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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하나또하나의 역사탐방 (38) 조선의 명당터 (명당의 형태 02)
하나또하나 추천 1 조회 650 15.06.28 14:54 댓글 9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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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5.06.28 15:17

    첫댓글 늘 재미나게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오모가 명당이긴 명당이네요.

  • 15.06.28 16:25

    저요저요..
    따따따블 발복하면. .
    울 하나또하나님들께 은혜 갚아야지용..ㅎㅎ
    그래서 명당터에 조선왕조 능을 한곳에 여럿 모신 예가 많은 거로군요.
    모르긴해도 그 주변에 무지 많은 이름 모를 유해들 숨겨져 있을 것 같아요..ㅎ힘없고 빽없는 일반인들ㅣ...^^

    저 선정릉 옆에 살 때
    매일밤 가위에 무지 눌렸어요.ㅠㅠ
    이거 뭥미??

  • 15.06.30 06:36

    조선시대 라면 왕비가 될 징조인디, 아마도 세월이 흘러서리 영부인이 될 거 라는 건가....

  • 작성자 15.06.28 18:20

    본래 선정릉터가 지금 수서에 있는 광평대군(세종5남)파의 묘역을 빼앗아 성종의 능이 처음 들어갔고, 후에 정현왕후가 들어가면서 '선릉(宣陵)'이 되었는데, 아들 중종의 '정릉(靖陵)'이 처음에 서삼릉에 있다가, 계비 문정왕후가 지금의 강남으로 옮겼놓고는 사후에 본인이 중종 옆에서 있으려 했는데... 여름철 장마가 지면 능 앞이 일대가 모두 물바다를 이루는 아주 낮고, 습한 지역이라 결국 문정왕후의 희망은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았지요.
    여인의 질투 덕(?)에 중종은 살아서 세 분의 왕비가 있었지만, 죽어서는 혼자서 550년 이상을 언덕너머 부모님을 모시고
    계시는 효자(??)가 되셨습니다.

  • 작성자 15.06.28 18:27

    그러나, 특히 선정릉의 세 분릉은 모두 임진왜란 때 왜놈들에 의해서 파릉되고 말았습니다.
    - "왕은 키가 크고, 비대하지 않았으며 수염을 갖추었고, 용안에 얽은 자국과 점이 있었다. (중종), 세 분의 시신을 찾으려 했으나 결국은 광 안의 태워진 탄화물을 수습하여 다시 능을 조성하였으니... 좀 사연이 많고, 그러네요. ㅠ ㅠ

  • 15.06.30 06:44

    근디 선릉이 왜 이리 좋은 명당이여....고기 계신분들이 부러워라..........

  • 15.06.29 13:19

    와~~~
    백가학무형~~대박!!!
    정말 이렇게 좋은 울사오모 명당에서
    이렇게 좋은분들 만나고 행복하니
    이보다 좋은 명당이 어디있으리요~~♥
    이렇게 방대한 자료~
    올려주셔서 울카페를 더풍요롭게 만들어주시는 하나형부!!!!감사 또감사!!!!

  • 15.06.30 06:45

    올리브님두 이곳에 왕림 하셨넹...방가방가....

  • 15.12.02 18:13

    우와! 대단하심요 아무리 봐두 제눈엔 암것두 안뵈구 모리것어유
    그거이 그거같구요 ㅎㅎ
    수고많으셨습니다 잘 보고갑니다 근디 다 명당은 사람이 살어야하는디 다 구신만 가득하네여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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