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5장
고난을 통해 순종함을 배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 그리스도를 믿고 본받자
(찬송 204장)
2023-10-28, 토
맥락과 의미
1-4장에서 구약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해준 그리스도가 천사보다 크고, 모세보다 큰 분이라고 했습니다. 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했습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을 불순종한 백성은 이집트에서 해방되기는 했지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에게 하늘의 안식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을 고백한다고 하면서 마음으로 믿지 않거나 불순종하면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함을 알고 두려워합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우리와 같이 고난을 당하시고, 죄는 없으시지만 우리의 약함을 경험하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하늘 성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1-2장의 끝, 3-4장의 끝에서 이 대제사장을 소개했습니다. 고난받는 자를 도우시고 은혜를 주시는 그리스도 앞으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가자고 격려했습니다.
5-7장은 예수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임을 가르칩니다. 아론의 후손 대제사장이 하던 역할뿐 아니라 왕의 역할도 함께 하던 완전한 제사장을 소개합니다.
1. 인간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께 임명받은 대제사장 그리스도(1-10절)
1) 아론과 그 후손 대제사장(1-4절)
1절: 구약의 제사장직을 맡았던 아론과 그 후손은 사람 가운데서 임명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되, 특히 사람을 위해 속죄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이를 위해 두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2-3절: 첫째, 다른 사람들과 같이 연약함이 있습니다. 죄와 비참함의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부족하고 미혹을 당하는 자들을 용납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이 명하신 제사를 드릴 때 그의 마음에서 실제로 백성의 연약함을 감당하는 정서와 의지가 있어야 했습니다. 자기도 죄를 지은 사람으로서 자기 죄를 회개하며 백성을 위한 제사를 드립니다.
“용납”이라는 단어에는 “고난”이라는 표현이 들어있습니다. 제사장은 자기도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처럼 넘어지는 죄인에 대해 아파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들을 부드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자신도 죄인이므로 백성을 위해 제사를 드릴 뿐 아니라 자기 죄를 위해서도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4절: 둘째, 제사장 직분을 맡는 영광은 자기가 결정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임명해 준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5-10절)
그리스도도 아론 제사장의 자격을 가지고 더 완전하게 이루었습니다.
5-7절: 첫째,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의 영광은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명해준 것입니다. 히브리서 1장에서 예수님이 천사보다 낫다는 증거로 첫 번째와 마지막에 인용했던 시편 2편과 110편(1:5, 12) 말씀을 다시 인용합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시편 2:7) 이것은 구약의 왕 임명식에서 부르던 찬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세례받을 때에, 또 변화산 위에 계실 때에 하늘에서 이 말씀을 하시며 그리스도를 임명하셨습니다.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시 110:4) 이 말씀도 구약 왕의 임명식에서 사용한 찬송입니다. 구약의 왕을 “멜기세덱의 직분을 따르는 제사장”이라고 말했습니다. “멜기세덱”은 “의로운 나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때 “하나님의 아들”로서, “멜기세덱의 직분을 따르는 제사장-왕”으로서 임명되는 의식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는 완전한 제사장으로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왕으로 다스리고 계십니다.
7-10절: 둘째, 그리스도가 육체를 가지고 세상에 있을 때 사람의 약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는 연약함이 있었지만 죄는 없으십니다(4:15). 그리스도는 사람으로서 사람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았기에 대제사장의 자격이 있으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를 올리셨습니다.” 그분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십니다. 그 죽음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큰 고통이었습니다. “할 수 있거든 피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피하게 해달라고 눈물로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며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이 눈물의 기도를 아버지께서는 들으셨습니다. 그 고통을 이해해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죽게 하시는 것을 통해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구원받지 않고 오히려 죽으셨습니다. 죽으심으로써 죽음 가운데 있는 자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 고난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고난을 통해 순종하는 것을 경험으로 배워가셨습니다. 그래서 온전하게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이루었습니다.
온전함의 또 다른 뜻은 “직분에 임명받는다”는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순종함을 통해 대제사장으로서 역할을 하셨습니다. “배우지 않아도 되는”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배워야 되는” 그런 부족한 사람으로 낮아지셨습니다.
이제 우리 모든 사람도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그 순종을 통해 구원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근원(9절)이 되셨습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구속자일 뿐 아니라 우리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10절의 대제사장 그리스도는 아론 제사장 가문의 제사장과는 다릅니다. 이분은 멜기세덱을 계승하는 대제사장이십니다. 왕(멜기세덱: 나의 왕)이요, 제사장으로서 임명받으셨습니다. 아론의 후손 제사장처럼 자기 죄를 위해 제사를 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2. 구원의 초보에 머물지 말고 강한 음식을 먹으며 성장하라(11-14절)
11절: 이런 멜기세덱에 대해서, 그리고 멜기세댁의 후예로서 왕이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더 풍성히 가르치고 싶지만 더 나갈 수 없습니다. 앞으로 7장에서 다시 멜기세덱에 대해 가르치기 위해서 5장에서는 가볍게 책망하면서 마음을 준비시킵니다.
히브리서를 받는 성도들에게 가르칠 “말씀”은 많지만 그들이 “듣는 것”이 둔합니다. “둔하다”의 원래 뜻은 “게으르다”입니다. 말씀을 배우는 데 게으릅니다. 말씀을 순종하는 데 게으름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12-14절: 성도들도 장성하여 온전하게 되어야 합니다. 구원의 기초가 되는 죄용서, 회개, 세례 등 “젖과 같은” 가르침을 받는 상태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 구원의 초보에 대한 말씀은 계속 들어야 하는 기초입니다. 그러나 “단단한 음식”을 먹는 온전한 데까지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문제입니다.
믿음의 어린아이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입니다. 경험하는 것은 훈련/시험을 이기는 것을 말합니다(고전 10:13). 고난 가운데서도 강한 운동 선수처럼 연단/훈련을 받아 성장합니다. “의의 말씀을 분별하는 것에 연단받는 것”은 무엇이 옳은가 나쁜가를 아는 것뿐 아니라 의로운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단단한 음식”은 “견고하고 굳센 음식”입니다. 이 음식을 먹는 자는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합니다”(벧전 5:9).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이 굳세어지는 것”(행 16:5)입니다. 굳센 음식을 먹는 것은 배우는 것도 있지만 배운 것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굳게 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순종함으로 온전하게 되셨듯이(9절), 성도도 순종함으로써 온전하게 됩니다.
믿고 복종할 일
오늘도 성령님은 어린아이 같은 우리에게 온전한 어른으로 성장하라고 말하며 격려해주십니다.
들은 말씀을 잊어버리지 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일에 게으르지 맙시다. 신실하고 충성되어 착하다는 칭찬을 받읍시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의 아들이 되어 우리 죄를 위해 저주받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 고난을 받고 그 가운데서 순종함을 배워가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봅시다”(히 12:2).
말씀을 배울 뿐 아니라 작은 일에서도 순종하여 더 단단하게 성장합시다. 온전하신 그리스도를 향하여 성장합시다. 우리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를 도우시도록 기도하며 순종하는 하루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1. 오늘 말씀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2. 오늘 말씀에서 주신 교훈은 무엇입니까? 3. 오늘 말씀에서 순종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2절, “용납”
“용납”(메트리-파테오)은 길이를 재는 “자”(메트리)와 “고난”(파테오)이라는 말이 합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제사장은 다른 사람의 죄와 고난에 자기를 맞추면서 아파하고 고난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죄는 없으시지만,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에 대해 공감하고 부드럽게 대하십니다.
<참고>9절, 영원한 구원의 “근원”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근원”(9절, 아이티오스)이 되셨습니다. 이 단어와 다르지만 비슷한 뜻을 가진 것이 “아르케”입니다. “아르케”는 “구원의 창시자”(2:10), “믿음의 주”(12:2)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과 믿음의 원인, 근원, 시작하는 분, 선구자, 모델입니다. 요약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의 공로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분이시며,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이십니다.
<참고> 11절, “둔하므로”
말씀을 깨닫는 것이 둔한 이유는 단순히 지식이 부족해서만은 아닙니다. “둔한 것”은 게으른 것을 말합니다. 게으름은 주님께 충성함/신실함이 적은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에서, “악하고 게으른(옥네로스) 종”(마태복음 25:26)의 반대는 “착하고 충성된/신실한 종”(피스토스, 마 25:21,23)이라고 가르칩니다. 깨닫는 것이 둔한 것은 주님을 향한 신실성이 적은 것이 하나의 원인이고, 그래서 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닫는 것이 둔한 이유는 깨닫는 지식도 문제지만(무식함) 죄로 인해 미혹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2절). 4:2에서도 “들은 바 말씀”이 있지만, 믿음(피스토스)으로 화합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합니다. 순종하는 것에 게으르기 때문입니다(노트로스, 6:12). 그리스도처럼 순종하고 배우는 일에 진전이 없기 때문에 많이 가르치기도 힘듭니다.
<참고> 9절, “온전케 됨” = 14절, “장성한”
그리스도께서 순종을 통해 온전하게 되었습니다(텔레이오, 9절). 성도들도 순종을 통해 “장성한”(텔레이오스, 14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참고> 14절, “단단한”
“단단한(스테레오스) 음식”은 견고하고 굳센 음식입니다. 이 음식을 먹는 자는 “믿음을 굳게 하여(스테레오스) 마귀를 대적합니다”(벧전 5:9).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이 굳세어지는 것”(스테레오, 행 16:5)입니다. 굳센 음식을 먹는 것은 배우는 것도 있지만 배운 것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굳게 서는 것입니다.
<참고> 13절, “경험”
믿음의 어린아이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아-페이로스) 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처럼 온전한 자는 하나님 안에서 의로운 일을 하는 훈련/시험(페이라조, 고전 10:13)에서 이깁니다. “의의 말씀을 분별하는 것에 연단받는 것”은 무엇이 옳은가 나쁜가를 아는 것뿐 아니라 의로운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