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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경전 ‘어서’에서 배운다 (33) 아부쓰보어서(보탑어서) 하
보아라!
우리 가슴속에 보탑은 찬연하다
<본문> (어서 1304쪽 8행~10행)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 이외(以外)에 보탑(寶塔)은 없으며, 법화경(法華經)의 제목(題目)이 보탑이고 보탑이 또한 남묘호렌게쿄이니라. 지금 아부쓰상인의 일신(一身)은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의 오대(五大)이며, 이 오대는 제목의 오자(五字)이니라.
그러므로 아부쓰보가 바로 보탑이고 보탑이 바로 아부쓰보이며 이것 이외의 재각(才覺)은 무익(無益)하니라. 문(聞)·신(信)·계(戒)·정(定)·진(進)·사(捨)·참(慚)의 칠보(七寶)로써 장식한 보탑이니라.
<현대어역>
묘호렌게쿄 이외에 보탑은 없습니다. 법화경의 제목이 보탑이고 보탑이 또한 남묘호렌게쿄입니다. 지금 아부쓰상인 당신의 몸은 지, 수, 화, 풍, 공의 오대로 되어 있습니다. 이 오대는 제목의 오자입니다.
그러므로 아부쓰보가 바로 보탑이고, 보탑이 바로 아부쓰보입니다. 이것 이외에 지식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당신 몸은 문, 신, 계, 정, 진, 사, 참이라는 일곱 가지 보물로 장식된 보탑입니다.
어본존은 만인을 비추는 명경(明鏡)
여기부터 대성인은 “아부쓰보, 당신 자신이 묘호렌게쿄의 보탑입니다.” “당신도 칠보의 광채를 발하고 있습니다.” “당신 자신이 부처입니다.”라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아부쓰보 자신이 보탑이라는 의미를 전개하십니다.
먼저 대성인은 “법화경의 제목이 보탑이고, 보탑이 또한 남묘호렌게쿄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법화경에서 설한 보탑은 남묘호렌게쿄 이외에 어디에도 없습니다. 법화경의 제목이 바로 보탑이고, 그것을 대성인은 어본존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어의구전>에는 “지금 니치렌 등의 동류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자는 명경에 만상을 비추는 것과 같이 지견하느니라. 이 명경이란 법화경이고 별해서는 보탑품이니라.”(어서763쪽)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울이 없으면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하물며 ‘기심의 보탑’은 그것을 보는 명경이 없으면 누구도 볼 수 없습니다. 거기에 대성인이 어본존을 나타내신 이유도 있습니다.
니치렌대성인은 어본불로서 자신의 생명을 어본존으로 도현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어본존을 명경으로 삼아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을 봉창했을 때 자신에게 내재(內在)한 부처의 생명이 강성하게 용현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가슴속에 보탑을 일으켜 세우는, 바로 그러기 위한 어본존입니다.
자신의 묘호렌게쿄 보탑
이어서 대성인은 아부쓰보의 일신은 (주10)“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의 오대(五大)”며, “이 오대는 제목의 오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컨대 자신이 바로 묘호렌게쿄의 당체입니다. 보탑은 어디까지나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우리 자신 이외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부쓰보가 바로 보탑이고, 보탑이 바로 아부쓰보”라는 말씀입니다.
이 금언의 취지는 불법의 결론 그 자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 이외의 재각(才覺. 학력)은 무익하니라.” 이것만 알면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이것이 어본불의 눈입니다. 말법의 범부, 평범한 서민의 생명에서 바로 ‘존극한 보탑’의 광채를 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인류가 인간의 존엄을 보는 눈을 지닌다면 역사는 바뀝니다.
초점은 인간생명의 존엄을 깨닫는 일입니다. 한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존귀한가에 눈뜨는 일입니다.
19세기 미국의 사상가 (주11)소로는 정치제도가 점차적으로 민주주의로 진전된 의의를 “개인에 대한 진정한 존경으로 향한 진보” 라고 통찰했습니다.
한 인간, 한 사람 한사람의 생명이 본디 갖춘 존엄성에 어울리게 사회 속에서 엄연히 존중된다, 중요시 된다, 힘을 발휘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진정한 인류의 진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로는 이상적인 인간사회의 미래상을 다음과 같이 내다보았습니다.
“국가가 개인을 국가보다 높은 독립된 힘으로 인식하고, 국가의 힘과 권위는 모두 개인의 힘에서 연유한다고 생각해서 개인을 거기에 어울리게 취급하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문명국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보탑품은 하나의 생명은 국가를 넘어 지구대(地求大) 아니 우주대(宇宙大)의 무게와 광채를 지닌다고 가르칩니다. 만인이 그 존극한 생명의 당체입니다.
만인이 그 가능성에 눈 뜨는 일이 바로 ‘보탑품’의 진정한 의의입니다.
칠보는 자신의 실천
이어서 대성인은 “문(聞) · 신(信) · 계(戒) · 정(定) · 진(進) · 사(捨) · 참(慚)의 칠보로써 장식한 보탑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 보탑이 범부의 생명 그 자체라면 경문에서 보탑을 장식한 금, 은, 유리 등 칠보 대신, 법화경을 수지한 남녀의 생명을 장엄하게 하는 칠보는 무엇인가. 그것은 (주12)‘문, 신, 계, 정, 진, 사, 참’이 자신을 장엄하는 불도수행의 일곱가지 요건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즉 구도심을 품고 묘법을 듣고, 묘법을 믿으며, 묘법의 계를 지니고, 자기를 다스리며 묘법을 근본으로 마음을 정해서 끊임없이 정진하고, 신심을 제일로 삼아 ‘이기심’을 버리고, 반성해야 할 일은 솔직하게 반성해서 나날이 게으름 없이 전진하는 일이 내 생명을 장식하는 보배가 됩니다.
이것은 모두 ‘신심’이라는 두 글자에 들어 있습니다. 나날이 하는 학회활동 속에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칠보라도 내 생명을 장식하는 것은 보석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과 실천이 자기 생명을 장식하며 기심의 보탑(불성)을 장식합니다.
(주10)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의 오대(五大) : 고대 인도사상으로 우주만물을 구성하는 다섯가지 원소.
(주11) 소로 : 1817~1862. 미국 사상가, 수필가. 하바드대학교를 졸업한 뒤에 에머슨에게 감화를 받아 그 철학을 실천하는 생활을 했다. 저작으로 <숲의 생활>등이 있다.
(주12) 문(聞) · 신(信) · 계(戒) · 정(定) · 진(進) · 사(捨) · 참(慚) : 불도수행에서 중요한 일곱 가지 덕목, 문법(聞法), 신수(信受), 지계(持戒), 선정(禪定), 정진(精進), 사리(捨離), 참괴(慚愧)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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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어서 1304쪽 10행~1305쪽 2행)
다보여래(多寶如來)의 보탑(寶塔)을 공양(供養)하신다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자신(自身)을 공양하시는 것이며 자신이 또한 삼신즉일(三身卽一)의 본각(本覺)의 여래(如來)이니라. 이렇게 믿으시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 봉창(奉唱)하시라.
이곳이 바로 보탑(寶塔)의 주처(住處)이니라. 경(經)에 가로되 “법화경(法華經)을 설(說)하는 일이 있는 곳에는 나의 이 보탑(寶塔)이 그 앞에 용현(涌現)함”이란 이것이니라. 너무나 존귀(尊貴)하시므로 보탑을 써서 나타내어 드리느니라,
<현대어역>
당신은 다보여래의 보탑을 공양하신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을 공양하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의 몸이 또한 삼신즉일신의 본각의 여래입니다. 이렇게 믿고 남묘호렌게쿄라 봉창하시오.
이곳이 바로 보탑이 계시는 곳입니다. 법화경 견보탑품 제12에 “법화경을 설하는 곳이 있으면 나의 이 보탑은 바로 그 앞에 용현함”이라고 설한 부분이 이것입니다. 정말 존귀하므로 보탑(어본존)을 써서 나타내어 드립니다.
<본문> (어서 1304쪽 10행~1305쪽 2행)
자식이 아니면 물려주지 말 것이며 신심(信心) 강성(强盛)한 자(者)가 아니면 보이지 말지어다. 출세(出世)의 본회(本懷)란 이것이니라.
아부쓰보는 정말 북국(北國)의 도사(導師)라고도 말해야 하리라. 정행보살(淨行菩薩)이 다시 태어나서 니치렌(日蓮)을 찾아 오셨는지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도 불가사의하도다.
이 마음씨를 니치렌은 잘 모르나 상행보살(上行菩薩)이 출현(出現)하시면 그 힘에 맡겨 드리기로 하나이다. 별다른 까닭은 없소이다. 보탑을 부부(夫婦) 함께 은밀히 배례(拜禮)할지어다. 상세한 것은 다시 말씀드리리다, 공공근언(恐恐謹言).
<현대어역>
자식이 아니면 물려주지 마시오. 신심 강성한 자가 아니면 보이지 마시오. 출세의 본회라 함은 이것입니다.
아부쓰보, 당신은 정말 북국의 도사입니다. 정행보살이 다시 태어나서 니치렌을 찾아오셨는지,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불가사의합니다.
왜 이러한 뜻을 지니고 있는지 니치렌은 잘 모르지만, 상행보살이 출현하시면 그 힘에 맡겨드리겠습니다. 별다른 까닭은 없습니다. 이 보탑(어본존)을 부부가 함께 은밀히 배례하시오. 자세한 말씀은 다시 드리리다. 공공근언.
‘지금’ ‘여기에’ 보탑이 서다
다시 대성인은 “아부쓰보가 다보여래의 보탑을 공양하신다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공양하시는 것이며”라고 말씀하십니다. 보탑, 즉 어본존에게 하는 공양은 바로 자신에게 하는 공양이 됩니다.
(주13)‘삼신즉일(三身卽一)의 본각(本覺)의 여래(如來)’는 원융원만(圓融圓滿)한 부처입니다. 우리 자신이 본디 완전무결한 부처라는 선언입니다.
한 사람 한사람의 생명을 장엄하기 위한 어본존입니다. 우리를 빛내기 위한 어본존입니다. 여기에 니치렌대성인 불법이 ‘인간을 위한 종교’라는 연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자신이 삼신즉일신의 본각의 여래며 보탑이기 때문에 자신이 있는 곳이 보탑의 주처(住處)입니다. 그것을 “이곳이 바로 보탑의 주처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보탑을 다른 곳에서 찾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강성한 신심으로 어본존을 배례하는 곳, 그곳이 어디든 또 언제든 거기가 허공회가 되고, 영산(靈山)이 되어 보탑이 세워집니다.
불이(不二)의 제자가 활동하기를 기대
니치렌대성인은 법화경의 보탑을 어본존으로 도현하셨습니다. 즉 “보탑을 써서 나타내어”는 니치렌대성인이 보탑, 즉 남묘호렌게쿄의 어본존을 도현하여 만인이 현실에서 성불할 수 있는 길을 확립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출세의 본회’, 부처가 세상에 출현한 궁극적인 본뜻과 목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성인은 물러서지 않는 아부쓰보의 신심과 불석(不惜)의 실천을 칭찬하며 ‘북국의 도사’라고 부르기까지 하셨습니다. ‘도사’는 지금으로 말하면 광포의 존귀한 지도자입니다. 자신이 보탑이라고 깨닫는 사람은 당연히 다른 사람의 가슴속에도 보탑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사람들의 보탑을 여는 존재로 바뀝니다. 아부쓰보를 기점으로 사도와 북국(北國) 사람들이 보탑으로 빛납니다. 진정한 제자기 때문에 광포 지도자로서 대성인과 불이의 공전(共戰)에 일어섰으면 하는 염원을 담아 심혈을 기울여 격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정행보살이 다시 태어나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성인을 수호한 아부쓰보에게 참으로 불가사의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불법상의 깊은 유대를 느낀 말씀입니다.
대성인은 그 아부쓰보의 깊은 마음씨에 감동해 “상행보살이 출현하시면 그 힘에 맡겨드리기로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끝으로 대성인은 “보탑을 부부 함께 은밀히 배례할지어다.”라고, 어본존을 소중히 외호하고 창제에 면려하라고 촉구하십니다.
‘은밀히’라는 말은 대성인이 사면되신 뒤에도 아주 삼엄한 상황이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어본존을 소중히 “배례할지어다.”라고 어본존 근본의 신심을 가르치셨습니다.
인간찬가, 생명찬가의 시대로
정확하게 20년 전(1991년), 제2차 종문사건의 와중에 학회의 혼의 독립으로 결실하는 투쟁의 나날에서 우리는 수없이 이 ‘보탑어서’를 함께 배독했습니다.
독일에서, 영국에서, 일본에서, …. ‘자신이 보탑’, 이 불법의 인간존경과 생명존엄의 철리에 바탕을 둔 우주적 휴머니즘이 장대한 인간찬가, 생명찬가를 지구에 울려 퍼지게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칠보로 빛나는 보탑은 본디 우뚝 솟은 자신의 모습입니다. 자신은 장엄한 보탑입니다. 대성인은 “보탑즉일체중생, 일체중생즉남묘호렌게쿄의 전체이니라.”(어서 797쪽)고 가르치셨습니다.
자기 보탑을 보고 벗의 보탑도 본다. 그리고 이 보탑 저 보탑이 즐비하게 들어서 우리 지역을 장엄하게 한다. 지구를 장엄하게 한다.
광선유포의 보탑을 우리 지역에 세워야 합니다. 나는 이만큼 해냈다고 ‘영원한 금자탑’을 남겨야 합니다. ‘내 탑은 여기에 세운다.’고 인생을 장식해야 합니다.
우리 가슴속에 보탑을 용현시키고 나아가 그 보탑을 넓힌다, 보탑을 장엄하게 하는 칠보의 광채는 한 사람 한사람이 인간혁명한 모습입니다.
투쟁하는 사람은 반드시 빛납니다. ‘대원(大願)’을 지니고 사는 모습이 바로 보석과 같이 ‘불멸의 광채’를 발합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사람이 이 지구상에 숲처럼 빽빽이 보탑을 세울 사명을 지닌 광선유포의 용자입니다. 영웅입니다.
우리 보탑의 스크럼을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류가 요구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때’가 도래했습니다.
(주13) 삼신즉일(三身卽一)의 본각(本覺)의 여래(如來) : 법신, 보신, 응신의 삼신을 일신(一身)에 갖춘, 본디 깨달음을 갖춘 부처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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