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置溝婁”의 “置溝”는 “邾”자를 천천히 읽은 것이다. 빨리 읽으면 “邾”가 되니 “置溝婁”는 “邾婁”가 된다. 《三國志》에 “溝婁, 句麗名城也”라 적혀있다. 이를 근거로 “置溝婁”는 漢의 말과 夷의 말이 합져진 말로 볼 수 있다. 즉, “置”는 漢語에서 “한곳으로 모으다[彙]”라는 말이고 “溝婁”는 高句麗語로 “城”이란 뜻이니, 이 두 말을 합치면 “置城” (성을 세우다) 또는 “築城” (성을 쌓다)이 된다. 이런 풀이는 너무 복잡한데다 漢의 말과 夷의 말이 합져졌다 함은 짧은 견해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溝婁”가 “城”이라는 풀이를 전적으로 믿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刻木如生形, 隨死者爲數” 및 “又有瓦[金+歷], 置米其中, 編縣之於槨戶邊”은, 沃沮사람들은 죽은이에게 주는 일반적인 껴묻거리외에 무엇인가를 준비하여 [죽은이를] 본뜬 나무인형에게 껴묻거리로 주었다는 말이다. 이는 응당 ‘후하게 장사치룬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4. 沃沮族의 향후 흐름
《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 東沃沮는 BC 58년에 高句麗에 정복당했고 北沃沮는 BC 27년에 高句麗에 정복당했다. 그러나 沃沮 사람들은 여전히 민족을 이루어 살면서 高句麗와 융합하여 하나가 되지않았다. 晉나라 초기 무렵이 되서야 융합되었다.
삼국시대 魏나라 政始정시 7년 (246), 관구검母丘儉이 高句麗를 깨부셨다. 高句麗왕 궁宮이 東沃沮로 달아나자 관구검은 “遂進師擊之, <沃沮>邑落皆破之, 斬獲首虜三千餘級”했다 《三國志•東沃沮》. 궁은 또 달아나 北沃沮까지 이르렀다.
《晉書•夫餘國》에 따르면, 晉나라 태강太康 6년 (285)에 夫餘는 선비鮮卑 모용귀慕容廆의 습격을 받아 깨졌다. 그 왕 의려依慮는 자살했고 그의 아들과 아우는 “走保沃沮”하였다. 이 시기에도 沃沮가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晉나라 이후 역사책에는 두번 다시 沃沮란 이름을 볼 수 없다. 일반적으로 그 민족은 당연히 渤海 속으로 녹아들어갔다고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