
굵었다는 최찬일의 말을 기억에 떠올렸다. 모든 사건의 핵심은 부산에 있다.
그리고 고강진 살해 사건과 진남포 피습 사건이 결코 두 개로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싶었다.
고강진의 검시 결과를 먼저 보고 부산에 내려갈까 아니면 그대로 부산에 내려갈까
망설이던 문호는 잔뜩 긴장된 얼굴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대광 안마시술소'
이곳에는 장님 여자 안마사가 네 명, 남자 안마사가 두 명 도합 다섯 명의 안마사가 고용돼
있었고 사우나에서 잔심부름하는 남자가 한 명 카운터 경리가 한 명,
그리고 구내 이발사가 한 명이 일하고 있었다. 주인인 듯한 뚱뚱한 여자가 최 형사를
휴게실 소파로 안내했다.
"무슨 일이신지요?"
"여기는 무슨 일이 없습니까?"
"뭐 특별한 일은 없는데요. 혹시 저희들이 뭐 잘못한 거라도..."
갑자기 목소리가 낮아지며 겁먹은 듯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 그런 건 아닙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구요.
어제 만났던 그 입술 옆에 검은 점 있는 아가씨는 어디갔습니까?"
"아, 화자 말씀하시는군요. 얘, 가서 화자 불러 와."
주인은 옆에 있던 종업원에게 심부름을 시키고는 최 형사에게 담배를 권했다.
무슨 일인지를 몰라 모두들 어리둥절하다 있었다.
"정말 여기 아무 일 없었습니까?
최 형사가 얼굴을 굳히며 다그쳐 묻자 주인은 당황한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정말이에요. 여기 무슨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영업도정상으로 하고 있고."
"혹시 종업원 중 결근한 사람은 없습니까?"
"결근요? 아 네 영숙이요. 어젯밤에 돌아올 줄 알았는데 아직 출근하지 않고 있어요.
가끔 저희 오빠한테 갔다오곤 하는데 왜 있잖았아요.
어제 신문에 쬐그만하게 난 그 배우 피습 사건 말이에요.
진남포라고 바로 그 사람이 영숙이 오빠거든요. 그래서 병원에 가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영숙이한테... 아 참 그리고요.
조금 전에 영숙이란 사람 있느냐고 어디서 전화가 왔었어요. 입원한 오빠 얘기도 해줬죠.
그랬더니 두 말 없이 전화를 끊어 버리더군요."
"그 영숙이란 안마사 말씀인데요. 오늘 말이죠..."
이 때 층계를 타고 걸어 내려오던 화자라는 아가씨가 최형사를 보고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춰섰다.
"안녕...하...세요. 무슨...일로."
내려오지도 올라가지도 않은 채 엉거주춤 서서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둥그래진 눈으로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잠깐만 내려오시죠. 뭐 잠깐이면 됩니다. 그리고 주인 아주머니,
다른 안마사들은 어디들 있습니까?"
"얘, 화자야. 너 좀 내려 와. 정신없는 사람처럼 멍청하게 서있지 말고...
저 선생님 안마사들 말이죠. 옥상 별실에들 따루 기거하고 있어요. 아 얘 너는
내려오라는데도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니. 옥상에 올라가서 아예 애들 전부
깨워 가지고 와."
주인의 고함 소리에 화자가 비로소 정신이 들었는지 후다닥 돌아서서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화자는 얼굴이 새파랗게 죽어 있었다. 어제 왔다가 간 형사가 또 찾아와 주인이고
종업원이고 전부 모이라니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가뜩이나 어제 왔을 때 무언가 눈치재고
돌아간 게 분명한데 오전을 넘기지 못하고 또 찾아왔으니 영업 정지당하고 마는 게 아닌가
하고 더럭 겁이 났던 것이다. 아직도 곤하게 자고 있는 안마사들을 깨워 휴게실로 내려왔다,
주인과 형사가 머리를 맞대고 무엇인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이들이 내려오자
의자를 권했다.
"이렇게 모이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지금부터 제가 묻는 말에 솔직하고 정확하게
대답해 주셔야겠습니다. 조금 전에 주인 아줌마께서 박영숙의 신분을 묻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를 걸어온 곳은 부산이었습니다. 박영숙 씨가 부산에서 음독 자살을 했기 때문입니다."
"네?"
"뭐요? 영숙이가 자살을..."
"걔가 왜요. 틀림없는 박영숙이래요?"
사람들은 실감이 나지 않는지 눈이 휘둥그래진 채 말끝을 맺지 못했다.
"네, 틀림없습니다. 박영숙의 신분이..."
"어머 어쩌지... 걔가..."
"아니 오빠도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왜 자살을 해, 응?"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남매가 다 불쌍한 사람들인데... 세상에..."
"아, 잠깐들 조용히 좀 하세요. 제가 찾아온 것은 두 남매가 다같이 비극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좀더 자세히 알아보려구요. 에... 어저께 진남포가 왔을 때 동생과 무슨 이야기하는 것
혹시듣지 못했습니까? 아니면 평소 박영숙이 세상을 비관한다든가 아니면 요즈음 무슨
특별한 고민거리가 생긴 것 같은 눈치가 있다거나. 뭐 아무 거라도 좋습니다,
생각나시는 게 있으시면...”
최찬일은 안마사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이들은 대부분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라고 했다.
이들이 장님인 것 외에도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몸매는 누구할 것 없이 모두 여성다워
보였는데 이상하게도 얼굴은 하나같이 기형으로 보였다.
왜 장님들은 하나같이 기형으로 생겼을까. 보통 여자들이 눈을 감고 있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턱이 유난히 넓다든가 광대뼈가 유난히 불거져 있다는 것. 아니면 얼굴이 정상인
이상으로 휘어 있다는, 이를테면 골격 구조 자체에 이상이 있었다.
장님인 것도 불행한데 얼굴까지 이렇게 생겼을까 생각하니 새삼 그들의 불행이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저들은 저들대로 또 다른 세계를 구축하고 살아가고 있겠지.
순간적이나마 아련한 애증을 느끼던 최 형사는 이들이 전혀 입을 열지 않으려는 태도를
읽어냈다. 그리고 무척 당황하고 놀라워하는 것도 알아냈다.
"뭐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진 마십시오.
그가 왜 자살을 했는지 아는 것은 그의 오빠가 왜 피습을 당했는지를 아는 결과이기도
하니까요. 여러분들에게 필요 이상의 폐는 끼치지 않겠습니다.
그저 뭔가 생각나는 게 있거나 혹 아시는 게 있으면 그대로 말씀만 해주시면 됩니다."
이때 맨 앞에 잔뜩 쪼그리고 앉아 있던 안마사가 얼굴을 들며
"제가 말해도 돼요?"
하며 감겨진 눈을 깜박거렸다,
"네, 뭐라도 좋습니다."
"저, 영숙이는 저하고 좀 친한 편이었어요. 그런데...
영숙이가 한 두어 달 전부터 조금씩 우울해지기 시작했어요. 뭔가 고민이 있는 것 같았죠
. 손님 차례가 와도 반가워하지도 않고 또 어떤 때는 잠도 제대로 못 이루고 고민도 하구요."
"손님 차례가 뭐지요?"
"손님 차례라는 건 일을 공평하게 나눠 가지려고 번호를 정해 순서대로 손님을 받는 거죠.
그러나 지정 손님은 순서에 관계가 없어요."
"지정 손님은 또 뭡니까?"
"지정 손님은 손님이 안마사를 지정해서 부르는 거죠."
주인이 대신 대답해 주었다.
"박영숙에게 지정 손님은 없었습니까?"
"갠 단골이 있기는 했는데 호출 단골이었어요."
"호출은 뭡니까?"
"호출은 손님이 일정한 장소로 나오라고 해서 출장가는 거죠."
이때 눈을 깜박이던 안마사가 얼굴을 굳히며 머리를 갸우뚱인다.
"참! 전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언젠가 호출 손님이 영숙일 부르는데 얘가 가질 않았어요.
그 후로 두어 번 더 전화가 왔는데 끝내 안갔죠. 그리고는 그 손님하곤 끝이 났어요."
"그 때가 언제쯤이었습니까?"
"그 때가... 초가을... 추석 직전이었으니까 한두어달 된것 같아요."
이때 처음 말을 꺼냈던 영숙이 친구라는 안마사가 다시 말을 거들었다.
"네, 맞아요. 그 때부터 영숙이가 우울해지기 시작했어요.
아마 이유는 그 일 때문일 거예요."
"왜 그랬죠? 혹시 단골 손님하고 정이 든 게 아니었을까요?"
"그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음, 허긴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마지막 호출받던 날 안 가겠다고 버티더니 마구 울었어요.
내가 왜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면서요. 내가 왜 장님이 되었느냐고요.
남들 눈깔은 멀쩡한데 왜 우리만 이러느냐구 요.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었어요.
오빠한테 미안해 죽겠다는 말을 거듭했죠. 나도 처음엔 애인이 생긴 건가 하고 생각했는데
말투가 그게 아녔어요. 오빠를 괴롭히는 결과가 되었다고요."
"오빠한테?"
"네"
"그 괴롭힌 결과란 무슨 말입니까?"
"그걸 모르겠어요. 그 후론 성질이 싹 바뀌어 버렸어요. 여간해서 말도 잘 하지 않고."
"좋습니다. 자 그건 그렇고 그럼 엊그제 오빠가 왔을 때 둘이 나눈 얘기를 누구 들은 사
람 있습니까? 조금이라도 좋으니까요."
이 때 맨 뒤에서 어물어물하고 있던 화자가 안도의 빛을 보이기 시작했다, 경찰이 찾아온
용무의 핵심이 자기가 아니고 박영숙이라는데 대해 긴장이 풀어지는 듯했다.
"제가 조금 듣긴 했어요. 엊그제 영숙이 오빠가 찾아왔죠. 우린 언제나 그렇지만 영숙이
오빠가 오면 방을 비워 주고 둘이서 얘기할 수 있도록 해주죠"
"그 전에도 자주 왔나요?"
"아녜요. 그 전엔 어쩌다 한 번씩 들렀는데... 네 맞아요. 그 때 이후부터예요. 영숙이가
단골 호출을 기절하고 난 뒤부터 자주 들렀어요. 전엔 영숙이도 오빠네 집에 자주
들렀었는데 요즈음은 거기도 자주 안 가요."
"그래 둘이 나눈 얘기는 어떤 거였습니까?"
"제가 빨래를 거둬들이려고 옥상으로 올라갔어요. 저희들이 쓰는 방은 옥상에 있거든요.
그런데 창 틈으로 영숙이가 훌쩍훌쩍 우는소리가 났어요. 제가 깜짝 놀라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니까 '미안해요, 오빠. 저 때문에... ' 그러니까 오빠가 영숙이한테 '괜찮아,
까짓 거 자식 계속 까불면 죽여 버릴 거야. 애송이 자식이'하는 소리가 들렸구요. '자식
해치워야지. 너 나한테 무슨 일 생겨도 놀라지 마' 하는 소리도 들렸구요.
또 영숙이가 '아냐 오빠 내가 죽어 버리면 돼'하는 소리도 났는데 나중엔 오빠가 훌쩍이며
우는 소리가 나기도 했어요.
담배를 피우면서 벌떡 일어나는 게 유리창으로 보여서 그냥 내려왔죠."
"내용 전체가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습니까?"
"그것은 알수가 없었어요.
말을 드문드문 들은 데다가 이 이야기가 하루이틀 얘기는 아닌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날 밤에 아니 그 다음날 낮에 밖으로 나가서 그렇게 된거죠"
"네"
"달리 전화가 오거나 연락이 온 건 없었습니까?"
"한 번도 없었어요."
최 형사는 박영숙이 쓰던 살림 가방을 뒤져 보았지만 별달리 눈에 뜨일 만한 것은
나오질 않았다. 약간의 화장품과 내복 그리고 저금 통장이 한 개 나왔다.
저금액은 250만원. 한푼도 꺼내 쓰지 않고 알뜰하게 모은 돈이었다.
사우나나 하고 가라는 주인의 호의를 거절하고 대광 안마소를 나온 최찬일은 택시 회사고
뭐고 진남포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달렸다. 할수만 있으면 억지로라도 말을 꺼내게 해
보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떨어지지 않는 의문은 시간이 갈수록 가중되기만 했다.
화자라는 여인이 들었다는 둘의 대화 내용만 해도 그렇다.
진남포가 누구에겐가 맹렬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누가 됐건 상대는 애송이가 틀림없고 공격하려는 측은 진남포가 분명했다.
화자라는 여인의 말이 틀림없다면 진남포는 '애송이'라는 자식을 죽이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고 동생은 오빠에게 무언가 말못할 죄를 지어놓은 게 틀림없었다.
자살할 이유야 그렇다고 해도 최찬일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즉 진남포는 그가 이미 알고 있는 대로 부산 남포동 시절부터 힘깨나 쓰는 자로 알려져
있었다.
거기다가 오랫동안 액션 배우로 단련된 몸이고 호신술도 한두 가지는 더 배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먼저 공격하려던 측에서 오히려 당했다는 것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상대가 대여섯 명의 떼거리라면 몰라도 진남포가 당한 상황으로 보아서 일대 일의 대결이
분명한데 아무리 상대방이 칼을 가지고 있다 해로 애송이한테 그토록 처참하게 당할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 애송이라는 자가 선제 공격을 하기 위해 누군가를 고용했다는
논리가 성립되는데 그렇다면 현장을 최초로 검증할 때 느낀 대로 어떻게 범인이 그렇게
기막히게 시간을 맞춰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것이다. 추리의 논리는 언제나
그 시점에서 멈춰지곤 했다.
그래도 대광 안마시술소에서 얻은 수확이라면 동생 즉 박영숙과 진남포가 '애송이'라는
미지의 인물에게 맹렬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점이었다.
누굴까 그 애송이는, 그리고 무엇이 박영숙과 진남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일까.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있던 최찬일은 병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진남포는 7층 외과 병동에 입원하고 있었다. 병실에는 네 명이 함께 입원하고 있었는데,
두 명은 교통 사고로 입원한 사람이고 한 명은 목 뒤에 종기가 나서 입원한 사람이었다.
진남포는 가슴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고 잠이 들었는지 옆에서 떠드는 소리가 나도
꿈적도 하지 않았다. 간호하는 사람도 없는 듯싶었다. 머리맡에는 꽃송이가 잔뜩 꽂혀 있었다.
"이 꽃은 누가 보내 준 거죠?"
"이거요? 동네 꼬마들이 꽃아 놓고 갔어요. 한 열명은 됐을 거예요"
간호원이 꽃송이를 다독이며 대답했다.
"담당 의사는 어느 분이시죠?"
"장 박사님이신데 만나 보시려면 3층으로 내려가 보세요. 거기 가서 장재훈 박사님을 찾아보세요."
진남포를 깨울 수가 없어서 담당 의사를 찾아갔다.
40대 초반의 남자로 매우 깨끗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최찬일은 찾아온 목적과 신분을 밝히고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입원할 당시 상태는 어펐습니까?"
"예, 상처가 아주 대단했습니다.
가슴 부분에 대단한 상처를 입었는데 칼로 위에서 아래로 여러 번 그은 자국이
있었습니다. 길고 짧게 약 대여섯 번 베었구요. 왼쪽 옆구리에도 찍힌 자국이있었습니다.
우선 바늘로 꿰매긴 했지만 출혈이 좀 심했었습니다."
"아주 위험한 상태는 아닙니까?"
"네, 가슴 심장 부분을 칼끝이 약간 스쳐 놀라긴 했지만 그리 위험하진 않았습니다.
의식은 어느 정도 정상이지만 출혈이 심해서요.
그러나 말하고 먹고 하는데 당장에 큰 지장은 없죠. 그런데 이 사람 전혀 입을 열지 않아요."
"예. 조금 전에도 신문사에서 기자들이 왔다갔는데 일체 입을 열지 않아요.
그의 말을 들으려면 몸의 회복보다도 심적 변화가 더 빨리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 충격이 컸던 모양입니다."
"지금 상처 부위는 볼 수가 없죠?"
"지금은 곤란합니다."
"언제쯤이면 정상적인 면회를 할 수 있을까요?"
"면회는 아무 때나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전에 말씀 드린바와 같이 우선 수면이 끝나야 하고 또 질문에 무언가의
답을 얻으려면 정신이 안정되고 심적 변화가 와야지 그 전에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지, 감사합니다. 급히 가볼 곳이 있어서요. 다시 들리겠습니다."
최찬일은 쫓기는 사람처럼 서둘러 병원을 빠져나왔다.
손에 잡히는 대로 택시를 잡아타고 마포로 달려갔다. 신아 아파트로 가고 있는 것이다.
"맞아. 범인은 하나가 아니었어. 내가 왜 그걸 일찍 생각 못했지."
혼자 중얼거리며 택시 속에서 안절부절못했다.
최찬일은 병원에서 의사가 계속 출혈, 출혈, 하고 있을 때 아스팔트 위에서 보았던
혈흔을 생각했다.
"확실해. 범인은 하나가 아니었어."
"네?"
"아, 아닙니다. 빨리 좀 갑시다."
운전 기사는 아까부터 뒤에 앉아 무엇인가 자꾸 중얼거리는 사람을 백미러로 훔쳐보고는
다시 액셀레이터를 힘껏 밟아댔다. 부르릉 하고 차는 가속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신아 아파트와 인접한 아스팔트,
즉 아파트 입구에서 좌측 공터 쪽으로 공사하다가 중단한 도로, 바로 진남포의 핏자국이
최초로 식별된 장소였다. 핏자국은 아직 지워지지 않고 그데로 있었다.
사람들의 통행이 없기 때문에 혈흔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최찬일은 마을통장의 도움을 얻어 사람이 다니지 못하도록 제한 조치를 하고 인근 DP점에
의뢰해서 혈흔을 최대한 정밀하게 촬영했다. 혈흔을 조사하며 최찬일은 피습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
피습 장소. 그렇다, 아스팔트가 끝난 다음 공터, 마른 풀더미가 발목까지 오르는 공터가
최초의 피습 장소로 떠올랐으나 그 생각은 커다란 착오였다. 진남포가 피습당한 곳은
아파트 입구에서 옆으로 약 7m정도로 갈라져 들어간 아스팔트 도로. 어느 회사에선가
신축 아파트 공사를 위해 말뚝을 받고 새로 공사를 하다가 중단한 그 곳임이 확연히 드러났다.
아마 범인 중 한 명은 입을 틀어막고 뒤에서 붙잡고 있었고 다른 또 한 사람은 앞에서 칼로
옆구리를 찌르고 가슴을 칼로 긋고 도망간 게 틀림없어. 아니면 꿇어앉히고 했던가.
그래 맞아 범인은 두 명 이상이었어.
그렇다면... 별표식의 택시에서 내린 그 뚱뚱해보이는 한사람, 그리고 그 이후에 또 사람이
도착했다는 얘기가 성립되는데 그렇다면 한 사람은 어딘가 숨었다가 뒤에서 덮쳤고
한 사람 은 정면에서 칼질을 한 것인데, 핏자국의 상황으로 보아서는 틀림없는 그 상황인데
그렇다면 최초에 맞은 칼이 옆구리이건 가슴이건 소리 지를 여유는 충분히 있었을 텐데
그는 왜 비명을 지르지 않았을까. 설혹 그가 어떤 절대절명의 위기에 몰려 있다
해도 위기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은 사람들의 본능인데 왜 진남포는 이런 본능까지 포기했을까.
무슨 이유일까. 칼에 찔리고도 소리를 지르지 못할 만큼 위협을 받고 있었다면 가해자는
왜 하필이면 이런 위험한 주택가를 피습 장소로 선택했을까. 왜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주변에서 덮쳤을까.
핏자국으로 보아 격투한 혈흔은 아니었다. 왜 진남포는 극한 상황에서까지 맞서 대결하지
못했을까. 그렇다면? 그렇다면 조금 전에 안마소에서 들은 말과는 정반대의 현상이 아닌가.
진남포가 어떤 '애송이'를 처지하겠다고 했는데 이건 오히려 당한 꼴이 되었다,
진남포가 누군가를 해치려다가 당했다는 것도 우습거니와 그 동생은 왜 오빠 곁에 있지 않고,
그 곁에서 병간호를 하지 않고 자살을 했을까.
범인이 누구라고 증언할 충분한 사유와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핏자국의 사진을 찍고 혈흔을 조사하며 범인은 최소한 두명 이상이어야 한다고 판단한
최찬일은 핏자국에 대한 깊은 의문과 교차되는 상황의 논리에 그만 머리가 얼떨떨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