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 진 조부님
벼슬은 현감이고 생졸년 실전. 항상 단종이 폐위된 일로 탄식하였으며 세속에 물들지 않고 벼슬을 티끌과 같이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함. 부친과 같은 덕을 지님. 묘소는 임진왜란으로 실전
- 배우자: 부인 영일정씨로 생졸과 묘는 실전
2. 15세 계원 조부님
벼슬은 현감이고 생졸과 묘는 실전
- 배우자: 부인 진주강씨로 생졸과 묘는 실전
3. 16세 하 조부님
자는 경민이고 벼슬은 수임 교위와 원주판관을 지냄. 단종 2년 1454년생. 졸년 실전. 기일은 12월 9일. 묘는 충북 옥천군 동이면 가덕산 화봉 중턱 기슭 곤좌임.
- 배우자: 공인 옥천육씨로 주부 육지수의 여식. 목사 원의 손녀로 관찰사 종식의 증손녀임. 세종 31년 1449년생. 1513년 11월 28일 졸. 남편묘 합장
4. 17세 종한 조부님
자는 종해이고 호는 경암. 벼슬은 통정대부 행성균관 사성에 이름. 문과 급제. 사헌부 집의, 감찰과 신계 과천 여주 안동 황주 병마절제도위를 역임. 성종 14년 1483년생이며 1555년 졸. 단구재 공의 시를 낙양의 봄이 다 가도록 읊고, 장안의 모든 집의 꽃이 다 질 때까지 읊었음. 공이 사헌부 감찰을 역임한 관료들과 계회도를 하였는데 “23삼상대회도 및 김종한교지”가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대한민국 보물 제1406호로 지정됨
연산군 9년 중춘에 지음. 옥천 학촌에 거주. 묘는 부친묘 아래 유좌임.
- 배우자: 숙부인 청주이씨 참의 이철의 여식이고 홍의 손녀. 생졸 실전. 묘는 남편과 합장
5. 18세 노 조부님
자는 순보이며 벼슬은 장사랑 참봉과 통덕랑을 지냄. 중종 3년 1508년생으로 1576년 졸. 임금의 말을 잘 따르고 자식을 친히 가르쳤으며 문필이 화려하여 그 이름을 드날렸고 자식을 의롭고 방정하게 길러 여러 번 영화로운 잔치를 하여 주위에서 아름답다고 칭하였다. 묘는 부친묘 아래 기슭 유좌
- 배우자: 공인 연일정씨로 판관 정유건의 여식이며 첨정 광백의 손녀. 포은 정몽주의 후손. 중종 2년 1507년생이며 1569년 졸. 묘는 남편묘 좌측 유좌.
6. 19세 규찬 조부님
자는 운서이고 호는 영민. 벼슬은 이조정랑과 의금부 경력. 중종 29년 1534년생이고 1599년 졸. 공은 뜻과 기가 준엄, 엄정하였고 밝고 명민하게 일을 처리함. 묘는 조부묘 계단 아래 우측에 유좌.
- 배우자: 영인 청주이씨 주부 이경진의 여식이고 사평 진생의 손녀. 중종 30년 1536년생이고 계사년에 졸. 묘는 쌍분
7. 20세 익견 조부님
자는 문천이고 무과에 등제. 벼슬은 훈련원 판관과 첨정을 지냄. 명종 15년 1560년 6월 21일생. 1624년 11월 19일 졸. 공은 기국이 풍부하고 후덕하며 풍채와 의관이 준수함. 만물의 이치에 따라 마음을 바로 하며 겉과 속이 희고 곧았으며 거듭하여 몸을 굽혀 남쪽을 살피고 붓을 던져 무장을 풀고 상대를 시원하게 설득하여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복종함. 묘는 옥천군 안남면 잔달리 안산 사니현 을좌.
- 배우자: 영인 김해김씨로 가의대부 김영호의 여식이자 가선대부 구정의 손녀. 명종 13년 1558년생이고 1623년 정월 13일 졸. 묘는 남편묘 뒤 기슭 손좌.
9. 21세 경 조부님
자는 경삼이고 호는 은당. 통정대부 동지중추부사. 선조 17년 1584년생. 1649년 10월 4일 졸. 묘는 옥천군 동이면 가덕산 화봉 유좌
- 배우자: 정부인 김해김씨로 김상의 여식. 성기의 손녀이자 소엽의 증손녀. 의성김씨 김휘곤의 외손녀. 선조 14년 1581년생으로 1634년 8월 7일 졸. 묘는 남편묘에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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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환철 부친 인식
자는 윤삼. 고종 광무 3년 1899년 4월 21일생. 1938년 9월 16일 졸함. 부자가 함께 고향과 인근에서 처사로 통하였음. 묘는 배골 마을 우측편 밭옆 자좌임
- 배우자: 유인 해주오씨로 오희근의 여식임. 고종 광무 1년 1897년 3월 21일생. 1938년 8월 8일 졸함. 묘는 남편묘에 합장함
2. 환철 조부 연상
자는 덕필. 고종 15년 1878년 2월 14일생. 1951년 12월 25일 졸함. 공은 성품이 온화하고 자애로우며 너그럽고 후덕하여 세상 사람들이 처사라고 칭하였음. 묘는 배골 사양골 임좌임.
- 배우자: 유인 강릉김씨로 김제경의 여식임. 고종 12년 1875년 정월 13일생. 1938년 4월 17일 졸함. 묘는 충남 대덕군 기성면 관추리 한백골 옥녀봉 경좌임.
3. 성균 조부 연철
자는 장수. 고종 광무 10년 1906년 7월 17일생. 1983년 5월 21일 졸함. 향년 78세. 공은 재능이 빼어나서 독학하였고 몸을 닦아 성품은 강하고 질박하였음. 올곧고 도타워서 가난하거나 불우한 사람을 돕고 효도하며 벗은 신의로 사귀었고 모든 일은 공평히 하였음. 근본적인 천성이 뜻이 곧아서 세상 사람들이 현명한 처사라고 칭함. 지방의 유지라고 불렀음. 묘는 배골 동산 110번지 곡불안등 중턱 기슭 손좌로 상석이 있음
- 배우자: 유인 김해김씨로 김근배의 여식임. 고종 광무 10년 1906년 11월 4일생. 1985년 10월 6일 졸함. 향년 80세. 묘는 남편묘에 쌍분임
4. 성균 증조부 우진
자는 형원. 고종 18년 1881년 10월 5일생. 1953년 3월 15일 졸함. 향년 73세. 공은 어려서부터 부친의 가르침 받아 예의에 게으르지 않았고 효도하며 형제간의 우애도 게으르지 않았음. 유풍을 고수하여 밖을 나갔다 오면 신주에 고하는 예의를 다하여 효자라고 칭하였음. 묘는 도장골 5대조 계단 아래 건좌로 상석이 있음
- 배우자: 유인 강릉김씨로 김병귀의 여식임. 고종 16년 1879년 7월 7일생. 1955년 5월 20일 졸함. 향년 76세. 묘는 남편묘에 쌍분임
5. 장균 증조부 상진
자는 국서이며 호는 노산. 고종 12년 1875년 12월 6일생. 1951년 6월 30일 졸함. 향년 77세. 공은 성품이 굳세고 질박하며 곧았으며 학문을 도탑게 하여 스스로 수학하였음. 효도하고 우애로움이 근본 천성으로 뜻과 몸이 함께 이른 나이에 이루어졌음. 어버이상을 당하여 여막에서 3년간 시묘살이를 하여 인근의 선비와 벗들이 중히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음. 묘는 모서면 대표리 웃노산 잿골 대웅골 갑좌임.
6. 장균 고조부 기영
자는 사선이며 오는 덕화. 헌종 10년 1844년 7월 17일생. 1893년 2월 22일 졸함. 공은 박학하였고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음. 시경과 예기를 가르치니 인근 마을의 수재들이 많이 모였으며 선유를 숭상하여 후세 사람들이 거사라고 칭하였음. 효도하고 부모를 잘 받들어 인근에서 중히 여김. 묘는 고곡리 둔덕 우두산 남쪽 기슭 고실 바위 언덕 위 건좌.
7. 장균 5대조 은득
자는 진여이며 호는 양수. 순조 16년 1816년 4월 14일생. 1898년 12월 26일 졸함. 향년 83세. 공은 성품이 온화하고 자애롭고 너그러우며 후덕하였음. 마음을 세우고 행동을 규제하며 실수가 없어서 모든 일에 척도가 되어 시비가 있을 때 말로써 판정을 하니 모든 사람들이 다 공경하고 복종하였음.
묘는 배골 삼밭골 양지 간좌로 상석이 있음.
8. 장균 6대조 원성
자는 치명이고 호는 백운. 벼슬은 贈승의랑 예조좌랑. 정조 6년 1782년 8월 30일생. 1871년 7월 8일 졸함. 향년 90세. 듣기에 공은 어려서부터 지혜와 재주가 있어서 그 기량이 뭇 사람을 뛰어 넘었음. 학문에 들어 시골의 학당에서 교육 과정을 번거롭게 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그 과정을 정하여 마쳤음. 침식을 잊고 의례와 제자백가를 익히지 않은 것이 없었음. 저서로는 백운유집 여섯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음. 묘는 배골 삼밭골 등날 모친묘 아래 자좌로 상석이 있음.
9. 장균 7대조 춘석
자는 여관이며 호는 송당. 영조 30년 1754년 정월 7일생. 1822년 정월 10일 졸함. 공은 풍채가 훤칠하고 컸으며 논의를 하면 영특함을 뽐내었고 효도하고 우애로웠음. 집안의 명성을 그대로 계승하였고 뭇 사람과 손님을 잘 접대하여 마을에서 선인(善人)이라고 칭하였음. 묘는 배골 깊은골 간좌로 상석이 있음.
첫댓글 윗대 조상에 관한 부분은 일부 해석이 덜 되어 생략된 부분이 있습니다. 한자를 다 알아도 해석이 분분한 대목이 있고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고생 했어. 우리 세대가 아마도 마지막으로 족보를 기록 할 것 같아.
완성 하면 보람이 있을 거야.
두분 다 고생하셨습니다.
혹시나 해석에 의견이 서로 다르면 어르신들이나 전문가에게 의뢰를 해보면 어떨런지요?
그리 중요할 것 같지는 않는데, 홍균이 동생이 봤을 때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 되면, 고모가 중국어 전공이라며?
한 번 보여 주면 되겠고..... 역사적인 기록이 아니고 선조님들 칭찬한 글이라면 의미가 없을 것 같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