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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봄 집회
하나님의 건축
4. 하나님 보좌의 건축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계22:1~5]
창세기 1장과 2장을 보면 하나님이 한 목적과 영원한 계획을 가지시고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동방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셔서 지으신 사람을 거기다 두시고 그 동산을 지키고 다스리게끔 하셨다는 말씀이 있다. 이 말을 우리말로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사람보고 나와 오순도순 잘 지내보자는 말이기도 하고, 나와 힘을 잘 모아 우주를 잘 통치하자는 말이 된다. 우주를 통치한다는 입장에서는 동산은 하나의 보좌이다. 보좌라고 번역을 했는데 왕좌를 말한다.
하나님의 왕좌는 맨 처음 에덴에 창설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주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이 있어야하니까 사람을 통해서 통치를 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우주 통치를 위해서 우리가 태어났고 지어졌다. 다른 일로 인해서 우리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우주 통치를 위해서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 사탄이 이것을 방해하려고 사람을 유인한 것이다. 하나님의 우주 통치를 방해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없으면 안될 줄 알기 때문에 그리고 사람이 빗나가면 하나님의 우주 통치가 빗나갈 줄 알기 때문에 그 사람을 빼돌리면 자기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아담을 유혹하게 되었다.
이 사실은 영원한 사실인데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사탄은 하나님은 어떻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의 우주 통치의 반려자이고 배필인 사람을 어떻게 해야 자기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것이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이런 전쟁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냥 내가 내 좋은 대로 살고 있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우주 통치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한 사람이 나이고, 그 한 사람은 적에 의해서 늘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된다. 왜냐하면 에덴을 볼 때 그렇게 온전하게 만들어놓았어도 사탄이 와서 결국 틈을 잡아 사람을 딴 곳으로 빼돌렸다. 오늘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타락한 인간은 결국 가인과 아벨을 낳게 되고, 그 다음에 에녹성을 건축하여 인간 문화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가인과 아벨이 둘이 서로 싸워서 죽였기 때문에 두 사람이 역사는 창세기 4장에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대신에 셋을 주셨는데 셋의 후예들은 또 나가다가 노아시대에 와서 홍수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노아의 식구들을 구원하여 또 새로운 이 작업을 하려고 이 통치를 하려고 했는데 이 사람들이 또 어디로 가는가 하면 바벨로 가고 말았다. 그래서 거기서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불러낸 것이다. 이 창세기 3장부터 11장까지 있는 이 사건은 시간적으로 얼마냐, 어느 연대에 속하냐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류 역사에 관한 문제이고 영원한 문제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 문제는 이 땅위에서 진행되고 있고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계시록을 보면 그 바벨이 마지막 멸망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에덴에서 시작한 이 보좌가 어떻게 흘러가는가? 이 에덴에 보니까 생명나무가 있고 강이 있고 보석이 있다고 되어있다. 금과 진주와 호마노와 같은 보석이 있다고 했다. 이 에덴이 닫혀지고 화염검으로 가려졌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이 보좌가 공개적으로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임수정부 비슷하게 나타난 것이 성막이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시정부이다. 땅위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임시정부이다.
이 성막은 무엇으로 구성되었는가? 나무와 금과 돌과 물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에덴동산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상해 임시정부처엄 임시정부이니까 이 성막을 만들기 전에 세상에서는 바로의 궁전이 건설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국고성을 쌓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바로의 궁전을 짓고 있었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이스라엘 왕국이 건설된 후에 성전이 건축되었는데 이 성전 역시 나무와 금과 돌과 물로 지어졌다. 이때 이 성전을 향해 공격하는 세계 열방들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의 공격했고 마침내는 그 성전의 보물들을 가져가고 노략질해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메시아 고레스왕을 보내서 느부갓넷살을 보내서 다시 그것을 되돌려 보내는 역사들이 이스라엘의 역사들이다. 최종적으로는 로마제국을 통해서 AD 70년에 이 성전이 완전히 훼파되게 되고 말았다. 역사에서는 자취를 감추게 되고 그 자리에 모슬렘 사원이 서게 되었다. 이것이 에덴에서부터 와서 AD 70년에 타이터스에 의해서 훼파된 하나의 성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성전도 성막도 다 회파될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에덴은 감추어져있었다는 것이다. 누구도 들어갈 수 없도록 만일 사람을 들어가게 하면 그 에덴을 훼파해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에 또 성전이나 성막이 훼파된 것처럼 그렇게 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화염검으로 가려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놓고 두루 도는 그룹들로 말미암아 지키게 했다는 것이다. 임시정부는 없어졌지만 원 정부는 남아있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보존되어 있는 보좌가 요한계시록에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오랜 역사를 지나오면서 하나님께서 이 보좌의 회복을 갈망하고 있었다. 이 보좌가 없이는 이 우주 통치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전 세계를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일반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전혀 그런 것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보좌가 없는 통치란 있을 수가 없다. 왕좌가 있어야 통치가 가능하다. 왕좌가 없는데 어떻게 통치가 가능하겠는가? 또 어떤 사람들은 묻는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이 우주를 통치한다면 어떻게 이렇게 이 지구상에 모순이 있으며 이렇게 불행이 만연되어있을 수가 있는가? 어째서 한쪽에서는 배불러서 죽고, 한쪽에서는 배고파서 죽는가? 이런 문제들을 제기한다. 한쪽에서는 살을 빼려고 매일 운동을 해야 되고, 한쪽에서는 살이 없어 보리죽이라도 먹어야 되는 모순이 생기는가? 이런 질문들을 하고 있다.
이것은 왜 그런가? 하나님의 보좌가 땅위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신데 왜 그런가? 하나님이 계시지만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다. 땅위에 그의 보좌가 없다. 땅위의 통치권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누구에게 있는가? 땅위의 통치권은 사탄에게 넘어가 있다. 마태복음 4장에는 분명하게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의 그때 상황을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을 산꼭대기에 세우시고 사탄이 하는 말이 내게 절하라,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이기만 하면 이것을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들에게 주노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자기 통치(영역)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절을 하면, 나를 숭배하면 내가 이것을 주겠다는 뜻이다. 땅위에는 하나님 보좌가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땅위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없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했는데 이 말은 땅위에는 없다는 말이고, 땅위에는 보좌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 통치가 없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보좌가 임하옵시며’라는 말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로 기도하고 있다. 이 땅의 사정을 자세히 보면 하늘의 통치권을 하나님을 통치권을 이미 벗어나버렸다는 것이다. 하늘에만 하나님의 통치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오신 목적과 갈망은 그 하늘의 통치가 땅에 오도록 그 보좌가 땅으로 내려오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 그분이 오셨고,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필요한가?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사용해 보았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들을 사용해 보았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을 사용해보았더니 결국 그 성전을 지키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을 바꾸는 것이었다. 이 사람을 바꾸지 않고는 안되겠다, 그렇지 않고는 이 보좌가 형성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회개시켰지만 아무리 해봐도 다시 그 자리이고 다시 그 자리였다. 천하에 없는 율법을 주어서 백성들을 가르쳐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이다. 천하에 없는 왕을 주어 나라를 세워놓았지만 그 나라가 도로 망해버리는 역사를 반복하는 동안에 하나님에게는 한 방법이 생겼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여기서 인간의 정체를 폭로하면서 사람이 더 이상 헛된 것에 방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의 정체를 폭로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항상 무엇인가 다른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예 안한다. 노름도 아예 재주 없는 사람은 안한다.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안하는데 뭔가 머리가 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계산도 좀 할 수 있고 남도 좀 속일 수 있다는 사람이 하지 노름하면서 남 속이지 않고 돈 따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다 속여야 딴다. 속일 자신이 없는 사람은 못한다. 증권하다 잘된 사람도 있겠지만 망한 사람도 많다. 그런데 왜 하는가? 뭔가 자기가 머리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다. 스스로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안한다. 나 같은 사람은 골치가 아파서 안한다.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한다.
그래서 네가 무슨 가능성이 있는지 정체를 밝혀보자 하여 한 사람을 십자가에 내놓았는데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는 참 기이한 광경을 보게 된다. 한 사람은 오른 편에 한 사람은 왼편에 있어 세 사람이 십자가에서 처형이 되었다. 한 사람은 너무너무 악해서 그 자리에서까지도 ‘네가 하나님이 아들이냐, 네가 그리스도냐, 뛰어내려 봐라’하는 사람이었다. 악에 받힌 사람이다. 또 한 사람은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당신이 행하신 것이 옳지 않으신 것이 없습니다’하고 회개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가운데 선 이 예수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극히 선한 분이었다. 어디에도 흠을 잡을 수 없는 완전하고도 선한 분이었다.
이 세 사람이 대조적으로 십자가에 서 있었다. 전 인류가 거기에 서 있는 것과 똑같다. 전 인류를 가르면 이 세 사람으로 갈라진다. 죽으면서도 한번 뛰어내려 봐라 했는데 그 고통 속에서 어떻게 그 말을 하겠는가. 얼마나 악이 받혔으면 그 고통 속에서 어떻게 그 말을 하겠는가. 한편에서는 그래도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은혜를 구하고 바라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종교인들이 아니겠는가. 대표적으로는 또 기독교인들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항상 은혜만 기다려야 되는 사람이고 늘 주여 주여 하면서 하나님 은혜만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600곡 찬송가를 보면 거의 80%가 전부 그 자리에서 부르는 노래이다. 하늘에서 하나님 은혜를 내려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살려주십시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를 모른 채 하여 주십시오, 전부 이런 노래들이다. 이 찬송가라는 것은 기독교 역사의 하나의 결정적인 산물이다. 시편이 이스라엘 역사의 결정적인 산물이듯이 이 600곡 찬송가는 기독교 2000년 역사의 결정적인 산물이다. 이 찬송가 가사를 들어보면 이 가사가 기독교 2000년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보여주고 있고, 무엇을 어떻게 믿고 있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어느 수준의 사람들이 와 있는가가 이 찬송가에 다 들어있다. 우리가 새로 만든 찬송가를 보면 우리의 현 주소가 있다. 그와 꼭 마찬가지이다. 노래라는 것은 언제든지 현주소이다. 유행가를 잘 보면 시대별로 갈라져있다. 그 시대상황을 유행가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뽕짝도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고 아주 의미가 있다. 흘러간 노래라고 하는데 그것은 그 시대의 노래라는 뜻이다. 노래를 들어보면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를 알게 된다. 서울 가는 12열차라든가 경상도 사투리에 아가씨가 슬피 운다거나 이런 것은 그 시대를 반영한 것이다. 이렇게 찬송가는 구성되어 있다. 시편이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
여기 이 흐름 속에서 이 세 인물들이 다 작용하고 있다. 우편의 강도는 ‘당신의 나라가 이를 때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했는데 이 사람이 종교인들이다. 그런데 예수는 지극히 선한 사람이다. 하나님도 인정하고 사람도 인정한 사람이다. 유태인들도 그의 선함을 인정했다. 내가 무슨 악한 일을 해서 너희가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고 했을 때 네가 무슨 악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참람해서이다, 단지 너는 종교적으로 잘못됐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정말로 그 사람이 올바른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리적으로 잘못되면 이단이라고 한다. 이단이라는 말이 알고 보면 쉬운 말이 아니고 무서운 말이다. 옛날에는 사람을 떼려 죽여도 살인이라고 하지 않는 말이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쓰기도 하고, 알고 쓰는지 모르고 쓰는지도 모르겠다. 강팍해서 모르고 쓰는지, 몰라서 쓰는지 모르겠다. 옛날에는 이단이라고 하면 사람을 죽여도 살인죄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렇게 무서운 말이다.
이런 세계 속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셨다. 여기서 인간이 다 폭로되었다. 악한 자도 폭로되고, 슬프게 은혜를 기다기고 있는 사람도 폭로되고, 지극히 선한 사람도 폭로되고, 다 폭로되었다. 다 폭로되고 나니까 무엇이 남았는가? 오직 사람의 그 절대성만 남았다. 어제 수학 공부를 많이 했는데 더하기 빼기는 다 만든 것이다. 내가 더하고 싶어서 더한 것이고, 빼고 싶어 뺀 것이니까 내가 만든 것이다. 그런데 절대 숫자는 영(zero)이라고 한다. 뺄 수도 없고 더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 절대 숫자가 남았다. 그 절대치가 사람이다.
그러면 왜 이 사람을 보여주고 있는가? 그것은 다시 한번 잘해보자는 것이다. 다시 에덴으로 돌아가 보자. 너와 내가 합하여 우주 통치를 잘해보자. 그러려면 네가 진실해야지 네가 진실하지 않으면 우주 통치를 이루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진실하기 위해서는 폭로가 되어야 된다. 그래서 이런 사건이 발생했다. 십자가에 대한 해석이 좀 특이할 것이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특이하다고 생각하고 들어주기 바란다. 이치를 잘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제 다른 사람과 일을 해야 되겠다는 것이다. 그 다른 사람을 새로 짓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는 원래 지어놓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을 드러내면 되는데 그 사람을 드러낼 방법이 첫째는 율법이었다. 율법을 주었더니 이 사람이 악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바울이 말하기를 율법은 뭣 하러 주었는가, 죄가 죄로 드러나게 하기 위해 주었다고 했다. 율법이 없을 때는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런데 율법이 옴으로 죄가 죄로 드러났다. 이 말은 교통신호를 설치하지 않았을 때는 교통법규로 위반한 사람이 없었다. 교통신호를 설치해놓으니까 교통법규를 위반한 사람이 나왔다. 그리고 위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런데 원래부터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 아니고 교통신호가 생기니까 그냥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율법이 온 것은 죄가 죄로 드러나게 하려고 왔다. 이것은 폭로하자는 것이다. 하나님이 네가 먼저 무엇인지 알아보아라, 네가 이 법을 옳다고 할테니까 네가 해보면 뭔지 알게 될 것이다, 네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율법을 주었는데 율법을 받은 사람이 거기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이 법을 문자대로 지킬 수 있느냐에만 몰두하고 관심을 갖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바울이 이것을 깨달은 것이다. 바울은 율법에 도를 통한 사람인데 이제 예수를 만나고 보니까 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구나, 율법은 나를 드러내기 위해 주신 것이었음을 그때야 깨닫게 된 것이다. 바울이 그것을 최초로 깨달은 사람이다.
이것을 가지고도 안되니까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락함으로써 인간의 정체성을 드러내게 했다. 변치않는 그 절대치를 드러내었다. 그 자리에서만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이 가능하고, 그 자리에서만 보좌가 이루어질 수 있다. 하나님의 통치가 100% 이루어지려면 이런 사람이라야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종이면 100% 종이라야 주인의 뜻이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종이 너무 똑똑하면 주인의 뜻이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생각에 옳을 대로 해버리기 때문이다. 머리가 좋으면 부산 갔다 오라고 하는데 굳이 부산까지 갈 필요가 있겠는가 하여 마산 가서 해결하고 오면 되지 할 수도 있다.
정말로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려면 하나님이 창조한 그대로 그 정체성이 유지되고 그것이 폭로되어야만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될 수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자기의 정체성이 드러날 때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가 드러날 때 순종하게 된다. 순종이 좋은 것이라고 해서 순종할 수가 없다. 순종이 좋은 것은 다 안다. 다 알지만 안된다. 왜? 자기 정체성이 드러나지 않으니까 자기 가능성이 항상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굴복할 때는 어떤 때인가? 내 정체성이 드러날 때이다.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받아들이고 구속하시고 구원하셨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이 자리에서만 이루어진다. 이 자리가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순서대로 하는 말은 이 자리에 와 있는 사람이 자기의 자신을 보니까 교리적으로 말하면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념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와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로 볼 때 그렇게 설명해야 그 사람들은 알아듣는다. 그런데 요즘 그것을 그대로 본 따서 그 수속을 밟아서 올라가려고 한다. 그 수속을 밟아서 올라간다고 될 일이 아니다. 이 자리에 오지 않으면 주의 사함도 안되고 거듭남도 안되고 변화됨도 안되고 아무것도 안되는 것이다. 다시 시작하려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것을 보고 첫 사람 아담이 끝났다고 말하고, 마지막 사람 아담이 살아났다고 말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말한다. 말은 여러 가지로 말하지만 실제는 이것 하나이다. 여기서 인생의 본 바탕이 드러나고 본질이 알려졌다. 내가 내 마음대로 하느냐 안하느냐는 세계가 아니다. 내가 주님을 따르려면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주님 마음대로 해야 될텐데 하고 이렇게 이를 악물 문제가 아니고, 자기의 정체성이 드러나면 말할 필요가 전혀 없다. 나는 우리 가운데서 정체성이 드러나기만을 소망하고 있다. 이렇게 할 것인가 저렇게 할 것인가, 순종하겠다고 결심한 사람도 있지만 나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결심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므로 반대도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소리도 않는다. 그렇지만 뒤로 가보면 안된다. 얼마 있지 않으면 코가 쭉 빠져서 온다.
문제는 자기의 정체성이 발견되는 것이다. 십자가는 언제든지 보라고 영원히 서 있다. 교회도 항상 보라고 올 때마다 보라고 십자가를 붙여놓은 것 같다. 그런데 헛것을 봐서 내가 어떻게 저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나도 예수님처럼 이를 악물고 견디면서 하나님을 위해 이래볼까를 생각한다. 그것을 하라고 십자가가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알게 하려고, 절대의 나를 알게 하려고 주어진 것이다. 이 사람하고만 하나님이 천하를 의논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 사람을 찾고 있다. 천하를 경영하려면 사람이 필요하다. 돕는 사람이 필요하다. 유비(劉備)가 천하경영을 하려고 제갈량을 찾아간다. 삼국지에 보면 삼고초려(三顧草廬)라고 하는데 사정하고 사정하여 결국은 승낙을 받아내어 중원의 패자가 돼보려고 했던 것이다. 제갈량이 없이는 유비는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림도 없는 일이다. 제갈량을 만났기 때문에 그나마 그 세력을 가질 수 있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이런 사람을 만나야 자기의 보좌를 만들 수 있다. 천만명이 있어도 수십억이 있어도 이런 사람이 아니면 소용이 없고, 한 사람이라도 이런 사람이 있으면 자기의 보좌가 될 수가 있다.
예수님 한 분이 오셨을 때 이미 그분의 보좌는 하나였고 완성됐다고 할 수 있다. 단지 그 보좌가 적다. 크지 못할 뿐이지 보좌 자체는 질적으로는 완성되었다. 지금은 무엇이 필요한가? 그 질적으로 완성된 보좌가 확장되는 것이다. 정부는 커야 된다. 지금 지구상에 보면 조그마한 약 5만명 되는 나라도 있고 10만명 되는 나라도 있다. 그런데도 왕은 왕이고 대통령은 대통령이다. 백악관 정도는 되어야 세계경영을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0만명, 100만명을 가지고 나라라고 해보았자 통치가 되겠는가.
지금의 문제는 무엇인가? 새로운 보좌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진 보좌를 확장하는 것이다. 확장을 하려면 그만큼의 사람이 필요하다. 예수님 한 사람과 하나님이 합해서 하나의 보좌를 이루고 있는데 이 보좌가 확장되려면 그와 같은 사람들이 그만큼 필요하다. 많이 필요하다. 많이 있어야 보좌가 확장이 된다. 그래서 오늘 우리를 부른 것이다.
왜 우리를 꼭 십자가로 끌고 가려고 하는가? 李목사는 왜 30년 동안 십자가로만 끌고 가려고 하는가, 물귀신인가 생각할 것인데 그 이유가 그것이다. 내가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러시는 것이다. 그곳으로 끌고 가야 보좌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멋대로 살다가 죽으려면 필요 없다. 내가 하나님과 함께 살아보려면 내가 하나님의 보좌가 돼보려면 그분의 통치에 참여하려면 나는 그 자리로 가야 된다. 그렇지 않으려면 안해도 되고, 그냥 돌아다니다가 죽으면 된다. 그런데 우리가 그럴 수가 없지 않은가. 우리 인생을 그렇게 버릴 수가 없다. 천하보다 귀한 인생을 그렇게 허비할 수가 없다. 적어도 인생으로 났으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올라야 되지 않겠는가. 그분의 통치에 참여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려고 만들었는데 우리가 그냥 그럭저럭 살다가 죽지 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지금 세상은 그렇게 만들고 있다. 자본주의 세계는 사람들을 어떤 절대적인 목표 안으로 집결시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냥 편하고 재미있고 노는 것만 퍼뜨려 놓았기 때문에 오늘의 청소년들은 아무 생각이 없다. 어디에 놀 곳이 있는가, 어디에 재미있는 것이 있는가, 이런 것밖에는 생각이 없다. 사람은 어떤 목표를 세워놓아도 문제가 되고, 목표가 없어도 문제가 된다. 공산주의는 목표를 세워놓으니 맨날 복창하고 이상한 짓만 하고 있다. 또 자본주의는 그것을 풀어놓으니 제멋대로 놀러 다니는 것밖에 모른다.
인간에게 참 목표가 설정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하나님의 목표 안에 우리가 참여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우리 인생이라면 우리 인생은 너무너무 귀하고 존귀하고 아무 곳에나 쓸 수가 도저히 없다. 아까워서 쓸 수가 없다. 좋은 것을 함부로 던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진주를 개에게 던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기가 진주인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만들어서 그 사람과 더불어서 천하를 의논하려고 하는 것이다. 삼국지(三國志) 식으로 말하면 천하를 모으려고 그런 사람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유비는 천하에서 그런 사람들을 모았다. 관우나 장비 같은 사람을 모아 조조 같은 놈을 떼려 부수자고 도원의 결의도 하였는데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도원의 결의를 하여 천하를 다스려 보자는 것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사탄이 있는데 저 사탄을 떼려 부수고 우리가 같이 좋은 나라를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천하의 사람을 모으고 있다. 우리는 그의 부름 받음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포자가 요한계시록에서 우리에게 그림처럼 드러났다. AD 70년에 성전이 무너지고 난 다음에 땅위에는 하나님의 정부가 없어졌다.
그래서 요한은 땅위의 보좌를 보지 못하고 맨 처음 요한계시록 4장에서 하늘에 있는 보좌를 보게 된다.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다고 했는데 그 말은 땅에는 없다는 말이다.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다. 벽옥 같다는 말은 하나님 색깔을 말하고, 홍보석 같다는 말은 어린양의 색깔을 의미한다. 이것이 암시적으로 보여지고 있다.
그리고 무지개가 둘러져 있더라고 했는데 이 무지개는 녹보석 같더라는 것이다. 이 무지개는 언약을 상징하고, 이 언약의 상징은 녹보석 같더라는 것이다. 벽옥과 홍보석을 합해놓으면 녹보석이 된다. 하늘과 땅을 합해 놓으면 녹색이 된다. 녹색은 푸른 잔디가 되고 사람이 눕고 싶고 앉고 싶고 거닐고 싶고 평화가 상징된다. 주님의 뺨을 보고 두 뺨은 뭐라고 했는가? 푸른 언덕 같다고 했다. 녹보석 같다는 뜻이다. 가장 부담없는 색깔이 녹색이다. 우리 눈에도 가장 좋은 색깔이 녹색이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이 섞여진 색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평화롭게 보이는 것이다.
24장로들이 있고 24보좌들이 있고 행정을 집행하고 있는데 이 24보좌에서 집행되는 행정은 어떤 것인가? 번개와 음성과 뇌성 같은 것들이었다. 왜? 땅위의 보좌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가 나서 24보좌들이 화풀이 한 것이 번개이고 음성이고 뇌성이다. 하늘에서는 잔뜩 골이 났고 신경질이 났다는 뜻이다.
일곱 등불을 켠 것이 있더라고 했는데 일곱 등불은 땅에 있는 일곱 교회를 의미한다. 그래도 거기서 하나의 희망이 일곱 등불이었다. 그리고 네 생물이 있었다. 사자와 송아지와 사람과 독수리 같은 네 생물이 있었는데 이 네 생물들은 좌우사방에 눈이 가득하더라는 것이다. 눈이 가득하면 자기에게는 좋을지 모르지만 남에게는 대단히 불편하다. 왜냐하면 숨을 곳이 없다. 만약 내 몸 전체가 눈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이 눈을 어디에 둘지 모를 것이다. 사람이 숨을 곳도 있어야 되고 가릴 곳도 있어야지 너무나 사방에 눈만 있으면 못 견딜 것이다. 네 생물은 눈이 가득하더라고 했는데 이것은 지금 세상에 대해 하나님이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살피는 눈이므로 심판의 눈이다. 땅에 평화가 없다는 것이다.
계시록 11장에 가니 하늘에 있는 하나님 성전이 보인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 성전으로 땅위에는 성전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은 하늘에 있다. 이 성전은 역시 보좌에 해당된다. 여기서는 언약궤가 보이더라고 한다. 이것은 약속이 있다는 것이다. 약속이 있고 언약궤가 보이지만 그 언약궤로부터 나온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번개와 음성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라고 했다. 언약궤가 있는데 땅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하나님의 언약은 성취가 되어야 되는 것인데 땅위에서는 인간이 없어서 이것이 성취가 안되면 얼마나 하나님이 답답하시고 분하시겠는가. 그것이 표현된 것이 번개와 음성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다.
이것이 조금 더 발전하여 계시록 15장 5절에 가면 하늘에 있는 증거 장막의 성전의 열리더라고 되어있다. 증거 장막은 하나님의 성전과는 개념이 조금 다르다. 같은 성전이지만 증거 장막은 장막이니까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한다는 뜻이다. 이 증거 장막의 성전이 보이더니 일곱 재앙을 가지 일곱 천사가 나오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일곱 재앙을 담은 금 대접을 갖다가 땅에 쏟으라고 천사들에게 주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연기가 나는데 성전에 아무도 들어갈 자가 없더라고 한다. 이 상황을 자세히 생각해보면 얼마나 무서운 상황인가. 하늘에서는 지금 잔뜩 긴장되어 있고 하늘은 지금 찌푸려져 있다. 비오기 직전에 캄캄해지면 무섭다. 천둥번개가 나면 무슨 일이 날 것 같다. 그러다가 태풍이라도 불어 닥친다거나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버리면 한꺼번에 홍수가 나서 집이 떠내려가는 일도 생긴다. 꼭 그와 같은 전조이고 징조가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계시록 20장에 가니까 크고 흰 보좌가 나온다. 이 크고 흰 보좌는 생명책의 중심이 된다. 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다 심판을 받더라. 하늘도 피하여 간 데가 없고 땅도 피하여 간 데가 없더라. 오직 거기는 생명책에 기록된 것만 남더라. 사망과 음부도 다 불 못에 던져지더라. 지금까지의 모든 부정적인 요소가 이 생명책 앞에서 완전히 심판되고 처리되고 정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이것은 희망이 보인 것이다. 생명의 세계가 열렸다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생명의 세계가 열려야 문제가 해결이 된다. 오늘 교회의 상황을 보면 하늘에 있는 상황과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과 하늘에 있는 증거 장막의 성전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사정 밑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크고 흰 보좌의 심판에 올 때는 생명책에 기록되어야 된다. 거기에 녹명되어야 된다는 것이다. 생명의 세계 안으로 들어와야 된다.
요한복음을 공부할 때 ‘생명의 목장’이라는 제목으로 했었다. 제목만 들어보아도 뭔가 새로워지지 않는가? 왜 ‘생명의 목장’이라고 했는가? 그것은 의문의 목장이 있기 때문이다. 교리적인 목장, 의문의 목장, 형식적인 목장, 종교적인 목장, 제도적인 목장이 있기 때문에 ‘생명의 목장’이라는 이름을 썼다. 내 ‘생명의 목장’ 안으로 들어와야 생명책에 녹명되는 것이 가능하다.
계시록 21장에 가니까 새 예루살렘이 나오는데 단장한 신부의 모습으로 나온다. 어떤 문제가 해결되었다.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하는 장막이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 하나님이 된다. 저희는 그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그의 아버지가 된다. 이런 세계가 열려지게 된다.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로 보여지고 있다. 이것은 지금 하늘에서 어떤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고, 아까 말씀드린 것과 마찬가지로 정체성이 드러난 그 인간의 변화와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교회를 통해서 교회로 살면서 어떤 변화가 있다. 그 자리에서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서 변화가 되었다. 그분의 성분으로 그분의 성향으로 변화되어 그분과 협력할 수 있는 어떤 상태로 변화되어 갔다는 것이다. 한 보좌를 이룰 수 있는 어떤 상태로 지금 변화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 보게 될 때 이런 과정을 겪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겠다하고 크고 높은 산으로 데려가더라고 했다. 계시록 21장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이 다시 그 성전이시라고 말한다. 하나님과 그 어린양이 그 성전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어린양이 나란히 둘이 앉아있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어린양이 성전이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빛이 되고 어린양은 등이 된다. 성전이라는 것은 등이다. 하나님의 어린양이 성전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어린양을 통해서 통치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어린양이 그 성전이라는 뜻이다.
계시록 22장 마지막에 보니까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그 성의 중심에 있다. 그 길 가운데 있더라. 이것은 중심이라는 뜻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중심은 새 예루살렘이고, 새 예루살렘의 중심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이다. 역시 이것은 하나님과 어린양 둘의 보좌가 아니고, 하나님의 어린양의 보좌이다.
여기에 생명수 강이 흐르더라고 했다. 다시 에덴을 생각해 보자. 창세기 2장의 에덴을 생각해 보면 생명수 강이 흐르더라, 생명나무가 있더라고 했다. 이미 21장에서 그 성에 대해 여러 가지 보석들이 나왔다. 벽옥으로 쌓여진 성에 12보석이 기초가 되어있고 진주로 문이 되어있고 길은 정금이라고 설명이 되어있었다. 생명수의 강이 있고 생명나무가 있고 보석들이 있는 이런 세계가 다시 회복되고 있다. 그때보다 강화되어서 회복되고 있다. 그때는 사탄이 들어올 수 있는 동산이었지만 이 동산은 들어올 수 없는 동산이다. 진주 문을 통해서 들어가기 때문에 사탄을 그곳을 들어갈 수 없는 세계로 강화된 동산이 다시 회복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경륜의 최종완성이다. 하나님 경륜의 최종완성을 위해서 누가 필요한가? 바로 사람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이 필요한가? 예수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그 예수 같은 사람이 누구인가? 그것은 십자가에서 폭로된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가 왜 그 자리로 부름 받았는가? 우리가 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이 보좌가 되기 위해서 부름 받았다. 사실상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때 비로소 하나님을 본다고 한다.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라고 했다. 하나님 얼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세가 등을 조금 봤다고 표현되었는데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고 되어있다.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섬기면서 본다고 했다. 여기서 섬긴다는 것은 동력한다는 말이다. 그분과 함께 일한다는 말이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하나님의 이름이 저희 이마에 있다는 말이니까 이마에 있다는 말은 표시라는 말이다. 그 사람들을 보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써있더라는 것이다. 개 이마에 김아무개라고 쓰겠는가. 개 이마에는 개 이름을 붙이지 사람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옛날에 문경에서 개 한 마리를 키웠는데 개 이름이 옥순이었는데 들을 때마다 우스웠다. 사람 이름을 붙여 놓으니 어울리지 않는다. 개에게는 개 이름을 붙여야 어울린다. 여기 이름이 있다는 말은 그렇게 됐다는 말이다. 사람이 이름이 있으니까 우리가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 모든 사람의 이마에는 사람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람이라고 말한다. 개라고 붙어있으면 개라고 한다. 나도 내 이마에 사람이라고 써있지 않은가. 그래서 여러분이 나를 사람이라고 부른다. 나도 여러분을 볼 때 이마에 사람이라고 써있기 때문에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이것은 마주 보는 것만이 아니고 그의 이름이 저희 이마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보좌이다. 여기 하나님의 이름들이 있는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어린양이나 하나님의 사람이나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어린양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사람들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 이렇게 물으면 ‘저 하늘에 계십니다’로 대답하는 것은 옛날 이야기이다. 계시록 4장의 이야기이다. 계시록 4장까지는 맞는 대답이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하고 물으면 ‘증거 장막의 성전에 계십니다’는 계시록 15장에 가면 맞다. 그 다음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하고 물으면 ‘크고 흰 보좌의 생명책 안에 있습니다’라고 해야 맞다. 그 다음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하고 물으면 ‘단장된 신부 안에 있습니다’라고 해야 맞다. 그 다음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하고 물으면 ‘어린양 안에 있습니다’라고 해야 맞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 어린양 안에 계신다. 어린양 안에 감추어져 있다. 이제는 우리가 하늘에 가서 볼 수도 없고 성전에 가서 볼 수도 없다. 이미 벌써 떠나오셨다. 이미 어린양 안으로 이사를 했기 때문에 이제 옛날 집으로 가서는 볼 수가 없다. 오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어린양 안에 있다. 그래서 어린양을 통해서 통치하신다. 그러면 어린양은 도대체 무엇인가? 목장에 가서 아무리 봐야 모른다. 양은 멍청하다거나 지저분하다거나 연약하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런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말한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십자가에서 폭로된 그 사람이다.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이 계신다.
오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그 사람 속에 계신다. 오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그 사람들 속에 계신다. 왜 그 사람들 속에 있는가? 통치를 위해서이다. 그 사람들 안에 계셔야만 자기의 통치가 완성된다. 그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이 통치하기 때문에 다시는 저주가 없다는 것이다. 하늘의 보좌를 폈을 때는 저주가 있었다.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있었는데 다 저주이다. 하늘에 있는 성전도 마찬가지로 번개와 음성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었는데 이 모두도 저주이다. 증거 장막의 성전은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금대접이 쏟아져 나왔다. 이도 저주이다. 크고 흰 보좌는 생명책이 있어서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다 쓸어버린다. 불 못에 다 들어가 버린다.
그런데 단장된 신부 안에 오니까 하나님은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하나님 백성이 된다. 저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그는 그들의 아버지가 된다. 이렇게 바꾸어졌다. 이것이 좀 더 완전하게 바꾸어지니까 하나님과 어린양이 그 성전으로 바꾸어졌다. 하나님은 지금 어린양 안으로 최종적인 이사를 왔다. 더 이상 이사 갈 곳이 없다는 말이다.
히브리서 1장은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로 말한다. 이는 아들 안에 있다는 말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하나님은 아들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누구든지 다 안다. 사실 아는 것이 아니라 교리적으로 배운 것이다. 폭로된 그 사람 안에, 우리가 버리고 우리가 무시했던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이 있구나로 알아야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있다로 아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수박 겉핥기이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그 중심에 있더라고 한다. 이제 우주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어린양 안에 있다. 어린양이 보좌가 되는 거기에 우주의 중심이 있으니까 거기에서 통치가 일어나니까 다시는 저주가 없는 것이다.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설사 우리 안에 있다하더라도 가령 우리가 호랑이 같으면 호랑이 소리를 내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늑대 같으면 늑대 소리를 내지 않을 수가 없다. 참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늑대가 어떻게 자기 소리를 참겠는가. 개가 어떻게 자기 짓는 소리를 참겠는가.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좀 들어오신다고 하더라도 나타나는 것은 늑대이다. 하나님이 있기는 있는데 믿고 영접하고 의자까지 놓아드렸는데 소리가 나오는 것은 늑대소리가 나온다. 이것이 비극이다. 없다하면 섭섭한 일이고 있기는 있다. 그런데 나타나기를 그렇게 나타나버리는 것을 어떡하겠는가. 분명히 전기는 들어왔는데 전구가 시커멓다 보니 불이 시커먼 것이다. 그러니 그 전기를 보고 누가 밝다고 하겠으며 좋다고 하겠는가.
하나님을 보고 좋다고 하려면 등이 좋아야 된다. 보좌가 좋아야 된다. 참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써붙여 놓았는데 하느님이 하늘에 계시면 우리가 참 좋으신 하나님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참 좋으신 하나님이 되려면 참 좋으신 사람이 있어야 된다. 참 좋으신 사람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이래야 참 좋으신 하나님이다. 하나님 스스로가 참 좋으신 하나님도 아니고, 참 나쁜 하나님도 아니다.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일 뿐이다. 하나님은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다. 선한 것도 없고 악한 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타날 때 보면 전기는 똑같은 전기이지만 빨간 전구에서는 빨갛게 나타나고 파란 전구에서는 파랗게 나타난다. 한국전력에서 빨간 전기 따로 팔고 노란 전기 따로 팔고 파란 전기 따로 파는 것이 아니다. 전기만 팔고 있다. 전기는 사실 빛도 없고 색깔도 없는데 무엇을 만나니까 빛이 되었다. 또 무엇을 만나니까 색깔이 되었다. 원래는 전기는 빛이 전혀 없다. 전기가 빛이 있으면 보고 달아나면 되니까 벼락 맞아 죽지 않는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 우리가 이 보좌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이 보좌가 되어야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없으면 이 보좌를 만들 수가 없다. 왜 동산을 가려놓았던가? 이 사람이 없어 가려놓았다. 왜 임시정부를 수립했던가? 그 보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보좌가 생기면 임시정부가 있을 필요가 없다. 임시정부는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상해에 가면 임시정부 자리가 있다고 한다. 불란서에 우리나라 대사관 자리가 있다고 하여 보존한다고 한다. 그것은 단지 보존할 뿐이지 통치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에서 지금 우리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불란서의 대사관이 우리나라를 대표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것은 박물관에 보관한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이루어지게 되면 성경에 썼던 그 성전들이나 성막은 모두 박물관에 들어가야 된다. 그 이상의 가치가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역사적인 사명을 띠고 부름 받았다. 하나님의 보좌가 되기 위해서이다. 통치의 보좌가 되기 위해서이다. 나를 통해서 빨간색이 될 수 있고 나를 통해서 파란색이 될 수도 있다. 내가 파란색이면 그분이 파란색으로 나타나고 내가 빨간색이면 그분이 빨간색으로 나타난다.
그분이 그분대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십자가에서 폭로된 내 자신을 알아야 된다. 폭로된 자신을 내 자신으로 알아야 된다. 그리고 여기서 건축이 가능하다. 보좌는 건축되는 것이다. 건축이 되려면 분명히 재료가 좋아야 된다. 재료가 나쁘면 아무리 설계를 잘해도 좋은 건축이 될 수가 없다. 재료! 그 완전한 재료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끝내신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지금도 우리 안에 문제가 여러 가지가 있는가? 왜 있는가? 우리의 본질은 십자가에서 드러났다. 정체성이 드러났다. 단번에 싹 사라지면 좋겠는데 그런데도 왜 문제가 있는가? 건축을 하려면 좀 다듬어질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다듬어져야 할 문제가 남아있다. 집을 지으려면 돌로 하든지 벽돌로 하든지 결정을 해야 된다. 결정이 되었다면 무조건 돌만 갖다놓는다고 집이 되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벽돌만 갖다놓는다고 집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다듬어야 된다.
교회 생활 안에서 큰 기능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다듬는 기능이다. 서로 어우러지고 짜여 지려고 하니까 다듬어져야 한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 왜 여러 사람이 있을까? 한 사람이 있으면 좋을텐데 왜 여러 사람이 있는 것일까? 그것은 정체성은 하나이지만 모양은 여러 가지라는 것이다. 보석을 보니까 보석은 하나인데 색깔은 여러 가지였다. 교회도 결국 한 생명 안에 여러 가지 모양이 있다. 여러 가지 색깔이 있는 것을 보게 되고 그 색깔마다 다듬어지면 성을 이루는 보석 성벽이 된다. 오늘 교회 생활은 다듬어지는 생활이다. 나 혼자 기도하고 성경보고 예수 믿는다는 것은 설사 그 사람이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아서 선별되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건축에 참여할 수 없다. 왜? 건축 안에서 다듬어져야 하는데 다듬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좋은 벽돌이 한 장 남아 있는 것이고 굴러다니는 것이다. 벽돌이 아무리 좋아도 혼자 있으면 아무 가치가 없다. 시시한 벽돌이라고 하더라도 어우러져야 돼지막이라도 될 수 있다. 벽돌 한 장이 혼자 있다면 길바닥에 버려져서 밟히움이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교회 생활이 필요하다.
교회 생활을 통해서 다듬어진 것만이 건축의 효과가 있다. 물론 다른 것에서 다듬어진 것도 있고, 세상에서 다듬어진 것도 있을 수 있지만 그런 것은 건축이 될 수가 없다. 그 설계도에 맞도록 다듬어져야지 아무렇게나 다듬는다고 자기가 보기 좋도록 다듬어놓으면 이 건축에는 쓸 수가 없다. 홀로 나 혼자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과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은 다르다. 신앙생활은 자기 혼자해도 된다. 하지만 교회 생활은 자기 혼자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신앙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생활에 있다. 왜? 건축에 있기 때문이다.
이 성은 건축되어진 성이다. 지어진 성이고 만들어진 성이다. 새로 지어진 성이다. 새로 짓기 위해서는 재료가 필요하고, 그 재료는 다듬어져야 된다. 혹시 부딪혀서 다듬어지더라도 아깝게 생각하지 말고, 잘라져 나갈 것은 잘라져 나가야 된다. 뭔가 부딪히면 그것은 잘라져 나갈 부분으로 알면 받아들이기가 쉽다.
목표를 어디에 두느냐일 것이다. 이것을 그냥 박물관에 보관해 둘 것인가, 아니면 건축 재료로 쓸 것인지에 따라서 잘라져야 될 것도 있고 잘라지지 않아야 될 것도 있다. 잘라지는 것이 유익한 것도 있다. 건축을 목표로 한다면 잘라지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건축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면 잘라지는 것은 유익하지 않다. 무익하다.
한 목표, 거룩한 목표! 이것은 건축을 통해서 보좌가 확장되는 것이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잘라질 곳은 잘라져야 되고, 다듬어질 때는 다듬어져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자르려고 누가 왔구나, 나를 다듬으려고 옆에서 누가 나를 건드리는구나, 왜 자꾸 찌르는지, 왜 모기처럼 괴롭게 하는지, 나 혼자 편하게 살게 놔두지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다 하나님이 목적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다. 그 목적은 거룩한 목적이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하나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된다. 아무리 잘났어도 짜여지지 못하면 건축이 될 수 없다. 박물관에 남아 있는 것밖에 될 수 없을 것이다.
다시는 저주가 없다. 왜 다시는 저주가 없는가? 어린양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어린양을 통해서 행정하시기 때문에 다시는 저주가 없다. 폭로된 그 사람을 통해서 통치하시기 때문에 다시는 저주가 없다. 이 세계에 지금 우리가 부름 받고 있다. 이 세계야 말로 인류가 추구해야 될 마지막 소원이다. 그리고 마지막 목표이다. 세상의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이상향으로 제시했다. 그렇지만 다 망했다. 그럴 듯 했지만 다 되지 않았다.
90년 동안 성전을 지었는데 그것은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지었다. 헤롯이 유태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지었으니까 일부러 90년 동안 지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계속 짓고 있으니까 유태인들은 다 끝나면 보자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성전은 누가 보아도 참 잘 지었다고 할 수도 있고, 규모를 보면 10년이 걸려도 90년이 걸려도 다 이해가 된다. 그런데 사흘 동안에 이 성전을 다시 일으키겠다고 한 말은 도저히 이해될 수가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사흘 동안에 일으킨 성전은 영원히 남아있고, 90년 동안 지은 성전은 불과 몇 년 쓰지 못하고 망해버렸다. 예수님 당시 AD 45년인가에 지어진 성전인데 숫자 상 AD 70년에 망했다고 하면 25년간 쓰고 초토화되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성전은 영원한 성전이다. 오늘 우리 안에도 있고, 앞으로도 계속 확장될 것이고 영원할 것이다. 우리가 개념을 바꾸어야 한다. 어린양 안에 어떻게 하나님이 계시는가? 어린양에 안에 계시는 그 하나님이 과연 가능한가? 개념을 바꾸어야 한다. 황제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고, 어린양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다. 이 어린양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보좌를 이루게 되면 다시는 저주가 없게 될 것이다. 저주가 있을 필요가 전혀 없다. 왜 저주가 있었는가? 호랑이 속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저주가 있었다. 뇌성과 벽력 속에 계시니 저주가 되었다. 분명히 오고 싶어서 오기는 왔는데, 이 사람이 없다보니까 어쩔 수 없이 고레스 속에도 들어가고 느부갓넬살 속에도 들어갔던 것이다. 그래서 고레스도도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다. 나의 종, 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다. 오죽 사람이 없었으면 이방인의 왕을 들어 자기의 그리스도로 삼았겠는가. 하나님은 그만큼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 그만큼 기름 부음 받은 자들을 필요로 한다. 왜? 당신의 통치를 위해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위해서 우리 자신이 헌신하여야 되고 드려야 된다. 그 통치에 나를 사용해 주십시오 해야 된다. ‘내가 누구를 보낼꼬?’할 때 ‘주여 나를 보내소서’ 해야 된다. 우리가 내일부터 나가는 사회, 세상 속에 나가면 우리는 다 사람들로부터 주시를 받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보좌를 보고 주시하고 있다. 우리를 통해서 무엇이 나갈 것인가? 잘못하여 저주를 주어버리면 뇌성과 음성과 번개를 주어버리면 박살난다. 큰 우박 덩어리로 때려버리면 머리가 터져서 나는 하나님에게 머리가 터졌다고 할 것이므로 하나님이 책임을 져야한다. 오늘 우리가 나가는 사회는 보좌를 가지고 나가는 사회이다. 보좌 안에서의 통치를 가지고 나가는 세계이다.
[기 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진토에서 우리를 빚으시고 당신의 생기를 불어넣어서 당신의 동산을 관리할 자로 경작할 자로 작정하셨던 그 영원한 계획을 사탄의 그 끈질긴 방해와 사람들의 그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취소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이것을 성취하셔서 오늘 우리 앞에 영 안에서 이것을 보도록 지시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고 오늘 교회 생활을 통해서 우리가 이 싹을 누리고 이것을 체험해 가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 인생이 어디에 쓰여지려 할 것이며 무엇을 위해서 있는가는 분명하게 보여주셨으니까 우리 인생을 이제 헛되이 낭비할 수 없고 오직 당신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만 온전하게 쓰여 질 그런 인생이 되어지기를 원하옵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당신의 보좌가 되어서 땅위의 움직이는 보좌들이 되게 되기를 원하고 세상 앞에 당신의 얼굴이 되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