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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샘골 泉洞 원문보기 글쓴이: 풋과일
갑신정변(甲申政變)
1. 우정총국 - 갑신정변 첫날
1884년 12월 4일. 음력 시월 열이레의 둥근 달이 서울 전동(典洞)의 우정총국을 비추고 있다. 이 밤, 느닷없이 치솟는 불길이 역사의 한 순간을 그을린다. 갑신정변의 시작이었다. 우정총국은 이날 밤 초대 총판(總辦·대표) 홍영식이 주최하는 낙성식 축하파티로 흥청거렸다.
서울에 주재하는 외교관들과 정부 대신들이 각기 다른 꿈의 축배를 올리고 있다. 1876년 일본과 첫 수교를 맺은 이후 조선의 문에는 더 이상 닫아 걸 수 있는 빗장이 없었다. 1882년 미국과 영국·독일에 잇달아 문을 열었고 1884년에는 이탈리아·러시아와 국교를 튼 그때의 조선은 지난달 칠레와 사상 첫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오늘의 한국을 연상시킨다. 지금, 미군기지가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는 용산이 바로 그 해 8월 일본의 요구로 외국인을 받아들일 ‘자유 지대’(開市場)로 문 열었던 것은 역사의 우연이기만 한 것일까.
1883년 인천항을 개항하고 이듬해 봄 부산과 나가사키 간 해저 케이블을 막 개통했을 정도로 조선은 급박한 개방의 물결을 타고 있었지만, 정작 나라를 어디로 끌어갈지 에선 개화당과 수구당이 ‘속도’와 ‘폭’을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양반이 상업에 종사하는 것과 상민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된 것이 겨우 2년 전인 1882년 말의 일이었다. 근대의 빛은 아직 어둠 속에 있었다.
▲ 1883년 말 미국 방문 길에 나선 민영익과 개화파 일행이 일본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이렇게 함께했던 이들은 1년 뒤 개화의 속도와 방법론을 놓고 동지에서 적으로 갈라서게 된다. 앞줄 오른쪽에서부터 김옥균 서광범·민영익, 맨 왼쪽이 홍영식.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에 유길준이 보인다. 앞줄에 보이는 어린이는 당시 게이오의숙에 유학 중이던 박용화다.
파티에 참석하고 있던 김옥균(金玉均)이 일본 서기관 시마무라(島村久)에게 물었다. 그대는 하늘을 아는가. “요로시(좋다)!” 시마무라가 즉각 답했다. 갑신정변 거사의 암구호였다. 좋다, 불길만 솟으면 이제 천하가 바뀌게 될 것이다.
‘각기 다른 꿈’들은 그날 파티 자리에서도 은밀히 타오르고 있다. 흥분과 기대, 그리고 막연한 두려움들. 개화파 젊은 지식인들을 지지했으나 정변에는 협력하고 싶지 않던 초대 미국 공사 푸트(Lucius H. Foote), 조선의 수상한 기운이 러시아의 확장을 가져올까봐 불안한 영국 영사 애스턴(William George Aston), 수구파를 손에 넣고 있는 청국영사 천서우탕(陳壽棠), 그리고 정변의 순간을 기다리느라 공사관에서 대기 중인 일본 공사 다케조에를 대신해 참석한 서기관 시마무라, 친청파인 외교고문 묄렌도르프…. 박영효와 개화당의 우두머리 김옥균, 바로 그날 밤 개화파의 처단 대상 목록에 올라있는 수구당의 거두 민영익·한규직·이조연도 한 자리에 있었다.
죽여야 할 자를 바라보는 김옥균의 눈빛이 깊게 떨린다. 불길이 오르면, 그의 가장 친했던 친구이고 한때는 개화의 같은 꿈을 가졌던, 그러나 지금은 수구당의 가장 젊은 총아가 되어있는 민영익은 죽을 것이다. 그는 다만 그의 오래 전 친구가 고통 없이 단칼에 죽기를 바랄 뿐이다. 시간은 거침없이 흐르나, 기다리는 불길은 타오르지 않는다.
열강 틈바구니서 헤맨 20년…100년 후 오늘과 '닮은 꼴'
거사의 주역들인 홍영식과 김옥균·박영효는 피가 마른다. 최초의 계획이었던 안동 별궁 방화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기별에 행동대원 유혁로가 급히 말한다. 죽여야 할 사람들은 그냥 이 파티 자리에서 죽여 버리자. 김옥균은 실패로 돌아간 별궁 방화 대신 민가에 불을 지르라고 지시하고, 마침내 창밖으로 불길이 치솟는다. 포성이 뒤따른다.
파티 장은 삽시간에 수라장이 됐다. 외국 영사들과 고위 대신들은 불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장 먼저 불길을 향해 달려 나갔던 민영익은 칼에 찔린 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한성을 불바다로 만들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을 베어버리고, 그 피 위에서 혁명정강을 발표하게 될 갑신정변의 밤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김옥균과 홍영식·박영효·서광범 등 개화당 청년들은 그때 갓 스물셋에서 서른셋 사이였다. 전권부대신으로 미국의 신문물을 돌아보고 와 우정총국 총판이 된 홍영식의 나이 고작 스물아홉. 그들은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를 창간했고 치도국(治道局)과 한성 순경부(巡警部)를 만들어 국가 시스템 정비에 나섰다. 마침내 근대우편제도까지 도입하며 개화당이 얻어내려 했던 것은 눈부신 근대의 속도였다. 좌절의 순간까지 멈출 수 없던, 멈춰서도 안 되었던 눈부신 속도. “모든 평화수단은 끝났소.” 개화당의 맏형으로 꼽히던 서른셋의 김옥균. 1884년이 저물어갈 무렵, 그는 더 이상 수구파와 합의에 의해 개혁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이 무의미하다고 선언했다. 김옥균은 개화당이 고종의 마음을 얻었다는 데 추호도 의심이 없었다. “무릇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국가의 대계를 그대가 생각한 계획에 맡길 터이니, 그대는 이에 대해 다시 의심하지 말라.” 이 말을 글로 쓰고 옥새까지 찍어준 것이 우정총국 낙성식 불과 닷새 전이었다. 김옥균 등은 군주의 마음이 수구파가 아닌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믿었다.
수구파는 청나라의 등에 업혀있었으나, 청은 이미 제 목숨도 지킬 수 없는 늙은 호랑이에 불과했다. 청은 바로 그 해 안남(베트남)을 놓고 프랑스와 전쟁에서 패해 그곳의 지배력을 상실해버린 몰락의 제국 아니던가. 그러나 청은 조선에서는 가장 강력한 외세였으며 수구파의 힘이었다. 중도파를 대변하는 김윤식조차 한가롭게 청나라 톈진(天津)을 유유자적하며 신문물을 보고 오겠다고 하지 않는가. 한때 개화당과 절친했던 민영익마저 이들의 초조함과 속도감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제 그는 개화당이 칼끝을 겨누어야 할 수구파의 가장 젊은 대표가 되었다.
왜 하필 일본이어야 했는가? 침략자인 것이 분명한, 떠오르는 후발(後發) 제국. 언젠가 조선마저 완전히 삼켜버릴 욕심을 정한론(征韓論)을 통해 분명히 드러냈던 일본의 손을 그들은 왜 잡아야 했는가. 김옥균과 개화당의 눈에 민중의 힘은, 조선 근대화의 자생적 힘은 보이지 않았다. 미국은 적어도 당시까지는 조선의 정치에 개입할 의지가 없었다. 적어도 그들 눈에는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일본이 새로운 ‘국가 모델’로 보였을 것이다. “우리들은 이미 사지(死地)에 들어가 있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겠소, 아니면 먼저 치겠소? 우리에게 길은 한 가지뿐이오.” 김옥균과 개화당이 이날 토로한 진실은, 일본을 등에 업은 권력의 장악이 아니라 운명적인 애국충정이다. 적어도 혁명의 전야에는 그러했다.
스스로 밝지 않으면 불길로라도 밝혀야 했던 근대의 빛은, 그러나 아직 불길 뒤편 어둠 속에 있다. 외세를 등에 업은 외세의 배격, 혁명을 위한 무자비한 폭력, 친일의 족적(足跡)들, 마침내 10년 후 갑오개혁이 일어날 때까지 조선의 근대화를 제자리에 묶어버린 보수화, 혁명의 실패가 그들에게 덧씌울 오명도 역사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백 투 더 퓨처의 정치적 상상력은 아직 그들에게 허용되어 있지 않다. 잡느냐, 잡히느냐. 군주를 수중에 차지하고 천하를 잡기 위해 불길 속을 내달릴 뿐이다. 멀미 같은 밤이 숨 가쁘게 깊어가고 이른바 3일 천하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갑신정변 120주년과 러일전쟁 100주년을 맞이하는 현재 동북아의 국제정세는 한말(韓末)과 비슷하게 남북한을 둘러싼 주변 열강들의 경쟁과 대립이 격화되고 있다. 역사적 실패와 좌절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한말에 한반도의 평화와 생존을 위해 ‘어느 국가를 의지하고 동맹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주변 열강의 이해관계에 비춰볼 때, 19세기 후반 한반도는 주변 강대국들 간 흥정과 타협 그리고 이권쟁탈의 대상에 불과했다. 서쪽에 위치한 중국(청·淸)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진주한 청국 군대를 배경으로 조선의 외교와 국내 정치에 개입했다. 동쪽에서는 일본이 조선의 청국으로부터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면서 접근했다. 일본은 한반도를 자국의 안전에 필수불가결한 지역으로 간주하고 중국과의 전쟁에 대비했다.
북쪽으로는 제정(帝政) 러시아가 있었다. 시베리아 개발과 얼지 않는 부동항(不凍港)을 찾기 위해 러시아는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진출을 본격화하면서 조선 정부에 접근했다. 그리고 남쪽에서 영국은 한반도를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완충지대로 여겼으며, 러시아 극동함대에 대비하기 위해 1885년 거문도를 불법점령했다. 프랑스는 가톨릭의 포교를 염두에 두었고, 미국은 조선의 위기 때 중재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됐지만, 실제로는 한반도에 무관심했다.
조선 정부는 주변 강대국들을 근대화의 모델로 여기고 있었다. 조선 정부는 이들 국가에 대해 군사 교관 파견과 차관(借款), 경제교류 등을 통해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 노력을 지원해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조선의 이 같은 기대와는 상반되게 주변 강대국들은 서로 경쟁 내지 연합의 양상을 반복했다. 동북아 지역에서 특정 국가의 지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1882년 임오군란의 발발을 계기로 청·일 양국은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한반도 진출 및 동북아의 맹주(盟主) 자리를 놓고 대립했다. 일본은 1884년 갑신정변 당시 청국과의 전면 전쟁을 우려했다. 조선의 개화파를 사지(死地)에 남겨두고 철수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은 청국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군비를 강화하면서 조선 진출의 기회를 노렸다.
갑신정변으로부터 꼭 10년 후인 1894년, 조선 정부가 동학 농민군 진압에 나서면서 열강은 조선 땅에서 격돌했다. 조선 정부는 청국에 구원병을 요청했지만 청국은 제한된 병력만을 파견했다. 반면 일본은 총동원령을 내려서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들었다. 개전 초기 일본은 조선의 자주와 평화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중국을 대신하여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를 실행에 옮겼다.
일본의 대륙 진출을 우려한 러시아는 삼국간섭(1895년)과 아관파천(1896년)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진출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 후 한반도와 만주를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 간의 경쟁 속에서 한반도의 분할 지배가 거론됐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며 자국 식민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일본 입장을 지지했다. 일본은 서구와의 동맹 내지 암묵적 협조를 이끌어낸 후, 그동안 준비해 온 군사력과 전투경험을 기반으로 1904년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사실상 식민지화를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았다.
주변 국가들의 대(對)한반도 정책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었던 조선 정부는 처음에는 중국, 그 다음에는 일본, 러시아, 미국에 외교적·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국제법과 한반도의 평화를 내세웠던 국가 중에서 조선이 믿고 의존할 만한 진정한 동맹국은 없었다. 한국이 도와줄 것으로 가장 기대를 걸었던 미국조차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 중립을 표방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1905년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제일 먼저 한국에서 공사관을 철수시켰다. 이런 20여년에 걸친 실패 경험을 돌이켜 볼 때, 조선이 취해야 하는 현실적 방안 중 하나는 특정 국가에 의존하기보다는 주변 국가 모두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주변 강대국 간 경쟁과 대립 양상을 활용하여 조선의 안정과 국제적 지위를 보장받는 것이 모색돼야만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 이를 지탱할 만한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과 외교적 실무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력이 뒷받침되지 못했다. 그 결과 이 시기 조선의 운명은 부국강병과 개혁을 위한 ‘기회의 시기’가 되지 못했다. 그 반대로 한반도는 외세에 대한 짝사랑과 쇄국의 쌍곡선 속에서 식민지로 전락하는 비극적 종말을 맞게 됐다.
▲ 갑신정변 발발현장: 120년 전 갑신정변 발발의 현장이었던 우정총국
동지에서 적으로. 갑신정변의 배경에는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 등 ‘개화파 4인’과 민씨 척족(戚族)의 젊은 거물 민영익의 만남과 헤어짐이 있었다. 개화운동의 주동 세력이었던 김옥균 등은 민비(閔妃)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민영익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지만, 그가 청(淸)과의 관계를 중시하며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함에 따라 개혁을 넘어 혁명을 선택한 것이다.
개화파의 리더 김옥균(金玉均·1851~1894)이 홍영식(洪英植·1855~1884), 서광범(1859~ 1897), 박영효(朴泳孝·1861~1939) 등 훗날의 동지들을 만난 것은 1870년대 중반 ‘개화파의 스승’ 박규수(朴珪壽·1807~ 1876)의 사랑방에서였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의 손자로 평안감사·우의정을 역임한 박규수는 1872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눈을 떴고, 1874년 벼슬에서 물러난 후 젊은 관리와 집권층 자제들에게 개화의 필요성을 가르치는 데 전념했다. 이들은 모두 명문 출신이었다. 김옥균은 강릉부사를 지낸 안동 김문 김병기(金炳基)의 양자로 1872년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한 엘리트 관료였다. 홍영식은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의 아들로 1873년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에서 근무했다. 서광범은 이조참판을 지낸 서상익(徐相翊)의 아들로 1880년 문과에 급제했다. 가장 지위가 높았던 박영효는 철종(哲宗)의 부마(駙馬·사위)로 왕실 가족이었다. 민영익(閔泳翊·1860~1914)은 1877년 과거에 급제하여 정계에 진출하면서 개화파를 만났다. 민비의 오빠로 민씨 일파의 수장(首長)이었던 민승호의 양자 민영익은 고종과 민비의 특별한 기대를 받은 ‘황태자’였다.
민영익과 김옥균 등은 새로운 국가 모델을 ‘개화’에서 찾으면서 급격히 가까워졌다. 외교 업무를 관장하고 있던 민영익은 일본·중국으로 잇따라 개화 시찰단을 파견하고, 각종 정부기구 개편과 신문 발행·차관 교섭·유학생 파견 등 급물살을 탄 근대화 움직임에서 개화파의 외교·경제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러나 민영익은 1884년 5월, 10개월에 걸친 미국·유럽 시찰을 마치고 귀국한 후 개화파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개화파가 청으로부터의 자주를 외치면서 일본에 기대어 개화를 추진하려는 것과는 달리 민영익은 청(淸)과의 유대를 강조했다. 그해 10월 군권(軍權)을 장악한 민영익은 일본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군에서 축출하는 등 개화파 활동을 제약했다. 그로부터 김옥균 등과 민영익은 ‘함께 국사(國事)를 논의할 수 없는 사이’(미국공사관 퍼어크 무관의 보고)가 되고 말았다.
고종, 김옥균이 재촉하자 日공사에 密旨…"짐을 지키라"
2. 군주를 장악하라 ― 갑신정변 둘째 날
▲ 905년의 창덕궁 인정전 모습. 창덕궁의 정전(正殿)인 인정전은 국왕이 집무를 보던 곳이다. 갑신정변 당시 급진개화파는 고종이 신변의 위협을 느껴 거처를 옮기도록 이곳에 폭약을 설치했다.
불길로 시작된 1884년 12월 4일 정변의 밤이 자정을 향해 치달리고 있다. 피투성이가 된 민영익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우정국을 빠져나온 김옥균은 필사적인 힘을 다해 일본공사관으로 달려가고 있다. 창덕궁의 군주를 손에 넣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은 일본의 지원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일이다. 병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거사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1882년의 임오군란 후, 청나라는 3000명의 청군을 조선에 주둔시켰다. 1884년 프랑스가 하노이를 점령하면서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청나라는 조선 주둔군 중 1500명을 빼갔다. 김옥균과 개화당은 동대문 밖에 주둔하던 청군이 절반으로 줄자, 이야말로 ‘거사’를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무릎을 쳤으나, 청군과 맞설 일본 병력은 고작 120명에 불과했다.
일본 군대를 제외하고는 서재필 등이 이끄는 십 수 명의 사관생도와 그들의 보잘것없는 군대, 그리고 거의 텅 비어 있다시피 한 탄약상자와 장전도 제대로 안 되는 몇 자루의 총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개화당은 자칫 ‘청일 전쟁’으로 폭발할 수 있는 군사 충돌을 청군이 일으킬 리 없다고 확신했다.
최초의 불길이 솟자, 교동의 일본공사관 창가에 초조하게 붙어 서 있던 다케조에의 입이 비로소 벌어진다. ‘요로시!’ 그는 드디어 천하를 잡았다고 믿는다. 불길은 계속 번지고, 불붙은 민가는 비명 속에 깨어났으며, 그 소란 속으로 조선의 자객들과 일본의 낭인들이 총포와 무사도를 들고 죽여야 할 자들을 찾아 뛴다. 살육까지도 순수한 열정이라고 믿었던 당시의 개화파들이 정변의 밤을 달리던 그 거리, 그날 밤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껴안은 우정국 뜰은 이제 안온하고 우아한 도시 공원으로 변모했다. 근처 직장인들이 제법 완연해진 봄기운을 즐기고 있는 이곳에서, 새삼 1884년이나 2004년이나 역사의 작동원리는 같다는 생각을 한다.
모든 변화는 속도 위에 있다. 그러나 속도를 받쳐주는 것은 바퀴이다. 페달을 밟는 ‘선수’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퀴의 무게이다. 오늘 이 나라를 굴리고 있는 바퀴인 민중들은, 페달의 속도가 아니라 자신의 무게를 믿는다. 그러나 120년 전 갑신년의 겨울 밤, 정변의 숨 가쁜 순간을 내달리던 개화의 주역들은 스스로 페달을 밟았던 속도에 제가 먼저 현기증을 내고 있다.
다케조에 공사와 군사 동원의 약속을 확인한 김옥균은 바로 창덕궁으로 내달았다. 대기 중이던 김봉균과 이석이에게 인정전 아래 폭약을 매설하고 30분 후 폭파시키도록 명한다. 고종의 침전에는 윤경완이 군졸 50여명을 이끌고 거사의 밤을 지키고 있다. 난세의 군주는 은근과 끈기로 나라를 지키고 있었다. 무능한 군주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의 강력한 자주를 꿈꾸었고, 조선의 힘을 위해 개화된 문명을 열망했으며, 청의 압력으로부터 나라를 방어하기 위해 개화파에 힘을 실어주었다.
고종과 민비를 깨운 김옥균은 변란이 일어났음을 알리고, 세자 내외와 대왕대비 조씨, 그리고 홍 대비까지 이끌고 경우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한다. 군주는 망설였으나 때마침 궁녀 고대수가 통명전에서 터뜨린 폭음에 완연히 공포에 사로잡힌다. 김옥균이 권하는 대로 그는 일본공사에게 밀지(密旨)를 내린다. “日本軍來護朕(일본 군대는 와서 짐을 지키라)” 김옥균이 지니고 있던 연필로 요금문 앞 길거리에서 쓰인 이 보잘것없는 밀지는 훗날 위조와 무효 논쟁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박영효가 밀지를 들고 일본공사관으로 달려갔을 때, 이미 다케조에는 출동준비를 마치고 있다. 고상한 유학자였던 다케조에도 이 순간만큼은 유교적 도덕심을 잊는다. 정변의 밤엔 이기고 지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그 밤 살육은 도처에서 일어난다. 다케조에가 이끄는 일군이 경우궁의 안팎에 포진하고, 개화파가 군주를 장악해 버린 다음에야 숨이 턱에 차 달려온 윤태준, 이조연, 한규직 등은 군주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자객들에게 목이 잘린다. 누가 조선의 문신들은 칼을 지니지 못하게 하였단 말이냐. 피맺힌 절규를 내뱉으며 조영하, 민영목, 민태호도 차례차례 목이 날아간다. 아무도 죽이지 말라는 군주의 처참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내시감 유재현은 군주의 면전에서 목숨을 잃는다. 이날 개화당의 칼에 날아간 대신의 목숨이 11명에 이르렀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죽음은 또 얼마나 되는지, 미처 기록되지 못한 역사의 한 장면이다.
이 무자비한 칼바람 앞에서 고종은 참혹하게 질려 버린다. 개화파의 잔혹함에 대한 분노로 말미암아, 진보와 개혁에 대한 믿음마저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그런 군주의 마음을 읽을 여유가 개화당에는 없었다. 이번이 아니면 안 된다, 수구의 목을 단번에 날려 버려야 한다. 그 잔인한 새벽, 개혁 정권의 각료 명단이 발표된다.
우의정 홍영식, 전후영사 좌포장 박영효, 좌우영사 겸 대리 외무독판 겸 우포장 서광범, 호조참판 김옥균, 병조참판 겸 정령관 서재필, 도승지 박영교. 대원군 쪽 인물들도 보인다. 대원군의 조카인 이재원은 좌의정을 맡았고, 이재원의 형 이재완은 병조판서를 맡았다. 대왕대비 조씨의 측근과 온건 개화파들도 각료 명단에 포함된다. 말하자면 거국내각. 그러나 벼락치듯 이뤄낸 정변의 둘째 날 밝은 아침에 세상에 드러난 그 ‘혼합형’ 명단은 개화당이 그 정도도 자기들 세력만으로는 채울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젊었던 만큼 무모하기 이를 데 없던 조선의 개화당. 그들은 붓 자국이 마르기도 전에 곧 스러져갈 혁명의 정강들을 힘 있게 써내려가고 있었다.
一 대원군의 즉각 송환을 실현하고 청나라에 대한 조공과 허례를 폐지함.
一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의 평등권을 이루고 인재등용에 있어 자리로써 사람을 택하지 않을 것임.
一 지조법을 개혁, 관리의 부정을 막아 인민들의 곤궁함을 구하고 나라 재정을 넉넉하게 할 것임.
개화당이 가졌던 것은 거대한 이상과 한 줌의 힘, 그리고 성급함뿐이었는가. 그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일본 병력과, 이제 인질이 되어버린 군주뿐이다. 군주와 왕비의 끈질긴 환궁 요구를 묵살하고 개화파는 군주를 좌의정 이재원의 계동 집으로 옮긴다. 규모가 크지 않아 인질을 붙들어 놓기에 적합한 집이었다. 정작 군주의 환궁 요구를 들어준 것은 일본공사 다케조에였다. 유학자의 점잖음으로, 그러나 병력을 장악하고 있는 전략가로서는 턱없이 무지하게도 다케조에는 한 줌의 일본군대로는 지켜내는 것이 불가능한 창덕궁으로 군주를 돌려보낸다.
바로 그 시간, 청군의 젊은 장교 위안스카이는 일본군과의 군사 충돌을 두려워하는 오조유에게 출병을 격렬히 주장하고 있었다. 훗날 중국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를 퇴위시키고 혁명파인 쑨원마저 물리친 후,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될 그가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군을 이끌고 온 것은 2년 전이었다. 정변 세력을 치러 나가자고 주장하는 그의 나이 스물여섯. 개화당 청년들과 동년배였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 과격한 이 청나라 군인은 늙고 겁 많은 상관들을 협박처럼 다그쳐들었다.
정변의 역사는 이처럼 외줄 위에 있다. 오랜 후의 사람들은 많은 교훈을 갖고 그들을 기억할 것이다. 무모한 당위에만 차 있는 칼끝에 묻힌 피의 힘밖에는 없는 이 실패할 수밖에 없던 혁명을 단호히 정변이라 이름 붙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역사에 있어 중요한 것은 실패의 결과가 아니라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라는 것을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늘 도정이다. 실패의 원인은 실패의 결과와 함께 120년 후 갑신년의 오늘을 밝힐 것이다.
조선의 개화가 본격화된 1880년대 조정을 움직이고 있던 유력 정파는 온건개화파, 급진개화파, 민씨(閔氏) 일파, 대원군(大院君) 일파 등 4개였다. 적극적인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개화파’는 개화의 방법론과 모델을 놓고 다시 두 파로 나뉘었다.
‘온건개화파’는 서양의 과학기술만을 받아들이고 정신문화는 거부하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내세웠으며, 중국 청(淸)나라가 서양의 근대기술을 도입하여 자강(自强)을 도모하려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모델로 했다. 김홍집(金弘集) 어윤중(魚允中) 김윤식(金允植) 이조연(李祖淵) 등이 대표적인 인물로 이들은 40대를 전후한 나이로 정국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급진개화파’는 서양의 과학기술은 물론 정신문화까지 받아들이자는 입장으로, 구미(歐美) 자본주의 국가를 본떴던 일본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모델로 했다. 김옥균(金玉均)을 필두로 박영교(朴泳敎)-박영효(朴泳孝) 형제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 등이 핵심 인물로 당시 20대 후반~30대 전반으로 정부 각 부서에서 실무자로 활약하고 있었다.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의 가장 큰 차이는 정치체제와 유교(儒敎)의 역할을 둘러싼 입장이었다. 급진개화파는 양반 지배체제를 타파하고 백성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며 유교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온건개화파는 여전히 양반 지배체제와 유교의 틀 안에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추구했다. 즉 급진개화파가 ‘근대 국민국가’를 지향했다면, 온건개화파는 ‘계몽군주 체제’를 선호했던 것이다.
급진개화파는 자신들을 ‘개화당(開化黨)’·‘독립당(獨立黨)’, 온건개화파를 ‘수구당(守舊黨)’·‘사대당(事大黨)’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온건개화파 역시 ‘수구’나 ‘사대’를 추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개화의 방법론을 둘러싼 차이였기 때문에 그 같은 호명(呼名)은 정치 공세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민비(閔妃)를 둘러싸고 있는 민씨 일파는 민태호(閔台鎬) 민영목(閔泳穆) 민영익(閔泳翊) 민응식(閔應植) 등 이른바 ‘4민(閔)’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개항을 이끄는 등 개화에 적극적이었지만, 더 큰 목적은 자파(自派)의 권력 유지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정권에서 밀려날 위기에 처했다가 청나라 군대의 도움으로 이를 넘기자 친청(親淸) 노선을 택했고, 급진개화파와 정치적 입장을 같이했던 민영익이 그들과 갈라선 것도 이 때문이다.
대원군 세력은 1873년 11월 대원군이 정권을 내놓고 물러난 후 정치 일선에서 밀려나 있었다. 그러나 고종의 친형인 이재면(李載冕), 대원군의 둘째 형 정응(晸應)의 아들 이재원(李載元)과 이재완(李載完), 대원군의 조카뻘인 이재순(李載純) 등을 중심으로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들은 개화에는 소극적이었고, 역시 자파 세력의 확대에 가장 중점을 두었다.
갑신정변 사흘 동안도 이들 세력은 합종연횡을 거듭했다. 먼저 정변을 일으킨 급진개화파는 민씨 세력을 밀어낸 후 온건개화파 일부와 대원군 일파를 끌어들여 혁명정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사흘째 되는 날 청나라 군대를 등에 업고 반격에 성공한 민씨 일파는 급진개화파를 제거하고 다시 정권을 잡은 후 온건개화파, 대원군 일파의 일부와 제휴했다.
울창한 수풀 속에선 산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는 법. 멀리 떨어져 바라볼 때 그 진면목이 눈에 들어온다. “그대들이 잠자고 꿈꾸며 세상사에 개의치 않는 동안에 조선의 오랜 적인 일본인은 지금 당신들이 보고 있는 낯선 서양 사람들의 기술을 배우기에 분주했다.” 갑신정변이 일어나던 1884년부터 러일전쟁이 일어나던 1904년까지 이방인의 눈으로 조선의 영욕을 지켜본 미국인 앨런(Horace N. Allen, 1858~1932)의 진단이다.
100년 전 우리 역사 시계의 시계추가 “똑 이요, 딱 이요” 하며 유유자적하고 있을 때, 일본의 그것은 “똑딱똑딱” 바쁘게 움직였다는 말이다. 그가 우리의 정수리에 놓은 일침은 더 뼈아프다. “일본인들은 지난날 자기에게 문명을 전해 준 스승의 나라를 정복했다. 한때는 저들의 선생이었으나 지금은 늙어빠진 퇴역이 된 지금의 왕조에게 여러분들은 무엇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있겠는가?”라고….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 일본과 일본인을 근대 국민국가와 국민으로 거듭나게 하는 데 성공한 반면, 이 땅의 사람들은 좌절의 역사를 써야만 했다.
우리의 지도층은 ‘국민국가 만들기’(nation building)에 실패해서 나라를 식민지로 전락하게 했다. 백성(百姓)은 국민(國民), 나아가 시민(市民)으로 거듭나지 못해 ‘천황폐하의 신민(臣民)’이 되어버렸다. 한 세기 전 국민국가 형성의 시기에 ‘서세동점(西勢東漸)’이란 또 다른 세계화의 충격이 동아시아 지역에 도래했을 때, ‘시간의 경쟁’에서 낙오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 1900년대 초반 독립문 주위를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100년 전 우리 민족에게 ‘독립’은‘근대 국민국가 만들기’와‘열강의 침입에 맞서 나라 지키기’라는 이중의 과제를 의미했다.
물론, 우리 선조들이 수수방관만 한 것은 아니다. 국사 교과서는 말한다. 조선 후기부터 근대 지향적 실학사상과 자본주의의 싹이 트고 있었으며, 개항 이후에도 갑신정변, 갑오경장(1894~1896), 독립협회운동(1896~ 1898), 광무개혁(1897~1904)과 같은 개혁운동과 동학농민봉기(1894), 을미의병(1895), 을사의병(1905)과 같은 반침략 운동이 일어났지만, 서구 제국주의 열강과 이를 모방한 청나라와 일본의 침략 때문에 자주적인 근대국가 수립에 실패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는 없는 법. 애국주의 내지 민족주의적 입장에서의 감싸 안기나 외세에 책임 미루기만으로 우리의 마음이 편해질 수는 없다.
해방 후 허송한 역사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 “바쁘다 바빠”와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분초를 다투며 앞뒤를 가리지 않고 돌진한 오늘의 우리에게도 한 세기 전 조선 사람들이 이루려다가 실패한 목표는 여전히 달성해야 할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이데올로기 시대의 붕괴와 함께 다시 한 번 밀어닥친 세계화의 시대를 맞아, 오늘 우리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역사는 반복하는가?”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한 세기 전 난맥상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복마전의 태아적 원형(embryonic prototype)이다. 남북 분단은 논외로 하더라도 ‘보수와 진보’ ‘친미와 반미’로 나누어진 우리 안의 이분법은 한 세기 전 ‘개화와 수구’ ‘친일과 반일’의 분열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역사의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역사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는 자에게 미래는 없다. 세계사의 시계는 “똑딱똑딱” 가고 있는데 우리는 또 한 번 “똑 이요, 딱 이요”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의 시간을 다시 허송하는 어리석음을 거듭하지 않기 위해 한 세기 전 참담한 실패의 역사를 찬찬히 곱씹어 보자. 근대 국민국가 만들기와 제국주의 열강의 침입에 맞서 나라 지키기라는 이중의 과제를 짊어졌던 한 세기 전 이 땅의 사람들처럼 오늘의 우리도 동시대 다른 나라 사람보다 훨씬 무거운 책무를 어깨 위에 짊어지고 있다. 그 하나는 지난 세기가 남긴 숙제인 ‘국민국가 만들기’와 이를 넘어선 ‘아시아와 더불어 살기’이며, 다른 하나는 ‘국민을 넘어 시민으로 거듭나기’이다. (허동현·경희대교수)
혁명의 실패 뒤엔 민중의 분노만… 나라는 淸의 손으로
120년 전의 갑신년 12월 26일. 정변 사흘째의 아침은 낮은 구름 속에 묻혀 있다. 고종은 혁신정치를 천명하는 대정유신조서(大政維新詔書)를 선포한다. 잠시 후면 청군의 포성에 밀려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어버릴, 역사에 그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게 될 ‘유신’ 선포였다. 노회한 제국 청나라는 조금도 멈칫거리지 않았다. 전날 저녁 선인문 앞 군사 시위를 시작으로 작전이 시작됐다. 야심만만한 청년 장수 위안스카이는 6일 아침 창덕궁으로 환궁해 있던 고종에게 봉서를 보냈다. 군사작전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는 서신이었다. 다케조에 일본 공사에게도 같은 내용의 편지가 전해졌다. 청나라는 일본과의 군사 충돌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선전 포고였다.
혁명의 불길이 치솟았던 시간으로부터 사흘이 채 지나지 않은 오후 3시쯤이었다. 마침내 창덕궁의 하늘 위로 청군이 쏟아 붓는 포성이 터지기 시작했다. 전쟁의 시작이었다. 바로 그 시각 서재필이 거느리고 있던 사관생도들은 장전도 안 되고 발사도 안 되는 이름뿐인 총기들을 재조립하거나 수선하고 있었다.
▲ 서울의 외교사절들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울에 와 있던 각국 외교사절은 서로 경쟁과 협조 관계를 맺으며 자기 나라의 국익을 추구했다. 사진은 1903년 알렌 미국 공사의 초청으로 정동 미국공사관에서 회의를 가진 후 기념촬영 한 것이다. 오른쪽 두 번째부터 차례로 독일·프랑스·미국·청국·영국 공사이고, 왼쪽에서 두 번째가 러시아 공사다.
박영효가 신식 군대를 양성할 당시 조직해 두었던 군사가 있었으나 밀린 봉급부터 달라고 흥정을 할 정도로 신념 없는 군사들이었다. 정변의 주역들에겐 돈도 없었다.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이라곤 시대보다 빨랐던 이상과 그와는 어울리지 않게도 외세를 등에 업은 폭력뿐이었다. 군주는 포성이 가까워지는 가운데 창덕궁 뒤편 비원의 연경당으로 피신했다. 화약 냄새가 코를 찌를 무렵 옥류천 뒤편 북창문을 거쳐 북관묘로 몸을 피했다. 개화당에 뒷덜미를 잡힌 군주는 허겁지겁 창덕궁을 나온 뒤 경우궁에서 계동궁으로 떠밀리다 다시 돌아왔지만, 결국 또 궐 밖으로 달아나야 했다.
잘 훈련된 일본군 100명이면 청군 1,500명은 문제가 없다고 호언장담하던 다케조에였다. 하지만 막상 청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이 전쟁이 과연 본국의 이익에 부합할지 확신을 잃어버린다. 그렇다. 조선을 놓고 청과 일이 진짜 전쟁을 벌일 시기는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일본군 30명이 청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다케조에는 후퇴를 결정하고 만다. 일본의 손을 잡고 시작한 혁명. 일본의 손에 의해 정변으로 끝나는 순간이다. 끝까지 싸워 달라는 개화파의 절규는 공허하다. 일본은 조선을 위해 싸울 이유가 없다. 그들은 다만 그들의 조국을 위해 후퇴할 뿐이다.
개화파에 남은 것은 이제 군주뿐이었다. 김옥균은 군주에게 함께 인천으로 가자고 요구한다. 군주를 인천으로 옮겨가기만 한다면 일본의 지원을 다시 얻을 수 있을지 모르고, 잘 하면 일본까지 데려가 망명정부를 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어마어마한, 정변의 마지막 순간 거의 도착에 빠져버린 듯한 김옥균의 요구는 군주에게는 되 돌이 킬 수 없는 분노로 남는다. 난세의 군주였지만 적어도 군주가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너희들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군주는 그렇게 개화파를 버렸다. 김옥균은 군주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쏟는다. 이제 곧 천하 대역 죄인이 될, 그의 부모와 아내와 아이들은 몰살을 당하게 될, 그리고 자신은 10여년의 망명객이 될 것이며, 망명지 일본에서도 버림받은 후 결국 중국 상하이에서 조선정부가 보낸 암살자에게 목숨을 잃을, 그러나 군주를 사랑하였고 조선의 강대한 힘을 꿈꾸었던 김옥균은 이렇게 군주와 마지막 작별을 했다.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이 김옥균과 함께 후퇴하는 일본군을 쫓아갔다. 군주의 곁에는 이제 청군과 군중들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될 홍영식 박영교만 남았다.
실패한 혁명 뒤에 남은 것은 군중의 분노뿐이다. 거리는 살육으로 뒤덮인다. 일본인과 개화파들, 그들의 가족은 보이는 대로 습격을 당한다. 김옥균의 집과 일본 공사관은 성난 군중의 손으로 불타올랐다. 정변의 일원이었던 서재필은 훗날 그의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3일 동안 성공한 듯 보였던 혁명의 제일 큰 패인은 그 계획에 까닭도 모르고 반대하는 일반 민중의 무지몰각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제일 큰 패인은 민중의 무지몰각이 아니라 민중을 무지몰각하다고밖에 생각하지 못했던 그들에게 있었으리라. 민중이 바라는 것은 희망과 힘이지 살육과 외세가 아니었다. 적어도 일본은 아니었다. 백성들은 아직도 일본이 대원군의 척화비를 철거했던 사실을 기억했다.
대원군 집권 때의 모든 혼란에도 불구하고, 그때보다 더욱 부패하고 더욱 무력해진 듯 보이는 정권에 대한 불만 때문에 대원군이란 인물은 그리움이 되었다. 군주를 잡아가둔 개화파의 정변은 그 그리움으로부터 솟아난 분노가 되었다. 소수 개화파의 불길로 시작된 혁명은 민중이 되갚은 불길 속에서 실패한 정변으로 끝난다.
1905년 외교권과 사법권을 일본에 넘기는 을사조약이 맺어진 후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은 갑신정변으로부터 10여년이 지난 후 ‘과거의 상황’이란 논설에서 이런 말을 남긴다. “갑신년 겨울 개혁파는 급격한 유신을 일으켜 마침내 일대 결렬을 낳고 청·일 양국의 갈등만 낳게 해서 사태는 더욱 긴장됐다. 이제까지 일으켜 놓은 약간의 개화사업 마저 수포로 돌아가 버렸으니 결국 오늘날의 슬픈 지경을 여기까지 이르게 했다.”
120년 전 외국 군대가 제 나라 이익을 위해 포화를 쏟아 붓던 서울. 지금 그 아픈 기억은 누가 얼마나 지켜가고 있을까. 2004년 북핵문제와 한반도 긴장을 논의하는 6자회담은 서울이 아닌 베이징에서 열렸다. 중국과 일본, 미국과 러시아가 남북한을 둘러싸고 앉았다.
조선을 놓고 청군과 일군이 맞불을 놓고 미국과 영국, 그리고 독일이 냉정하게 셈속을 차렸던 그 사흘은 과거완료형으로 끝났던 것일까. 청나라라는 거대 외세로부터 벗어나 강력한 자주 조선과 평등한 사회, 부강한 나라를 소망하였던 개화파의 이상은 고작 사흘의 꿈으로 버려졌다. 역사는 그들에게 그들의 이상과는 완전히 반대가 되어 버린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될 것이다. 그러한 질문은 오늘을 되돌아볼 미래에도 여전할 것이다.
정리
1. 배경
2. 중심인물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3. 전개과정
1884년 9월 17일, 박영효의 집에서 김옥균은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자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제 민씨 정권의 친청 수구정책에 대항하여, 종래의 평화적 방법에 의한 개혁에서 친청 정권을 타도하고 일시에 권력을 장악하여 개혁을 실현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은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던 우정국 개설 피로연을 이용하여 거사하기로 결정하고, 일본사관학교의 유학생, 종래의 신식군대 가운데 자신들의 영향 아래 있는 조선 군인을 동원하기로 하는 등 정변을 위한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개화파는 정변을 일으켰을 때 정권을 비호하는 청군의 반격에 대한 군사문제와 자신들이 개혁정책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재정확보문제를 일본을 이용하여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속내를 같이하던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와 함께 모의합니다. 1884년 10월 17일 오후 6시경, 급진개화파들은 우정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민씨척족 세력을 제거하는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왕과 왕비를 창덕궁에서 경우궁으로 옮겨 일본군 200명과 50여 명의 조선 군인으로 호위케 하여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정변에 성공한 개화파는 친청 세력을 제거한 뒤 그 동안 정권에게 소외되어 왔던 왕실의 이재선을 궁으로 불러 정변의 취지를 설명하고 왕실과 연합정부 구성을 제안하였습니다. 개화파와 왕실은 새 정부 구성을 위한 인물 배정에 착수하는 한편, 각국 공사관에도 정변의 뜻을 전달하고 지지를 요청하였습니다. 급진개화파는 이튿날인 10월 18일 새 정부조직과 구성원을 발표하였습니다. 새 정부는 형식적으로는 왕실과 연합한 형태를 취했지만 실제로는 개화파가 개혁추진을 위한 중요한 자리를 장악한 급진개화파의 권력이었습니다. 최고 권력기관인 의정부의 좌의정에는 홍영식이, 정부 중추기관의 자리에는 김옥균(호조참판)을 비롯하여 박영효(전후영사 겸 좌포장), 서광범(좌우영사·우포장 겸 외무독판 대리), 서재필(병조참판 겸 정령관), 박영교(朴泳敎:도승지) 등이 배치되었습니다. 이어 10월 19일에는 새 정부가 앞으로 단행할 개혁정치의 내용을 담은 14개조로 된 '신정강'을 발표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대원군을 조속히 귀국시키고 청에 대한 조공 허례를 폐지한다.
② 문벌을 폐지하고 백성의 평등권을 제정하여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한다.
③ 지조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재정을 넉넉히 한다.
④ 내시부를 폐지하고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한다.
⑤ 전후 간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한다.
⑥ 각도의 환상미(還上米)는 영구히 면제한다.
⑦ 규장각을 폐지한다.
⑧ 시급히 순사를 설치하여 도적을 방지한다.
⑨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폐지한다.
⑩ 전후의 시기에 유배 또는 금고 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시킨다.
⑪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고 영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급히 설치힌다.
⑫ 일체의 국가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하고 그 밖의 재정 관청은 금지한다.
⑬ 대신과 참찬은 날을 정하여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정령을 의정·집행한다.
⑭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폐지한다.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경우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명성황후가 청의 위안스카이에게 원병을 요청하여 1,500여 명의 청의 군사가 개화파를 공격하였습니다. 이때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일본은 개화파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일본 군인을 철수시켰습니다. 결국 홍영식, 박영교 등은 청군에게 사살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함으로써 갑신정변은 이른바 3일천하로 막을 내렸습니다.
4. 결과
5. 실패의 이유
6. 의의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한 근대적인 국가와 사회건설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고, 단계적으로나마 국민주권주의를 지향한 최초의 정치개혁운동이었다는 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gypsytour/9NLt/1939