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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37에서는 회룡고조형, 금계포란형… 유두혈 까지 8가지 형태의 터를 소개하였다.
이 EP에서는 나머지 형태 매화낙지형, 오룡쟁주형, 연화부수형 등 널리 알려진 명당의 형태를 비롯하여 가장 새롭게 발견된 명당터 백가학무형(百歌學舞形)까지 가 봅시다.
⑨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 ‘매화꽃이 땅에 떨어진 모양의 형상’
: 매화는 고결한 꽃이므로 이 꽃이 떨어지면 향기가 사방에 퍼진다.
이 명당의 발복은 세상을 교화할 수 있는 아주 고귀한 자손이 태어나 매화향과도 같이 천지사방에 가문의 명성을 떨치게 된다고 한다.
▷추존왕 원종의 김포 장릉(章陵): 경기 김포 풍무동 산141- 1.
: 이 명당의 형국은 남한정맥의 계양산을 조산, 장릉산을 주산으로 하여 사신(四神)이 확실하고 장릉의 연지에 합수되는 매화낙지형, 회룡고조형의 명당이란다.
이 분은 조선 최고의 멍치 국왕 16대 인조의 부친이다. 살아생전 왕의 아들로 모든 것을 너무 누렸는데, 죽어서도 아들 덕에 종묘사직에 정식으로 올라간 추존왕까지 되었으니 이런 발복이 어디에 또 있으리오?? (이 터는 인조가 즉위 후 이장하면서 잡은 곳이다.)
본래 광해군은 이복동생 정원군(원종)과 순화군이 친형인 임해군과 더불어 매년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는 등 패악질을 일삼아 처음부터 인간으로 취급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특히 정원군은 백성들이 난리통에 도탄에 빠져 사경을 헤매는데 이 양반은 왕족이랍시고 전란 후 돌아올 때 여기저기서 빼앗은 금은보화를 바리바리 싣고 온 아주 추한 면이 많이 나온다. 정원군에게는 패악질로 짝꿍인 동갑내기 이복동생 순화군(순빈 김씨 아들)이 있었는데, 여기도 절대적으로 만만치 않았다.
실록에 순화군에 대한 패악질의 고발과 탄핵, 처벌 요청이 50~ 60회 이상 도배를 하고 있다. 결국 이 인간 탄핵을 받았지만 겨우 수원으로 유배시켰는데 유배 중에도 순화군의 말썽은 멈춰지지 않았다. 결국 선조는 서울로 올려와 관원의 집 등에 안치시켜 감시하였는데, 그래도 순화군은 죽기 한 해 전까지 이 X지랄을 반복하다가 1607년 3월, 27살의 나이에 그것도 병으로 아까운(?) 이 세상을 버리고 저 세상으로 떠나야만 했다.
실록에 기록된 순화군의 졸기(拙記)를 보자, 지금 김포 장릉의 명당터에 계시는 원종, 즉살아 생전 정원군의 행적을 간접적으로 비교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선조 40년(1607)3월18일: 이보의 졸기, 이보는 왕자 순화군이다.
: 이보가 졸(拙)하였다. 성질이 패망하여 술만 마시면 행패를 부리고 남의 재산을...(중략)
“비록 임해군과 정원군의 행패보다는 덜했음에도 무고한 사람을 죽인 숫자가 해마다 10여명을 헤아리기에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호환(虎患)을 피하듯 했다.” ..(이하 생략)
… 이 망나니가 그래도 정원군보다는 덜했단다... 참~ 세상 불공평해~ 증말~~~ 우쒸!!
▷대전 국립현충원(85년 완공, 17,000위 안장):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산23- 1.
:계룡산을 태조산으로 모시고 주산은 옥녀봉(두리봉)이다. 좌측에 장군봉(갑하봉), 우측에 문필봉(無名)을 거느리며 문무를 겸비하고 안산은 왕가봉이다.
내수구부터 외수구로 소하천이 합수되는 서출동류 물길이 있고, 앉은 방향이 동남향으로 아주 이상적인 명당이 되었다. 이곳의 혈처는 현충탑이 된다고 한다.
⑩ 오룡쟁주형(五龍爭珠形): ‘다섯 마리의 용이 구슬을 놓고 다투는 형상의 터’
: 다섯 마리나 되는 용이 서로 차지하여 다투니 얼마나 좋은 지세인가?
혈처는 구슬에 해당하는 터로 모든 사람이 받들어 모실 출중한 인물을 나올 명당이란다.
옛날부터 경북 영주시, 충남 부여 구룡면, 천안시를 모두 오룡쟁주형 명당이라 불렀다.
영주시는 동쪽 청량산, 동북쪽 태백산, 서북쪽 소백산, 서남쪽 희양산, 남쪽의 학가산이 휘둘러 산기운들이 몰려들어오고 있다. 구슬이 있는 혈처는 흑석사가 위치한 석포리.
▷충남 공주시 유구읍 동해리는 병화불입지지(兵火不入之地: 난리가 나도 적이 들어오지 않는 명당)로 부귀가 태산(泰山)같다는 명당터를 지니고 있다.
▷충남 천안시: 외곽을 감싸는 외사룡(外四龍)과 중심 시가지 일대에 내오룡(內五龍)의 오룡쟁주형의 형상으로 내외를 모두 함께하면 구룡희주(九龍戱珠)의 명당이란다.
그런데, 이 명당의 발복으로 무엇들을 얻었지?? 출충한 인물?? 여의주=호두과자, 맞나!
⑪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연꽃이 활짝 피어서 물에 떠있는 형상’
: 연꽃은 꽃이나 잎, 연근 등도 유용하지만 연꽃이 수면에 뜰 때가 가장 향기가 만발해 좋을 때이다. 연꽃 명당의 소응은 자손들 모두가 원만하고 또한 고귀하게 화려한 생활을 하게 된다하여 귀하게 여긴다.
▷예천 금당실(金塘室: 연꽃이 핀 못 마을): 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일원
: 정감록의 감결에 병화도 들어오지 못하는 ‘삼재불입(三災不入)’의 10승지지 마을이다. 東 옥녀봉, 西 국사봉, 南 백마산, 北 매봉(오미봉)으로 금당실은 완전히 차단된 분지형의 매우 넓은 땅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에도 6.25전쟁 때에도 모두 적군이 이곳까지 들어오지 못하였고, 최근에는 전염병 구제역까지도 역시 이 마을만은 피해 갔다고 한다.
구한말 법무대신 양주대감 이유인이 들어와 명성왕후의 피난처(?)로 99칸의 비궁(秘宮)을 지었으나, 곧 이어 을미사변이 터지면서 이 저택 역시 비운의 저택이 되어 버렸다.
이후 이유인도 조정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던 중 뻔한 결과를 알고는 스스로 자결하였다. 현재는 폐가가 되어서 가옥의 잔해는 남아있지 않고 담장 일부와 거송 두 그루만이 덩그러니 남아있구나~
마을은 고택풍경과 천연기념물 469호의 800m 송림, 용문사찰, 병암정(황진이 촬영장)과 초간정 등 정자가 어울러져 전통마을로 특히 오미봉 누각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주변을 둘러싼 산들은 연꽃잎이요, 분지 안의 전통가옥들이 찬 마을은 연꽃의 꽃수술같이 보여 장관을 이룬단다.
혈처는 못 속의 연꽃과도 같은 오미봉 공원이 진혈처란다.
⑫ 비학등천형(飛鶴登天形): ‘학(鶴)이 땅을 박차고 하늘로 오르는 형상’의 명당 터.
: 영월군 주천면에서 수주면 법흥사로 가는 길목에 무릉리를 지나면 요선정이란 정자를 만나게 된단다. 수려한 경치 속에 자리 잡은 이 정자에서 앞의 설귀산을 바라보게 되면바로 눈앞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학의 모습이 보인다고 하는데... (그게 잘 보일까??)
바로 비학등천형의 명당이 요선정(樂仙亭)이란다.
세속을 떠나는 학, ‘탈 세속’의 기운이 쏘이는 땅으로 혈처는 학(鶴)의 등이나, 학이 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여기에 묘를 쓰게 되면 학이란 새가 높이 나니 높은 권세와 직위를 얻을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땅을 명당이라고 부를 수만은 없단다.
어쩌면 얼풍수에 속은 사람들이 더 많은 그런 곳이 이런 곳이란다.
이곳에 무덤을 만들면 속세에서 말하는 출세할 인물을 배출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이사는 세상을 초탈한 기인이나 도사가 나오는 곳이란 것이다. 마치 세속을 벗어난 고고한 한 마리 학(鶴)과 같은 이미지처럼 말이다.
영월에서는 이 터에 요선정을 지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경치를 조망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지않고 공연한 세속적인 욕심을 부려 이 터에 묘를 쓴다면 자손들은 물론 경치까지 조화를 깨뜨리고 말았을 것이란 영월군의 자화자찬이다.
▷요선정: 강원 영월 수주면 무릉리 산139, (문화재자료 41호) 주천강변 언덕 위 정자.
: 숙종의 어필詩가 모셔져있고, 바로 옆에 오층석탑과 마애불상이 있다.
⑬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 ‘늙은 쥐가 밭에 내려온 형상’의 터
: 우리나라 많은 지역에서 나타나는 명당 터로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온 모습이다.
쥐는 새끼를 많이 낳으므로 다산성을 뜻하고, 먹을 것이 풍부한 밭에 나와 있어 재물도 풍족하다. 때문에 이곳의 혈처는 쥐의 젖가슴과 배 부위이다.
정읍에 있는 서중리 마을은 생김새가 마치 쥐를 조각한 것처럼 보인단다. 쥐의 주둥이와 주둥이 앞에 솟은 수염, 쥐의 이빨, 귀, 앞발 등. 쥐의 앞 부위가 그대로 나타나 있단다.
이 마을이 정말로 좋은 자리라는 것은 마을에서 약 2㎞ 떨어진 지점에 고양이로 보이는 묘산(猫山)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다산과 풍족으로 안온한 삶을 살고 있지만, 고양이 덕분에 항시 긴장하기 때문에 교만에 빠질 염려가 없어 좋다는 것이다.
혈처인 젖가슴에는 향교가 위치하고 있고, 쥐 배 옆에는 마을이 들어섰는데 마을 이름도 기가막히게 ‘쥐 서(鼠)’자를 집어넣어서 서중리(鼠中里)로 부른단다.
▷양택- 전북 정읍군 산외면 서(鼠)중리가 교과서적인 가장 대표적인 지형이란다.
※묘산도 있고, 혈처에 향교가 있고, 쥐의 배 옆으로 마을이 들어서 있다고 하는데…
다음지도, 구글 등을 동원해 딥따 찾아보는데.. 허걱~ 아무리 뒤져도 안보인다. ㅠLㅠ
※진짜 웃기는 일이 생겼다!!! 면사무소에 전화해 보니 산외면엔 서중리가 없단다???)
할 수없이 새로운 노서하전형의 명당을 찾아야 한다.... 지명까지 딱 좋았었는데...
▷평택임씨 중시조 임정 墓: 용인 이동 묘봉리197, (묘역 밑 주소)
: 조산 갈미봉에서 내려오는 산줄기 형상이 노서하전형의 전형적인 산세를 보이고 있다.쥐의 주둥이 부분에 묘를 썻다. 이곳 역시 남쪽으로 묘봉(고양이 산)이 버티고 있어 항시 후손들이 긴장하고 교만에 빠질 염려가 없는 명당처이다.
여기서 북서향 건너편 산에 위치한 아들 임인산(병조참판)묘 역시 명당터로 알려져 있다. 아들이 부친을 이곳에 모셔놓고 자신의 유택까지 부친의 묘소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죽어서까지도 지키고, 모시려는 효심이 갸륵하다. 임정은 태종 때 형조판서, 평양부윤을 역임하였는데, 아들 때인 성종조에서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⑭ 금구몰니형(金龜沒泥形): ‘황금거북이 진흙으로 들어가는 형상’의 명당 터.
: 거북이가 진흙땅에 묻힌다는 것으로 알을 낳으려고 진흙을 파고드는 모습이다.
혈처는 거북이 뒤편에 위치한 알 부분이다. 거북이는 뒤로 알을 낳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 묘소를 쓰면 자손이 번영하고 장수, 부귀영달을 한다는 명당이란다.
거북이 형태의 명당은 거북이 바다로 들어간다는 금구입해형(金龜入海形), 늙은 거북이가 꼬리를 끈다는 노구예미형(老龜曳尾形) 등이 있다.
▷경기 고양 원당 서삼릉 영역 (희릉, 효릉, 예릉 및 왕자, 공주, 후궁 등의 묘가 있다.)
: 금구몰니형의 거북알을 보호하기 위해 봉분이 크거나, 석물을 쓰면 알이 깨질 수 있어 절대 금기사항인데 서삼릉은 왕릉이니 봉분이 크고 석물도 많이 써서 후손들이 별로가 되었나? 그래도 왕릉인데, 첫 주인공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인종의 모친)이시고 아들 인종도 들어와 있고, 마지막은 강화도령 철종이신데...
알이 다 깨져버렸나??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103, 운조루(雲鳥樓: 민속자료 8호)가 유명하다.
: 운조루는 류이주가 낙안군수 시절에 조선 양반주택의 전형을 보여주는 99칸의 대저택으로 풍수가 사이에 이곳은 ‘금환낙지형(金環落指: 금가락지를 손에 빼는 형국, 남녀가 음양을 교접하기前에…), ’오보교취(五寶交聚: 다섯가지 보물이 모이는 형국), ‘금귀몰니(金龜沒泥) 3대 진혈이 한 곳에 모인 길지 중의 길지로 남한 제일의 명당이라 불리는 곳.
경상도에 경주 최부자가 있었다면, 호남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운조루의 주인장이였다.
⑮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 ‘봉황이 둥지로 날아들어 오는 형상의 터’
: 봉황은 영(靈)을 지닌 희귀새이다. 이런 터에서는 귀한 성인군자가 나온다고 한다.
혈처는 봉황이 들어오는 보금자리에서 새끼를 부화하기 위함이니 바로 둥지속이다.
▷곡성 동리산 태안사(泰安寺): 전남 곡성 죽곡면 원달리 20, 선종 수행사찰.
: 처음 이 사찰은 신라 고승 혜철이 839년, 사찰의 진산인 봉두산 아래 동리산(桐裏山:오동나무 속)에 둥지(태안사)를 틀었다. 풍수에 해박한 혜철은 인근에 봉황이 편안하게 쉬며 지낼 수 있게하기 위한 비보로 절 근처에 오동나무와 봉황의 먹이가 되는 대나무를 많이 심었고, 절 입구의 양편에는 수구막이로 돌무더기를 쌓아서 빠져나가려는 기맥을 누르면서 절 앞뜰에는 연못을 만들어 기(氣)를 머무르게 하였다.
아울러 비보지명으로 동리산(오동나무)을 비롯하여 죽곡(대나무), 죽래리(대나무), 봉덕리(봉황), 동계리(오동나무) 등 오동나무 및 대나무와 관련된 지명들을 지어 봉황을 편하게 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 태안사가 고려 초기까지는 송광사, 화엄사 등 모든 전라도의 대부분의 사찰들이 태안사의 말사이었으나, 고려 중기에 이르러 순천 송광사가 본사로 되면서 절의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하다가, 급기야 6.25전쟁 때 화재를 겪은 후 이제는 아주 조촐한 선종의 수행사찰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바로 이 사찰에서 조선풍수의 비조 ‘도선국사’가 약관인 20세 때 혜철스님을 찾아와 법문을 듣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는 곳이었고, 또 봉황이 자리한 명당임에도 불구하고 세월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는가 보다. 지기가 다되어서 그리 되었나??
이제는 초라한 사찰로 변모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세월만이 무상하구나~
⑯ 옥녀단장형(玉女丹粧形): ‘여인이 단정히 화장하는 형상’의 명당 터.
: 명당 형국 중에는 마음과 몸이 옥(玉) 같이 깨끗한 여자를 지칭하는 옥녀형이 많다.
옥녀단좌(單坐)형, 옥녀탄금(彈琴)형, 옥녀산발(散髮)형 등은 여인이 화장한 후 앉아있는 형상, 또는 비단을 짜거나 거문고를 타며 춤을 추는 모습의 형상들이다.
▷옥녀단장형 명당: 원주 지정 간현 산43- 1, 한산이씨 이기 선생 墓
: 선조 때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청백리에 선정되신 이기 묘로 원주 간현에 있다.
형상은 옥녀가 목욕 후 화장대에서 단장하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키다는데, 절묘한 것은 .
목욕재계를 위한 욕지(浴池)는 물론 머리빗에 분갑, 거울까지 갖추고 있고, 앞 둔덕에는 옥녀를 남들이 쉽게 볼 수 없도록 쳐놓은 병풍이란다. 완전 꿈보다 해몽이라지만.
이런 곳이야 말로 귀한 인물이 태어날 만한 명당이라고 일컬어진다.
▷옥녀산발형 명당: 양주시 남면 상수리 산55- 1에 위치한 당홍계 남양홍씨 묘역.
: 이곳에 처음 홍지(智)선생 묘를 쓴 이후 그 명당 발복으로 자손의 발흥을 이룬 뿌리의 장소로 유명하다. 아들 홍경손을 비롯 후손 홍춘경, 홍춘년, 인조 때 영의정 홍서봉 및 이조판서 홍초량의 묘가 이 묘역에 같이 있다.
▷옥녀산발형 양택으로는 : 낙안읍성 및 성주이씨 집성촌인 성주 한개마을이 유명하다.
⑰ 옥녀만개형(玉女滿開形), 옥녀단좌형(端坐形): ‘누운 여인의 형상’
: 성숙한 처녀인 옥녀가 상체를 누이고 앞쪽으로 양다리를 벌려 아래를 드러낸 모습이다.
이런 모습이 옥녀만개형, 옥녀단좌형 또는 옥녀측와형이라 부른다.
▷동래정씨 정사(賜)묘: 경북 예천군 지보면 도장리 산38, (인근 사당: 지보재.)
: 이곳은 묘주변의 생김새는 여근을 닮았고, 곱고 풍만하게 뻗은 청룡과 백호는 옥녀의 두 다리 모습 그대로라는데… 동래정씨에서는 이 형상을 옥녀측와형이라 부른다.
거기에 낙동강 건너편의 남쪽의 봉황산(비봉산)은 안산으로 의젓한 남성의 모습으로 장대한 남근을 드리운 채 점잖게 옥녀형 산(태을산)을 건너다보고 있는 형상이란다.
이곳의 혈처는 옥녀의 생식기 중 음핵에 해당되는 부분이란다.
샘물이 바로 아래에서 솟는 경우가 많은데, 이 터의 주인공은 동래정씨 중시조 정사(賜)묘로 매장 때 물이 고여있어 왕겨와 놋젓가락 3매를 넣자,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도마’마을의 3곳에서 왕겨가 섞인 물과 각각 놋젓가락 한 매씩이 나왔다고 한다. 믿자고요!
지금까지도 ‘도마샘’ ‘어룽샘’ ‘옥로정’이라 불리며 가뭄에도 물의 양이 한결 같고 맑고 물맛 또한 너무 좋아 식수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 묘가 동래정씨에게 정승 한 섬을 배출시킨 유명한 ‘정묘(鄭墓)’ 명당이다.
이런 터에서는 옥녀와 같은 고귀한 미인이 태어나거나, 남자라면 훌륭한 인재로 여복(?)까지 많은 자리라 한다. 이러한 형태의 옥녀만개형이 명당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인간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나와 일생을 살다가 죽음에 이르러 또다시 자궁에 들어가 영원한 안락의 잠 속에 든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란다.
믿자!! 믿어야 하느니라!!!
⑱ 일월상포형(日月相包形): ‘조산과 안산의 형세가 해와 달이 포옹하여 합한 듯한 곳’
: 구리시 검암산 동구릉 최상단부에 자리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이곳은 아직도 땅 기운이 왕성하다고 한다. 안산인 응봉과 멀리 조산인 남한산이 탁월한 경치는 물론이거니와 서로 어긋나게 3겹으로 겹쳐 있어 마치 해와 달이 서로 포옹하여 합치는 아주 귀한 형세로 ‘일월상포형’의 명당이란다.
풍수가들은 건원릉 터를 맹호출림(猛虎出林), 장군대좌(將軍對座), 모란반개형(牡丹半開) 등 여러 가지로 부르고 있다. 역시 명당에는 붙여진 형국의 이름들이 정말 많구나.
거저 적당한 설명을 곁들여 가져다 붙이면 턱하니 새로운 이름이 하나 나오니까 말이다.
이 터는 이성계가 죽자 길지를 알아보던 태종에 의해 하륜과 김인귀가 찾아낸 곳이다.
물론 동구릉이 다 들어차서 동구릉으로 불리게 되기까지 500년이란 시간이 걸렸지만.
(※쫄필 ‘하나또하나의 역사탐방’中‘조선왕릉 왜 그곳에 있을까?? 요기에 상세히 나온다!)
그러한 대 명당임에도 불구하고 태조의 후손들은 500년간 사직은 유지하였지만, 첫 단추에서부터 자식들 간의 골육상쟁이 시작되고, 조금이라도 불안한 정세에서는 언제나 피를 뿌리는 다툼이 계속되어 조선 내내 편안할 날이 많지 않았으니 이 터의 임자는 진즉부터 태조 이성계가 아니었나 보다.
이후로도 왕가의 터는 모두가 당대 최고의 지관이 잡았을 터임에도 조선은 500년을 겨우 넘겨서 막을 내렸으니 역시나 풍수란 것 믿으시거나 말으시거나, 당신 마음이로소이다.
⑲ 야(也)자형(也字形): 글자 ‘야(也)’ 모양의 터, 겹겹이 싸여있는 형상‘
: 이 터는 혈 뒤에 호(乎)자 형의 봉우리가 있고, 혈 앞으로 천(天)자형의 봉우리가 갖추어 진다면 최고 명당터가 된단다. 이유인즉 천자문은 ‘天地玄黃, 宇宙洪荒 … ’로 이렇게시작하여 4글자 한 문장으로 전부 125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지막 두 문장 ‘위어조자(謂語助者) 언재호야(焉哉乎也): 즉 문장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는 어조사로는 언, 재, 호, 야(也)가 있다’ 이 두 문장이 천자문의 마지막 문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뒤로 천(天)과 호(乎)자 형의 봉우리가 있으면 완벽하다는 것이다.
이런 형상에서는 일세를 풍미할 문호가 나오며, 시종일관 가문에서는 지속적으로 뛰어난 인물이 배출된다고 하는데… 그 명당의 임자가 동래정씨 2세조 정문도였다.
▷동래정씨 정문도 묘: 부산 부산진구 양정동 469, 화지산 기슭.
: 화지산은 태백산맥에서 양산 원효산, 금정산을 거쳐 대간룡이 끝나는 용진처라 한다.
묘소가 ‘야(也)자’ 형상의 중심에 자리하였으며, 이곳의 혈처 앞에 좌청룡, 우백호가 모두 부복하고 있는 형상이란다. 좌측으로 황령산, 우측으로 팔금산과 이어진 수정산 사이로 부산항이 정면에 들어오고, 영도의 봉래산에 이르기까지 중간중간에 문필봉들이 억수로 즐비하다... 그 즐비하게 늘어선 문필봉 하나하나가 모두 조선의 정승을 의미했었나?? 동래정씨 가문에게 한 섬의 정승이 배출될 수 있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었나 보다.
이외에도 무수히 많다. ‘물(勿)자형’ 선인(仙人), 옥녀(玉女), 장군(將軍), 용(龍), 맹호(猛虎), 말(馬), 뱀(蛇) 등과 관련된 것만도 각각이 작게는 5~ 6개에서 15~ 20여개 씩 존재한다. 이제까지 풍수가들이 거론한 것만도 400여종에 이르고, 또 누군가가 새롭게 형상을 만들어 이름을 붙이게 되면 새로운 형국들이 앞으로도 더 등장하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양상이다.
이참에 우리도 하나 만들어 보자 … … … 백가학무형(百歌學舞形) !!!
의미: 만나면 언제나 많은 노래와 춤을 부르고 익히며 즐길 수 있는 곳!
- 비록 한문이야 다르지만 우리네 순진성님 아명으로다 ~ 거냥! 만들 수 있었다.
서로가 만나면 언제나 노래와 웃음과 행복이 샘 솟아나는 바로 우리 사오모카페!!
거저 학무님과 만나는 장소, 장소들이 모두가 백가학무형의 명당터란 소리입네다.
이렇게 좋은 명당터에서 울 카페회원님들 모두들 발복(發福) 하 소 서 ~
이 글을 읽으신 회원님들은 따블로 발복하소서 ~ ~
이 글에 예쁜 댓글까지 착하게 다신 분들은 따따블로 발복하소서 ~ ~ ~ ~
다음 EP는 조선의 8대 명당터와 그 외 명당이라 불리운 ‘터’에 대해서 찾아봅니다.
순위를 정할 능력도 자격도 못되어서 서울에서 찾아가기 가까운 거리 순으로 정리하니까 이거 괜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VIC 5와 Bic 10으로 일차 명당터를 선별하고 이후로는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스스로가 ‘ 조선의 8대 명당’을 정하도록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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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늘 재미나게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오모가 명당이긴 명당이네요.
저요저요..
따따따블 발복하면. .
울 하나또하나님들께 은혜 갚아야지용..ㅎㅎ
그래서 명당터에 조선왕조 능을 한곳에 여럿 모신 예가 많은 거로군요.
모르긴해도 그 주변에 무지 많은 이름 모를 유해들 숨겨져 있을 것 같아요..ㅎ힘없고 빽없는 일반인들ㅣ...^^
저 선정릉 옆에 살 때
매일밤 가위에 무지 눌렸어요.ㅠㅠ
이거 뭥미??
조선시대 라면 왕비가 될 징조인디, 아마도 세월이 흘러서리 영부인이 될 거 라는 건가....
본래 선정릉터가 지금 수서에 있는 광평대군(세종5남)파의 묘역을 빼앗아 성종의 능이 처음 들어갔고, 후에 정현왕후가 들어가면서 '선릉(宣陵)'이 되었는데, 아들 중종의 '정릉(靖陵)'이 처음에 서삼릉에 있다가, 계비 문정왕후가 지금의 강남으로 옮겼놓고는 사후에 본인이 중종 옆에서 있으려 했는데... 여름철 장마가 지면 능 앞이 일대가 모두 물바다를 이루는 아주 낮고, 습한 지역이라 결국 문정왕후의 희망은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았지요.
여인의 질투 덕(?)에 중종은 살아서 세 분의 왕비가 있었지만, 죽어서는 혼자서 550년 이상을 언덕너머 부모님을 모시고
계시는 효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특히 선정릉의 세 분릉은 모두 임진왜란 때 왜놈들에 의해서 파릉되고 말았습니다.
- "왕은 키가 크고, 비대하지 않았으며 수염을 갖추었고, 용안에 얽은 자국과 점이 있었다. (중종), 세 분의 시신을 찾으려 했으나 결국은 광 안의 태워진 탄화물을 수습하여 다시 능을 조성하였으니... 좀 사연이 많고, 그러네요. ㅠ ㅠ
근디 선릉이 왜 이리 좋은 명당이여....고기 계신분들이 부러워라..........
와~~~
백가학무형~~대박!!!
정말 이렇게 좋은 울사오모 명당에서
이렇게 좋은분들 만나고 행복하니
이보다 좋은 명당이 어디있으리요~~♥
이렇게 방대한 자료~
올려주셔서 울카페를 더풍요롭게 만들어주시는 하나형부!!!!감사 또감사!!!!
올리브님두 이곳에 왕림 하셨넹...방가방가....
우와! 대단하심요 아무리 봐두 제눈엔 암것두 안뵈구 모리것어유
그거이 그거같구요 ㅎㅎ
수고많으셨습니다 잘 보고갑니다 근디 다 명당은 사람이 살어야하는디 다 구신만 가득하네여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