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8년 세자로 원나라에 갔다가 1330년에 충숙왕의 전위(傳位)를 받고 귀국해 즉위하였다.
그러나 1332년 원나라에 의해 전왕인 충숙왕이 복위하자 다시 원나라로 갔다. 1339년 충숙왕이 죽자, 조적(曺頔) 등이 음모를 꾸며 심양왕
고(瀋陽王暠)를 옹립하려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충혜왕이 복위하였다.
그는 본성이 호협방탕해 주색과 사냥을 일삼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며, 후궁만도 1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기거주(起居注) 이담(李湛)의 충고와 전 군부판서(前軍簿判書) 이조년(李兆年)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방탕한 습성을 버리지 못해 유신들과
반목이 심하였다.
그는 관제를 개혁해 과거의 고시관(考試官)을 다시 지공거(知貢擧)로, 정승을 중찬(中贊)으로, 평리를
참리(參理)로 고쳤다. 1331년에는 종래의 은병(銀甁) 통용을 금하고, 한 개가 오종포(五綜布) 15필에 해당하는 소은병(小銀甁)을 통용하게
하였다.
한편 원나라에 쌍성(雙城 : 지금의 함경북도 영흥)·여진·요양(遼陽)·심양(瀋陽) 등지에서 살고 있는
고려인들을 데리고 돌아올 것을 요청하였다. 그 해 이학도감(吏學都監)을 설치했으며, 5도에는 염장도감(鹽場都監)을 설치하였다가 얼마 뒤에
폐지하였다.
1342년에는 식화(殖貨)에 힘써 의성창(義城倉)·덕천창(德泉倉)·보흥창(寶興倉)의 포 4만
8,000필을 풀어 시장에 전포를 열게 하였다. 1343년에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삼현(三峴)에 새로 궁궐을 지었다.
이 때 개성에서는 “왕이 민가의 어린아이 수십 명을 잡아 새 궁궐의 주춧돌 밑에 묻고자 한다.”는 소문이
돌아 집집마다 아이를 안고 도망하고 숨는 등 소란이 일었다고 한다.
충혜왕은 영특하고 슬기로운 재능을 좋지 못한 데 사용하였다. 사무역(私貿易)으로 재화를 모으고 무리한
세금을 강제로 징수해 유흥에 탕진하고,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약탈해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키는 등 실정이 많았다.
이에 이운(李芸)·기철(奇轍) 등이 왕의 실정과 횡포함을 원나라의 중서성(中書省)에 알렸으나,
오히려
이들은 원나라에 끌려가서 게양현(揭陽縣)으로 귀양가다가 악양현(岳陽縣)에서 죽었다.
충혜왕의 시호는 헌효(獻孝)이고, 원나라의 시호는 충혜이다.
능은 영릉(永陵)으로 지금의 개성에 있다.
30歲에 요절한 충혜왕의 비극 문란한 성생활 때문에 충혜왕은 임질에 걸려 항상 치료약을 복용하고 있었고, 충혜왕과 관계를 맺은 여성들이 이 병에 옮아 고생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충혜왕을 단지 패륜과 강간 등의 자극적인 단어로만 설명하기엔 무언가 부족하다. 1315년에 태어나 1344년에 3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충혜왕. 그가 살았던 시절은 원나라가 고려에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때였다. 원나라의 허락이 없으면 고려국왕이 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원나라에 복속한 이후 고려국왕들은 원나라의 눈치를 봐야만 했고, 원나라는 마음대로 고려국왕을 바꾸기도 했다. 심지어 원나라는 고려국왕의 자손들을 불러들여 원나라의 생활 방식을 익히게 해 원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키우게 했다. 충혜왕 역시 1328년에 14세의 나이로 원나라에 들어갔다가 당시 원나라의 정국을 주름잡고 있었던 연철목아(드라마 기황후에는 ‘연철’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의 눈에 띄게 되었다충혜왕은 연철목아의 강력한 후원을 받아 아버지 충숙왕을 몰아내고 1330년에 고려국왕이 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충숙왕-충혜왕 부자 사이의 갈등 관계가 더욱 커지게 됐다. 한번은 충혜왕이 아버지 충숙왕을 영접하고 있었는데, 충숙왕이 “너의 부모는 모두 고려 사람인데, 어찌 나에게 오랑캐의 방식으로 인사를 하느냐?”고 꾸짖었고 충혜왕은 이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던 적도 있다. 충혜왕이 이후 고려국왕이 됐지만, 아버지 충숙왕의 견제는 심했다. 결국 1332년에 원나라는 다시 충숙왕을 고려국왕으로 삼고, 충혜왕을 원나라로 도로 불러들였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원나라에서 연철목아가 죽었다. 충혜왕은 후원자를 잃게 된 것이다. 연철목아 집안을 박살낸 백안이라는 사람은 충혜왕이 연철목아의 사람이라고 생각해 극도로 혐오하고 있었다. 백안은 충혜왕을 억지로 고려로 돌려보냈고, 충숙왕이 죽고 난 후에는 충혜왕이 절대 고려국왕이 될 수 없다며 다시 그를 잡아들였다. 충혜왕은 원나라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고려와 원나라를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그런데 때마침 백안의 조카 탈탈이 숙부를 쫓아내면서 충혜왕은 운좋게 다시 고려국왕이 될 수 있었다. 이때가 1340년으로, 8년 만에 다시 되찾은 고려국왕 자리였다. 이때 원나라에서는 고려에서 공녀로 끌려와 고생하던 한 여성이 황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바로 기황후다. 기황후의 위세는 갈수록 커져 갔고, 그 여파는 고려에도 미치고 있었다. 기황후의 오빠들이 세력을 점차 키워갔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이 화근이 되어 1343년에 충혜왕은 고려국왕에서 밀려났다. 1343년 10월에 고룡보라는 이름의 환관이 고려에 왔다. 고룡보는 고려 출신 환관으로 기황후의 총애를 받아 상당히 높은 지위에 올라 있던 사람이었다. 고룡보가 고려에 온지 얼마 안 있어 원나라에서는 계속 사신의 명목으로 사람을 보냈다. 어느날 이들은 충혜왕을 갑자기 끌어내 발로 차면서 포박했다. 갑작스러운 원나라 사신들의 행동에 당황한 충혜왕은 고룡보를 불렀는데, 고룡보는 도리어 충혜왕을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를 신호로 원나라 사신들이 칼을 빼 충혜왕을 모시던 사람들을 죽였다. 기황후의 은밀한 지시가 예상되는 사건이다. 결국 충혜왕은 또 다시 원나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고, 유배를 가던 도중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슬퍼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
고려시대 역대왕
1대 태조(918~943)2대 혜종(943~945)3대 정종(945~949)
4대 광종(949~975)5대 경종(975~981)6대 성종(981~997)
7대 목종(997~1009)8대 현종(1009~1031)9대 덕종(1031~1034)
10대 정종(1034~1046)11대 문종(1046~1083)12대 순종(1083)
13대 선종(1083~1094)14대 헌종(1094~1095)
15대 숙종(1095~1105)16대 예종(1105~1122)
17대 인종(1122~1146)18대 의종(1146~1170)
19대 명종(1170~1197)20대 신종(1197~1204)
21대 희종(1204~1211)22대 강종(1211~1213)
23대 고종(1213~1259)24대 원종(1259~1274)
25대 충렬왕(1274~1308)26대 충선왕(1308~1313)
27대 충숙왕(1313~1330)(1332~1339)
28대 충혜왕(1330~1332)(1339~1344)
29대 충목왕(1344~1348)30대 충정왕(1348~1351)
31대 공민왕(1351~1374)32대 우왕(1374~1388)
33대 창왕(1388~1389)34대 공양왕(1389~1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