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중부(鄭仲夫)의 난(亂).
정중부(鄭仲夫)는 해주(海州) 사람이니 용모가 웅위(雄偉)하고 모난 눈동자에 이마가 넓고 피부가 희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신장(身長)이 7척(尺)이나 되었으므로 바라보기에 가히 두려웠다.
처음에 주(州)에서 군적(軍籍)에 올리고 봉비(封臂)하여 서울에 보냈더니,
재상(宰相) 최홍재(崔弘宰)가 군사로 뽑다가 보고 이상히 여겨 그 봉(封)한 것을 풀고 위로하여,
공학금군(控鶴禁軍)에 충용(充用)하였다.
○ 인종(仁宗) 때 비로소 견룡 대정(牽龍隊正)에 보임(補任)하였다.
제석(除夕 섣달 그믐 )에 나례(儺禮 역귀(疫鬼)를 쫓는 의식 )를 설(設)하여 잡기(雜技)를 보이므로
왕이 와서 보았는데, 내시(內侍) 다방(茶房) 견룡(牽龍) 등이 서로 날뛰고 즐기다가,
내시(內侍) 김돈중(金敦中)이 연소(年少)하나 기운이 날래어 촛불로써 정중부(鄭仲夫)의 수염을 태우니,
정중부(鄭仲夫)가 치고 욕하므로 김돈중(金敦中)의 아비 김부식(金富軾)이 노하여 왕께 아뢰고,
정중부(鄭仲夫)를 매치고자 하매 왕이 이를 허락臼느립�,
그러나 정중부(鄭仲夫)의 사람됨을 이상히 여겨 비밀히 도망케 하여 면(免)하도록 하였는데,
정중부(鄭仲夫)는 이로 말미암아 김돈중(金敦中)을 싫어하였다.
뒤에 정중부(鄭仲夫)가 다시 나아가 좌우(左右)에 근시(近侍)하였다.
○ 의종(毅宗) 초(初)에 교위(校尉)가 되었다. 어사대(御史臺)가 조(詔)를 받들어
수창궁(壽昌宮)의 북문(北門)을 봉쇄하고, 군소(群小)의 출입(出入)을 금(禁)하는데
정중부(鄭仲夫)가 산원(散員) 사직재(史直哉)와 더불어 함부로 열고 출입(出入)을 마음대로 하는지라,
어사대(御史臺)가 이(吏)에게 내리기를 청하니,
왕이 듣지 않았으며 누전(累轉)하여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때에 왕이 음탕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고 노는 것이 법도가 없었으며,
매양 가경(佳境)에 이르면 문득 수레를 멈추고 풍월(風月)을 읊으며 구경하였다.
18년에 왕이 인지재(仁智齋)에 이어(移御)하매 법천사(法泉寺) 승(僧) 각예(覺倪)가 어가(御駕)를
달영원(獺嶺院)에서 맞이하는지라 왕이 모든 학사(學士)와 더불어 창화(唱和)하기를 마지않으니,
정중부(鄭仲夫) 이하 모든 장수가 피곤하므로 분이 나서 비로소 불궤(不軌)한 마음을 품었다.
우부승선(右副承宣) 임종식(林宗植), 기거주(起居注) 한뢰(韓賴)는 큰 도량이 없으면서 총애(寵愛)를
믿고 남에게 거만하였으며, 무변(武弁)을 멸시하니 중인(衆人)들의 노함이 더욱 심하였다.
24년에 왕이 화평재(和平齋)에 행차하였는데, 또 근행(近幸)하는 문신(文臣)과 함께 술을 마시고,
시(詩)를 읊으며 돌아가기를 잊으니, 호종(扈從)하는 장사(將士)의 굶주림이 심하였는데,
정중부(鄭仲夫)가 소변하려 나가니 견룡 행수(牽龍行首)인 산원(散員) 이의방(李義方) 이고(李高)가
따라와서 비밀히 정중부(鄭仲夫)에게 말하기를,
문신(文臣)은 뜻을 얻어 취(醉)하고 배부르나 무신(武臣)은 모두 굶주리고 피곤하니,
이것을 참을 수 있으리까? 하므로 정중부(鄭仲夫)도 일찍이 수염을 불태운 감정이 있는지라,
이에 그렇다 하고 드디어 흉모(兇謀)를 꾸몄다.
뒤에 왕이 연복정(延福亭)으로부터 흥왕사(興王寺)에 거동할 때,
정중부(鄭仲夫)가 이의방(李義方)과 이고(李高)에게 말하기를,
지금 가히 일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왕이 만약 곧 환궁(還宮)하면 가히 또한 참을 것이요,
만약 또 보현원(普賢院)에 이행(移幸)하면 이 기회를 잃지 말 것이라.하였다.
그 다음날 왕이 장차 보현원(普賢院)에 행차하려 할 때 오문(五門) 앞에 이르러,
시신(侍臣)을 불러 술을 따르게 하고 술이 취(醉)하매 좌우(左右)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장하다. 이 땅이여 가히 써 군사를 연습(練習)하겠도다."하고
무신(武臣)에게 명하여 오병(伍兵)의 수박희(手搏戱)를 하게 하니,
이는 대개 무신(武臣)이 실망(失望)함을 알고, '후사(厚賜)로써 이를 위로하고자 함이었다.
한뢰(韓賴)가 무신(武臣)이 총애를 입게 될까 두려워하여 드디어 시기심을 품었는데,
대장군(大將軍) 이소응(李紹膺)은 비록 무신(武臣)이나 용모가 여위고 힘이 약하여 1인(人)과 함께
희박(戱搏)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거늘 한뢰(韓賴)가 앞에 가서 이소응(李紹膺)의 뺨을 쳐서
곧 계단 아래에 떨어뜨리매, 왕이 군신(群臣)과 함께 손벽을 치면서 크게 웃으니,
고려사 128권 3쪽

[원문] 林宗植李復基亦罵紹膺於是仲夫,金光美,梁肅,陳俊 等,失色相目仲夫여려聲詰賴曰
紹膺雖武夫官三品何辱之
[본문내용] 임종식(林宗植), 이복기(李復基)도 역시 이소응(李紹膺)을 욕했다.
이에 정중부(鄭仲夫), 김광미(金光美), 양숙(梁肅), 진준(陳俊) 등이 놀라서 서로 눈짓하니,
정중부(鄭仲夫)가 소리를 높여 한뢰(韓賴)를 힐책 하기를,
이소응(李紹膺)이 비록 무부(武夫)나 벼슬이 3품인데 어찌 욕함이 이토록 심한가?
하는지라, 왕이 정중부(鄭仲夫)의 손을 잡고 위로하여 마음을 풀게 하니, 이고(李高)가 칼을 빼어
정중부(鄭仲夫)를 눈짓하였으나, 정중부(鄭仲夫)가 그만두게 하였다.
날이 저물어 왕의 수레가 보현원(普賢院)에 가까워지매, 이고(李高)와 이의방(李義方)이 먼저 가서
왕지(王旨)를 꾸며 순검군(巡檢軍)을 모았는데, 왕이 문(門)에 들어서자마자
군신(群臣)이 장차 물러가려 하는지라, 이고(李高) 등이 손수 임종식(林宗植), 이복기(李復基)를
문(門)에서 죽였다.
한뢰(韓賴)는 친한 환관(宦官)에 의지하여 가만히 어상(御床) 아래에 숨는지라 왕이 대경(大驚)하여
환자(宦者) 왕광취(王光就)로 하여금 이를 금(禁)하게 하니 정중부(鄭仲夫)가 말하기를,
화근(禍根)인 한뢰(韓賴)가 아직도 왕의 곁에 있사오니 바라건대 내어 이를 베게 하소서.
라고 하였고, 내시(內侍) 배윤재(裴允才)도 또한 입주(入奏)하니 한뢰(韓賴)가 왕의 옷을 당기며
나오지 않으려고 하거늘, 이고(李高)가 칼을 뽑아 이를 위협하니 이에 나오는지라 곧 이를 죽였다.
지유(指諭) 김석재(金錫才)가 이의방(李義方)에게 말하기를,
이고(李高)가 감히 어전(御前)에서 칼을 뽑느냐 하거늘, 이의방(李義方)이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니
김석재(金錫才)가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이에 승선(承宣) 이세통(李世通), 내시(內侍) 이당주(李唐柱), 어사 잡단(御史雜端) 김기신(金起莘),
지후(祗侯) 유익겸(柳益謙), 사천감(司天監) 김자기(金子期), 태사령(太史令) 허자단(許子端) 등,
모든 호종(扈從)한 문관(文官) 및 대소 신료(大小臣僚) 환시(宦寺)가 모두 해(害)를 만나매,
쌓인 시체가 산(山)과 같았다. 처음에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등이 약속하기를,
우리들은 오른 소매를 빼고 복두(頭)를 벗을 것이니 그렇지 않은 자는 다 죽여라.
"고 하였으므로 무인(武人)으로서 복두(頭)를 벗지 않은 자도 또한 많이 피살(被殺)되었다.
.
왕이 크게 두려워하여 그 뜻을 위로하고자 하여 제장(諸將)에게 칼을 하사하니,
무신(武臣)들이 더욱 교만하여져서 횡포하였다. 이에 앞서 동요(童謠)에 이르기를,
어느 곳이 이 보현찰(普賢刹)이냐, 이 획수(劃數)를 따라 같이 도살(刀殺)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혹자가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에게 고하기를,
김돈중(金敦中)은 먼저 알고 도망하였다. "고 하니, 정중부(鄭仲夫) 등이 놀라 말하기를,
만약 김돈중(金敦中)이 입성(入城)하여 태자(太子)를 받들고 성(城)을 닫아 굳게 막으며 아뢰어
반란(叛亂)의 주모자(主謀者)를 잡게 하면 일이 매우 위급할 것이니 어찌하랴.
하니 이의방(李義方)이 말하기를, 만약 그대와 내가 남쪽으로 강해(江海)에 투피(投避)하지 못한다면,
북쪽으로 거란(契丹) 호족(胡族)에 투신(投身)하여 피할 것이라, "하고
드디어 걸음이 빠른 자를 보내어, 서울에 이르러 탐지케 하였는데,
걸음 빠른 자가 밤에 김돈중(金敦中)의 집에 이르러 기다리니,
고요하여 사람의 소리가 없는지라, 승선(承宣)이 어디 있는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호종(扈從)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하므로 곧 회보(回報)하였더니,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등이 기뻐하여, 일은 이미 잘 되었다."하고, 곧 당(黨)을 머물러
행궁(行宮)을 지키게 하고, 이고(李高)와 이의방(李義方) 이소응(李紹膺) 등이 날래고 용감한 자를
뽑아 경성(京城)에 직주(直走)케 하여 가구소(街衢所)에 이르러 별감(別監) 김수장(金守藏) 등을
죽이고, 궁궐(宮闕)에 들어가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양순정(梁純精),
사천감(司天監) 음중인(陰仲寅), 대부 소경(大府少卿) 박보균(朴甫均),
감찰어사(監察御史) 최동식(崔東軾), 내시 지후(內侍祗候) 김광(金光) 등과
내직(內直)한 원료(員僚)들을 다 이를 죽였으며 또 순검군(巡檢軍)을 거느리고
밤에 태자궁(太子宮)에 이르러 행궁 별감(行宮別監) 김거실(金居實),
원외랑(員外郞) 이인보(李仁甫) 등을 죽이고 또 천동택(泉洞宅)에 들어가
별상원(別常員) 10여 명을 죽였으며 사람으로 하여금 길에서 부르짖기를,
모든 문관(文冠)을 쓴 자는 비록 서리(胥吏)라 할지라도 죽여서 유종(遺種)이 없게 할 것이라.
하니 졸오(卒伍)가 벌떼같이 일어나서 판리부사 치사(判吏部事致仕) 최포칭(崔포칭),
판이부사(判吏部事) 허홍재(許洪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서순(徐醇),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최온(崔溫), 상서 우승(尙書右丞) 김돈시(金敦時),
국자감 대사성(國子監大司成) 이지심(李知深), 비서 감(秘書監) 김광중(金光中),
이부 시랑(吏部侍郞) 윤돈신(尹惇信), 위위 소경(衛尉少卿) 조문귀(趙文貴),
대부 소경(大府少卿) 최윤서(崔允), 시랑(侍郞) 조문진(趙文振),
내시 소경(內侍少卿) 진현광(陳玄光), 시어사(侍御史) 박윤공(朴允恭), 병부 낭중(兵部郞中)
강처약(康處約), 도성 낭중(都省郞中) 강처균(康處均), 봉어(奉御) 전치유(田致儒),
지후(祗侯) 배진(裵縉)․배연(裵衍) 등 50여 인을 찾아 죽였다.
왕이 더욱 두려워하여 정중부(鄭仲夫)를 불러 난(亂)을 그치기를 꾀하니 정중부(鄭仲夫)가
묵묵히 대답하지 않는지라, 왕이 곧 이고(李高)와 이의방(李義方)으로 응양 용호군(鷹揚龍虎軍)
중랑장(中郞將)을 제배(除拜)하였으며 그 밖의 무인(武人)에게는 상장군(上將軍)은
수 사공 복야(守司空僕射)를 더해 주고, 대장군(大將軍)은 상장군(上將軍)을 더해 주니
정중부(鄭仲夫) 등이 왕을 환궁(還宮)케 하였다.
환자(宦者) 왕광취(王光就)가 무리를 모아 정중부(鄭仲夫) 등을 치기를 꾀하였는데
한숙(韓淑)이 그 모사함을 누설하니 정중부(鄭仲夫) 등이 또 수가(隨駕)하는 내시(內侍) 10여 인과
환관(宦官) 10명을 찾아 죽였다.
정중부(鄭仲夫)가 왕을 핍박하여 군기감(軍器監)에 옮기고 태자(太子)는 영은관(迎恩館)에 옮겼다가,
마침내 왕을 거제현(巨濟縣)에 태자(太子)를 진도현(珍島縣)에 추방하고 어린 태손(太孫)을 죽였으며,
왕의 애희(愛姬) 무비(無比)는 도망하여 청구역(靑邱驛)에 숨었는데,
정중부(鄭仲夫)가 죽이고자 하였으나 태후(太后)가 굳이 청하였으므로 이에 면(免)하고 왕을 따라 갔다.
병부 시랑(兵部侍郞) 조동희(趙冬曦)가 국기(國基)를 연장(延長)시킬 땅을 상보고자 하여
서해도(西海道)에 갔다가 변(變)을 듣고 장차 동계(東界)에 가서 군사를 들어 적(賊)을 치고자하여
철령(鐵嶺)에 이르니, 맹호(猛虎)가 길에 있으므로 지나지 못하다가 추기(追騎:기병騎兵)가 달려와
이를 잡았다. 정중부(鄭仲夫)가 조동희는 일찍이 탐라(耽羅)를 평정(平定)한 공(功)이 있으므로
원지(遠地)에 내치기로 의론하는데 지키는 자가 급히 이를 죽여 시체를 물에 던졌으므로,
고려사 128권 5쪽~6쪽

[원문] 仲夫等又殺內侍少卿崔현1)流少卿崔?員外郞崔値又欲撤所殺文臣家
陳俊止之曰吾輩所嫉怨者李復基韓賴等四五人今殺無辜亦已甚矣若盡撤其家
其妻子將何기2)生義方等不聽遂從兵毁之是後武人習以爲常若有讐怨者輒毁其家
仲夫義方高等領兵迎王弟翼陽公晧3)卽王位
註 1)영리할 (현).
註 2)붙어있을 (기)=갓머리 밑에+奇.
註 3) 익양공 호는, 고려 제19대 명종(明宗)이다. (1131~1202, 재위기간:1170년 9월~1197년 9월,27년)
명종은 인종의 셋째 아들이자 공예왕후 임씨 소생으로 1131년 10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흔(昕), 이름은 호(晧), 자(字)는 지단(之旦)이다.
[본문내용] 정중부(鄭仲夫) 등이 또 내시 소경(內侍少卿) 최현(崔)을 죽이고 소경(少卿) 최치(崔値),
원외랑(員外郞) 최식(崔植)을 유배(流配)하였으며 또 죽인 문신(文臣)의 집을 철거하고자 하거늘,
진준(陳俊)이 이를 만류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이 미워하고 원망하는 자는 이복기(李復基) 한뢰(韓賴) 등 4,5人인데,
이제 죄(罪)없는 자를 죽임이 또한 이미 심하였거늘 만약 다 그 집을 철거한다면,
그 처자(妻子)는 장차 어디에 기생(寄生)하리요. 하였으나 이의방(李義方) 등이 듣지 않고
드디어 군사를 놓아 이를 헐어치우니, 이 뒤로는 무인(武人)들은 상습(常習)이 되어
만약 원수가 있는 자는 문득 그 집을 헐었다.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이고(李高)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왕의 아우 익양공(翼陽公) 왕호(王晧)를 맞아 왕위(王位)에 나아가게 하고,
정중부(鄭仲夫) 등은 또 폐환(嬖宦)인 왕광취(王光就) 백자단(白子端)과 행신(倖臣)인 영의(榮義)
유방의(劉方義) 등을 저자에서 베어 머리를 달고 다른 환자(宦者)나 또 총애(寵愛)를 믿고
교만하고 방자하던 자는 거의 다 죽였다.
처음에 의종(毅宗)이 사제(私第) 셋을 지으니 관북택(館北宅), 천동택(泉洞宅),
곽정동택(藿井洞宅)이라 이름하고 재화(財貨)를 거두어 모으니 거만(巨萬)을 헤아리게 되었는데,
이에 이르러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이고(李高)가 다 이를 분점(分占)하였다.
정중부(鄭仲夫)는 서해도 군현(西海道郡縣)을 관향(貫鄕)인 해주(海州)에 붙이고,
이의방(李義方)은 외향(外鄕 외가(外家)고을 )인 금구(金溝)를 올려 현(縣)으로 삼았다.
○ 명종(明宗)이 이미 서매 정중부로 참지정사(知政事)로 삼고,
이어 중서 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리고 또 문하 평장(門下平章)을 더해 주었으며,
공(功)을 1등으로 책정하고 형상(形象)을 벽상에 그렸다.
때에 모든 무신(武臣)이 중방(重房)에 모여 문신의 남은 자를 다 불러
이고(李高)가 모두 이를 죽이고자 하거늘 정중부가 이를 중지시켰다.
이에 앞서 수성사(壽星祠)를 지으매,
병부 낭중(兵部郞中) 진윤승(陳允升)이 역사(役事)를 감독하는데,
모든 군졸이 돌을 옮기면 반드시 저울로 달아보고 받아들이므로 군졸이 원망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군사가 진윤승의 집에 이르러 속여서 말하기를,
왕지(王旨)가 내려 먼저 궁궐로 나아가는 자는 승선(承宣)을 제배한다 합니다.
하니 진윤승이 나오는지라 군사가 이를 죽여 큰 돌로써 덮었다.
2년에 정중부가 서북면 병마 판행영병마(西北面兵馬判行營兵馬) 겸(兼)
중군 병마 판사(中軍兵馬判事)가 되었는데,
처음에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 간의대부(諫議大夫) 김보당(金甫當)이 대담하고 용기가 있어
정중부와 이의방 등이 그를 꺼렸다.
이듬해에 김보당이 정중부, 이의방을 토벌하고 다시 의종(毅宗)을 세우고자하여
녹사(錄事) 이경직(李敬直) 및 장순석(張純錫)과 함께 꾀하여
장순석과 유인준(柳寅俊)으로 남로 병마사(南路兵馬使)로 삼고
배윤재(裴允材)를 서해 도병마사(西海都兵馬使)로 삼아 군사를 내게 하고
곧 동북면 지병마사(東北面知兵馬事) 한언국(韓彦國)과 함께 군사를 들어 응하게 하였는데,
장순석, 유인준 등은 거제(巨濟)에 가서 의종을 모시고 나와 계림(鷄林)에 거처하게 하니,
정중부 이의방이 이를 듣고 장군(將軍) 이의민(李義旼), 산원(散員) 박존위(朴存威)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남로로 가게하고 또 군사를 서해도에 보내어 이를 도모하니,
안북 도호부(安北都護府)가 김보당, 이경직 등을 잡아 서울에 보내거늘 이의방이 국문하고
저자에서 죽였다.
고려사 128권 7쪽

[원문] 初甫當之謀起兵也內侍陳義光,裵允材知之甫當臨死誣曰凡其文臣孰不與謀於是一切
誅戮或投江水旬日閒文士戮且盡中外洶洶莫保朝夕承宣李俊義及陳俊自知無道乃請義方止殺戮
郎將金富亦謂仲夫義方曰天意未可知人心不可測恃力不揆義선치1)衣冠世寧少金甫當乎吾輩
有子女者通婚文吏以安其心可久之道也
註1)사냥할 선(개사슴록 변+爾), 풀 깍을 치(초두밑에+雉)
[본문내용] 처음에 김보당이 군사 일으키기꾀하매,
내시(內侍) 진의광(陳義光), 배윤재(裴允材)가 이를 알았는데 김보당이 죽음에 이르자 속여 말하기를,
무릇 문신(文臣)으로서 그 누가 이 꾀에 참여하지 않았으리요. 하는지라 이에 모두 베어 죽이고
혹 강물에 던져 죽였는데 10일간에 문사(文士)들을 모두 죽이니
중외가 흉흉하여 조석을 보존치 못하는지라 승선(承宣) 이준의(李俊義) 및
진준(陳俊)이,스스로 무도함을 알고, 곧 이의방에게 살륙을 중지할 것을 청하였으며,
낭장(郞將) 김부(金富)도 역시 정중부, 이의방에게 말하기를,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하며,
인심(人心)을 가히 측량치 못하거늘 힘만 믿고 의(義)를 생각지 않으며,
의관(衣冠)(官吏)를 사냥하여 풀베듯 하면 세상에 어찌 김보당(金甫當) <같은 사람>이 적으리요.
우리들 중에 자녀(子女)있는 자는 문리(文吏)와 통혼(通婚)하여,
그 마음을 편안케 함이 가히 오래 갈 수 있는 길이라. 하거늘 뭇 사람이 이를 청종(聽從)하므로
이로부터 화(禍)가 점차 그쳤다.
이의민(李義旼) 등이 계림(鷄林)에 이르러 의종(毅宗)을 죽이고 또 이듬해에는 정중부(鄭仲夫)를
문하 시중(門下侍中)에 제배(除拜)하였다.
이에 앞서 이의방(李義方)이 이고(李高), 채원(蔡元)이 자기를 핍박함을 미워하여 이를 죽였는데,
정중부(鄭仲夫)는 화(禍)가 자기 몸에 미칠가 근심하여 관위(官位)를 사양하고자 하여 문(門)을 닫고
나오지 않으니 이의방(李義方)의 형제(兄弟)가 술을 가지고 그 집에 가서 기쁘게 대우(待遇)하거늘,
정중부(鄭仲夫)가 맞아들이고 실상을 고하는지라 이의방(李義方) 등이 서로 약속하고 맹세하여
부자(父子)가 되고 말이 매우 간절하니 정중부(鄭仲夫)가 이에 안심하였다.
정중부(鄭仲夫)의 아들 지병마사(知兵馬事) 상장군(上將軍) 정균(鄭筠)이 비밀히 승(僧) 종참(宗참)을
달래어 이의방(李義方)의 형제(兄弟)를 죽이고자 하매, 종참(宗참)이 정균(鄭筠)을 천거하여
모주(謀主)를 삼아 왕께 친근(親近)케 하고 후정(後庭)에 출입(出入)하여 꺼림이 없더니,
드디어 승선(承宣)을 제배(除拜)하였다.
정중부(鄭仲夫)는 성질(性質)이 본래 탐비(貪鄙)하여 재물 늘이는 일을 싫어하지 않더니,
시중(侍中)이 됨에 미쳐 널리 전원(田園)을 확장하매 가동(家童)가 문객(門客)이 권세를 믿고
방자하므로 중외(中外)가 이를 괴롭게 여겼다.
5년에 정중부(鄭仲夫)가 보제사(普濟?寺)를 중수(重修)하고 낙성회(落成會)를 설(設)하여
왕의 행차하심을 청하매 유사(有司)가 간(諫)하여 그치게 하니,
정중부(鄭仲夫)가 가만히 승록사(僧錄司)로 하여금 주청(奏請)하여 친히 행차케 하고,
정중부(鄭仲夫)가 성찬(盛饌)을 갖추어 올리거늘 왕이 종용(從容)히 유흠(留欽)코자 하지 않고,
곧 양부(兩府)의 재추(宰樞)와 승선(承宣)과 제사(諸司)의 시신(侍臣)에 명하여,
동시에 부연(赴宴)케 하였다.
때에 정중부(鄭仲夫)의 나이 이미 70세이나 권위(權位)를 버리고자 하지 않는지라,
낭중(郞中) 최충의(崔忠義)가 아부하여 말하기를,
재상(宰相)에게 궤장(杖)을 하사하면 비록 나이 70세이나 치사(致仕)치 않는다.
고 하므로 정중부(鄭仲夫)가 기뻐하여 예관(禮官)에게 비유로 간(諫)하게 하고 한(漢)의 공광(孔光)의
고사(故事)에 의하여 궤장(杖)을 하사하고 국사(國事)를 모두 처결케 하매,
때로 중방(重房)에 앉아 사람의 죄(罪)를 의론하거늘 백료(百僚)가 문(門)에 나아가 축하하였다.
6년에에 정중부(鄭仲夫)가 병(病)으로 면(免)하기를 청하니,
제령(諸領)을 군사(軍士)가 익명(匿名)의 방(榜)을 붙여 말하기를,
시중(侍中) 정중부(鄭仲夫) 및 아들 승선(承宣) 정균(鄭筠)과 사위 복야(僕射) 송유인(宋有仁)이
권세를 천단하고 방자하므로 남적(南賊)이 일어남은 그 근원이 이에 의함이니,
만약 군사를 내어 치려하면 반드시 먼저 이 무리를 죽인 뒤에야 가능하다, 하는지라
정균(鄭筠)이 이를 듣고 두려워하여 해직(解職)하기를 빌고 여러 날 동안 나오지 않았다.
8년에 정중부(鄭仲夫)가 치사(致仕)하였는데 가노(家奴)가 일찍이 금법(禁法)을 범(犯)하여
자라삼(紫羅衫)을 입었거늘 대리(臺吏)가 소유(所由)로 하여금 이를 벗기게 하니 노(奴)가
소유(所由)를 구타하고 달아나는지라 관리가 매우 분하게 여겨 길가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이를 잡았다.
다음날에 중승(中丞) 송정(宋訂), 어사(御史) 진광인(晉光仁)이 포박하고 국문하니
정중부(鄭仲夫)가 노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대(臺)에 이르러 송정(宋訂) 등을 죽이고자 하거늘
정균(鄭筠)이 이를 만류하였으나 정중부(鄭仲夫)가 드디어 왕께 아뢰고 이를 죄(罪)주고자 하였는데,
마침 기두(旗頭)인 녹상(祿尙)이 정중부(鄭仲夫)에게 고하기를,
대장군(大將軍) 장박인(張博仁)과 전 장군(前將軍) 조존부(趙存夫) 등이 가만히 실직한 무리들을
결집(結集)하고 어두운 밤을 기약하여 공(公)의 집을 침범하려 한다. 고 하니
정중부(鄭仲夫)가 이를 믿고 조(詔)하여 옥(獄)에 매기를 청하므로,
왕이 내시 장군(內侍將軍) 오광척(吳光陟) 등에 명하여 안문(按問)케 하였으나 죄상(罪狀)이 없었다.
또 기두(旗頭)가 고하기를, 동령(同領)의 기두(旗頭) 80인이 주가(酒家)에 모여 마시면서,
장박인(張博仁)을 옥(獄)에서 내보내기를 꾀한다.
하니 정중부(鄭仲夫)가 가만히 가동(家)을 보내어 잡아매고 국문하여도 역시 증거(證據)가 없는지라,
마침내 장박인(張博仁)을 해도(海島)에 귀양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남쪽 원방(遠方)에 유배(流配)하였다.
또 기두(旗頭) 강실(康實)이 무고(誣告)하기를, 추밀(樞密) 최충렬(崔忠烈)이 정중부(鄭仲夫)를
모해(謀害)한다. 고 하니 정중부(鄭仲夫)가 안국(按鞫)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옥사(獄事)가 연달아 일어나매, 송정(宋訂) 등을 다스릴 여가가 없는지라
왕이 정중부(鄭仲夫)의 분(憤)이 풀어지지 않음을 근심하여,
송정(宋訂)의 직(職)을 파(罷)하고 진광인(晉光仁)을 공부 원외랑(工部員外郞)에 좌천(左遷)시켰다.
광덕리(廣德里)에 옛적부터 태후(太后)의 별궁(別宮)이 있었는데,
화재(火災)로 인하여 거둥하지 않는 지라 정균(鄭筠)이 사서 사제(私第)로 삼기를 청하거늘,
태후(太后)가 명하여 그 값을 받지 않고 주니 정균(鄭筠)이 크게 공역(工役)을 일으켜 영조(營造)하였다.
때에 왕이 수창궁(壽昌宮)에서 태후(太后)의 병을 시중하였는데,
그 땅이 궁(宮)에서 100보(步)도 되지 않고 또 세행(歲行)에 태후(太后)의 꺼리는 방위(方位)라
왕이 이를 깊이 미워하여 여러 차례 조(詔)하여 그 역사(役事)를 그만두게 하고자 하였으나,
정균(鄭筠)을 꺼리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정균(鄭筠)이 오랫동안 지병부(知兵部)로 무반(武班)의 전선(銓選)의 일을 관장(管掌)하매,
청알(請謁)이 복주(輻輳)하므로 자못 이를 싫어하여 여러 차례 면(免)하기를 구하였으나,
윤허(允許)치 않았다. 9년에 정균(鄭筠)이 단기(單騎)로 천신사(天神寺)에 가서 이를 피하니,
왕이 내시 낭장(內侍郞將) 유득의(柳得義)를 명하여 돌아오도록 설유하라 하므로,
사자(使者)가 연속 부절하니 정균(鄭筠)이 이에 돌아오므로 지도성사(知都省事)로 고쳤다.
정균(鄭筠)이 일찍이 상서(尙書) 김이영(金貽永)의 딸을 달래어 처(妻)를 삼고,
구처(舊妻)를 소박하였으며 욕심을 마음대로 하여 절도가 없었는데,
장군(將軍) 경대승(慶大升)이 평소에 정중부(鄭仲夫)가 행한바를 분하게 여겼고,
또 정균(鄭筠)이 가만히 공주(公主)에게 장가가기를 도모하므로, '왕도 역시 이를 근심하는지라
경대승(慶大升)이 예의(銳意)로 이를 쳐서 이미 정균(鄭筠)을 죽이고,
이로 말미암아 금군(禁軍)을 발(發)하여 정중부(鄭仲夫) 및 송유인(宋有仁)과 송유인(宋有仁)의 아들
장군(將軍) 송군수(宋群秀)를 분포(分捕)하니 정중부(鄭仲夫) 등이 변(變)을 듣고,
민사(民舍)에 도망하여 숨거늘, 이를 모두 집아 베어 머리를 저자에 다니 중외(中外)가 크게 기뻐하였다.
이소응(李紹膺)은 벼슬이 참지정사(知政事)에 이르렀으나, 녹위(祿位)를 탐하여 나이 70세가 지났으나,
오히려 치사(致仕)치 않았다.
이광정(李光挺)은 항오(行伍) 출신으로 정중부(鄭仲夫)가 의종(毅宗)을 폐(廢)할 때,
이광정(李光挺)이 그 꾀에 참여 하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대장군(大將軍)에 제배(除拜)되었으며,
명종(明宗) 초에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제수(除授)하고 여러 차례 옮겨 원사(院使)로
승진(陞進)하였다.
때에 내시 낭장(內侍郞將) 겸(兼) 병부 원외랑(兵部員外郞) 장보(莊甫)가 성품(性品)이 강직(剛直)하여
권귀(權貴)에 아첨하지 않았으며 일찍이 내시 장군(內侍將軍) 정존실(鄭存實)이 교만함을
면책(面責)하였는데 중방(重房)이 이를 듣고 장보(莊甫)가 장관(長官)을 능욕(陵辱)함을 탄핵하여,
거제 현령(巨濟縣令)으로 내치고자 하거늘 장보(莊甫)가 분노(忿怒)하여 추밀원(樞密院)에 나아가
이광정(李光挺) 및 부사(副使) 최충렬(崔忠烈)에게 일러 말하기를,
듣건대 공(公) 등이 나를 해상(海上)에 내치고자 한다 하는데 내게 무슨 죄(罪)가 있느냐.
하며 언색(言色)이 함께 엄하니 이광정(李光挺) 등이 노하여 곧 원도(遠島)에 유배(流配)하고,
가만히 사람을 시켜 수중(水中)에 밀어 넣게 하였으므로 듣는 사람이 이를 애석히 여겼다.
9년에 이광정(李光挺)이 참지정사(知政事)가 되었는데 일찍이 일로써 경시서 령(京市署令)
왕총부(王寵夫)에게 부탁하였으나 왕총부(王寵夫)가 이를 듣지 않는지라 이광정(李光挺)이
전리(電吏)를 보내 달래어 중서성(中書省)에 오게 하여 크게 꾸짖었으나,
왕총부(王寵夫)가 의(義)를 지켜 굴(屈)하지 않으므로 이광정(李光挺)이 노하여 꾸짖으며,
뜰에 끌어내려 그 의관(衣冠)을 빼앗고 가두었다가 얼마 후에 이를 석방(釋放)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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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형혹(熒惑)이 세성(歲星)을 범(犯)하는지라 이광정(李光挺)이 재변(災變)으로써,
두 번 해직(解職)하기를 빌었으나 허락치 않고, 태자 태부(太子太傅) 판병부사(判兵部事)를 더하였다.
이광정(李光挺)은 완고하고 탐욕이 많으나 무식(無識)하여 전주(銓注)가 매우 범람하였으며,
문하 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나아갔다.
13년에 총재(宰) 민영모(閔令謨)가 나이 늙음으로써 물러가기를 고하고자 하였으나,
나이 아직 70세가 못되었으므로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이광정(李光挺)이 그 직(職)에 대신 나아가기를
꾀하여 먼저 스스로 상표(上表)하여 물러가기를 비니,
이는 대개 민영모(閔令謨)의 치사(致仕)를 재촉함이었다.
이어 민영모(閔令謨)를 대신하여 수 태부(守太傅) 판이부사(判吏部事)가 되었다.
14년 8월에 태백성(太白星)이 상장(上將)<성(星)> 집법(執法)<성(星)>에 범(犯)하므로,
또 거짓 상표(上表)하여 사직하였다가 조금 뒤에 태백성(太白星)이 물러가매 다시 직(職)에 나아갔고
11월 팔관회(八關會)에 왕이 악(樂)을 구정(毬庭)에서 관람하니,
이광정(李光挺)이 수(壽)를 올리거늘 왕이 말하기를, 경(卿)은 이미 늙었으니 애석하도다.
하니 이광정(李光挺)이 눈물을 닦으며 흐느껴 울었는데,
대개 늙었으므로 직(職)을 빼앗길가 두려워함이었으니 사람들이 다 조소하였다.
관례에 의하면 연노 퇴직의 청원은 상표(上表)하여 걸퇴(乞退)함이 그 해 10월이었는데,
이광정(李光挺)은 작위(爵位)에 미련을 가지고 이에 이르러 걸퇴(乞退)한 것이다. 24년에 죽었다.
참고문헌>고려사,고려왕조실록
집필자/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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