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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먹을 것을 준비해 온 제자들에게 그들이 “알지 못했던 양식”을 제시하심
[요한복음 4:32~34]
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한대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오늘은 먹을 것을 준비해 온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신 대목이다. 예수님은 뭘 먹고 배부르셨는가? 더 요약하면 예수님의 양식은 무엇인가? 이런 문제가 된다.
예수께서 여자와 대화하고 계신 사이에 제자들은 먹을 것을 준비해 왔다. 그런데 잡수시기를 청하자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했던 먹을 양식이 있다고 하셨다.
여자와 대화를 하고 있는 동안에 제자들은 동네에 내려가서 먹을 것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잡수시기를 청하니까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양식은 무엇인가? 아버지 뜻을 행하고 그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도 육신이시니까 물론 배가 고프시겠지만 그런 이야기를 지금 하자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 뜻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 목마르신 분이다. 이렇게 할 수 있다.
그의 양식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는 이 일을 때문에 목마르고 배고프신 분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가 구원의 빛을 본 것을 보시고 배가 부른 것처럼 만족하셨던 것이다.
(예수의 목마름이나 배고픔은) 이 여자의 목마름이나 우리 많은 사람들이 배고픈 것과도 차원이 좀 다르다. ‘아버지 뜻을 이루기 위해서 배고프다!?’ 이 점이 다른 점이다.
그런데 이 여자가 구원의 빛을 보고 기뻐한 것을 본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배가 부르셨다. ‘배가 부르다’는 것은 만족(滿足)하다는 뜻이다. 우리 인간의 본성 속에 만족이라는 개념은 배가 부른데서부터 온 것이다. 성경은 어떻게 이렇게 본질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여자는 남편문제로 목이 말랐고, 종교문제로 혼란스러웠고, 그리스도가 없어서 만족이 없었던 그런 사람이었다. 요즘도 이런 사람이 많다. 남편문제로 목이 마른 사람도 있고, 종교문제로 왔다갔다 혼란스러운 사람도 있고, 그리스도가 없어서 만족이 없는 사람도 많이 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서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이 여자는 만족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아주 큰 것이다.
두 사람 다 처음 만날 때는 둘 다 물이 필요해서 만났다. 이 여자도 목이 말라서 물 길으러 갔고 예수님도 행로에 피곤해서 물을 마시려고 갔는데 이 두 사람은 먹을 물로 만족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어떤 것으로 만족을 취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동안에 열심히 먹을 것을 준비해 가지고 온 셈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지금 만족하고 있는 이런 음식은 몰랐다. 본문대로 하면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했던 먹을 양식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육신의 음식뿐만 아니라 영적인 양식도 필요하다. 육신의 양식이 없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필요하지만 영적인 양식이 더 있어야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위임(委任)을 떠난 인간,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서 지어진 그 인간이 그 자리를 떠나고 나니까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다. 아무리 노력해도 소득이 없다. 자기가 일할 자리에 가서 일해야 하는데 일하지 않을 곳에 가서 일하면 소득이 없기 때문에 항상 진실을 찾고 있다. 모든 사람마다 참 이상하게도 우리가 생각할 때 불량배들 같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가면 제일로 진실을 더 찾고 있고 의리, 진실 이런 것에 죽고 살고 한다. 어떤 인격적인 소득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는 다 진실이란 것을 찾고 있다. 그 진실을 찾다보니까 남과 싸우기도 하고 판단도 하고 비난도 하고 이런 것이다. 자기는 그렇게 못하면서도 남은 또 판단한다. 이것이 참 이상한 일이다. 진짜로 진실한 사람이 남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보면 지도 별것 아니면서 저러네. 이런 사람이 꼭 진실을 판단한다. 진짜 진실한 사람은 아무 말도 안 한다. 참 이상한 일이다.
위치를 떠난 인간은 항상 진실이 없어 목마르고, 에덴을 잃은 인간은 안식이 없어서 불안하며, 배필과 분리된 인간은 하나됨이 없어 고독하다.
왜 이런가? 수고해도 소득이 없기 때문에 진실한 것을 자꾸 찾고 있다. 에덴을 잃어버린 인간은 안식이 없다. 하나님의 동산에서 살아야할 인간이 하나님 없는 동산 밖으로 나온 것을 세상이라고 하는데 거기는 안식이 없는 곳이다. 또 배필과 분리가 되었기 때문에 그냥 배필은 하와였지만 사실 인간의 배필은 하나님이었다. 이 배필하고 분리되고 나니까 사람이 이상하게 까닭 없이 고독하게 된다. 꼭 혼자 있기 때문에 고독한 것이 아니라 군중 속에 있어도 고독한 것이고 사람은 이상하게도 고독하다. 왜냐하면 하나됨이 없기 때문이다. 다 내 속을 안다면 고독할 일이 없지만 ‘내 속을 몰라’ 이러니까 고독하게 된다. 참 이상한 현상이 사람 속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영적인 양식이 사람 속에 없기 때문에 이런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 고독(孤獨)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어떤 철학자들은 아주 심각하게 생각했다. 보통 말하는 고독이 아니라 아주 더 근원적인 고독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죽을 때도 혼자 죽어야 되는 고독이다. 아무리 가깝다하더라도 죽을 때 같이 죽을 수는 없다. 옆에서 독약을 같이 먹고 죽어도 고독한 것이다. 죽어도 같이 죽는 것이 아니라 따로따로 죽는 것이다. 둘이 똑같이 농약먹고 한 날 한 시에 죽었어도 이것은 같이 죽는 것이 아니라 다 개별자(個別者)일 뿐이기 때문에 고독하다고 한다. 뭔지 모르는데 하여간 이런 문제가 있다.
이 목마름과 불안과 고독을 무엇으로 해결할 것인가? 예수께서는 물을 길으러 온 여자를 만나 “나의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고 하셨고, 음식을 준비해온 제자들에게는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렇게 말씀하게 하셨을까? 예수께서는 나의 음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다. 인생을 만족케 하는 참 양식은 자기를 지으신 이의 뜻을 행하고, 맡겨진 위임을 이루는 것이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무슨 물이 있어서 이랬을까? 무슨 양식이 있어서 이랬을까? 먹을 것을 누가 갔다드렸는가 했더니 그것이 아니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이렇게 대답했다. 인생을 만족케 하는 참 양식은 자기를 지으신 이의 뜻을 행하고 맡겨진 위임을 이룰 때 그 때 만족이 온다는 뜻이다. 그러기 전까지는 자기 일을 안 하니까 만족이 없다. 항상 자기 일이 아닌 남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차라리 세상을 살려면 남의 일을 하려고 작정하고 살면 편하다. 그렇지 않은가? 해보라! 내가 누구를 위해서 살겠다고 작정하고 살면 훨씬 더 행복하다. 자기를 위해서 살려고 하면 계속 불만이 생긴다. 왜냐하면 아무리 해도 해도 자기일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예 처음부터 나는 나를 위해 일할 자가 아니고 누구를 위해 살 자구나 라고 생각하고 좌우간 누구를 위해서 살면 그 사람은 그 만큼 행복하다. 자식들을 위해서 살다보면 행복하지 않은가? 그런데 자식들에게 뭔가를 기대하거나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러기 시작하면 불행해지기 시작한다. 아예 그런 생각하지 말고 자기는 그냥 소비할 자로 한 자루의 초가 어차피 탈 것이니까 탈 자로 알면 행복하다. 지금까지 행복하지 못하신 분이 있거든 오늘부터라도 당장 그렇게만 생각해도 어느 정도 행복할 수 있다. 나라를 위해서라든지 가정을 위해서든지 또 누구를 위해서든지 그 범위에 따라서 행복의 크기도 커지게 될 것이다. 내가 누구를 위해서 살 때 적으면 적은대로 행복해질 수 있다. 나를 위해 살면 소득이 없어서 항상 껄떡거리게 된다. 그러니까 사람을 만족케 하는 양식!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왜 만족할 수 없는가? 만족할 수 없는 길(하나님 같이 되려함)을 택했다. 소득이 없는 길을 택했다. 그러니까 창세기 3장에 보니까 네가 땀이 흘러야 먹고 살 것이다. 가시밭길일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한 것은 너는 수고해봤자 겨우 목이나 축이고 살다가 다시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 말이다. 그것은 길 자체가 아예 만족이 없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방금 말 한데로 최소한도 만족을 하려면 내가 나를 소비해야 한다는 길을 택했으면 그나마도 행복할 수 있는데 내가 나를 위해 살겠다는 길을 택하면 그나마도 불행하다는 것이다. 길 자체가 틀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원적으로 만족할 수 없는 길을 택했으니까 만족할 수 없는 길을 택해서 거기서 만족을 얻으려니까 되지 않는 것이다. 줄을 잘 서야하고 길을 잘 들어야 하지 빨리 달리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어디를 가려면 먼저 지도를 보고 어디를 갈 것인가를 먼저 정해야 하지 차만 빨리 간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차만 좋은 차 탄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운전을 잘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분주하지만 소득이 없고 갈망하지만 채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짐승들이 하루 종일 먹이를 찾아다니는 것처럼 무엇인가를 인생은 구하고 있는 것이다.
주둥이가 넓적한 저어새라는 것이 있는데 계속 좌우로 두리번거리며 다니는데 먹이를 찾느라 그런 것이다. 그런데 다른 짐승들도 다 그렇게 다니면서 노는 시간도 없이 먹이를 찾아다닌다. 이것처럼 인생도 찾기를 뭔가를 찾는데 채워지지 않는다.
육신의 배고픔은 음식의 결핍이니까 음식으로 채워진다. 내가 지금 배고프다 이 말은 내가 지금 밥이 없다는 말이니까 음식의 결핍이니까 그것으로 채워지는데 영적인 배고픔은 인격의 결핍이다. 그러니까 그 인격의 자리가 아니면 채워질 수가 도저히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위치와 본분인 인격을 버리고 하나님 같이 되기 위해서 선악을 아는 지식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행복을 얻을 방법이 없다.
하나님 같이 될 수 있는 자가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면 쉽지만 하나님 같이 될 수 없는 자가 하나님 같이 되려면 다른 것이 아니고 그것이 저주다. 어떤 사람이 100m 선수가 되려고 하면 되는 사람이 있다. 우사인 볼트는 노력하니까 됐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이 처음에 누구에게 너는 100m 선수가 될 수 있다고 잘 못 들었다면 나는 평생 저주가 되는 것이다. 다리 구조가 그렇게 생겼는지 심장 구조가 그렇게 생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달려도 앞으로 가지 않으니까 100m 선수가 될 수 없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만일 100m 선수가 되는 길을 택했다면 그것이 저주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고 부모들은 자녀들을 볼 때 자녀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것도 모르고 무조건 욕심을 부리면 애들이 죽는 것이다. 애들은 자기는 못하는데 무조건 하라고 하면 죽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할 일을 하면 된다. 지난번에 말씀 드린 데로 할 일은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해도 안 될 일도 있다. 그 안 될 일을 하려고 하니까 안 되는 것이다. 될 일을 찾는 것 이것이 참 중요한 일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같이 되려는 것 이것만은 안 되는 일이다. 다른 것은 다 되도 이것만은 안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세상대로 다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 같이 되고 나면 그 다음엔 떨어진다. 올라가기는 올라갔는데 올라가면 바로 떨어진다.
옛날에 꿩을 잡을 때 청산가리를 콩을 파서 그 속에 넣어서 초로 막아서 겨울에 보리밭에 거꾸로 놔두면 꿩이라는 놈이 와서 그걸 먹고 날아가다가 공중에서 그대로 떨어져 버린다. 왜냐하면 청산가리니까 먹으면 호흡이 안 되니까 바로 똑 떨어진다. 그렇게 해서 꿩을 잡아먹었던 시대가 있었다. 요즘에 그렇게 하다가는 큰일 나지만 그렇게 하던 때가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님같이 되는가 했더니 그만 떨어질 때 보면 완전히 꿩 떨어질 때 같이 떨어진다. 안 될 일은 안 되는 것이다. 될 일을 해야 된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할까. 그래도 사람들이 그렇게 하려고 할까? 꿩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자기는 안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런가 하는 것은 판이 그래서 그렇다. 오늘은 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이 판이 되면 인격은 무용지물이다. 노름판에 가서 인격이 필요하겠는가. 노름판에는 인격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기술이 필요하다. 세상 어디에도 인격이 필요한 곳은 없다. 세상에는 인격말고 다른 것이 필요한 곳이다. 판이 그러니까 인격이 무시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달리기를 잘하는 선수라고 하더라도 이번 전국체육대회에는 달리기 종목이 없다고 하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판이 100m 경주를 안 하는 판이 되어버리면 소용이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써 먹을 수 있는 판이 없으면 못 써 먹는다. 사람들은 왜 인격을 무시하는가? 그것은 인격을 써 먹을 데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 판이 그래서 그렇다.
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같이 되려고 할까? 그 판이 하나님같이 되어야만 하는 판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럴 것이다. 요 밑에 가면 화상경마장이라고 있다.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차가 가득 찬다. 왜냐하면 거기는 노름판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들어가서는 그 판에서는 그것을 해야 한다. 거기에 들어가서 딴 짓하고 있으면 이상한 사람이 된다. 그 판에서는 그것을 해야 한다. 수영장에 가서는 다 비키니 차림으로 수영을 해야 되지 나처럼 정장을 하고 돌아다니면 안 된다. 여름에 해변에 가보면 판이 완전히 다르다. 제주도는 그런 것을 잘 모르겠던데 대천 해수욕장에 가보니까 해수욕장하고 동네하고 붙어있었다. 그래서 온 동네 사람들이 비키니 차림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동네에서는 그렇게 하고 다녀도 아무렇지도 않다. 왜 그런가 하면 판이 그러니까. 대천해수욕장에서 그렇게 돌아다닌다고 해서 서울시내에서 비키니 입고 돌아다니면 대번에 잡아간다. 정신병원에서 잡아간다. 그러니까 판이라는 것이 참 중요하다.
나만 잘하면 된다는 이런 것을 사람들은 가르치려고 노력한다. 이런 것은 어떤 특별한 사람은 가능하지만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판에 의해서 움직여진다. 그러니까 이 판에서는 하나님 사람은 살기가 더 어렵다. 판이 그러니까. 세상 판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이 살기가 더 어렵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려면 열심히 해라 잘해라하는 특별한 길을 가르쳐 줘서 어떤 사람이 겨우 하는 그런 것을 가지고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이렇게 되어있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은 뭔가? 부처님처럼 해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겠는가? 또 지금 기독교 안에서까지라도 예수님처럼 해라! 이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예수님처럼’이라는 그 말 속에는 예수님 같은 위대한 분이 되라는 말이다. 그렇게 몇 명이나 되겠는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려면 그것은 어느 세월에 될지 모르는 일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가장 쉬운 것은 뭔가? 그것은 십자가였다. 그런데 그 십자가도 어렵다고 생각한다. 가장 나는 쉽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제시했다. 언제든지 십자가는 가장 쉬운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자기 자리로 내려오는 거니까! 그런데 딱 이 자리에 오면 사람이 이상해진다. 말하다보면 딱 느낀다. 안 들어가는 구나! 안 들어가고 있다. 쉬운 자리를 얘기하면 왜 안 되나! 그런데 어려운 데를 얘기하면 정신이 말짱해서 듣는데, 삼 천배를 하면 어찌되는 얘기를 하면 정신이 말짱해서 듣는다. 아이고, 예수님께서 죽으신 그 자리 죽었으니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은 것이다. 이말 하면 앞이 캄캄해지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것도 안 되겠고 다른 방법이 나와야겠는데 그래서 생각한 것이 판을 바꿔야 되겠다! 이 생각이 들었다. 판 전체를 바꿔버리면 무식한 사람이나 유식한 사람이나 유능한 사람이나 무능한 사람이나 다 들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판이 그러면 말이다. 이 판을 바꾸려고 하나님께서 하셨다. 인격이 살 판!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람이 살 판! 이것이 된다면 사람들이 그 말을 들을 때 귀가 번쩍 들어질 것이다. 왜 그 말을 한때 안 들리나 하면 판이 안 보이기 때문이다. 말은 맞는데 판이 없다. 그러니까 안 된다.
충청도에 가니까 바다를 생전 안 본 사람이 너무 많다. 태어나서 아직 바다를 한 번도 본적이 없단다. 그림에서만 보고 실제로는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 사람 앞에 가서 바다에 대한 얘기를 하면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를 것 아닙니까. 생전 안 봤으니까 마찬가지로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구속 받은 한 인격을 애기하면 판이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판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못 알아듣는 것이다. 말이 어려워서 못 알아듣는 것이 아니고 너무너무 쉽지만 그런 판이 없어서 못 알아듣는 것이다. 화투 중에 섰다라는 것이 있다. 섰다를 할 때는 딱 두 장 가지고 하는데 백만 원도 나가고 천만 원도 나간다. 한 끗에 말이다. 한 끗 차이에 천만 원, 집 한 채가 날아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섰다라는 것이 집어넣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백만 원 넣고 백오십만 원 넣고 이백만 원 넣고 찌르는 것이니까! 막 찔러놓고 마지막에 딱 깐다. 단 한 끗 만 모자라면 왕창 나간다. 이것을 보고 섰다판이라고 한다. 그 판에는 그 법이 통한다. 전부 그 판이 통한다. 그 판에서는 화투패가 위력이 굉장하다. 장땡이라고 하는 것이 단풍이다. 단풍 두 장이 들어오는데 집 한 채가 홀랑 날라간다고 생각해보라. 단풍 두 장이 들어오는 것이 장땡이다. 섰다판에 안 가면 단풍 두 장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집에 누군지 모르지만 화투 한 케이스를 갖다 놨다. 말짱 새 것이 있다. 이번에 짐 정리 하다가 나오는데 그 것은 우리 집에 와서 말짱 놀고 있었다. 몇 년 놀았는지 몰라. 판이 아니니까 자기 판이 아니니까. 별 볼일 없는 사람도 그 사람이 쓰일 수 있는 판에 가면 용면을 발휘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모든 인류가 살 수 있는 그런 판이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큰 고래라도 바다가 없으면 힘을 쓰지 못하고 죽는다. 고래가 힘을 쓰고 살아가려면 바다가 있어야 하는데 고래는 스스로 바다를 만들지 못한다. 그러면 누가 고래에게 바다를 만들어 줄 것인가? 역시 고래를 지으신 하나님뿐이다.
이와 같이 인격이 살 곳은 인격을 주신 하나님이 만들어 주셔야 한다. 비록 사람이 버리고 떠났다고 해도 하나님밖에는 만들어 주실 분이 없다.
이 판은 누가 만들 것인가? 주식회사, 증권회사도 하나의 판이다. 판을 만들어 놓으니까 사람들이 돈 을 가져다가 찌른다. 노름도 노름판을 만들어 놓으면 사람들이 와서 노름을 한다. 화상 경마장 만들어 놓으니까 돈을 가져온다. 판을 만들어 놓으니까! 인격이 살판은 누가 만들어야 되나 이 말 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만들겠는가? 오바마 대통령이 만들겠는가? 이것은 인격을 만드신 이가 만들 수밖에 없다. 비록 사람이 그것을 버리고 떠났지만, 무시하고 떠났지만 그래도 하나님 밖에는 만드실 분이 없다. 그래도 왜냐 우리는 무시하고 떠났기 때문에 물을 떠난 고기는 자기가 물을 만들 수는 없다. 고래가 힘이 얼마나 센가? 엄청나다. 그놈이 물 밖으로 나오면 아무 힘을 못 쓴다. 금방 죽어 버린다. 그 고래가 자기가 물을 만들어서 자기가 살 수 있겠는가? 자기는 물을 만들 수는 없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물속에서는 용맹했었지만 자기가 물을 만들어서 용맹을 발휘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사람도 마찬가지 이다. 인격은 사람이 정해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것이기 때문에 내가 버릴 수는 있을지 몰라도 살 수 있는 판을 만들려면 하나님 밖에는 만들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 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 판이 다시 만들어지기만 한다면 어린 아이들까지라도 다 하나님을 알 것이라고(렘31:31) 하셨다. 아버지 하나님은 어찌할 수 없는 인생을 아시고 벌써부터 이 약속을 해놓으셨고, 예수는 이 약속을 이루려고 세상에 오신 그의 아들이시다.
예레미야 31장 32절에 보면 내가 새 법을 너희에게 주어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하겠다. 그 날 이후로는 어린아이나 누구라도 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날이 언제이겠는가? 그런 판이 왔다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아무라도 보면 다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약속하셨다. 예수님은 이 약속을 이루시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약속을 하신 분의 아들이다. 이 약속을 하신 분의 아들, 아들이라는 개념은 그런 개념이다. 아버지는 약속하시고 아들은 이루신다. 다윗이 약속을 받았고 솔로몬이 이루었지 않은가! 그러니까 아버지는 약속하고 아들은 이루었다. 예수는 누군가? 바로 이 예레미야 31장 32절에서 약속하신 그분의 아들이다.
성경에는 ‘예수 안’, ‘그리스도 안’, 이라는 말이 많다. 이 말은 ‘아담 안’과 대비되는 말이다. ‘안’은 판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 판에서는 그 판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경에는 ‘예수 안에’, ‘그리스도 안에’ 라는 말이 아주 많다. 그리고 특별히 바울 서신을 읽으면 이 말이 아주 많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 in christ.’ 이 말은 ‘아담 안에’와 대비되는 말이다. 이 ‘안’이라는 말은 무엇인가? 이것을 우리는 ‘판’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다. 예수 안, 예수 판, 그리스도 안, 그리스도 판, 이렇게 될 것이다 그러면 더 쉽지 않겠는가? 인간이나 동물이나 모든 생물들은 다 자기들이 생존하고 있는 판이 있다. 그 판에서 산다. 그 판에서 놀고 그 판에서 산다. 그러니까 ‘안’이라는 말은 ‘판’이라고 해석해도 될 것 같다.
그러니까 아담 판에서는 아담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판이 아담 판이니까. 화투판에 가면 화투를 쳐야 할 것이다. 화투판에 가서 포커를 치고 있는 사람은 정신없는 사람이다. 화투판에 가서 윷놀이하고 있다. 이것도 말이 안 된다. 화투판에 가서는 화투를 쳐야 한다. 그래야 한 끝 차이로 몇 백 만 원을 딸 수 있다. 그 기술자들은 그렇다. 상대방에게 아홉수를 준다. 그러면 아홉 끝을 가진 사람은 내 위에 누가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계속해서 돈을 찔러 넣는 것이다. 그런데 딱 까놓고 보면 기술자는 장땡을 가지고 있다. 한끝 차이다. 너무 많이 차이가 나면 안 된다. 한 끝 차이가 나게 하는 것이 기술자라고 한다. 48장을 가지고 돌리는 데 어떻게 해서 그 사람은 9끝을 주고 나는 열 끝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기술자들이 있다. 그러니까 화투판에 가서는 화투를 쳐야지 화투판에 가서 윷놀이하고 있으면 안 된다. 그래서 아담 판에서는 아담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판만 예수가 된다면 예수 판에 가면 예수로 살게 된다.
아담 판은 판자체가 목마름으로 가는 판이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같이 되려는 곳이니까 목이 마를 수밖에 없다. 안 되고 안 될 수밖에 없다. 예수 판은 축복으로 가는 판이다. 이것이 새사람을 위한 새 판이다. 예수 판이다. 아담 판에서 우리 인생은 저주였다. 그런데 그리스도 판, 예수 판에서 사람은 축복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판 안에서 보면, 창조의 판 안에서 딱 보면 인생은 너무나도 복된 자다. 우리가 창세기 1장의 판, 2장의 판에서 보면 인생처럼 복된 게 없다. 그런데 3장판에 가 보면 인생은 저주인 것이다. 판이 달라지니까 그렇게 된다. 그러니까 어느 판에 가느냐가 문제이고 하나님이 어느 판을 우리에게 만들어 줄 것인가? 이것이 문제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5:17)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어떻게 새로운 피조물인가 막연하다. 그리스도 판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 안에 있으면 다 그 사람이다. 노름판에 있는 사람들은 다 노름쟁이다. 노름을 하나 안 하나 다 노름쟁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노름을 직접하는 사람도 있고, 심부름을 하는 사람도 있으며, 판을 만들어 놓고 고리를 따 먹는 사람도 있고 그렇다. 그 안에는 다 노름판이니까 알고 보면 다 노름쟁이다. 부엌에서 백숙을 삶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것도 다 노름판이고, 노름쟁이다. 백숙 한 마리에 4만원 한다. 그런데 거기 가면 10만원해도 아무도 비싸다고 안한다. 왜냐하면 그게 내 돈으로 먹는 것이 아니다. 판돈으로 먹는다. 그 판에서 도는 돈으로 먹으니까 내 돈으로 먹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10만원이 됐든, 20만원이 됐든 상관이 없다. 그래서 판을 짜 놓고 장사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 이 말은 ‘그리스도 판에’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멀쩡하던 사람이 노름판에 들어가면 사람이 변한다. 자주 이야기 했지만 우리 뒷집에 있는 분은 우리 동네에서 제일 부자였다. 제일 부자 집의 외아들이다. 그런데 정말 점잖은 분이다. 생전 누구와 큰소리를 안 해 보신 분이시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해마다 한 번씩 노름판에 들어간다. 노름판에 들어가면 밭 한 뙈기 팔아먹고 논 한 뙈기 팔아먹고 나오는 것이다. 그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다. 너무나 사람이 점잖으니까... 그러나 그 판에 들어가면 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판 안에 들어가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 판은 그 안에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들에 의해서 또 확대된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판이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만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판이 된 사람들이 많아지면 판이 점점 넓어진다. 노름도 사람이 많아지면 노름판이 커진다. 지금 제일 커진 것이 증권회사다. 증권회사는 노름판이다. 말이 좋아서 증권회사다. 노름판이다. 쉽게 말하자면 돈 놓고 돈 먹는 곳이다. 그리고 그 노름판을 합법화 시켜준 곳, 그곳이 바로 증권회사다.
그러니까 이것은 점점 확대된다. 먼저는 예수가 판이고, 나중에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확대된 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점점 판이 커진다. 이것이 바로 교회다. 우리는 지금 예수의 확대판이다. 예수 판이 확대되어서 교회가 된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으면’ 이 말을 ‘누구든지 교회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 말이 된다. 그러니까 얼마나 쉬운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려면 어렵다.
귀가 닳도록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었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려면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어디에 전도하려면 막연하다. 책 보라고 할 때는 안 보고, 공부하라고 할 때는 안 하더니 막상 전도하라고 하니까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자꾸 보라는 것이고 읽어보라는 것이다. 몇 번씩 읽어야 된다. 그래야 될 일이지 슬쩍 듣는다고 다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가 써 봐도 그렇다. 한 번 써 놓고, 두 번째 또 보면 또 고칠 데가 있다. 그러면 고쳐 놓고 또 열어본다. 그러면 또 고친다. 열어보면 또 고칠 게 있다. 늘 고칠 게 있다. 그런데 여러분이 한 번 듣고 다 알겠는가? 안 된다. 그러니까 내 속을 알려면 여러분이 여러 번 읽어야 된다.
예수님은 새 판을 만들기 위해서 이것을 약속하신 분의 아들로 오신 것이다.(렘31:31참) 예수는 누군가? 그보다 훌륭하신 분들이 없는가? 다 있다. 예수님보다 훌륭하신 분이 없어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 약속을 이루시려고 오신 분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분을 따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판이 아니더라도 나 혼자 독불장군으로 나 혼자 독야청청하게 살 수 있는 사람 같으면 예수를 우리가 믿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안 되기 때문에 이분을 우리가 따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분이 그런 판을 만들어 오셨으니까 그렇다.
아버지는 약속하시고 아들로는 이루시고 그런 셈이다. 이것을 이루셨기 때문에 아들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은가? 아버지의 생명을 이루는 것은 아들이 아닌가? 아버지의 생명을 이루는 것은 아들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을 이루는 것이 아들이란 말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들이다.
사막에서는 누구나 목마르고 배고프다. 이와 같이 아담판(세상)에서는 누구나 목마르고 배고프다. 사막에는 물이 없어서 목마르고 세상에서는 인격(그릇-통로)이 없음으로 하나님의 공급이 없어서 목마르다.
사막에 가면 누구나 목마르다. 거기에는 장사도 없고 약한 사람도 없다. 다 똑같다. 누구나 목마르다. 물이 없으면 사람은 누구나 목마르다. 이와 같이 아담 판에서는 누구나 다 목마르다. 왜냐하면 판이 그러니까 그렇다. 멀쩡하던 사람이 사막에 가면 목마르다. 그렇지 않은가? 멀쩡하던 사람도 여름이 돌아오면 덥다. 그렇게 더웠는데 요즘 어떻게 해서 기온이 확 내려서 10도 이하로 내려 가 버리니까 멀쩡하던 사람이 춥다. 어제까지 안 추웠는데 오늘은 춥다. 왜 그런가? 내가 어떻게 되어서 그런 게 아니고 판이 지금 그렇게 바뀌어 버렸다. 여름 판에서 가을 판으로 바뀌어져 버렸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있는데 갑자기 더웠다가 지금은 추운 것이다. 그냥 얇은 옷만 입고서도 더웠는데 이제는 두벌 세벌 입고 나와야 된다. 나는 멀쩡한 사람인데 알고 보니까 판이 바뀌었다.
우리는 이 판을 막기 어렵다. 나는 겨울이 와도 여름처럼 산다. 이것은 독종들이나 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못한다. 겨울에 외투를 잔뜩 입고 있다가 나는 여름이 와도 절대로 안 벗어. 이것도 역시 독종이나 하는 짓이다. 일반적인 사람으로는 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사막에서는 누구나 목마르다. 목마르지 않다는 사람은 전부 다 거짓말이다. 다 목마르다. 누구든지 그렇다. 판이 그런데 어떻게 목마르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사막에서는 물이 없어서 목마르고 아담 판에서는 왜 목마른가? 공급이 없어서 목마르다. 하나님과 줄이 끊어져 버렸다. 그러니까 공급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목이 마르다. 그런데 자기는 공급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른다.
아담 판에서는 인격으로 살려면 오히려 살기가 어렵다. 인격은 설 곳이 없고 쓰일 곳이 없어서 멸시를 받는다. 판이 그래서 그런 것이다. 그 판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아무 것도 해 주신 것이 없었다. 단지 그 판을 열어주셨을 뿐이다. 그런데 그녀는 자유를 얻고 담력을 얻어 동네에 내려가서 이가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하였다.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무엇을 해주었는지 여러분이 잘 생각해봐라. 제자들이 먹을 것을 준비하러 나가 있는 동안에 예수님하고 이 여자하고 우물가에서 무슨 얘기를 했다. 그렇다고 오동나무 이야기를 했겠는가, 앵두나무 얘기를 했겠는가. 이 여자하고 무슨 얘기를 했는데 이 여자가 물동이를 놔두고 동네에 내려가서 미친 여자처럼 외치는 것이다. 이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고 다니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이런 일이 생기는가? 예수님이 무엇을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겠는가?
나도 여러 가지를 생각해봤다. 무슨 말을 해서 한 말로 이렇게 할 수 있는 말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렇다. 예수님께서 왜 이 여자를 이렇게 만들었냐면 판을 열어줬다. 그래서 이 여자가 모든 것이 확 사라져버렸다. 판을 바꿔버리니까 모든 것이 한꺼번에 사라져버렸다. 거기서 판이 바뀌니까 자유를 얻은 것이다. 자유를 얻으니까 담력이 생겼다. 담력이 생기니까 나와서 정신없이 가서 그리스도를 봤다. 와 봐라. 이러고 다녔다. 판이 바꿔지니까 그렇다. 그냥 할 수 없고 그냥 하면 한번 하고 못한다. 어쩌다 홀려서 하면 한번하고 못하는데 판이 바꿔졌으니까 늘 계속 할 수 있다.
예수 안에는 너는 누구냐? 너는 누구 아내냐? 너는 누구 마누라냐? 몇 번이나 결혼을 했냐? 다섯 번 했나, 여섯 번 했냐? 너는 어디서 예배하나. 너는 장로교 인이냐 감리교 인이냐? 너는 천주교인이냐? 너는 웨스터민터 신앙고백을 믿냐? 아니면 뭘 믿냐? 이런 것이 없다. 예수는 그런 것을 안 물어본다.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나? 이런 것을 안 물어본다. 생각을 해봐라. 졸자들이나 그런 것을 물어보는 것이지 예수 안에 갔는데 그런 것을 물어보겠는가?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의 생각으로 생각을 해보더라도 예수님에게 갔는데 그런 것을 묻고 있겠나. 부처님 앞에 가면 그런 것을 묻겠나. 이것은 상식 이하의 일이다. 이것은 졸부들이 묻는 물음이다.
지금까지 이 여자는 누구를 만났냐면 너는 누구 아내냐? 몇 번이나 결혼을 했나? 너는 어디서 예배하냐? 이런 사람만 만났다. 그리고 그런 판에 살았다. 그런 판에 살다보니까 이 여자는 설 자리가 없다. 유대인을 만나면 너는 혼혈종이라 순종이 아니라고 무시를 하고 왜 다섯 번이냐 결혼을 했냐고 하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너는 누구 아내냐 하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거기서는 어디를 가도 그 질문 밖에 없으니까 그 판에서는 이리 뒤집어도 그 사람, 넘어져도 그 사람이다. 물속에 들어가 보면 이리가도 물이고 저리 가도 물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이 판에서는 어디를 가도 이 질문이다. 그렇게 안 할 데를 찾아봤지만 없다. 그래서 이 사람이 죽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니까 이것이 아니고 넌 사람이냐, 아니냐? 이것만 묻더라는 것이다. 너는 사람이냐, 아니냐? 그러면 당연히 사람이라고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예수 안에’ 이것은 너무 중요한 말이다. 예수 안에 거기에는 뭐만 있냐면 너는 사람이냐, 아니냐? 이것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이 여자는 인격만 있는 이 판에서 비로소 자유를 얻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게 된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길가에 돌아다니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이렇게 한다고 짐이 벗어지겠는가? 안 벗어진다. 그런데 혹시 그런 말을 듣고도 간혹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왜냐하면 자기가 너무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가 그것은 이 짐이 아니고 다른 짐을 지고 있다가 벗겨준다는 말을 들으니까 시원해져서 예수 믿는 사람이 있기는 있지만 이 여자는 그것이 아니고 판이 바꿔진 것이다.
다른 판에 왔기 때문에 자유가 왔다. 그래서 무거운 짐이 벗어지고 말았다. 너는 누구 아내냐 이 짐이 얼마나 무거운 짐인가? 너는 몇 번이나 결혼을 했냐 하는 질문이 얼마나 무거운 짐인가! 이것을 짊어지고 다니려면 얼마나 무겁겠는지 한 번 생각을 해봐라. 그것을 평생을 짊어지고 잠 잘 때도 내려놓지 못한다고 생각을 해봐라. 얼마나 이것이 힘이 들겠는가? 그런데 판이 바꿔져버리니까 소용이 없어져버렸다. 그래서 무거운 짐이 벗어진 것이다.
여자냐, 남자냐? 사마리아인이냐, 유대인이냐? 이런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회복되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다 들어야 할 말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불교인을 만나면 너와 나는 다르다고 셋방도 주지 않는다. 또 절에 다니는 사람 집에 방을 얻으러 가서 교회 다닌다고 하면 셋방을 안 준다. 이런 각박한 세상에서 무슨 생명이 생기겠나. 이 교리에 틀렸니, 저 교리에 틀렸니, 이러고 있는데서 어떻게 생명이 자라겠는가? 너는 유대인이냐 사마리아인이냐 너는 순종이냐, 혼혈이냐? 너는 여자냐, 남자냐? 누구 아내냐? 이러면 여기서 어떻게 사람이 살겠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한 인간으로 대하신다. 인간으로 회복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독교 안에서 늘 배운 것이 사랑이고 용서다. 매주 한 번씩은 최소한 들으니까 기독교인만큼 용서를 많이 배운 사람이 없다. 그렇지만 사랑을 매주 듣지만 사랑을 제일 못하는 것이 기독교인이다. 참 이상하다. 왜?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매주 들으니까 하고는 싶은데 그런 판이 없다. 그러니까 안 되는 것이다. 딴 판에 가서 그것을 하려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는 여러분이 자유롭게 잘 살 수 있다. 말도 자유롭게 하고 간증도 잘 된다. 그런데 다른 판에 가보니까 말이 막혀서 잘 안 되더라는 것이다. 전도 해보니까 안 되고 무슨 말을 할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잘했는데 시간 짧게 하라니까 더 길게 하고 그랬는데 왜 갑자기 입이 막혀서 말을 잘 못하냐? 판이 달라져서 그렇다. 판이 달라지니까 입이 막힌다.
지난번에 양생회 자매가 아주 재미있는 말을 써 놓았다. 양생회에서 영어모임을 한다고 모였는데 영어로만 얘기를 했더니 좋은 것이 뭐냐면 간증이 아주 짧다는 것이다. 영어를 능숙하게 못하니까 여러 말을 못하고 다 한마디씩만 하게 되니까 정말 좋다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도 간증을 길게 하는 사람이 나오면 누가 yellow 카드에 영어로 말하세요. 하고 써서 나와라. 간증 짧게 하세요. 하면 너무 야박하니까 영어로 말하세요. 하면 한마디 하기가 어려우니까 저절로 간증이 짧아지게 된다. 좋은 간증일지라도 너무 길어지면 좋았던 것이 다 없어져버린다. 우리교회는 간증이 많아서 모두들 들었었기에 서문 본문 이렇게 다 안 해도 된다. 이미 다 알고 있기에 핵심만 이야기하면 되는데 처음부터 시작해서 다하려고 하니까 너무너무 어렵다. 모두가 들은 얘기를 다시 리바이벌해서 다 해놓고 마지막 결론을 얻으려 하니 그게 쉽지가 않다. 딱 한마디로 자기가 받은 것만 얘기하면 쉬운데 그것이 어려운가 보다. 그러니까 판이 좋아야한다. 영어판에 가니까 말이 짧아진다. 영어판에 들어가면 도저히 길게 말할 수가 없다. 다음에 한번 그렇게 실험을 해봐야겠다.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서 새로운 판을 짜게 하셨다. 아담이 짜놓은 옛 판을 치우고 새판을 만드셨다. 예수는 이 판을 보여 주시느라고 배고픔을 잊으셨다. 다른 양식을 잡수신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아직 알지 못했던 양식이었다.
아담에게도 판이 있을 것이 아닌가? 아담에게 배당된 최선의 판이 있다. 그중에서 고르고 골라서 제일 좋은 판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이스라엘이라는 판이다. 인격이 살기에 가장 좋은 판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스라엘-율법, 이스라엘하면 율법이 딱 붙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제일 좋은 판이다. 너희가 가시밭길을 갔지만 그래도 이판에 와서 살면 좀 나을 것이다 하고 준 것인데 오히려 사람들은 이판에서 더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율법에 의해서 시달렸다는 말은 바로 그 말이다.
이스라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것은 너무너무 좋은 것인데 선택받은 백성, 선민이라는 그 속에서 사마리아 여자가 나왔다. 우리는 선민이고 너희는 선민이 아니라는 것이다. 율법은 너무너무 좋은 법이지만 이 법 때문에 사람이 매이게 되었다. 이 여자는 이것 때문에 시달린 것이다. 이스라엘-율법, 그래도 하나님에게 최선의 배당을 받은 것이 이것인데 거기서 인간은 더 시달렸고 모든 인간은 고달팠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판을 짜기로 작정하셨다는 말이다.
예수는 이 여자에게 이판을 보여준 것이다. 새로운 판을 보여준 것이다. 여자는 이판에서 자유와 해방을 주는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다. 그래서 서로 여기서 만족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판이고 알지 못했던 양식이다. 판이 바꿔지니까 사람이 바꿔졌다는 것은 모르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내속의 내면적인 문제를 해결 할 수있는가하는 이런 판에서, 나는 그대로 있는데 갑자기 태양이 떠오르더니 기온이 35도로 올라갔다하면 오늘 여러분은 집에서 입고 온 것 다 벗어야 할 것이다. 판이 바꿔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판을 바꿔주신 분에게 귀를 기울여야한다. 해방을 주신 분, 이 양식으로 배부르신 주님. 자기가 판을 내놓았는데 이 여자가 자유를 얻었으니 예수님은 너무너무 기뻤을 것이다. 이 여자는 마찬가지로 너무너무 황홀했을 것 아닌가? 다른 판에 와 버렸으니까. 여러분은 꿈이라도 이런 꿈을 한번 꿔보라. 예를 들어서 시커먼 판에서 살다가 하얀 판으로 왔다든가, 억압받던 판에서 살다가 자유하는 판으로 왔다든가, 어떻게 판이 한번 확 바꿔지는 꿈을 꿔보면 얼마나 시원한지를 알지 않겠는가? 꿈을 안 꾸더라도 상상력이 있는 분들은 상상을 한번 해보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 되겠는가? 판이 확 바꿔졌다. 일제하에 있다가 해방이 되었다. 판이 바꾸어지니까 당장 달라진 것이다.
이 양식으로 주님은 배부르신 것이다. 이 여자는 그걸로 배불러서 동네에 내려가서는 나팔을 불고 다닌 것이다. 예수님은 이 양식으로 배부르시니까 제자들보고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눈을 들어 들판을 봐라.’ 그렇게 말했다. ‘넉 달이 지나야’ 라는 말은 추수하는 기간이 아직 넉 달이 남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아직 덜 익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눈을 들어 들판을 봐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분명히 그때 현실은 아마 추수 때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엉뚱한 이야기를 하셨다. ‘눈을 들어 들을 봐라.’ 이것은 새 눈으로 새판을 보라는 것이다. 새로 만들어진 이 판을 보라는 것이다.
우리도 이 판을 보자! 육신의 양식은 추수할 기한이 있지만 영의 양식은, 인격은, 언제, 어디서나, 그 누구에게서나, 항상 바로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새로 만들어진 이 판에는 누구나 들어오기가 쉽다. 판으로 들어오기는 너무너무 쉽다. 내가 개인적으로 그런 사람이 되기는 너무너무 어렵지만 판으로 들어와 버리는 것은 너무나 쉽다. 성인군자들이 옷 벗고 돌아다니는 것은 죽어도 못할 짓이다. 그렇지만 대천해수욕장에 데려다 놓으면 성인군자라 할지라도 다 벗고 돌아다닐 것이다. 해수욕장에서 옷 입고 돌아다니면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렇듯 쉬워진다.
그러므로 어려운 것은 왜 어려운가? 판이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나는 그 판을 완전히 무시하고 산다. 이런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관중무시 이런 사람들이다. 청중무시 관중무시 이래 가지고 자기만 알고 막 가는 사람들 그것도 역시 또 별종이다. 그러므로 새 눈으로 새 판을 봐라. 우리도 이 판을 봐야 한다.
육신의 양식은 추수할 기한이 있다. 언제든지 뿌려서 언제든지 거둘 순 없다. 봄에 뿌려서 가을에 거둔다든지 이런 것이 있다. 그런데 영의 양식 이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다.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항상 바로 거둘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물질적인 추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인격은 변하지 않았다. 인간이 그렇게 버리고 무시했다 해도 없어지지 않았다. 소가 소이기를 싫어하고, 해서, 그가 모자를 쓰고 인간 행세를 한다고 해도 소의 격이 변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되찾을 수 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인격은 변하지 않았다. 다 없어질 것 같지만 변하지 않았다. 인간이 그렇게 버리고 무시했지만은 없어지지 않는다. 소가 소이기를 싫어한다고 해서 소의 격이 변할 수 있는가? 자기만 버린 것이 소의 격은 그대로 있다. 우리가 사람의 격을 버린다 해서 사람의 격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버려도 사람의 격은 사람의 격 그대로다. 내가 천당에 가도 이격으로 갈 것이고 지옥에 가도 이격으로 갈 것이고 어디를 가도 이격이다. 바꿔질 수 가 없다.
숯불에 생선을 구어 놓으면 고등어도 굽고 꽁치도 굽고 전어도 굽는다. 이렇게 굽는다고 전어가 고등어가 되겠는가? 고등어가 전어가 되겠는가? 아무리 구어도 전어는 전어다. 가을철에는 전어철이니까 맛있는 전어철이 돌아왔다. 집나간 며느리가 돌아온다는 전어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것은 절대로 안 변한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되찾을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구속이 생긴 것이다. 예수님께서 찾을 수 있다. 우리도 없는 것 같은데 있다.
이스라엘에게 정해준 기업은 영원히 변하지 못한다. 이런 법이 있다. 내가 전라도를 기업으로 받았으면 이것은 베냐민 집파에게 준 땅이면 영원히 변개치 못 한다. 다른 집파가 사갈 수 없다. 이것을 왜 이렇게 만들어 놨겠는가? 물론 현실적으로는 같은 동족들이니까 땅 가지고 못 싸우게 하려고 만들어 놨겠지만 그러나 더 큰 의미는 결국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것은 변개 할 수 없다.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것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인격이다. 사람에게는 인격이다.
그러므로 넉달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때는 항상 지금이다. 눈을 들어 보면 희어져 추수할 때 인 것이다. 추수하는 판에서는 목마름이 없다. 배고픔이 없다. 들어오기가 쉽다.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내 인생이 고달프다. 이런 사람은 고달프지 않는 판으로 들어가면 된다. 좋은 판으로 들어가면 되는데 좋은 판은 추수하는 판이다. 추수하는 판에 들어오니까 사라마리아 여자 같은 여자도 대번에 이가 그리스도다 하고 다닌다. 이 사람이 언제 신학교 가고 박사학위 받아가지고 이가 그리스도다 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판을 바꿔 놓으니까 대번에 바꿔진다. 교회는 바로 이 판이다. 새 판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다르게 생각하면 안 된다. 교회가 다른 것 하는 곳으로 생각하면 절대 안 된다. 그런 기준으로 교회를 보면 안 된다. 여기는 판이 다른 곳이다. 어떤 목적을 가진 새로운 판이지 여기서 세상이 원하는 그런 것이 다 있는 곳이 아니다. 어느 형제는 이러고 어느 형제는 저러고 이런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소용없다. 그것은 세상이 원하는 것이고 내가 원하는 것이며 내가 그랬으면 좋겠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교회는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와 교회 이것은 새판이다.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할 새 판이다. 더 이상 목마름과 배고픔이 없게 하는 새로운 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알지 못했던 양식이었다.
토요일 날 저녁에 우리 청년부에서 활이라는 영화를 가지고 프로젝트를 했다. 나는 안 봐서 잘 몰랐는데 어제 질문해서 들어 보니까 활이 사람 죽이는 활인데 사람을 살렸다는 말이다. 살릴 활(活)자 죽일 활 자가 살릴 활자가 됐다. 이런 뜻인가 보다. 다른 얘기도 많이 있지만은 활 때문에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활은 다른 사람을 죽이고 살았다. 상대방을 죽이고 내가 맞은 화살을 뽑아가지고 그 사람을 쏴서 그 사람을 죽게 하고 자기 동생을 살려 냈다. 이말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화살은 남을 죽이고 내가 사는 화살이지 않는가?
그렇지만 복음은 남을 죽이고 내가 사는 화살이 아니다. 이것은 영생하는 화살이다. 내게는 영생하는 양식이 있다는 것이다.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새로운 판이다. 우리가 스스로 새로운 판을 인정해야 나도 자유를 얻고 담력을 얻지 내가 스스로 이것을 율법 판으로 만들어 버린 다 던지 내가 스스로 이것을 세상의 다른 판으로 만들어 놓으면 자기가 그 안에 갇혀 버린다. 내가 만들어 놓은 대로 갇혀 버린다. 내가 그 사람 됐어 안됐어 하는 차원으로 생각지 말고 이것은 내가 자유를 얻을 수 있는 판, 사마리아 여자도 담력을 얻을 수 있는 판, 자유를 얻을 수 있는 판이다. 그 판이니까 나도 거기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판이 있어야 나도 자유를 하지 이 판이 없으면 내가 무슨 수로 나 혼자 자유를 하겠나! 그러니 우리는 이것을 소중하게 생각해야한다. 눈을 들어 밭을 봐라 희어져 추수 하게 되어 있다. 무슨 밭을? 들판을 봐라. 그러니 이 판을 보라는 것이다. 눈을 들어 교회판을 보라. 그리스도판을 보라.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판을 봐야 한다. 그 세계 그 나라를 봐야한다. 이 세계 이 나라가 없으면 나 혼자 잘해봐야 금방 시들어 버린다. 그 영화의 마지막도 그렇다. 나라가 없으니 병자호란 때 50만이 포로로 잡혀 갔다는데 잡혀 가다가 보니까 잡아 간 사람들이 생각해보니까 괜히 강냉이만 없어질 것 같으니까 50만명을 먹이려면 얼마나 강냉이가 많이 필요하겠는가! 그래서 흩어져 다 보내려니 압록강에 오니까 역적이라서 안 받아 준다. 그래서 지금 만주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짓말이기는 하지만~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여기도 못가고 저기도 못가는 사람들이 돼버린다. 왜? 나라가 없으니까. 이제는 판이 없다. 놀 판이 살판이 없다.
우리에게는 판이 있다. 어떤 경우에도 항상 이 판이 있다. 어떤 형제를 보면 세상에서 막 헤매고 돌아다니다가 갈 때는 그래도 대구교회 밖에는 없습니다. 이 말은 그래도 그 판에 가면 내가 사람노릇합니다. 이 말이다. 내가 그 판에는 가면 된다는 말이다. 항상 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가지고 있는 사람도 항상 그 생각은 가지고 있다. 내가 돌아 갈 곳은 있다. 돌아 갈 곳이 어딘가? 판이다. 여기 오면 자기가 마음대로 간증도 할 수 있고 노래도 부를 수 있고 그런 곳이 아닌가. 우리보고 유행가에 가사를 붙여 노래 부른다고 비난 한 사람들이 있던데 이번에 CTS를 보니까 이제 시작 했다. 어느 목사가 유행가를 딴따라(트로트)곡에다 붙이다가 신나게 부른다. 우리보고 한 것인지 그 것은 잘 모르지만 이제 시작했다.
우리는 변화에 동참 할 사람이 아니고 변화를 주도 할 사람이다. 변화를 선도 할 사람이다. 그 사람들이 한참하면 우리는 다른 것을 해야 한다. 그때는 구닥다리가 될 것이니까 우리는 새 것을 해야 한다. 교회는 판이다. 새로운 판이다. 내가 자유를 얻을 수 있는 판이다. 남도 자유를 얻고 나도 자유를 얻을 수 있는 판이다. 여기서 어떤 다른 것을 가지고 자유를 억압하면 안 된다. 내가 남의 자유를 자유대로 살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면 내가 그 안에 갇혀서 나도 역시 그렇게 살아야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판을 소중하게 만들어야 하고 이 판을 바꿔 나가야 한다. 마음대로 간증 할 수 있는 판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판을 하지 1분을 딱 정해 놓고 하면 땡하고 말아버리면 못한다. 말 잘하는 사람은 할 수 있는데 말 잘 못하는 사람은 참 어렵다. 1분 간증 하라면 대단히 어렵다. 1분하고 한 2초 넘어가도 괜찮다. 그 정도는 봐 줍시다. 그런 것이라도 봐 주는 것이 있어야지 그것마저도 옹색하게 쪼면 안 된다. 그것정도는 봐 주자. 1분30초 봐 준다. 좋은 판을 만듭시다. 우리가 좋은 판을 만들어야 우리가 좋은 판에 살 수 있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인생이 얼마나 불가능하고 얼마나 답답한지를 아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백방으로 처방을 하셨지만 그래도 안 되기 때문에 새로운 판을 우리에게 열어 주시고, 사마리아 여자가 자유할 수 있는 판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판을 소중하게 가꾸고, 우리가 잘 보관해서, 누구나 와서 다 이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누구나 와서 이 구원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가 이 판을 소중하게 보관하기를 원하고, 또 확장시키기를 원하고, 더 귀하게 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가 이 안에서 구원을 얻었으니, 다른 사람도 또 이 안에서 구원을 얻도록 우리가 문호를 열기를 원하고, 개방하기를 원하고,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구원을 우리가 전파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